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혈암 부근에는 꽤 큰 바위굴 하나가 있었다.
굴속에는 언제부터인가 이무기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이무기 때문에 마을에는 큰 변이 잦았다.
병이 자주 들고 사람이 자주 죽고 농사도 흉년이 되고…
하는 수 없이 마을 사람들은 이건 필시 이무기의 조화라 여겨
이무기를 달래기로 해마다 예쁜 소녀를 바치기로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제물로 바치기로 한 소녀의 오빠가
여장을 하고 이무기를 맞이했다.
그것도 모르는 이무기가 소년에게 기까이 오자
소년은 칼을 뽑아 이무기를 찔렀다.
그러나 설맞은 이무기가 독을 품고 달려들어 소년을 죽이고 말았다.
그러나 이때부터 왠지 마을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오고
이무기도 잠잠해졌으며 그 이무기는 어느 날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게 되었다.
용이 하늘로 올라가고 나자 굴 천정이 곧바로 뚫리게 되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그 굴 입구를 볼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 굴 입구가 바위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아서였다.
그때부터 마을 사람들은 그 굴을 용혈굴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2.김방 할아버지와 개미떼(광주광역시)
지금으로부터 500여년전 이조 4대 세종임금 때 김방이라는 분이 전라북도 김제군수로 있다가 광주목사로 전임해 오고 되었다. 일찍이 김방 할아버지는 김제군수로 있으면서, 김제의 벽골제라는 저수지를 중수하여, 김제평야를 문자 그대로 곡창지대로 만들어 놓은 공로자였다. 이 광주 고을은 높고 우람스런 무등산 물줄기를 타고 뻗어 내려온 평원지대 임에도 해마다 가뭄이 들어 흉년이 계속되었다. 이종시기가 되면 이 고장 백성들은 하늘을 우러러 비가 빌었으나 가뭄은 풀리지 않아 날이 가고 해가 거듭할수록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었다.
이 무렵 광주에 부임해온 김방 할아버지 마음은 무겁고 답답하였다. 그러면서도 항상 이 불쌍한 백성들을 구해내는데 좋은 묘안이 없나 골돌히 생각한 끝에, 「옳지, 저 높고 푸른 무등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모아 메마른 땅을 옥토로 만들어 놓아야지」하고 그때부터 이 큰「경양방죽」을 파게 되었다.
그러나. 그해에도 몹시 가뭄이 심하여 백성들의 가난과 굶주림은 날로 심해갔을 뿐이다. 그럴수록 김방 할아버지의 마음은 하루 속히 이「경양방죽」을 파는데 힘을 도와주실 것을 하나님 앞에 경건히 무릎을 끓고 기도를 열심히 계속하였다. 이 방죽을 파는데는 엄청난 경비와 많은 인력이 동원되지 않고서는 팔 수 없는 전남에서 제일 큰 저수지였기 때문이었다. 이 거창한 일을 계속하는 가운데 두 가지 큰 시련이 닥쳐왔다. 하나는 인력 부족이고 하나는 식량난이었다. 그중에도 식량문제는 무엇보다 골치가 아팠다. 가뭄에 시달리고 일에 시달린 백성들에게, 배부르게 해 줄 식량이라고는 거의 소비되어 바닥이 나다시피 되었다. 김방 할아버지는 날마다 마음에 고충이 심해가기만 했다.
그런데 하루는 일꾼들을 격려하면서 방죽을 파고 있었는데 개미굴이라고 할까 개미총이라호 할까, 몹시 큰 개미집을 건드리게 되었다. 무너진 그 개미굴에서는 수만마리의 개미떼가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본 김방 할아버지는, 이를 측은히 여겨 즉시 일꾼을 지휘하여 이 개미집을 가까운 장원봉 기슭으로 곱게 옮겨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후 김방 할아버지가 날마다 정성껏 기도드리는 자기 집 뒷뜰에서 이상한 기적이 나타났다. 어디서 모여든 개미떼인지 김방 할아버지가 기도드리는 곳에 셀 수 없이 많은 개미떼가 모여들지 않겠는가? 그 다음날 아침 미명에 김방 할아버지가 그곳후정을 찾아갔을 때에는 새하얀 쌀이 가득 쌓여 있었다.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여전히 새로운 쌀이 또 쌓여 있었다. 김방 할아버지는 이 사실은 필연코 하나님께서 저의 뜻을 갸륵히 여기시어, 개미의 힘을 빌어 쌀을 모으게 하여 우리 백성들의 굶주림이 없도록 해주신 것이라 믿으며, 모인 쌀을 그곳에서 일하는 모든 백성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백성들은 모두 다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자기 일을 더욱 열심히 해치우는데 온 힘을 다했던 것이다. 이렇게해서 김방 할아버지의 숙원이며 또한 광주지방 사람들의 염원이던「경양방죽」을 완공하게 되었다 한다.
