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사사적』에 의하면, 금산사는 600년대 창건되어 신라 혜공왕 2년(776)에 진표율사가 다시 고쳐 세우면서 큰 사찰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고려 전기인 935년에 후백제의 신검이 아버지인 견훤을 유폐시켰던 장소로도 유명하다.
이 노주는 금산사 대적광전에서 서남쪽에 위치한 대장각으로 가는 길의 중간에 있는데, 그 이름을 노주(露柱)라고는 하였으나 실제로 무엇으로 사용한 것인지 그 용도를 알 수 없는 보기 드문 유물이다. 꼭대기에 놓인 꽃봉오리모양의 조각만 없으면 불상을 얹는 사각형의 대좌(臺座)처럼 보인다.
땅 위에 바닥돌을 놓고, 그 위에 아래·중간·위받침돌을 순서대로 얹어놓았다. 아래받침돌에는 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겨 면을 둘로 나눈 뒤 안상(眼象)을 조각하였다. 아래받침돌 윗면과 윗받침돌에는 아무런 꾸밈이 없는 중간받침돌을 사이에 두고 대칭되게 연꽃잎을 새겼는데, 아래받침돌의 연꽃잎이 넓고 짧은 반면, 윗받침돌의 연꽃잎은 좁고 길쭉하게 표현하였다. 꼭대기에는 석탑과 같은 머리장식이 남아있는데, 둥근 받침부분과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가늘고 긴 사잇기둥이 연결하는 형식이다.
절이 창건된 때가 통일신라시대라고는 하지만, 당간지주 외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짐작되는 것이 거의 없다. 이 노주도 받침돌에 새겨진 조각의 양식이나 각 부분의 수법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전문설명
명칭은 노주(露柱)라고 하였으나 실제 무엇으로 사용된 것인지 그 용도를 알 수 없는 유물로서 상부에 놓인 보주(寶珠)만 없으면 방형(方形)의 대좌(臺座)처럼 조성된 특이한 형태의 석조물이다.
형태는 상(上), 중(中), 하부(下部)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하대(下臺)·중대(中臺)·상대(上臺) 등에는 안상(眼象)과 화형문(花形紋) 그리고 귀기둥 앙련(仰蓮), 복련(覆蓮) 등은 화려하고 다양하게 각부마다 장식하여 놓았다. 특히 상대석의 상면(上面)에는 일반 석탑의 상륜부(相輪部)를 구비하고 있는데, 상륜부는 원형으로 되었으며 기저(基底)와 정상(頂上)의 보주(寶珠) 사이는 간주(竿柱)형식으로 조성했다. 보주는 연봉형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노주는 완전한 석조물로서 상, 하대석 각면(各面)에 조각된 안상이나 연판(蓮瓣)의 양식수법 및 각부의 조성기법으로 보아 고려시대(高麗時代) 초기(初期) 10세기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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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금산사 노주 정면 ![](https://t1.daumcdn.net/cfile/blog/9971313D5C50285305)
상대 앙련석과 보주 ![](https://t1.daumcdn.net/cfile/blog/99EA623D5C5028550D)
하대석 안상과 귀꽃 모양 무늬 ![](https://t1.daumcdn.net/cfile/blog/991C413D5C50285701)
금산사노주 ![](https://t1.daumcdn.net/cfile/blog/9947313D5C50285809)
금산사노주 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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