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쿠르베 ◁
Gustave Courbet 1819.6.10 프랑스 오르낭 ~ 1877.12.31 스위스 라투르드 펠즈
[사실주의 운동의 선도자]
쿠르베는 당대의 낭만주의 회화에 반발하여 일상적인 사건들을 그림의 주제로 택했다. 인물 들을 빽빽이 그려 넣은 어두운 배경의 대작 [화가의 작업실 The Artist's Studio](1855)은 당시 미술계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1860년대부터 그의 작품들은 좀더 감각적이고 다 채로워졌다.
[초기생애와 작품]
쿠르베는 프랑스 동부에서 부유한 농부인 아버지 엘레오노르 레지와 어머니 실비 쿠르베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왕립 중학교와 브장송 미술대학을 다닌 뒤 1841년 명목상으로는 법 률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에 갔다. 그러나 그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대가들의 그림들을 연구 하는 데 더욱 진지하게 몰두했다. 그들 부자는 서로의 의견을 매우 존중했는데, 쿠르베가 지 방법률가보다는 화가가 될 작정이라고 아버지에게 말하자, 아버지는 "만일 도중에 그만두게 된다면 그것은 내가 아니라 너일 것이다"라고 하면서 동의했다. 또한 필요하다면 땅과 포도 원, 집까지 팔겠다고 덧붙였다. 재정적인 불안에서 완전히 벗어나자 청년 쿠르베는 미술에만 완전히 몰두할 수 있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와 리베라 등 17세기 스페인 화가들의 그림들 을 모사함으로써 숙련된 기교를 얻은 그는 여러 번 낙선하다가 1842년에 그린 자화상 [검은 개를 데리고 있는 쿠르베 Courbet with a Black Dog]로 마침내 25세가 되던 1844년에 왕립 아카데미의 후원으로 당시 프랑스에서 해마다 열리는 유일한 공공 미술전람회인 살롱 전에 입선했다. 그뒤 몇 해 동안 그의 작품이 비전통적인 양식과 대담한 주제 때문에 살롱의 심 사원들에게 3번이나 거절당했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출품했다.
[사실주의의 태동]
1848년의 혁명은 제2공화국을 이끌면서 예술에 큰 영향을 미친 새로운 자유주의 정신을 낳 았다. 살롱의 전시회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튈르리 궁으로 옮겨졌다. 쿠르베는 1849년 그 전 시회에 작품을 전시했으며, 그의 초기 작품은 비평가들과 일반 대중으로부터 상당한 찬사를 받았다. 1849년 그는 파리에서의 피곤한 생활을 벗어나 건강을 되찾기 위해 오르낭에 있는 그의 가족을 방문했는데, 다시 그의 고향마을에 감화되어 2점의 뛰어난 그림인 [돌 깨는 사 람들 The Stone-Breakers],[오르낭의 매장 Burial at Ornans]을 그렸다. 1849년에 그린 [돌 깨는 사람들]은 비천한 노동을 하고 있는 두 인물을 황폐한 시골을 배경으로 사실적으로 묘 사하고 있다. 그 다음해에 그린 [오르낭의 매장]은 농민의 장례식을 묘사한 대형 그림으로, 실물 크기의 인물들이 40명 이상 등장한다. 이 두 그림은 신고전주의나 낭만주의의 좀더 절 제되고 이상화된 그림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것들은 귀족적인 인물이 아닌 초라한 농 민들의 삶과 정서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쿠르베가 농민들을 미화하지 않고 대담하게 있는 그대로를 묘사한 사실은 미술계에 격렬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새로운 사실주의 파의 선도자]
