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프러스 나무와 집
첼리스트
부채를 들고있는 체호프스카
유태인 여자
카리아티드
젊은 여인의 얼굴
모자를 쓴 여인
노랑 스웨터의 쟌느
쟈크 립시즈 부처의 초상
에브데르느 부인의 초상
Jeanne Hebuterne
앉아 있는 나부
남프랑스 풍경
장밋빛 누드
Reclining Nude
Self Portrait
카리아티드
Head of a Woman
Nude -- Caryatid
Portrait of Max Jacob
Portrait of Beatrice Hastings
야외복을 입은 붉은머리 여인
소년
서있는 나부
푸른 방석 위의 나부
큰 모자를 쓴 쟌느 에브테르느
엎드려누워있는 나부
검은 넥타이를 맨 부인
물방울무늬 브라우스를 입은 소녀
1902 (18세)
프로필 *
출 생 : 1884년 7월 12일
사 망 : 1920년 1월 24일 (36세)
국 적 : 이탈리아
출 생 지 : 토스카나 지방의 리보르노
가족사항 : 쟌느 에뷔테른과 사이에 딸 하나(쟌느 모딜리아니)
학 력 : 리보르노 미술학교 - 피렌체 미술학교 - 베니스 미술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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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생애 *
전설과도 같은 삶, 신화적 운명 등 모딜리아니의 삶에 붙여진 이름은 많다.
그러나 보헤미언과 같은 그의 삶의 여정속에서 태어난 작품들은 고요한 감성을 표현하고 있어 놀라운 대조를 이룬다.
그는 정열적인 기질을 지닌 이태리인이었다.
데도라는 애칭으로 불리었던 그는 1884년 7월 12일, 이태리 토스칸 지방의 리부르네에서 아버지 플라니니오 모딜리아니와 어머니 으제니 가르셍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평생 일기를 쓰는 습관이 있던 어머니 으제니는 철없는 응석받이 막내아들 모딜리아니에 대해 1895년 일기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는 저애가 자라서 무엇이 될까 생각해봤다. 아마 예술가가 되지 않을까?"
장작과 석탄을 판매하는 유태인 상인이었던 아버지 플라니니오는 우울하고 정이 없는 성격인데다가 여행을 떠나 자주 집을 비우곤 했다.
교황청의 화폐발행에 필요한 구리잡품업자로 유복했던 그의 집안은 유태인의 토지소유를 금지하는 당신의 법을 어기고 포도밭을 샀다가 발각되어 로마에서 �겨나 리부르네로 이주한 퇴락한 부르주아였다.
어머니 으제니는 이태리의 문학작품을 영어로 번역하거나 가정교사를 하면서 집안살림을 도왔다.
멘델스존과 스피노자 등 예술과 철학을 좋아하던 이모와 할아버지 덕분으로 모딜리아니는 어릴때부터 지성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랄 수 있었다.
열네살이 되던 해,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우기로 결심한 모딜리아니는 화가 미켈리의 아틀리에에 다니면서 풍경화와 데생을 익혔다.
화가의 길을 가려는 그의 의지는 열여섯살이 되던 해 폐결핵으로 남부 이태리에 휴양을 떠났던 여행에서 더욱 확실해진다.
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내 인생이 즐겁게 흘러가는 풍요로운 강물이 되기를 바란다네. 난 지금 내 자신에게서 끝없는 창작의 가능성을 느끼고 있어. 작품을 그리고 싶은 욕구가 솟아오르고 있네. "
1902년. 열아홉살의 청년 모딜리아니는 플로렌치아로 떠났다.
누드 전문 미술학교에서 수업이 끝난 후 베니스 미술학교로 옮긴 그는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의 "인공낙원" 이라는 작품에 심취해 대마초를 피우며 술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앞서 간 명인의 작품이나 삶 자체에 매력을 느껴 빠져들어가면서 자신의 길을 모색하기 마련이지만 일생동안 마약과 술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모딜리아니의 생활방식은 이 시기에 형성된 것이다.
물론 그림에 필요한 기초교육을 가장 훌륭히 받을수 있었고 미술관과 도시곳곳을 다니면서 이태리의 전통을 몸에 익힌 것도 이 시기이다.
학비를 대주던 삼촌 아마데오 가르셍이 죽자 재정적 어려움이 생겼지만 모딜리아니는 당시 유럽 청년들의 동경의 대상이었던 파리로 떠났다.
1906년 파리에 도착한 그는 젊은 화가들이 모여있는 몽마르뜨에 자리를 잡았다.
파리시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몽마르뜨 언덕은 19세기까지는 밀을 빻는 방앗간이 가득 들어차 있던 동네였기 때문에 도시개혁이후에도 서민적인 풍모를 간직하고 있었다.
파리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도록 전망도 좋은데다가 방값도 싸고 카페가 들어차 있는 자유로운 분위기 때문에 특히 젊은 예술가들에게는 메카나 다름 없던 곳이다.
여기서 그는 2년 먼저 와 있던 스페인 청년 피카소를 만났다.
모딜리아니는 그의 그룹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 진정한 우정 관계는 싹트지 않았다.
모딜리아니는 예술에 관한 토론을 펼치기 보다는 낭만적인 분위기 속에서 술을 마시기를 즐겼다.
피카소가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발표함으로써 회화 전통을 무너뜨리고 입체파를 탄생시키는 동안 모딜리아니는 툴루즈로트렉과 그래피즘을 차례로 거치는 습작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가 잘 웃고 친절한 이태리 미남으로 더 알려져 있던 시기인 것이다.
여자들은 아무런 보수도 받지 않고 자원해서 모델을 서주었고, 그는 문인과 화가들의 회합장소였던 "라뼁 아질"에서 화가 위트리요와 함께 술에 젖기 일쑤였다.
그리고 그는 단테의 "신곡"을 외우곤 하는 것이다.
이름 없는 외국 청년에 불과한 그는 곧 방세가 밀려 하숙에서 �겨나 방랑생활을 해야 했다.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을때는 찢어 버리기도 했고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생활 때문에 그의 초기 작품은 거의 분실되고 별로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그가 그림그리기를 멀리한 날은 없었다.