김방 할아버지가 예상했던 대로 이 방죽에는 무등산 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맑은 물이, 마치 아름다운 호수처럼 잔잔한 물결을 이루고 석양에 비치는 풍치는 누구나 경탕하였다고 한다. 그후부터는 가뭄이 계속되어 기근이 들어도 광주평야는 기름진 옥토로 변하고, 해마다 풍년가의 노랫소리가 곳곳에서 들리어 백성들의 생활은 날로 윤택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위대한 김방 할아버지의 업적은 길이 우리들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도시 확장사업으로 이「경양방죽」은 그 형태마저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이제 김방 할아버지의 업적과 개미떼에 얽힌 전설만이 우리들의 귓전에 오르내리게 될 것이다.
3.경호대와 경호루(광주광역시)
지금은 쓰레기와 흙으로 메워져 그 자취를 잃어버린「경양방죽」은, 옛날부터 왜정시까지는 호남지방에서 가장 큰 저수지였다. 광주시 계림동과 중흥동 사이에 자리잡은 이「경양방죽」은,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전 이조 세종임금 때 광주 출신 김방이라는 위대한 건설자의 머리와 손으로 오랜 시일과 많은 경비와 연 수십마의 인력을 동원·투입하여 이룩한 못이 바로 이「경양방죽」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당시는 농사가 유일한 생산 산업으로서,「농사는 천하지대본이라고 말하듯이,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을 잘 살게할 수 있는 민생의 기본이었기 때문에, 이 전천후 사업으로 경국제민의 큰 뜻을 이룩한 분이 김방이라는 인물이었다. 그 규모나 그 설계에 있어서 과학적이고 합리적이었으며, 치밀한 계획과 실천으로 준공을 보았다고 한다. 크기가 4만6000평이 넘는 수면과 10미터 이상의 깊이로 된 이 방죽 밑바닥과 4키로의 수로를 시멘트가 없었던 옛날 백회와 황토로 한국식 콩크리트 공사를 시공하여, 물이 새지 않도록 방수 장치까지 하였다는 사실은 우리들이 다 같이 이 장한 일을 찬양하고 경탄해 마지않는 바이다.
이리하여 그 당시 광주고을 사람들은 김방 할아버지의 공덕을 찬양하고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지금의 상업고등학교 옆, 아담하게 솟아있던 동산 위에 경호루라는 다락을 지었다고 한다. 이 다락의 현판과 주련에는 방죽물의 맑음과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시와 공로를 기록한 글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이 경호루가 서있는 일대를 경호대라 일컬었다고 한다. 그러나, 1900년경 일본 사람들은 우리 민족의 역사적인 유물을 모조리 일소시키는데 혈안이 되어 이 방죽도 경호대의 크고 작은 산을 헐어다 메워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 얼마나 우리 조상들의 뜻을 짓밟아 버린 야만의 행위이겠는가?