시인인 샤를 보들레르와 사회철학자인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 등 당대의 작가 및 철학자들과 친하게 사귀었던 쿠르베는 새로운 사실주의 파를 이끌었는데, 이것은 결국 동시대의 다른 운동들을 압도하게 되었다. 그가 사실주의를 발전시키게 된 결정적인 요인들 중 하나는 그 가 태어난 지방인 프랑슈콩테와 이 지방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들 중 하나이자 그가 태어 난 곳인 오르낭의 전통과 관습에 대한 일생 동안의 애착이었다. 그는 잠깐 스위스를 방문한 뒤 오르낭으로 돌아가서 1854년 후반에 거대한 캔버스화를 그리기 시작해 6주만에 완성했는 데, 그의 미술 생애에 미친 영향들을 온갖 사회 계층의 인물들로 묘사한 우의적인 그림인 [화가의 작업실]이 바로 그것이다. 이 그림에서 화가 자신은 자부심을 드러낸 채 모든 인물 들을 주재하면서 누드 모델에게는 등을 돌린 채 풍경화를 그리고 있다. 1855년의 만국박람 회에서 심사원단이 이 그림을 거절하자 쿠르베는 친구의 재정적인 지원을 받아 그 전람회장 에서 가까운 곳에 사실주의 작품 전시회를 열어 자신의 작품들을 전시했다. 그의 전시회는 첫 번째 사실주의 회화 그룹전이 되었다. 이 시도는 실패했으며, 화가인 외젠 들라크루아만 이 그의 일기에서 쿠르베의 대담성과 재능을 칭찬했다. 쿠르베는 1867년 다시 한번 그룹전 을 시도했으나 또다시 실패했다. 1856년 쿠르베는 독일을 방문하여 동료 미술가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3년 뒤 40세가 된 그는 자신의 조국에서는 여전히 혹독한 비평을 받았지만 이제 명백히 미술의 대가가 되었으며, 전통적인 회화 양식들이 예술적 착상에 장애만 될 뿐 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에서 등을 돌린 새 세대 화가들의 지도자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쿠르 베는 온갖 장르의 작품을 만들었다. 여성 찬미자였던 그는 매우 따뜻한 느낌의 관능적인 그 림들에서 여성의 누드를 예찬했다. 훌륭한 초상화들도 그렸지만, 무엇보다도 프랑슈콩테를 찬양해 그곳의 숲·샘·바위·벼랑들을 그리면서 거기에 불멸의 생명을 불어넣었다. 1865년 에는 에트르타와 도빌, 트루빌 등 제2제정시대에 인기가 있었던 휴양지들의 벼랑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대기의 흐름과 폭풍우가 몰아치는 하늘을 주의 깊게 관찰해 일련의 해안 풍 경화들에서 폭풍우 치는 장면을 성공적으로 묘사했다. 이 그림들은 미술계를 놀라게 하고 인상주의로 나아가는 길을 여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 뒤 인상주의는 대상을 엄격한 윤곽 선들로 형상화하기보다는 대상에 부딪쳐 반사된 광선 및 색채를 그려 더욱 놀랄 만한 감각 적 표현을 성취했다.
[정치활동]
1870년 프랑스-독일 전쟁이 일어나 제2제정이 무너지면서 제3공화국이 선포되었다. 1871년 3월 18일 파리 코뮌(파리에 세워진 혁명정부)이 수립되어, 프랑스에 체류중인 독일인들 및 나폴레옹 3세에게 계속 충성하는 베르사유군과 싸울 것을 다짐했다. 파리 코뮌 사람들은 베 르사유군이 독일과 휴전 조약을 맺은 것을 불명예스럽게 여겼다. 그 무렵 미술가동맹의 회 장으로 선출되어 박물관들을 다시 열고 해마다 열리는 살롱전을 주관할 임무를 맡은 쿠르베 는 코뮌의 혁명적 활동에 참여했다. 그는 박물관들을 여는 대신 중요한 공공기념관들, 특히 세브르 자기공장과 퐁텐블로의 궁전을 보호하기로 결정했다. 파리는 그 당시 독일군의 계속 적인 폭격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파리 코뮌의 과격한 행위들에 놀라 5월 2일 사임했다. 파리 코뮌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대군을 기념하는 방돔 궁전의 기둥을 없 애기로 결의하고 5월 16일 그 결정을 실행했다. 그러나 5월 28일 파리 코뮌은 베르사유군에 의해 무너졌으며 6월 7일 쿠르베는 친구의 집에서 체포되었다. 그 기둥의 파괴에 책임이 있 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군사법정에 서게 된 것이다. 그는 그 기념물이 상징하고 있는 군국 주의에 대해 종종 혐오감을 나타냈기 때문에 비록 그 파괴 행위에 전혀 참여하지 않았지만 선동자로 고발되었다. 속죄양이 필요하던 차에, 기둥 파괴에 실질적인 책임이 있지만 영국으 로 달아난 사람들과 쿠르베 자신의 항변에도 아랑곳없이 그가 임의로 선택되었다. 그는 6개 월의 형을 선고받음과 동시에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의 수반인 아돌프 티에르의 중재로 500프랑이라는 최소의 벌금형을 받았다. 