그는 1907년에는 살롱 도톤느, 이듬해에는 화가5인전과 엥데팡당전에 차례로 출품하는 의욕을 보였다.
몽마르뜨 언덕의 생활에 피곤을 느낀 모딜리아니는 1909년 이 언덕의 정반대편에 위치한 몽파르나스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아카데미즘을 결별하고 야수파와 표현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었는데 여기서 그의 그림을 최초로 수집하기 시작한 의사 알렉산드르 박사를 만났다.
몽파르나스의 시떼 팔기에르에 자리잡은 모딜리아니는 조각에 전념한다.
당시 이웃에는 루마니아에서 온 조각가 브랑쿠지가 살고 있었다.
로뎅을 좋아한 그와는 달리 주조나 석고를 싫어했던 모딜리아니 는 돌에 직접 조각을 하는 편을 택했다.
값비싼 돌을 살 수 없었던 그는 때로 공사장에 가서 조각을 했고, 그돌은 결국 회수를 당해 건축자재로 쓰이기도 했다.
주로 두상을 제작한 이 시기의 조각 25점은 1912년 살롱 도톤느에 출품되었다.
아프리카미술에서 영감을 얻은 이 작품들은 다이내믹하지는 않지만 고전적인 간결성을 드러내고 있고 그이 그림에서도 볼수있는 긴 얼굴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의 조각은 비평가들의 호응을 얻지 못한채 한 점도 팔리지 않았고, 빵대신 술병을 옆에 두고 작업하던 모딜리아니의 건강은 더 나빠졌다.
폐결핵이 심해지자 친구들은 서둘러서 그를 고향 이태리로 보내쉬도록 했다.
집으로 돌아가서도 돌을 구해 조각에 몰두했던 그는 작품들을 파리로 운반해 오고 싶어했지만 친구에게서조차 악평을 받자 모두 운하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다시 몽파르나스로 돌아오자 제 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모딜리아니는 폴란드 출신의 화가 수틴과 함께 입영신청을 했지만, 건강때문에 거절을 당했고 그림을 그리는 일로 되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조각가로서의 희망도 버리고 화가로서의 전환기를 맞은 셈이다.
이해에 그는 베아트리스 헤스팅스 라는 여자를 만나 뜨거운 사랑에 빠졌다.
남아프리카에서 태어나 런던에 거주하고 있던 그녀는 남편과 이혼한 후 앨리스 모닝이라는 필명으로 런던의 아방가르드 잡지에 기사를 쓰는 기자이자 시인이기도 했다.
어찌보면 모딜리아니를 더욱 술과 마약에 빠져들게 한 장본인일수도 있다.
술을 좋아했던 그녀는 값싸고 독하지 않은 포도주만 마시던 모딜리아니에게 위스키와 진을 가르친 것이다.
폭풍과 같은 2년간의 동거기간 동안 모딜리아니는 늘 술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베아트리스는 친구들의 비난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과격하고 정열적이던 그녀는 결국 1943년에 자살함으로써 생을 마쳤다.
무절제한 생활속에서도 모딜리아니는 많은 그림을 그렸다.
볼륨을 제거하고 평면적인 구도를 사용함으로써 조형적인 효과를 노리는가 하면 잠시동안이나마 표현의 수단으로 점묘수법을 이용하기도 했다.
그의 그림에는 회화적인 차원에서의 혁신은 없다는 비평가들의 지적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의 얼굴만을 대상으로 작업을 하는 그는 베르나르 뷔페를 예고하는 듯한 검은 선과 변형된 인물의 시선, 포즈를 통해 모한 감동을 불러 일으킨다.
훗날 1950년대의 실존주의자들은 그의 그림에서 실존의 불안과 괴로움의 표현을 발견해냄으로써 그의 가치를 부각시키기도 했다.
베아트리스와 헤어진 후 극도의 생활고에 시달리던 모딜리아니는 카페의 테라스에 앉아 옆자리에 앉은 손님들의 얼굴을 그려주고 10프랑(약 1,200원)과 술 한잔을 부탁하곤 했다.
많은 친구들이 그를 사랑했지만 정작 그는 피카소와 시인 막스 자콥만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피카소는 그의 그림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당시의 예술가, 비평가들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가지며 유파를 형성하고 대화를 즐기던 그와는 달리 모딜리아는 몽파르나스에서도 낭만적인 기질 그대로 떠돌고 있었다.
물론 그의 인간적인 모습을 좋아한 시인 막스 자콥은 "내가 시인임을 모딜리아니에게 증명하기 위해서"라는 시를 써서 헌정하기도 했고, 시인 아폴리네르도 몸소 나서서 작품을 팔아주기도 했다.
모딜리아니가 자신의 그림을 팔기 위해 사교계 인사들에게 자세를 굽히거나 필요에 의한 것이나마 유대관계를 맺었더라면 그렇게 심한 가난에 시달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아무에게도 자신을 설명하지도, 설명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작품의 가치는 사상이 표현되고, 말로 할 수 없거나 해서는 안되는 것에 길을 열어주며 작품 자체의 삶을 위해 작가에게 분리되는 데 있다" 라고 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적고 있다.
비록 가난에 시달리 망정 모딜리아니는 늘 우아하고 관대로운 사람으로도 유명했다.
당시의 몽파르나스는 몽마르뜨르와는 달리 외국인이 많이 찾아오거나 화제거리가 만들어지는 문화의 중심지가 아니었다.
야채나 과일을 파는 손수레가 늘어서 있고, 이제 막 변두리의 풍모를 벗고 화가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던 곳이어서 오히려 더 인정이 피어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몽파르나스거리의 라 로통드 카페에서 그림을 그리곤 하던 모딜리아니는 어느날 자신보다 더 가난한 친구를 만났다.
카페를 떠나면서 그는 친구가 앉아 있는 테이블 밑에 지폐 한 장을 슬쩍 떨어뜨리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네 발 밑에 웬 돈이 떨어져 있는 것 같군."