그 당시 경호루가 서 있던 경호대 일대의 물은 그 밑바닥이 하얀 회로 포장되어 있어 더욱 맑게 비치고 있었다고 한다. 이 방죽의 둘레에는 우람스런 노송들이 울창하여, 학과 두루미들이 날개를 펴며 깃을 접으며 물가에서 쉬어가는 곳이기도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백구와 제비떼들이 이 맑은 물 위를 날아 다니는 광경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여기가 선경인가 의심하게 할 정도였다고 한다. 바람 없는 조용한 날이면 그 잔잔한 수면은 마치 큰 거울이 놓여있는 차각을 일으켜 주었던 것이다. 거울이 희귀한 옛날이었기 때문에 이 맑고 깨끗한 물가를 찾아드는 여성들은 그 치렁치렁한 머리를 감고는 자기의 머리를 맑은 물 위에 거울처럼 비춰 보았다고 한다. 한편, 선비들은 다락에 모여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르며 태평성대를 구가했다고 한다.
이렇듯 남녀노소가 이 방죽물을 들여다보면서 얼굴을 비춰 보고 마음을 비춰 보았던 거울같은 호수는 자자손손 그 아름다운 전설과 노래와 글이 전해졌건만, 임진왜란으로 그 못의 경호루는 소실되어 버리고, 또 제 2차대전을 앞두어 일본인들의 광분속에 경호대 언덕은 허물어져 버렸으나 어찌 우리들 마음속에 간직된 맑고 아름다운 경호대의 전설마저 사라질 수 있으랴!
4.비단깔린 현몽으로 인도받은 수구로(광주광역시)
이조 세종시 광주 덕림마을에 김방이라는 성주가 있었다. 이분이 광주목사로 오기 전에는 김제군수로 지내면서 국리민복을 위하여 많은 치적을 남겼다. 그 하나의 예로서 허물어져가는 김제땅 벽골제를 확장 보수하여 김제 만경평야를 옥토로 만든 사실을 들 수 있다. 공은 문학에도 탁월한 소질을 가져 글을 잘하는 군수로, 총명한 성주로 그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문학이라고 하여도 실학에 가까운 온 겨레가 잘 살 수 있는 학문을 좋아했고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일하는 군수로서 칭송이 자자할 무렵 광주목사로 옮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김방군수가 떠나올 때 김제고을 백성들은 남녀노소할 것 없이 수립리 밖에까지 나와 울면서 전송의 석별을 안타까와 했던 것이다.
광주에 부임한 김방 목사는 여장을 풀겨를도 없이 먼저 백성들의 소리를 듣기에 귀를 기울렸는데, 몇 개월동안 여론을 조사한 결과, 주민의 요청은 여출일구로「이번 오신 성주님이 김제군수로 계실 때 별골제를 늘리고 보수했다는데, 우리 광주땅에도 큰 방죽 하나 파 주었으면...」하는 뚜렷한 민성이었다. 측근관리들의 의견도 광주에 큰 저수지가 하나만 있다면, 가뭄에는 메마른 논에 물을 대는 수원으로 쓰고 큰 물이 지면 무등산에서 마구 쏟아져 내리는 급류가 꾸불꾸불한 수로를 흘러내리는 동안 완류로 바꾸어 방죽으로 이끌면 홍수의 피해도 막을 수 잇다는 것이었다. 소위 풍수학자연하는 사람들도 찾아와서「성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광주는 문자 그대로 불빛 곧 화가성한 까닭에 조해로 말미암은 흉년이 간삼년 찾아들어 농민을 울리는 실정입니다. 물이 적고보니 불이 왕할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 뿐만 아니라, 가끔 불이 나도 연쇄적인 화재의 불길을 끌 만한 큰 저수지가 없는 고을입니다. 성주님, 김제 벽골제에 못지 않는 큰 저수지 하나를 만들어 수화가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하시는 것도 현명하신 시책의 하나가 아니겠습니가?」하고 오행설까지 내세워 저수지 방축을 간청하는 것이었다. 김방목사는 심사숙고한 끝에 드디어 뜻을 정하였다.「대왕의 중농정책을 받들어 내 필생의 사업으로 광주에도 벽골제에 못지 않은 큰 방죽 하나를 만들고 말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즉시 관계관을 불러 연구와 조사, 그리고 실지 답사를 거쳐 후보지를 선정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 당시는 비교적 저습한 와지로서 농토에서 별 가치성을 인정받기 어려운 경양리 아랫 들이 이 거창한 저수지의 후보지로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한가지 큰 문제점이 따른 것은 장원봉, 향로봉, 각화, 경양 일대의 물을 집결시키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으나. 무등산 골짜기 물을 어떻게 인수해 오느냐 하는 점은 큰 난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 당시의 기술진을 총동원하여 날마다 구수회의를 하여 얻은 최종안은 현금 새 수원지인 석곡에서 작고개를 뚫어 경양까지 인수해 보자는 것이었다. 실학연구에 있어서 일가를 이룬 김옹은 그의 연구한 이론과 실지경험에 비추어 이 무리한 계획에 대하여 얼른 동의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대안으로서 무슨 묘계가 있는 것도 아닌 김옹의 고민은 날로 심각해지기만 했다. 그러나, 이미 착수한 저수지 공사는 날로 진척을 보아 백성들은 대중의 열원이 현실화한 기쁨에 이 사업을 결단한 김방옹에게 대한 찬사가 자자하였다. 그러나, 김옹의 마음에도 근심의 구름이 덮여 명랑할 수가 없었음은 인지상정이라고 할까?
