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보물

보물 제21호 부여 당 유인원 기공비

오늘의 쉼터 2008. 2. 2. 19:57


종     목 보물  제21호
명     칭부여 당 유인원 기공비 (扶餘 唐 劉仁願 紀功碑)
분     류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산 16-1 국립부여박물관
시     대신라
소 유 자국유
관 리 자국립부여박물관

일반설명

당나라 장수 유인원(劉仁願)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碑)이다. 부소산에 세 조각으로 깨진 채 흩어져 있던 것을, 그 자리에 비각을 세워 복원해두었다가 해방 후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옮겨 놓았다. 비는 비몸돌의 앞면이 조금 깨어져 나갔고, 머릿돌도 부분적으로 깨어져 있으며, 비문은 몸돌 앞·뒷면에 새겨져 있으나 심하게 닳아 있어서 알아보기가 힘들다.

비몸돌과 머릿돌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머리부분은 각이 없이 둥글다. 특히 머릿돌은 여섯 마리의 용조각이 매우 사실적인데, 좌우 양 쪽에서 세 마리씩의 용이 올라가 서로의 몸을 휘감고 중앙에 있는 여의주를 서로 다투고 있다. 이는 당나라 전기의 화려한 수법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비문은 유인원의 가문과 생애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그의 생애에 대한 부분은 주로 그가 당나라 태종에 의해 발탁된 이후의 활동상을 적고 있다. 그는 645년 당 태종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뛰어난 공을 세웠으며, 660년에 소정방과 더불어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킨 뒤 백제유민들의 부흥운동도 평정하였다. 그 이후의 행적은 비문이 지워져 더 이상 알 수 없다.『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서는 이 비문을 유인원이 썼다고 하고 있으나, 이 설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비가 세워진 시기는 통일신라 문무왕 3년(663)으로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에 비문을 새긴지 3년 후이다. 비록 당나라 장수의 공적비이기는 하지만 비문 중에 의자왕과 태자 및 신하 700여 명이 당나라로 압송되었던 사실과 부흥운동의 중요내용, 폐허가 된 도성의 모습 등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상황을 아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전문설명

 

백제가 멸망한 뒤 진주한 당(唐)나라의 장수 유인원을 기념하여 세운 비로 비문의 내용은 유인원의 생애와 공적을 기념한 것으로 건립연대는 문무왕 3년(663)으로 추정된다.
비신높이 3.35m, 이수높이1.14m이며 해서체(楷書體)로 비신(碑身) 앞뒷면에 글자를 새겼으나, 뒷변은 마멸(磨滅)이 심하여 알아 보기가 어렵다. 비신과 이수(이首)가 한 개의 돌로 되어 있는데 여의주(如意珠)를 가운데 받쳐 들고 있는 6마리의 반룡(蟠龍) 조각 수법이 매우 사실적이며 뛰어나다. 경주(慶州) 무열왕릉비(武烈王陵碑)와 비교되는 작품으로, 전형적인 당비(唐碑) 양식을 따르고 있어 그때의 석비 건립 양식을 밝히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이 비는 비록 당나라 장수의 공적비이기는 하지만 비문에는 의자왕(義慈王)과 태자(太子) 및 좌평(左平) 이하 700여 명이 소정방에 의해 당나라로 압송(押送)되었던 사실과 백제부흥운동과의 전투및 신라와의 관계, 그리고 완전히 폐허가 된 도성(都城)의 모습 등 당시 상황이 새겨져 있어 당시의 상황을 아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당유인원기공비 정면

비신 머리 부분의 용조각

비신의 훼손 부분

당유인원기공비

당유인원기공비 측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