초상화를 그려주면서 생활을 연명했던 모딜리아니는 즈보로프스키 라는 폴란드 출신의 그림 중개업자를 만났다.
그는 하루하루 15프랑씩의 생활비를 보태주었고, 이후 두사람의 관계는 고흐와 동생 테오의 관계처럼 지속된다.
이제 예술과 삶을 은밀하게 연결한다는 이상을 추구하던 모딜리아니는 1913년 갤러리 베르트 바일에서 그의 생전 유일의 개인전을 갖게된다.
32점의 누드작품만 전시된 이 전시회는 외설을 이유로 경찰이 찾아와서 작품을 걷어가는 소동도 벌어졌지만 그의 이름이 비로소 대중에게 알려지는 성공을 거두었다.
비록 작품은 2점 밖에 팔리지 않았지만, 그의 누드화는 이전까지의 다른 화가들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피곤하고 권태로운 모습의 여인들을 보여줌으로써 주목을 끌었다.
고야나 마네의 누드에서 볼 수 있는 알레고리나 이상적인 여성의 미는 없이 부드럽지만 포기한 듯 내던져진 자세를 지닌데다가 몸전체를 그리지 않고 화면의 여백을 많이 남겨둠으로써 더욱 에로틱한 여운을 풍기는 것이다.
이 해에 모딜리아니와 쟌느 에퓨테른느와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이 시작된다.
그러나 1920년 1월 24일 오전 8시 50분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되어 사망한 그를 따라 임신 9개월의 몸으로 투신함으로써 짧은 이승의 삶보다 긴 영원 속에서 모딜리아니와 함께 있기를 택했던 그녀는 살아서는 그의 최상의 이해자였고, 반려였으며 목숨까지도 바친 여인이었다.
지중해의 뜨거운 햇빛과 고향의 어린시절을 그리워했던 그는 파리의 자선 병원에서 3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며 "카라 이탈리아(그리운 이탈리아) " 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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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사랑 *
여학생처럼 청순한 처녀가 몽파르나스의 로톤드(카페 이름)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눈동자도 머리 빛도 밝았던 이 처녀는 모딜리아니 등의 예술가들이 모여앉아 있는 쪽을 조심스럽게 바라보기도 했다.
들리는 말로는 그림 공부를 해보려고 몽파르나스에 온 것이라고들 했다.
얼마 후 이 청순한 처녀인 쟌느 에퓨테른느가 모딜리아니와 서로 팔짱을 끼고 몽파르나스 거리를 지나가는 정경을 사람들은 목격하게 된다.
드디어 모딜리아니도 행복을 잡았구나 하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녀는 모딜리아니의 생의 반려가 되며 앞으로 삼년간 로톤드의 맞은편 그랑 쇼미엘 거리에 셋방을 얻어 같이 살게 된다.
한때나마 안정된 시기가 찾아오며 모딜리아니의 독자적인 표현 양식은 급속도로 만개하게 된다.
모딜리아니는 칸느의 축제에서 쟌느 에퓨테론느를 만났다.
아카데미 콜라로시에서 그림을 배우며 화가가 되기를 꿈꾸고 있던 열아홉살의 쟌느에게는 슬프고 불행한 만남이 시작된 것이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쟌느의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곧바로 동거생활에 들어갔다.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를 가진 쟌느는 밤색머리를 땋아 둥글게 올리고 다니곤 했기 때문에 친구들은 그녀에게 " 느와 드 코코 " (야자열매라는 뜻) 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1918년 11월, 즈보르프스키 부부의 주선으로 니스에 내려가 있던 쟌느는 딸 지오바나(나중에는 어머니의 이름을 그대로 쟌느로 불림) 를 낳았다.
두 사람은 정식으로 결혼신고를 하지 않은 부부 였기에 그들의 딸은 사생아로 신고 되었다.
니스에 머물면서 풍경화를 모색해보기도 했던 모딜리아니는 어느날 르느와르의 초대를 받았다.
당시 니스에 살고 있으면서 이미 거장으로 불리었던 르느와르는 모든 방문을 거절했지만 예외적으로 모딜리아니를 집으로 불러 자신의 그림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몇 점의 그림을 둘러 본 그는 차가운 반응을 보인채 이 나이든 대화가의 면전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재능을 높이 샀던 르느와르는 자신의 그림을 팔아 그를 도와주었다고 한다.
괴팍하고 부도덕한 점이 예술가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특징처럼 되어버리기도 하지만 딸을 얻고 생활의 책임을 걸머지게 된 모딜리아니의 신경은 극도로 날카로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한 번의 시도 만으로 그자리에서 초상화를 그려내곤 했다.
당시에는 부탁을 받고 그리는 초상화는 모델이 자리를 잡는 횟수와 시간에 따라 보수를 받는것이 관례였다.
따라서 여러번에 걸쳐쳐 데생을 하면서 시간을 끌수록 화가는 돈을 더 받기 마련이었지만 모딜리아니는 한 번에 그려버리곤 하는 것이었다.
어느날 그는 야수파의 대가인 마티스의 초상화를 그리고 싶어했다.
아직 모딜리아니를 잘 알지 못했던 마티스는 5분간만 모델을 서주겠다고 했다.
결과를 보고 흡족해진 마티스는 결국 한시간의 시간을 내주었다고 한다.
1918년 폴 기욤은 자신의 화랑에서 마티스와 모딜리아니, 피카소, 블라맹크를 모아 전시했고, 런던 에서도 같은 전시회를 열어 호평을 받을 수 있었다.
1919년 봄, 다시 파리에 올라온 쟌느는 둘째아이를 임신했다.
겨울이 되었어도 난로를 피울수 없어 시린 발에 옷을 감고 지내는 가난에 시달렸던 쟌느는 친정어머니의 집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모딜리아니는 카페나 노천에서 밤을 세우면서 거의 자살에 가까운 생활을 했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평화롭고 안정된 삶을 갖고 싶어 쟌느와 정식으로 결혼하겠다는 서약서를 썼다.
때로는 딸이 보고 싶어서 찾아 가기도 했지만, 그를 못마땅해 하던 쟌느의 어머니는 문도 열어 주지 않았고 그러면 그는 집문 앞 계단에 앉아있다가 말없이 돌아가곤 했다.