때는 유월 유도절밤, 동쪽으로 흐르는 물이 없으니 비록 서쪽으로 흐르는 광주 냇물에서나마 머리를 감고 액을 씻어버렸다고 믿는 아낙네들과 용신제를 지내고 금년에도 대풍일 것이라고 자위하면서 귀가하는 농부들의 발길이 끊인지도 이미 오래되어 유두일의 자정, 김옹은 비몽사몽간에 공의 할아버지가 엄위하고 인자한 모습으로 나타나더니「방아, 너의 수고가 많구나. 그러나 작고개를 어떻게 뚫는단 말이냐. 그런 무모한 헌책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지금 곧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그 물길을 가르쳐 주겠노라.」하며 앞서 나가는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김방이 뒤따라 간 곳은 양파정 및 부동방 세칭「조참보」라는 고아주에서는 제일 깊은 소의 소재지였다. 이곳은 무등산에서 내려치는 냇물이 양파정 모퉁이에서 다시한번 격하여 굽이치는 바람에 바닥이 패여 수십 길이 깊이로 소가 된 곳이다. 이곳까지 이르러 사방을 둘러보니 희귀한 비단이 조개보 위에서부터 깔려 있는데 할아버지는 이미 이비단 위를 아무 말없이 걸어가는 것이었다. 김방도 묵묵히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햇는데 시중을 이리 꾸불 저리 꾸불 통과하며 경양까지 다달았는데 홀연히 할아버지는 간 곳이 없었다. 김방이 깜짝 놀라 잠을 깨었는데 시간은 아직 샛별이 반짝이는 여명이었다. 김방목사는 즉시 차마를 준비하여 보좌관을 대동하고「조참보」로 달려가 보니 거기에는 새벽꿈 환상에 나타난 비단은 없고, 초여름 새벽인데 때아닌 서리가 하얀 비단같이 물길을 가리킨 듯 깔려있지 않은가. 김옹은 이 서리 길을 따라 경양까지 이르렀는데, 이 길이 바로 무등산 물을 인수해올 수로였다. 그리하여, 작고개를 뚫어 인수해 보려는 처음 계획을 변경하고,「조개보」(현 적십자병원 구기일대)에서 취수구를 시설하여 현 불로동, 황금동, 충장로, 대인동, 계림동을 통관하는 작은 도랑을 만들어 경양방죽까지 관류하도록 새로운 인수로 공사가 순조롭게 진척되어 드디어 거울같은 경양호수를 보게된 것이다. 특히 오백년 뒤 우리가 경탄하여 마지않는 바는 장장십리의 수로 밑바닥과 넓은 경양지 바닥을 평균 다섯치의 한국식 콘크리트로 포장을 과학적인 방수장치로써 시공하였으니, 지금도 파보면 그 흔적이 뚜렷하다.
5.불재의 전설(순천시)
낙안에서 순천으로 가는 길목에 고개가 있는데 이곳을 불재라고 합니다 이 불재에는 예부터 전해오는 전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처사와 군수에 관한 전설이 지금까지도 전해오고 있습니다.
