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풍수지리

풍수지리에 밝은 신효창(申孝昌)

오늘의 쉼터 2008. 1. 30. 15:27

* 풍수지리에 밝은 신효창(申孝昌)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고려 건국 초기의 공신(功臣) 신숭겸(申崇謙)의 후손으로,

본래의 근거지는 곡산(谷山)이었다.

하루는 고려 태조 왕건이 말을 타고 평산 지역을 지나가는데,

마침 하늘 저쪽에 기러기가 줄지어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이때 왕건은 자기를 보필하여 가는 신숭겸을 돌아보며,

 "자네가 저 기러기의 맨 앞에 날아가는 놈을 활로 쏘아 맞춰 보라.

정확하게 쏘아 떨어뜨리면 내 후한 상을 내리겠다." 하고,

손가락으로 기러기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래서 신숭겸은 곧 날아가는 기러기를 향해 화살을 겨누어 쏘았다.

시위를 떠난 화살은 멀리 날아가, 줄지어 날고 있는 기러기의 맨 앞의 놈 두 눈을 꿰뚫어 관통했다.

그런데 화살을 맞은 기러기는 곧장 땅으로 떨어지지 않고 오랜 동안 여러 고을(縣)을 빙빙 돌아와서

왕건이 탄 말 앞에 와 떨어졌다.

 

그래서 왕건은 감탄을 금치 못하고,

그 기러기가 빙 돌았던 지역의 여러 고을 땅을 모두 신숭겸에게 하사했다.

이렇게 해 신숭겸은 평산 지역으로 옮겨와 자리잡았고 자손 대대로 살았다.

 

그러고 세월은, 어느 사이에 5백여 년이나 흘러갔다.

뒤에 조선시대 세종 임금 때, 신숭겸의 후손 신효창은 벼슬이 2품에 올랐었는데,

그는 풍수지리설에 깊은 지식을 가져서 우리나라 전국 산천의 근원을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좋은 묘지를 구해달라고 부탁하는 사람이 있으면, 신효창은 힘들여 산에 오르는 일이 없이,

누워서 어느 고을에서 왔느냐고 묻고는 이야기했다.

 

 "그 고을이라면, 어느 마을 뒤에 가면 어떻게 생긴 골짜기가 있고, 얼마만큼 높은 산봉우리가

몇 개 있는데, 그 몇 번째 봉우리 어느 지점이 좋은 자리이니 거기에 묘를 쓰시오.

후손 중에 아마 정승까지는 몰라도 판서 정도는 날 것이요."

 

이렇게 말하는데, 아무리 멀고 험악한 산골이라도 가서 보면 그가 지적한 말과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하루는 신효창이 장인 김사형(金士衡)의 장지를 구하기 위해 봉안역(奉安驛) 뒷산에 올라갔다.

동쪽으로 바라보고 있다가, 내 오대산의 좌우 양쪽 산맥 줄기는 일찍이 알고 있었으나,

그 중앙 산맥을 찾지 못해 애태웠는데, 지금 보니 저기에 있구나." 라고 말하고,

손뼉을 치면서 좋아했다.

그러고는 말을 달려 곧바로 양근군(楊根郡) 서쪽으로 가서 한 지점을 지적하여 묘지를 정했다.

 

재실(齋室)을 지을 장소를 찾지 못하고 헤매다가,

잠시 쉬는 사이에 고단하여 깜빡 잠이 드니,

꿈속에 푸른 옷을 입은 청의동자(靑衣童子)가 나타나 알려주었다.

 꿈을 깬 신효창은 청의동자가 일러준 장소에 재실을 짓고, 그 이름을 '중은(中隱)'이라 했다.

그것은 오대산 중앙 맥이 여기에 와서 멈춰 숨어 있다는 뜻이었다.

 

 또한 그 산 이름을 '청제(靑帝)'라고 했는데,

그것도 청의동자가 나타나서 일러준 것과 연관을 맺어 그렇게 이름을 지은 것이었다.

당시 신효창과 친하게 지내던 임자심(任子深)이 신효창에게서 그 풍수지리 법을 배워,

약간 터득해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