즈보로프스키는 런던에서 모딜리아니 전시회를 열어 주었고, 그의 생전 처음으로 초상화 한 점이 1,000프랑이라는 가격에 팔려 나가는 행운도 얻었지만 이미 그의 건강은 한계에 다다랐다.
자신의 종말을 예감이라도 한듯 그는 친구에게 "이젠 머리 속에 아무것도 남아 있는것 같지가 않아. 더이상은 버틸수가 없을 것 같군" 이라고 말했다.
1920년 1월, 모딜리아니는 파리 자선 병원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당시 임신 9개월이었던 쟌느는 이튿날 새벽 친정집 5층에서 뛰어내렸다.
모딜리아니가 병원으로 실려가던 날, 그는 친구에게 "죽어서 다시 만나 영원히 행복한 삶을 살자 " 라는 말을 쟌느에게 전해줄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그 약속을 지킨것일까..
쟌느는 남은 일생을 모딜리아니의 추억속에서 지내야 하는 고통을 감수하기 보다는 빠른 재회의 길을 선택했다.
이태리 사회당의 국회의원에 당선된 형 엠마누엘은 동생의 장례식을 " 왕자처럼 치뤄달라" 는 전보를 보내왔다.
몽파르나스의 엘레강스의 종말이라는 시인 쟝 꼭또의 애도와 함께 모딜리아니의 장례식에는 수많은 파리시민이 모여들어 긴 행렬을 이루었다.
그러나 딸의 시신 조차 집에 들여놓기를 꺼려한 쟌느의 집안에서는 아무런 부고도 없이 쟌느를 파리 변두리에 묻었다.
모딜리아니의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으로 몇년후에야 두 사람은 뻬르 라 쉐르묘지에 함께 묻힐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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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연보 *
1884년 7월 12일
이탈리아의 토스카나 지방에 있는 리오르노에서 출생.
부친 푸라미니오 모딜리아니는 중개상,모친은마르세이유출신.
1895년 (11세)
리오르노 중학교에 입학. 이해, 늑막염을 앓는다.
1898년 (14세)
장 질환에 걸려 폐렴 병발.
그러나 중학 졸업 자격을 취득. 리오르노 미술 학교에 입학
풍경화가 미케리 문하에서 데생과 유화를 배움.
1901년 (17세)
폐결핵에 걸림.
병후 요양을 위해 나폴리, 로마 등지를 여행.
카마이노의 조각에서 깊은 감명을 받음.
1902년 (18세)
5월, 피렌체 미술 학교 나체 자유화과에 입학.
조각가를 꿈꾼다.
1903년 (19세)
3월, 베네치아 미술 학교 입학. 살롱 도똔느 창립.
1906년 (22세)
파리를 방문. 몽마르뜨에 있는 아틀리에 "세탁선" 근처에서 하숙.
세잔 사망.
1907년 (23세)
앙데팡당 협회 회원이 됨. 세잔 회고전을 보고 크게 감동한다.
드레스덴에서 다리파 1회전.
1908년 (24세)
그레망 광장에서 생활. 앙데팡당 전에 유화 5점, 데생 1점 출품.
달리 출생
1909년 (25세)
아틀리에를 새로 마련.
알렉산드르의 소개로 브랑크스를 알게 되어 깊이 사귐.
브랑크스에게서 조각을 배움.
이해, 여름과 가을철을 조각제작에 몰두.
1910년 (26세)
베르넴 쥬누 화랑에서 열린 세잔전을 보고 감동.
앙데팡당전에 유화 6점 출품.
지난해에 이어 조각제작에 전념.
1912년 (28세)
살롱 도똔느에 조각 7점을 출품.
여름철에 고향 리오르노로 귀향. 클레, 마케, 마르끄 등 파리를 방문. 파리에서 미래파전. 레제, 로랑상 개인전.
피카소 브라크 등 꼴레 수법 시도.
베를린에서 "폭풍전" 개최. 아폴리네르, 드로네의 작품을 오리피즘으로 명명. 섹션도르 1회전 개최.
1913년 (29세)
여름을 고향 리오르노에서 지냄.
아폴리네에르 "큐비즘의 화가들" 발간.
말레비치 절대주의를 주창. 아모리 쇼 개최.
보치오니가 주동이 된 미래파 조작전 개최.
라이오느프, "광상주의"선언.
1914년 (30세)
파리로 돌아와 몽파르나스에 있는 카페에 자주 들려 스팅, 키스링그 등과 교류. 영국의 여류시인 베아트리스 헤스팅그스와 연애. 3년동안 동거 생활.
화상 폴 키욤과 알게 됨.
제 1차 세계대전에 브라크, 레제, 드랑 등 참전.
최초의 오브제 "레디 메이드" 발표.
샤갈, 러시아에서 귀국. 마케, 사망.
1916년 (32세)
스포르스키와 알게되어 정기적으로 원조를 받음.
취리히의 카바레 볼테르에서 다다이즘 운동이 시작됨.
보치오니, 마르크, 르동 등 사망.
1917년 (32세)
몽파르나스 화숙의 학생, 쟌느 에뷰테른느와 알게되어 6월부터 그랑드 쇼미에르에 있는 아틀리에에서 동거 생활.
12월, 베르토 웨일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했는데, 나체화 5점이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철거됨.
피카비아, "391"지 창간. 반데스버그, 몽드리앙에 의한 추상 예술 잡지 "데스틸" 지 창간.
드가, 로댕 사망.
베를린에서도 다다이즘 운동. 츠아라, "다다"지 창간.
1919년 (35세)
봄 리비에라에서 파리로 귀환.
그랑드 쇼미엘가 8번지에서 생활. 런던에서의 현대 프랑스 예술 그룹전에 출품.
1920년 (36세)
1월 24일.
파리의 자선병원에서 사망.
25일 장례식거행.
26일 쟌느 에뷰테른느, 남편의 뒤를 따라 투신 자살.
27일 라세즈 묘지에 묻힘.