옛날 처사님 한 분이 처사굴(구능수)에서 득도하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낙안에서 승평(지금의 순천)을 가기 위해 군수가 이 고개를 넘게 되었습니다. 고개에 다다르자 군수가 처사에게
"군수가 지나가니 내려와서 인사를 올리도록 하여라"
하고 명령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처사는 못 들은 척하고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화가 난 군수가 다음날 나졸들을 시켜 처사를 잡아다가 군수 앞에 데려오게 하였습니다.
"감히 군수에게 인사를 하지 않다니 무엄하도다"
하고 호통을 치며 벌을 내리려고 하자 처사가 말하기를
"내가 군수에게 인사할 아무런 이유도 없지만 공부하는 것도 죄가 되느냐"
고 큰소리를 치며 군수에게
"마침 불이 없어 밥을 하지 못하니 온 김에 불시나 좀 얻어 가겠소"
하며 불씨를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군수는 화가 많이 났지만 꾹 참고 처사를 골려 주고 싶어서 말 꼬리로 만든 밀가루 치는 체에다가 불씨를 담아 가도록 하였습니다. 군수는 처사가 불씨를 어떻게 가지고 가나 궁금하여 살금살금 뒤따라 가보니 아무런 탈없이 체에서 숯불이 활활 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을 본 군수는 처사가 능력이 신통하여 보통사람이 아닌 것을 알고 자신의 경솔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 고개를 불재라고 부르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6.송광사의 전설(순천시)
송광사는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에 있는 조계산 자락에 새둥지처럼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송광이라는 이름에는 몇가지 전설이 있습니다.
그 첫째는 18명의 큰스님들이 나셔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 절이라는 뜻입니다.
곧 '송(松)'은 '十八(木)+公'을 가리키는 글자로 18명의 큰스님을 뜻하고, '광(廣)'은 불법을 널리 펴는 것을 가리켜서 18명의 큰스님들이 나서 불법을 크게 펼 절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보조 국사 지눌스님과 연관된 전설입니다. 곧 스님께서 정혜결사를 옮기기 위해 터를 잡으실 때 모후산에서 나무로 깍은 솔개를 날렸더니 지금의 국사전 뒷등에 떨어져 앉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뒷등의 이름을 치락대(솔개가 내려앉은 대)라 불렀다합니다. 이 전설을 토대로 육당 최남선은 송광의 뜻을 솔갱이(솔개의 사투리)라 하여 송광사를 솔갱이 절이라 풀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일찍부터 산에 소나무(솔갱이)가 많아 '솔메'라 불렀고 그에 유래해서 송광산이라 했으며 산 이름이 절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7.홀어미 정자나무
여수시 오림동 대로변에 수령 500년이 넘는 느티나무 두그루가 정답게 서 있다.
옛날 수영성 서문에서 오리 지점으로 오리정이 있던것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젊은 부부가 삼칸 토막집을 짓고 남편은 등과를 목표로 글공부에 전념을 하고 부인은 남편의 뒷바라지를 위해 떡장수로 곤궁한 생활을 꾸려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은 알수없는 병을 얻어 자리에 누워 투병생활을 하게 되었다. 부인이 갖은 정성을 다하여 간호를 하였으나 병은 더욱 악화되어 회복할수 없게 되었다. 하루는 남편이 부인의 손을 잡고 "결혼 한지 10년동안 남편 노릇 한번도 못하고 당신 고생만 시켰으니 내죄가 너무 커서 어찌 눈을 감고 죽을수가 있겠소.
이생에서 못다한 인연을 저 세상에서 다시 만나 이루어 봅시다."라는 말을 마친후 숨을 거두었다. 부인은 남편의 시신을 안고 통곡을 하였으나 한번 죽은 사람이 살아날리가 있는가 남편의 시신을 거두어 삼일장으로 장례를 치른후부터 밤이되면 죽은 남편의 가냘픈 울음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와 문을 열고 나가보면 아무 흔적도 없고 문을 닫고 들어오면 또 다시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이와같은 일이 밤마다 계속되어서 부인이 대들보에 목을 매어 자살을 기도하는 순간 길을 가던 노승이 목이 말라 물을 얻어 먹으려고 주인을 찾다가 이같은 현장을 목격하고 급히 달려가 말하기를 "당신의 남편은 한많은 원귀가 되어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구천을 헤매고 있으니 남편의 영혼을 위해 만인공덕을 쌓아야 극락을 가게 된다." 고 말했다.