처음에 생트펠라지 감옥에서 형을 치르는 동안 중 병에 걸려 파리 근처의 진료소로 옮겨졌다. 석방되자마자 그는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 오르 낭으로 갔다. 1872년 티에르가 사임하자 보나파르트를 지지하는 국회의원들은 다시 쿠르베 의 재판을 열어 그를 상대로 그 기둥의 재건축에 드는 비용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그의 전 재산과 그의 그림 모두가 압류되었으며, 금화 50만 프랑의 벌금형이 내려졌다. 그는 벌금을 낼 수 없었기 때문에 프랑스를 떠나는 것밖에 다른 대안이 없었으므로, 1873년 7월 23일 국 경선을 넘어 스위스로 들어가 플뢰리에라는 작은 도시에 정착했다. 그는 다시 활동을 시작 했지만, 프랑스와 너무 가까워서 불안을 느낀 나머지 처음에는 브베로 갔다가 다시 라투르 드펠즈로 가서 거기에서 봉포르(좋은 안식처)라는 그의 처지에 어울리는 이름을 가진 허름 한 여관을 구입했다. 육체적·정신적으로 매우 쇠약해진 그는 그곳에서 58세의 나이로 죽었 다. 쿠르베의 명성은 그가 죽은 뒤 계속 높아져갔다. 그의 비방자들은 종종 그의 정치적 신 념이 관용과 연민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그의 사회주의에 기초하여 그의 미 술을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그 뒤의 여러 근대 미술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 쳤다. 그는 후세대의 화가들에게 새로운 기법보다는 완전히 새로운 예술관을 제공했다. 즉 그림의 목적은 예전의 유파들이 주장해왔듯이 현실을 아름답게 꾸미거나 이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정확하게 모사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쿠르베는 회화에서 상투적인 수법과 인 위적인 이상주의, 낡은 양식들을 없애 버렸다.
자료
프랑스 근대 회화에서 리얼리즘 창시자로 불리는 쿠르베는 스위스 국경 가까운 프랑슈콩테 주 오르낭 출생했다. 1840년 아버지의 권유로 법률연구를 위해 파리로 나왔으나, 얼마 후 화 가를 지망하여 화숙(畵塾)에 다니며 회화습작에 몰두하는 한편 루브르미술관에서 에스파냐 와 네덜란드파의 거장들의 작품을 열심히 공부하였다. 1844년 살롱에 출품하여 첫 입선을 하고, 1849년 [오르낭의 매장]에서는 이색적 화재를 인정받았으나, 1850년의 [오르낭의 장례 식]은 화단의 평론을 양분하는 물의를 일으켰다. 부르주아적 시민 사회를 고발하는 작품을 계속 발표하는 등 급진적 사상과 행동 때문에 지나치게 실경(實景) 묘사에 치우친 불경스런 희화(戱畵)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돌 깨는 사람](1849), 1855년 파리 만 국박람회에 출품한 노작 [화가의 아틀리에]에 이르러 더욱 두드러졌다. 이 작품의 출품을 거 절당하자 몽테뉴가에 손수 가옥(假屋)을 짓고 입구에 ‘사실주의’라는 큰 간판을 걸고서, 이 작품을 비롯한 40여 점의 자작품을 전시하여 자신의 예술상 입장을 도전적으로 표명하였 다. 그 후, [센 강변의 처녀들](1856) 외에 많은 수렵도, 거친 바다풍경, 나부(裸婦) 등을 제 작하였으나, 1871년 파리코뮌 때, 나폴레옹 1세 동상의 파괴책임으로 투옥되었다가 석방 후, 추방당한 후 스위스로 망명하여 객사하였다. 그의 견고한 마티에르와 스케일이 큰 명쾌한 구성의 사실적 작풍은 19세기 후반의 젊은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보다 근 본적으로는 당시의 고전주의와 같은 이상화나 낭만주의적인 공상표현을 일체 배격하고 ‘현 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묘사할’ 것을 주장한 그의 사상적 입장은, 회화의 주제를 눈에 보이는 것에만 한정 혁신하고 일상생활에 대한 관찰의 밀도를 촉구한 점에서 미술사상 가장 큰 의의를 남긴 것이다. 대표작에 [나부와 앵무새](1866), [사슴의 은신처](1866), [샘 (泉)](1868), [광란의 바다](1876) 등이 있다.