1922년
파리의 베르넴 쥬느 화랑에서 유작전 개최.
1925년
파리의 비인 화랑에서 모딜리아니 회고전 개최.
1931년
뉴욕의 라 데모트 화랑에서 유작전 개최.
1934년
바젤 미술관에서 유작전 개최.
1951년 뉴욕 근대 미술관에서 유작전 개최
1955년 시카고에서 모딜리아니 데상전 개최.
1902 (18세)
프로필 *
출 생 : 1884년 7월 12일
사 망 : 1920년 1월 24일 (36세)
국 적 : 이탈리아
출 생 지 : 토스카나 지방의 리보르노
가족사항 : 쟌느 에뷔테른과 사이에 딸 하나(쟌느 모딜리아니)
학 력 : 리보르노 미술학교 - 피렌체 미술학교 - 베니스 미술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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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생애 *
전설과도 같은 삶, 신화적 운명 등 모딜리아니의 삶에 붙여진 이름은 많다.
그러나 보헤미언과 같은 그의 삶의 여정속에서 태어난 작품들은 고요한 감성을 표현하고 있어 놀라운 대조를 이룬다.
그는 정열적인 기질을 지닌 이태리인이었다.
데도라는 애칭으로 불리었던 그는 1884년 7월 12일, 이태리 토스칸 지방의 리부르네에서 아버지 플라니니오 모딜리아니와 어머니 으제니 가르셍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평생 일기를 쓰는 습관이 있던 어머니 으제니는 철없는 응석받이 막내아들 모딜리아니에 대해 1895년 일기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는 저애가 자라서 무엇이 될까 생각해봤다. 아마 예술가가 되지 않을까?"
장작과 석탄을 판매하는 유태인 상인이었던 아버지 플라니니오는 우울하고 정이 없는 성격인데다가 여행을 떠나 자주 집을 비우곤 했다.
교황청의 화폐발행에 필요한 구리잡품업자로 유복했던 그의 집안은 유태인의 토지소유를 금지하는 당신의 법을 어기고 포도밭을 샀다가 발각되어 로마에서 �겨나 리부르네로 이주한 퇴락한 부르주아였다.
어머니 으제니는 이태리의 문학작품을 영어로 번역하거나 가정교사를 하면서 집안살림을 도왔다.
멘델스존과 스피노자 등 예술과 철학을 좋아하던 이모와 할아버지 덕분으로 모딜리아니는 어릴때부터 지성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랄 수 있었다.
열네살이 되던 해,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우기로 결심한 모딜리아니는 화가 미켈리의 아틀리에에 다니면서 풍경화와 데생을 익혔다.
화가의 길을 가려는 그의 의지는 열여섯살이 되던 해 폐결핵으로 남부 이태리에 휴양을 떠났던 여행에서 더욱 확실해진다.
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내 인생이 즐겁게 흘러가는 풍요로운 강물이 되기를 바란다네. 난 지금 내 자신에게서 끝없는 창작의 가능성을 느끼고 있어. 작품을 그리고 싶은 욕구가 솟아오르고 있네. "
1902년. 열아홉살의 청년 모딜리아니는 플로렌치아로 떠났다.
누드 전문 미술학교에서 수업이 끝난 후 베니스 미술학교로 옮긴 그는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의 "인공낙원" 이라는 작품에 심취해 대마초를 피우며 술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앞서 간 명인의 작품이나 삶 자체에 매력을 느껴 빠져들어가면서 자신의 길을 모색하기 마련이지만 일생동안 마약과 술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모딜리아니의 생활방식은 이 시기에 형성된 것이다.
물론 그림에 필요한 기초교육을 가장 훌륭히 받을수 있었고 미술관과 도시곳곳을 다니면서 이태리의 전통을 몸에 익힌 것도 이 시기이다.
학비를 대주던 삼촌 아마데오 가르셍이 죽자 재정적 어려움이 생겼지만 모딜리아니는 당시 유럽 청년들의 동경의 대상이었던 파리로 떠났다.
1906년 파리에 도착한 그는 젊은 화가들이 모여있는 몽마르뜨에 자리를 잡았다.
파리시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몽마르뜨 언덕은 19세기까지는 밀을 빻는 방앗간이 가득 들어차 있던 동네였기 때문에 도시개혁이후에도 서민적인 풍모를 간직하고 있었다.
파리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도록 전망도 좋은데다가 방값도 싸고 카페가 들어차 있는 자유로운 분위기 때문에 특히 젊은 예술가들에게는 메카나 다름 없던 곳이다.
여기서 그는 2년 먼저 와 있던 스페인 청년 피카소를 만났다.
모딜리아니는 그의 그룹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 진정한 우정 관계는 싹트지 않았다.
모딜리아니는 예술에 관한 토론을 펼치기 보다는 낭만적인 분위기 속에서 술을 마시기를 즐겼다.
피카소가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발표함으로써 회화 전통을 무너뜨리고 입체파를 탄생시키는 동안 모딜리아니는 툴루즈로트렉과 그래피즘을 차례로 거치는 습작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가 잘 웃고 친절한 이태리 미남으로 더 알려져 있던 시기인 것이다.
여자들은 아무런 보수도 받지 않고 자원해서 모델을 서주었고, 그는 문인과 화가들의 회합장소였던 "라뼁 아질"에서 화가 위트리요와 함께 술에 젖기 일쑤였다.
그리고 그는 단테의 "신곡"을 외우곤 하는 것이다.
이름 없는 외국 청년에 불과한 그는 곧 방세가 밀려 하숙에서 �겨나 방랑생활을 해야 했다.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을때는 찢어 버리기도 했고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생활 때문에 그의 초기 작품은 거의 분실되고 별로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그가 그림그리기를 멀리한 날은 없었다.
그는 1907년에는 살롱 도톤느, 이듬해에는 화가5인전과 엥데팡당전에 차례로 출품하는 의욕을 보였다.
몽마르뜨 언덕의 생활에 피곤을 느낀 모딜리아니는 1909년 이 언덕의 정반대편에 위치한 몽파르나스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아카데미즘을 결별하고 야수파와 표현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었는데 여기서 그의 그림을 최초로 수집하기 시작한 의사 알렉산드르 박사를 만났다.
