금산사 안에 서있는 탑비로, 혜덕왕사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혜덕은 고려 중기의 승려로서, 정종 4년(1038)에 태어나 11세에 불교의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그 이듬해에 승려가 되었다. 1079년 금산사의 주지가 되었으며 숙종이 불법(佛法)에 귀의하여 그를 법주(法主)로 삼자 왕에게 불교의 교리에 대한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59세에 입적하였으며, 왕은 그를 국사로 대우하여 시호를 ‘혜덕’, 탑이름을 ‘진응’이라 내리었다.
현재 비의 머릿돌은 없어졌으며, 비문은 심하게 닳아 읽기가 매우 힘든 상태이다. 비의 받침돌에는 머리가 작고 몸통이 크게 표현된 거북을 조각하였고, 비문이 새겨진 몸돌은 받침돌에 비해 커보이는 듯하며, 주위에 덩굴무늬를 새겨 장식하였다.
비문에는 혜덕의 생애·행적, 그리고 덕을 기리는 내용이 담겨 있다. 글씨는 구양순법(歐陽詢法)의 해서체로 썼는데, 구양순의 글씨보다 더욱 활달하여 명쾌한 맛이 있다. 신라나 조선에 비하여 고려시대의 글씨가 훨씬 뛰어남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비문에 의하면 비를 세운 것은 예종 6년(1111)으로 혜덕이 입적한 지 15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전문설명 고려(高麗) 숙종(肅宗)(1095∼1105)의 법주(法主)였던 혜덕왕사(慧德王師)의 탑비(塔碑)이다. 비문에는 왕사의 생애·행적 그리고 덕을 기리는 내용이 실려 있는데 숙종이 불법(佛法)에 귀의(歸依)하여 대사(大師)를 법주로 삼았고, 대사 사후에 왕사(王師)로 봉(封)했으며, 시호(諡號)를 혜덕(慧德), 탑명(塔名)을 진응(眞應)이라 했다.
이 비문(碑文)을 쓴 사람은 당대의 명필(名筆)인 정윤(鄭允)이라는 설이 있으며 대사 입적후 15년인 예종(睿宗) 6년(1111)에 해서체(楷書體)로 새긴 비문이다. 현재, 이수는 멸실되어 없으며, 비신 주위에는 당초문(唐草紋)을 새겼고 양 측면에는 아무런 조각이나 장식도 없다.
전체적으로 비신은 크며, 두부가 작은 귀부(龜趺)는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비신높이 2.77m, 너비 1.49m이다.
금산사혜덕왕사진응탑비 금산사혜덕왕사진응탑비 금산사혜덕왕사진응탑비(비문) 금산사혜덕왕사진응탑비(귀부머리) 금산사혜덕왕사진응탑비(귀부의발) 금산사혜덕왕사진응탑비(귀부의꼬리) 금산사혜덕왕사진응탑비(귀부밑부분) 금산사혜덕왕사진응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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