작품세계
*검은 개를 데리고 있는 쿠르베
1842년에 제작해서 44년의 살롱에 첫 출품, 입선한 쿠르베의 23세 때 작품이다. 고향인 쥐라 산중의 봉누보 골짜기에 있는 프레질 퐁테뉴 동굴 앞에서 스패니얼 종의 개를 데리고 포즈 를 취하고 있는 쿠르베의 자화상이다. 그 주제에 있어서나 묘법에 있어 쿠르베의 제반 특성 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어 그의 예술이 이미 청년 시대에 든든히 형성되어 있음을 엿 보여 준다. 화면은 인물의 얼굴을 향한 삼각형의 구도 속에 인물과 개가 자리잡고 배경은 암벽과 하늘로 처리하였다. 검은 인물의 옷과 개의 모습이 밝은 색조의 암벽과 원경(遠景)에 대조를 이루면서 한층 안정감을 주고 있다.
쿠르베 초기의 자화상 중 하나. 아버지의 희망으로 법률 공부를 위해 파리로 온 쿠르베는 곧 그 공부를 팽개치고 그림 공부에 열중하였는데, 파리에 나온지 6 년, 여러 차례 살롱에 입선한 경력을 통해 한 사람의 화가로서 자신을 쌓았던 무렵에 그려진 것이다. 야심에 찬 한 시골 출신의, 약간 텁텁하면서도 오만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자작에 이처럼 사인을 기 입하고 있는 것도 이전의 그림에서는 볼 수 없는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녹색의 상의, 녹회색의 배경에 떠받쳐진 흰 셔츠와 붉은 얼굴은 은은하게 인물을 드러내는 전통적 수법에 의존하고 있다.
제목:The Peasants of Flagey Returning from the Fair, Ornans
제목:The Young Ladies of the Village
제목:The Sleeping Spinner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그린다는 쿠르베의 사실주의 사상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대표작 의 하나. 화구 (畵具)가 담긴 상자를 짊어지고 막 역마차에서 내린 여행자 차림의 쿠르베 앞 에 몽펠리에 시의 미술 애호가인 알프레드 브뤼야스가 마중나와 인사하는 장면이다.
제목:The Painter's Studio
1848년에서 54년에 걸쳐, 쿠르베를 중심으로 한 일군의 리얼리스트들이 파리 오토피유가(街) 비어홀 앙드레르에 매일 저녁 모여들어 토론을 벌였다. 그레고와르 아주머니는 이 비어홀 카운터에 언제나 앉아 있던 집주인으로 이들 리얼리스트들과는 굉장히 친숙해 있었다. 화가 의 눈도 그런 친숙감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쿠르베는 다른 일련의 초상화에서와 같이, 여 기서도 대상에 육박해 들어가는 밀도 있는 객관성에 더욱 관심을 쏟고 있을 뿐이다. 육중한 그녀의 몸매와 두 팔을 약간 벌려 제스처를 쓰고 있는 표정은 딱딱한 대리석 카운터와 그 위에 놓인 검은 장부책과 어울려, 보는 이로 하여금 당당함을 느끼게 한다.