몽파르나스의 시떼 팔기에르에 자리잡은 모딜리아니는 조각에 전념한다.
당시 이웃에는 루마니아에서 온 조각가 브랑쿠지가 살고 있었다.
로뎅을 좋아한 그와는 달리 주조나 석고를 싫어했던 모딜리아니 는 돌에 직접 조각을 하는 편을 택했다.
값비싼 돌을 살 수 없었던 그는 때로 공사장에 가서 조각을 했고, 그돌은 결국 회수를 당해 건축자재로 쓰이기도 했다.
주로 두상을 제작한 이 시기의 조각 25점은 1912년 살롱 도톤느에 출품되었다.
아프리카미술에서 영감을 얻은 이 작품들은 다이내믹하지는 않지만 고전적인 간결성을 드러내고 있고 그이 그림에서도 볼수있는 긴 얼굴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의 조각은 비평가들의 호응을 얻지 못한채 한 점도 팔리지 않았고, 빵대신 술병을 옆에 두고 작업하던 모딜리아니의 건강은 더 나빠졌다.
폐결핵이 심해지자 친구들은 서둘러서 그를 고향 이태리로 보내쉬도록 했다.
집으로 돌아가서도 돌을 구해 조각에 몰두했던 그는 작품들을 파리로 운반해 오고 싶어했지만 친구에게서조차 악평을 받자 모두 운하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다시 몽파르나스로 돌아오자 제 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모딜리아니는 폴란드 출신의 화가 수틴과 함께 입영신청을 했지만, 건강때문에 거절을 당했고 그림을 그리는 일로 되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조각가로서의 희망도 버리고 화가로서의 전환기를 맞은 셈이다.
이해에 그는 베아트리스 헤스팅스 라는 여자를 만나 뜨거운 사랑에 빠졌다.
남아프리카에서 태어나 런던에 거주하고 있던 그녀는 남편과 이혼한 후 앨리스 모닝이라는 필명으로 런던의 아방가르드 잡지에 기사를 쓰는 기자이자 시인이기도 했다.
어찌보면 모딜리아니를 더욱 술과 마약에 빠져들게 한 장본인일수도 있다.
술을 좋아했던 그녀는 값싸고 독하지 않은 포도주만 마시던 모딜리아니에게 위스키와 진을 가르친 것이다.
폭풍과 같은 2년간의 동거기간 동안 모딜리아니는 늘 술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베아트리스는 친구들의 비난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과격하고 정열적이던 그녀는 결국 1943년에 자살함으로써 생을 마쳤다.
무절제한 생활속에서도 모딜리아니는 많은 그림을 그렸다.
볼륨을 제거하고 평면적인 구도를 사용함으로써 조형적인 효과를 노리는가 하면 잠시동안이나마 표현의 수단으로 점묘수법을 이용하기도 했다.
그의 그림에는 회화적인 차원에서의 혁신은 없다는 비평가들의 지적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의 얼굴만을 대상으로 작업을 하는 그는 베르나르 뷔페를 예고하는 듯한 검은 선과 변형된 인물의 시선, 포즈를 통해 모한 감동을 불러 일으킨다.
훗날 1950년대의 실존주의자들은 그의 그림에서 실존의 불안과 괴로움의 표현을 발견해냄으로써 그의 가치를 부각시키기도 했다.
베아트리스와 헤어진 후 극도의 생활고에 시달리던 모딜리아니는 카페의 테라스에 앉아 옆자리에 앉은 손님들의 얼굴을 그려주고 10프랑(약 1,200원)과 술 한잔을 부탁하곤 했다.
많은 친구들이 그를 사랑했지만 정작 그는 피카소와 시인 막스 자콥만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피카소는 그의 그림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당시의 예술가, 비평가들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가지며 유파를 형성하고 대화를 즐기던 그와는 달리 모딜리아는 몽파르나스에서도 낭만적인 기질 그대로 떠돌고 있었다.
물론 그의 인간적인 모습을 좋아한 시인 막스 자콥은 "내가 시인임을 모딜리아니에게 증명하기 위해서"라는 시를 써서 헌정하기도 했고, 시인 아폴리네르도 몸소 나서서 작품을 팔아주기도 했다.
모딜리아니가 자신의 그림을 팔기 위해 사교계 인사들에게 자세를 굽히거나 필요에 의한 것이나마 유대관계를 맺었더라면 그렇게 심한 가난에 시달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아무에게도 자신을 설명하지도, 설명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작품의 가치는 사상이 표현되고, 말로 할 수 없거나 해서는 안되는 것에 길을 열어주며 작품 자체의 삶을 위해 작가에게 분리되는 데 있다" 라고 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적고 있다.
비록 가난에 시달리 망정 모딜리아니는 늘 우아하고 관대로운 사람으로도 유명했다.
당시의 몽파르나스는 몽마르뜨르와는 달리 외국인이 많이 찾아오거나 화제거리가 만들어지는 문화의 중심지가 아니었다.
야채나 과일을 파는 손수레가 늘어서 있고, 이제 막 변두리의 풍모를 벗고 화가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던 곳이어서 오히려 더 인정이 피어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몽파르나스거리의 라 로통드 카페에서 그림을 그리곤 하던 모딜리아니는 어느날 자신보다 더 가난한 친구를 만났다.
카페를 떠나면서 그는 친구가 앉아 있는 테이블 밑에 지폐 한 장을 슬쩍 떨어뜨리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네 발 밑에 웬 돈이 떨어져 있는 것 같군."
초상화를 그려주면서 생활을 연명했던 모딜리아니는 즈보로프스키 라는 폴란드 출신의 그림 중개업자를 만났다.
그는 하루하루 15프랑씩의 생활비를 보태주었고, 이후 두사람의 관계는 고흐와 동생 테오의 관계처럼 지속된다.
이제 예술과 삶을 은밀하게 연결한다는 이상을 추구하던 모딜리아니는 1913년 갤러리 베르트 바일에서 그의 생전 유일의 개인전을 갖게된다.