부인은 스님에게 "나는 재물이 없으니 어찌 만인 공덕을 할 수가 있습니까?" 하고 반문했다. 스님은 "만인공덕은 재물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정성에 있는 것이다.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주는 일 ,개천에 돌다리를 놓는일 ,길가는 행인에게 쉬어가는 자리를 제공 하는것도 모두 만인공덕인 것"이라고 일러주고 스님은 길을 떠났다.
그로부터 부인은 남편의 극락왕생을 위하여 무엇으로 만인공덕을 할까 생각 끝에 느티나무 한쌍을 심어 두 사람의 미진했던 사랑을 나무를 통해 이루어 보고 또한 이 나무가 크게 자라서 푸른 그늘이 우거지면 오고가는 행인이 쉬어가는 자리가 되면 만인공덕이 되겠지 하고 두그루의 느티나무를 심었다고 해서 후세 사람들은 이 나무를톡모정 느티나무라고 부른다.
8. 향일암
향일암은 644년 신라의 원효대사가 원통암이란 이름으로 창건한 사찰이다.
그 뒤 1715년애 향일암으로 개명했으며 수차례의 훼손과 증축을 거쳐 오늘에 이름 향일암 주변의 기암절벽과 동백나무 그리고 아침에 지평선 위로 솟아오르는 일출의 장관을 보려고 관광객이 각지에서 몰려든다.
그리고 향일암이란 이름도 일출에서 유래 향일암이 위치한 금오산은 예로부터 풍수지리설로 거북이의 형국이라 해서 영구암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금오산을 살펴보면 주변 바위들이 거북이의 모양마냥 쩍쩍 갈라져있고 거대한 거북이가 넓은 대양으로 헤엄쳐가는 자태를 취하고 있다 예로부터 유명한 지관들이 거북혈에는 쇠붙이를 얹거나 등에 구멍을 뚫어서는 큰 재난을 당하게 된다고 일러 왔다.
그런데 얼마전에 사찰 난간에 안전을 위해 철주를 박고 철책을 치고 사찰 아랫지점에 마을 주민들이 지하수 개발을 위해 땅을 뚫는 작업을 하던 중 굴착기가 부러지는 일 이 일어났다.강철로 만들어진 굴착기가 부러진것을 보고 주민들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라고 작업을 중단했다.
더욱 놀라운 일은 이때부터 향일암 주지 스님의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스님은 16년 전에 이 사찰에 주지 스님으로 부임해와서 향일암의 부흥을 위해 노력하신 스님으로 알려졌다.
얼마후 주지 스님은 한쪽 다리가 마비되고 건강이 점차 악화되자 스님들과 마을 주민들은 풍수의 금기사항을 어기고 지혈을 잘못 건드린 탓이라고 해서 철책을 제거하고 샘을 매몰한 후에 주지스님의 건강이 회복되었다고 한다.
9.하구바위용굴
지금은 용굴은 메워지고 하구바위는 상아 아파트 건물의 지반이 되어 있다.
옛날 연등천은 바다로 흐르는 하구 지점으로 수심이 깊었으며 바위 밑에는 오동도 바다와 통하는 지하 용굴이 있어 비가오면 오동도 용이 지하통로를 이용하여 연등천 하구 바위용굴로 와서 빗물을 먹고 간다는 이야기가 전해왔는데 약 400년전네 한 어린아이가 멱을 감다가 실종되었는데 10여일 후 오동도 앞바다에서 어부에 의해 시신이 발견되어 인양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수영 주민들이 연등천용굴을 메워 버렸다고 하는데 그후로부터는 오동도 바다에는 새벽 2시경이되면 자산공원 등대밑에 있는 참샘물이 바다로 흘러내리는 물통으로 오동도 용굴에서 용이 이동을 하는데 물밑으로 헤엄쳐 다니기에 100m길이의 긴 은색 시거리가 물위에 펼처지고 파도가 일어나며 바닷물이 갈라지는 소리가 밤하늘에 메아리 친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다가 일제때 오동도 방파제 축조공사로 등대 밑에 차맴이 매몰된 후부터는 용굴은 있어도 용의 이동을 볼수 없게 되었다고 전하며 오늘도 오동도를 찾는 관광객은 용굴 앞에 걸음을 멈추고 용의 이동을 상상해 보고 있다.