1857년 살롱에 출품되어 물의를 일으켰던 작품. 여자들의 표정이나 자태가 음란하다는 도덕 적 입장에서 비난을 받았다. 이러한 도덕적 비난은 곧 인상파인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 로 이어지는 전조이자 인상파가 즐겨 다루는 행락(行樂)의 정경의 효시이기도 하다. 쿠르베 는 이 작품의 구상을 오래 전부터 하고 있었던 듯한데, 6년 전 1850년경에서 모자를 쓴 처 녀들 모습을 다룬 일련의 습작도 이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강가에 매여져 있는 보트로 미 루어 근처에 상대편 남자들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어 두 처녀의 모습은 더욱 에로틱한 분위기를 자아내게 한다.
1865년 1월에 프루동이 사망하자, 쿠르베는 1853년 그와 처음 알게 된 때의 모습을 재현시 켰다. 화면 중의 1853년이란 작품의 제작 연대가 아니고 이처럼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무 렵의 연대이다. 쿠르베는 같은 고향 출신인 사상가 프루동과는 상당한 친교를 유지했을 뿐 만 아니라 한때 프루동의 무정부주의적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傾倒)된 적도 있다.
1866년 살롱에 출품되어 호평을 받았던 작품. 65년 겨울 쿠르베는 몇 마리의 사슴을 빌어다가 숲속에 은신처를 만들어 주고 몰래 숨어들어가서는 사슴이 놀라 도 망가지 않도록 조심조심하면서 그렸다고 한다. 하루 작업이 끝나면 숲속에 캔버스를 감추어 두었다가 다음날 또 와서 그림을 계속했다고 한다. 다소 인용적인 제작 방법에도 불구하고 숲속에 사는 동물의 생태가 정확하게 포착되어 있으며, 흐르는 물의 투명함과 유동감, 숲속 의 습기 같은 분위기가 실감있게 포착되고 있어 쿠르베의 사실적 방법의 극치를 보는 느낌 이다. 무슨 소리에 곧 뛰어갈 것 같은, 사슴의 약간 치켜든 뒷다리가 사실감을 더해 준다.
일시 :. 1866
Self-Portrait
(Courbet with a Black Dog)
1844 Oil on canvas
*파이프를 물고 있는 남자
Self-Portrait (Man with a Pipe)
1848-49
Oil on canvas
*The Peasants of Flagey
일시:1850-55
재료:Oil on canvas
*마을 처녀들
일시:1851-52
재료:Oil on canvas
*The Sleeping Spinner
일시:1853
재료:Oil on canvas
*만남 (안녕하시오, 쿠르베 씨!)
맑은 남프랑스의 들녘에 선화가와 그를 마중하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너무도 일상적인, 그렇기 때문에 그림의 소재로서는 걸맞지 않게 보이는 장면을 소재로서 다루었다는 데서 쿠 르베의 현실에 대한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본다는 생각이 적나라하게 묘출되고 있는 것이다. 빛으로 충만한 남 프랑스의 풍광은, 쿠르베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는 밝은 심경의 반영처럼 시사된다.
The Meeting (Bonjour, Monsieur Courbet) 1854
Oil on canvas
*The Painter's Studio
일시:1854-55
재료:Oil on canvas
*그레고와르 아주머니
제목 : Mere Gregoire
일시 :1855
재료 : Oil on canvas
*세느 강변의 처녀들
제목:The Young Ladies on the Banks of the Seine (Summer)
일시 : 1856-57
재료 : Oil on canvas
*푸르동의 초상, 1853년
아마도 이 초상은 화가 자신에게 여러 모로 정신적 영향을 준 한 사상가에 대한 교분을 영 원히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것임이 분명하다. 65년 살롱에 출품되어 졸렬하고 못생겼다는 혹평을 받았으나 쿠르베의 치열한 사실 정신은 의외로 인물들을 통해 강하게 전달되고 있 다.
제목:Portrait of P.J. Proudhon in 1853
일시:1865
재료: Oil on canvas
*사슴의 은신처
제목 :The Shelter of the Roe Deer at the Stream of Plaisir-Fontaine, Doubs.
일시 :1866
재료 :. Oil on canvas
*The Sleepers
Oil on canvas
*송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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