32점의 누드작품만 전시된 이 전시회는 외설을 이유로 경찰이 찾아와서 작품을 걷어가는 소동도 벌어졌지만 그의 이름이 비로소 대중에게 알려지는 성공을 거두었다.
비록 작품은 2점 밖에 팔리지 않았지만, 그의 누드화는 이전까지의 다른 화가들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피곤하고 권태로운 모습의 여인들을 보여줌으로써 주목을 끌었다.
고야나 마네의 누드에서 볼 수 있는 알레고리나 이상적인 여성의 미는 없이 부드럽지만 포기한 듯 내던져진 자세를 지닌데다가 몸전체를 그리지 않고 화면의 여백을 많이 남겨둠으로써 더욱 에로틱한 여운을 풍기는 것이다.
이 해에 모딜리아니와 쟌느 에퓨테른느와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이 시작된다.
그러나 1920년 1월 24일 오전 8시 50분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되어 사망한 그를 따라 임신 9개월의 몸으로 투신함으로써 짧은 이승의 삶보다 긴 영원 속에서 모딜리아니와 함께 있기를 택했던 그녀는 살아서는 그의 최상의 이해자였고, 반려였으며 목숨까지도 바친 여인이었다.
지중해의 뜨거운 햇빛과 고향의 어린시절을 그리워했던 그는 파리의 자선 병원에서 3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며 "카라 이탈리아(그리운 이탈리아) " 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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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사랑 *
여학생처럼 청순한 처녀가 몽파르나스의 로톤드(카페 이름)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눈동자도 머리 빛도 밝았던 이 처녀는 모딜리아니 등의 예술가들이 모여앉아 있는 쪽을 조심스럽게 바라보기도 했다.
들리는 말로는 그림 공부를 해보려고 몽파르나스에 온 것이라고들 했다.
얼마 후 이 청순한 처녀인 쟌느 에퓨테른느가 모딜리아니와 서로 팔짱을 끼고 몽파르나스 거리를 지나가는 정경을 사람들은 목격하게 된다.
드디어 모딜리아니도 행복을 잡았구나 하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녀는 모딜리아니의 생의 반려가 되며 앞으로 삼년간 로톤드의 맞은편 그랑 쇼미엘 거리에 셋방을 얻어 같이 살게 된다.
한때나마 안정된 시기가 찾아오며 모딜리아니의 독자적인 표현 양식은 급속도로 만개하게 된다.
모딜리아니는 칸느의 축제에서 쟌느 에퓨테론느를 만났다.
아카데미 콜라로시에서 그림을 배우며 화가가 되기를 꿈꾸고 있던 열아홉살의 쟌느에게는 슬프고 불행한 만남이 시작된 것이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쟌느의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곧바로 동거생활에 들어갔다.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를 가진 쟌느는 밤색머리를 땋아 둥글게 올리고 다니곤 했기 때문에 친구들은 그녀에게 " 느와 드 코코 " (야자열매라는 뜻) 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1918년 11월, 즈보르프스키 부부의 주선으로 니스에 내려가 있던 쟌느는 딸 지오바나(나중에는 어머니의 이름을 그대로 쟌느로 불림) 를 낳았다.
두 사람은 정식으로 결혼신고를 하지 않은 부부 였기에 그들의 딸은 사생아로 신고 되었다.
니스에 머물면서 풍경화를 모색해보기도 했던 모딜리아니는 어느날 르느와르의 초대를 받았다.
당시 니스에 살고 있으면서 이미 거장으로 불리었던 르느와르는 모든 방문을 거절했지만 예외적으로 모딜리아니를 집으로 불러 자신의 그림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몇 점의 그림을 둘러 본 그는 차가운 반응을 보인채 이 나이든 대화가의 면전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재능을 높이 샀던 르느와르는 자신의 그림을 팔아 그를 도와주었다고 한다.
괴팍하고 부도덕한 점이 예술가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특징처럼 되어버리기도 하지만 딸을 얻고 생활의 책임을 걸머지게 된 모딜리아니의 신경은 극도로 날카로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한 번의 시도 만으로 그자리에서 초상화를 그려내곤 했다.
당시에는 부탁을 받고 그리는 초상화는 모델이 자리를 잡는 횟수와 시간에 따라 보수를 받는것이 관례였다.
따라서 여러번에 걸쳐쳐 데생을 하면서 시간을 끌수록 화가는 돈을 더 받기 마련이었지만 모딜리아니는 한 번에 그려버리곤 하는 것이었다.
어느날 그는 야수파의 대가인 마티스의 초상화를 그리고 싶어했다.
아직 모딜리아니를 잘 알지 못했던 마티스는 5분간만 모델을 서주겠다고 했다.
결과를 보고 흡족해진 마티스는 결국 한시간의 시간을 내주었다고 한다.
1918년 폴 기욤은 자신의 화랑에서 마티스와 모딜리아니, 피카소, 블라맹크를 모아 전시했고, 런던 에서도 같은 전시회를 열어 호평을 받을 수 있었다.
1919년 봄, 다시 파리에 올라온 쟌느는 둘째아이를 임신했다.
겨울이 되었어도 난로를 피울수 없어 시린 발에 옷을 감고 지내는 가난에 시달렸던 쟌느는 친정어머니의 집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모딜리아니는 카페나 노천에서 밤을 세우면서 거의 자살에 가까운 생활을 했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평화롭고 안정된 삶을 갖고 싶어 쟌느와 정식으로 결혼하겠다는 서약서를 썼다.
때로는 딸이 보고 싶어서 찾아 가기도 했지만, 그를 못마땅해 하던 쟌느의 어머니는 문도 열어 주지 않았고 그러면 그는 집문 앞 계단에 앉아있다가 말없이 돌아가곤 했다.
즈보로프스키는 런던에서 모딜리아니 전시회를 열어 주었고, 그의 생전 처음으로 초상화 한 점이 1,000프랑이라는 가격에 팔려 나가는 행운도 얻었지만 이미 그의 건강은 한계에 다다랐다.