10.타루비유래
우리 이 땅 여수민들이 이순신 장군을 추모혀서 그 비를 쳐다보면은 곧 눈물이 쏟아진다.이에서 이 이순신 장군을 추모턴 그 비를 타루비라 이렇게 헌다는 그런 전설이 있어.
떨어질 타(墮),눈물 루(淚),타루."
참 우리 충무대감을 우리를 살려주시고 저렇게도 전몰해 가셨다.
이걸 생각하면, 그 비만 쳐다보면 눈물이 나온다." 해서 타루비라 이렇게 했어.
[청중:막하장들이 세웠다고 그런 말이 있어.]
11.이량장군과 장군도
종고산은 해발 200m의 삼각형산으로 여수시의 맥을 이루는 중심산인데 옛날 이곳에는
보교대 가 있었고 또 비가 오지 않을때는 여기서 기우제를 지냈다.
이충무공이 '한산대첩의 대승을 거두던 날 이 종고산은 은은한 종소리도 같고 북소리도 같은
소리를 연 3일간이나 냈다하여 이충무공은 이 산 이름을 종고산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또 여수는 세마리의 용이 어울려 여의주와 같은 장군도를 두고 다투는 형국이라고 설명한다.
그 첫째 용이 건너편 바라 보이는 종(종고산)을 때리는 타봉처럼 생긴 대교동의 예암산
이요, 둘째 용이 돌산도요, 셋째 용이 경호도인데 이 중 경호도는 비룡으로 비유되고 있으나 고려때 서울에서 귀양온 사람들이 산 섬으로 경도 또는 경호도라 불리우다가 일제때 경호로 바뀌었다.
여의주라는 장군도는 해안선의 길이가 600m에 불과하지만 합방후 1914년 재향군인회가 이 섬에 벚꽃나무 1천그루를 심어 봄이면 벚꽃이 만발하고 고기 낚시도 꽤 되기 때문에 유명하다.
이 섬과 돌산간에는 수중석성이 쌓여 있고 목책 흔적도 보인다.
이 석축은 연산군때(1497) 이량이 이곳 절도사로 부임해와 금오도에 나타난 왜구선을 쫓고,수영을 보다 튼튼하게 하기 위하여 수성을 쌓았다고 전해온다. 뒤에 사람들은 이량의 비를 충무동에 세워 비각을 만들었고 장군도에도 이량장군 방왜축제비를 세웠다하며 이충무공 전공 기념비도 함께 세워져 있다
12.금오산
여수반도에서도 다시 돌산대교로 이어진 전라남도 남단의 돌산도에는 여수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일출 풍경이 가장 뛰어나다고 자랑하는 항일암이 있다.
항일암이란 암자의 이름부터가 해를 향해 있다는 뜻으로 이 절경의 항일암을 안고 있는 산이 금오산으로 비록 높이는 낮아도 명산이라 일러 부족함이 없는 산이다.
항일암에는 금거북이의 전설이 얽혀 있는데, 풍수지리상 바닷속으로 막 잠수해 들어가는 금거북이의 형상이라 한다.
대웅전 앞에서 왼쪽 아래로 내려다뵈는 야트막하게 솟아오른 봉우리가 머리, 향일암이 선 곳이 거북의 몸체에 해당하며 산 이름은 쇠 금(金)자 , 큰 바다거북 오(鰲)자를 쓴 금오산이다.
한때 거북 구 자를 써서 영구암이라 부른 적이 있고 현재 영구암이란 편액이 남아 있기도 하다.
이러한 전설을 더욱 그럴 듯 하게 꾸며주는 것이 이 일대 바위의 무늬다.