자신의 종말을 예감이라도 한듯 그는 친구에게 "이젠 머리 속에 아무것도 남아 있는것 같지가 않아. 더이상은 버틸수가 없을 것 같군" 이라고 말했다.
1920년 1월, 모딜리아니는 파리 자선 병원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당시 임신 9개월이었던 쟌느는 이튿날 새벽 친정집 5층에서 뛰어내렸다.
모딜리아니가 병원으로 실려가던 날, 그는 친구에게 "죽어서 다시 만나 영원히 행복한 삶을 살자 " 라는 말을 쟌느에게 전해줄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그 약속을 지킨것일까..
쟌느는 남은 일생을 모딜리아니의 추억속에서 지내야 하는 고통을 감수하기 보다는 빠른 재회의 길을 선택했다.
이태리 사회당의 국회의원에 당선된 형 엠마누엘은 동생의 장례식을 " 왕자처럼 치뤄달라" 는 전보를 보내왔다.
몽파르나스의 엘레강스의 종말이라는 시인 쟝 꼭또의 애도와 함께 모딜리아니의 장례식에는 수많은 파리시민이 모여들어 긴 행렬을 이루었다.
그러나 딸의 시신 조차 집에 들여놓기를 꺼려한 쟌느의 집안에서는 아무런 부고도 없이 쟌느를 파리 변두리에 묻었다.
모딜리아니의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으로 몇년후에야 두 사람은 뻬르 라 쉐르묘지에 함께 묻힐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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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연보 *
1884년 7월 12일
이탈리아의 토스카나 지방에 있는 리오르노에서 출생.
부친 푸라미니오 모딜리아니는 중개상,모친은마르세이유출신.
1895년 (11세)
리오르노 중학교에 입학. 이해, 늑막염을 앓는다.
1898년 (14세)
장 질환에 걸려 폐렴 병발.
그러나 중학 졸업 자격을 취득. 리오르노 미술 학교에 입학
풍경화가 미케리 문하에서 데생과 유화를 배움.
1901년 (17세)
폐결핵에 걸림.
병후 요양을 위해 나폴리, 로마 등지를 여행.
카마이노의 조각에서 깊은 감명을 받음.
1902년 (18세)
5월, 피렌체 미술 학교 나체 자유화과에 입학.
조각가를 꿈꾼다.
1903년 (19세)
3월, 베네치아 미술 학교 입학. 살롱 도똔느 창립.
1906년 (22세)
파리를 방문. 몽마르뜨에 있는 아틀리에 "세탁선" 근처에서 하숙.
세잔 사망.
1907년 (23세)
앙데팡당 협회 회원이 됨. 세잔 회고전을 보고 크게 감동한다.
드레스덴에서 다리파 1회전.
1908년 (24세)
그레망 광장에서 생활. 앙데팡당 전에 유화 5점, 데생 1점 출품.
달리 출생
1909년 (25세)
아틀리에를 새로 마련.
알렉산드르의 소개로 브랑크스를 알게 되어 깊이 사귐.
브랑크스에게서 조각을 배움.
이해, 여름과 가을철을 조각제작에 몰두.
1910년 (26세)
베르넴 쥬누 화랑에서 열린 세잔전을 보고 감동.
앙데팡당전에 유화 6점 출품.
지난해에 이어 조각제작에 전념.
1912년 (28세)
살롱 도똔느에 조각 7점을 출품.
여름철에 고향 리오르노로 귀향. 클레, 마케, 마르끄 등 파리를 방문. 파리에서 미래파전. 레제, 로랑상 개인전.
피카소 브라크 등 꼴레 수법 시도.
베를린에서 "폭풍전" 개최. 아폴리네르, 드로네의 작품을 오리피즘으로 명명. 섹션도르 1회전 개최.
1913년 (29세)
여름을 고향 리오르노에서 지냄.
아폴리네에르 "큐비즘의 화가들" 발간.
말레비치 절대주의를 주창. 아모리 쇼 개최.
보치오니가 주동이 된 미래파 조작전 개최.
라이오느프, "광상주의"선언.
1914년 (30세)
파리로 돌아와 몽파르나스에 있는 카페에 자주 들려 스팅, 키스링그 등과 교류. 영국의 여류시인 베아트리스 헤스팅그스와 연애. 3년동안 동거 생활.
화상 폴 키욤과 알게 됨.
제 1차 세계대전에 브라크, 레제, 드랑 등 참전.
최초의 오브제 "레디 메이드" 발표.
샤갈, 러시아에서 귀국. 마케, 사망.
1916년 (32세)
스포르스키와 알게되어 정기적으로 원조를 받음.
취리히의 카바레 볼테르에서 다다이즘 운동이 시작됨.
보치오니, 마르크, 르동 등 사망.
1917년 (32세)
몽파르나스 화숙의 학생, 쟌느 에뷰테른느와 알게되어 6월부터 그랑드 쇼미에르에 있는 아틀리에에서 동거 생활.
12월, 베르토 웨일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했는데, 나체화 5점이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철거됨.
피카비아, "391"지 창간. 반데스버그, 몽드리앙에 의한 추상 예술 잡지 "데스틸" 지 창간.
드가, 로댕 사망.
베를린에서도 다다이즘 운동. 츠아라, "다다"지 창간.
1919년 (35세)
봄 리비에라에서 파리로 귀환.
그랑드 쇼미엘가 8번지에서 생활. 런던에서의 현대 프랑스 예술 그룹전에 출품.
1920년 (36세)
1월 24일.
파리의 자선병원에서 사망.
25일 장례식거행.
26일 쟌느 에뷰테른느, 남편의 뒤를 따라 투신 자살.
27일 라세즈 묘지에 묻힘.
1922년
파리의 베르넴 쥬느 화랑에서 유작전 개최.
1925년
파리의 비인 화랑에서 모딜리아니 회고전 개최.
1931년
뉴욕의 라 데모트 화랑에서 유작전 개최.
1934년
바젤 미술관에서 유작전 개최.
1951년 뉴욕 근대 미술관에서 유작전 개최
1955년 시카고에서 모딜리아니 데상전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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