바위마다 한결같이 거북의 등무늬를 닮은 문양이 나 있는 것이다.
항일암에서 백미를 이루는 경관은 원효대사가 수도했다는 관음전 앞에서 바라보는 풍경이다.
항일암 뒤에는 어른이 흔들거나 아이들이 흔들어도 똑같이 흔들리는 바위가 있는데
설악산 흔들바위보다 조금 작은 이 바위는 흡사 경전을 펼친 모양이라 이를 한번 흔들면 불경을 한번 읽는 것 같은 공덕이 있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흔들바위 입구에서 5분쯤 비탈길을 오르면 곧 시야가 확 트이는 바위지대에 이른다.
촛대바위, 기둥바위 등 기이한 형상의 바위들이 짙푸른 바다와 어우러진 멋진 경관은 산행길에는 좀체 보기 드문 선경이다.
이렇게 뛰어난 향일암 일원의 경관을 보호하기 위하여 1984년 2월 29일에 문화재 자료 제 40호로 지정하였다. 그래서 여수 사람들은 이 산의 높이와 별개로 명산이라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13.벅수골의 내력
언제부터인가 여수시내 봉산동 678번지 인근 동네에는 돌로 깍아 세운 석인이 마주보고 있다. 마을에서는 "장성" 또는 "벅수"로 불린다. 바람 비 수 백년,만고풍상 세월속에 깍이고 헐린 민족의 시련과 함께 지나간 영욕의 역사를 증언하는 듯 깊은 표정을 감추지 않고 있다.
동네를 들어서는 위치에 서있는 쌍벅수는 바른쪽에 선 남자 벅수에 "남정중", 왼편의 여자 벅수에 "화정여"이라고 음각되어 있다. 높이가 2m,넓이가 40cm, 두께가 30cm 가량이다. 운래는 나무로 깍아 세운 것이었으나 오랜세월동안 형체가 미멸되어 뒷사람들이 이를 다시 돌로 쪼아 세운 것이다.
"벅수의 코를 갉아서 먹으면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부녀자가 임신할 수 있다." 는 구전 때문이었는지 현재의 쌍벅수의 얼굴에는 유독 코만 닳아져서 없어져 가고 있다.
오래 전부터 흔히 여수 사람들은 이곳을 "벅수골"이라고 불러온다. 연등동과 공화동등 다른 지역에도 벅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유별나게 이곳만을 "벅수골"이라고 부르게 된데는 그만한 이유가 없지 않은 듯하다.
지금으로부터 400년전 봉산동 일부 지역에는 사철동이라 부른 곳이 있었다. 이곳은 지금의 봉강동 의관산에서 캐온 철석을 녹여 충무공 휘하의 좌수영 수군이 사용하는 활촉,군검과 장못 따위 군사무기를 만드는 풀뭇간들이 있었다. 이같은 연고로 이곳은 외부사람들이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통제구역이었다. 그래서 이 경계지역에 수문장격인 벅수를 세워 외부인의 출입을 금한 경계표시로 삼았거나 봉산마을 주민들 이 마을의 무사와 행운을 비는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벅수는 원래 우후인이라고 해서 지역경계, 수문장, 민단신앙등의 대상으로 나무와 돌을 막아 눈,코,입 등을 갖춘 사람 형상으로 만들었다. 임진왜란 당시 종고산에는 국난을 알리는 산울림이 세번씩이나 울렸다 한다.
1822년의 큰 가뭄때문에 주민들이 종고산과 구봉산 상봉에 올라 기우제를 지냈는데 3일만에 흡족한 비가 내려 대풍을 이뤘다 한다.이때 고마움을 잊지못한 종고산과 구봉산아래 주민들은 이듬해 정월 초하룻날 저녁에 다섯사람의 제관을 뽑아 산제를 모셨다 .
주민들은 제를 지내는 기념으로 향토를 지키는 수호신격으로 남정중,화정여라고 새긴 연등동 국도변 벅수를 비롯 봉산동 입구와 공화동 동국민학교 근처에 쌍벅수를 세워 매년 동제행사 때마다 벅수에도 밥을 차려놓는 헌식을 하였다는 말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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