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묘지

7. 신숭겸 장군 묘

오늘의 쉼터 2008. 1. 12. 15:56
 

 

 

신숭겸 장군 묘와 관직제도

 

 

개국공신 묘역 좌우로 용맥 꿈틀… 도굴 막으려 봉분이 3개

 ◇강원도 춘천시 서면 방동1리의 신숭겸 장군 묘역.

견훤과의 싸움에서 왕건 대신 전사한 신숭겸 장군의 목을 돌려주지 않자 황금으로 머리를 만들어 용사했는데 한 사람의 묘의 봉분이 세 개인 것은 도굴을 염려한 태조의 배려다.

이번에는 쓴 지 1080년 된 묘를 찾았다.

 

신숭겸(申崇謙) 장군. 평산 신씨 시조로 시호는 장절공(壯節公), 고려 개국 일등공신이다.

서기 927년 대구 팔공산 전투에서 후백제 견훤과 싸우다 태조 왕건 대신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강원도 춘천시 서면 방동1리. 경춘국도를 따라 북으로 가는 길은 눈 들어 보이는 곳마다 절경 아닌 곳이 없다.

그 중에서도 의암호를 끼고 도는 호반 길은 차에서 내려 차라리 걷고 싶은 호젓한 숲으로만 이어진다.

길섶의 코스모스와 올망졸망 피어오른 물안개가 절묘하다.

 

이곳 장절공 묘를 처음 찾았을 때는 깜짝 놀랐다. 한 사람의 묘에 봉분이 세 개다.

내력을 알고 나서도 섬뜩한 마음은 가시지 않고 사람이 사람한테 충성한다는 한계가 어디까지 인지를 여러번

반추하게 되었다.

그의 묘는 강원도 기념물 제26호로 지정되어 있다.

 

장절공이 살던 시기는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난세 중의 난세였다.

후삼국 시대다. 천년 사직의 신라는 망조가 들어 방방곡곡에서 지방 호족들이 군사를 일으켰고 걸핏하면 중앙

정부를 위협했다.

왕실도 기강이 무너져 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면 다른 사람이 그 왕을 또 죽이고 새로 왕위에 오르던 때다.

 

이즈음 걸출한 인물 셋이 있었으니 견훤, 궁예, 왕건이다. 세력이 비슷하여 틈만 나면 싸우는 게 일이었다.

우리 역사에서 유일한 전국시대다.

신숭겸은 홍유, 배현경, 복지겸 등과 궁예의 태봉(후고구려)을 뒤엎어 버리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를 개국

(918년)한 공신이다.

 

태조 왕건과 함께 팔공산 전투에 출정한 신숭겸이 후백제 견훤군에 포위돼 병졸들과 함께 몰사 위기를 맞게

됐다.

왕건을 피신시킨 신장군이 왕건으로 변장하여 싸우다 참패했다.

태조와 용모가 흡사했다고 한다.

견훤은 그의 목을 자르고 몸만 고려에 보냈다.

왕건이 통곡하며 황금으로 머리를 대신 만들어 현 위치에 장사 지냈다.

예나 지금이나 도굴꾼들의 횡포는 다를 바 없었나 보다.

 

 

◇춘천시의 안산 ‘봉의산’. 보는 방향에 따라 노적봉도 되고 가마솥이 되는가 하면, 개화 직전의 연꽃 봉오리로 다가온다. 서면에서는 저 산을 바라보며 100명 가까운 박사가 배출되었다.

왕건은 신숭겸의 황금 두상 멸실을 염려하여 봉분 셋을 조성하도록 명했다.

현재까지도 어느 묘 안에 안장돼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일설에는 부인 묘를 합장했다는 얘기가 전해오나 평산 신씨 문중에서는 중앙의 봉분 앞에서 제향을 모시고 있다.

 

이렇다 보니 입수 내룡맥을 살피거나 좌향을 확인할 때도 중앙 묘를 기준할 수밖에 없다.

비석도 중앙 묘 앞에 있다. 술좌(정서쪽에서 북으로 30도 기운 방향) 진향(정동쪽에서 남으로 30도 기운 방향). 거의 해 뜨는 동쪽이라고 떠올리면 된다. 춘천에서 동해를 바라보는 좌향이다.

평소와 달리 윤갑원 교수의 판정이 조심스럽다.

 

“양 옆을 에워싸고 움푹하게 들어가 장풍득수지로 보았습니다.

잘 살펴봅시다.

이 자리는 주산과 부모산이 동일한데 주산에 용사했어요.

대맥은 좌측 청룡 자락에 있습니다.” 현지에서 간산 길에 동행한 사단법인 정통풍수지리연구학회 박민수(58)

춘천지회장도 “술좌 진향으로 모셨는데 안을 어느 곳으로 봐야 하느냐”고 묻는다.

고개 들어 부모산(혈처 뒤에 용맥을 결인한 산)을 보니 물매(경사)가 급하고 쏜살같다.

쭈빗쭈빗 올곧은 낙락장송 위로 운무가 서려 있다.

 

내룡맥이 부모산에 이르러 1절이나 2절을 꺾어 솟구친 다음 혈처를 주는 게 땅의 이치라고 했다.

일기일복(一起一伏)이라 하여 한 번 주저앉은 다음 힘 있게 불거져야 큰 자리라고 하지 않았던가.

신숭겸은 전남 곡성 태생으로 초명은 능산이었다.

그가 평산 신씨로 된 내력은 이렇다.

왕건과 평주(지금의 황해도 평산) 땅으로 사냥 나갔을 때 하늘에 기러기 세 마리가 맴돌았다.

“누가 저 기러기를 쏘겠는가” 묻자

신숭겸이 자청하여 왕건이 지목한 세 번째 기러기 왼쪽 날개를 맞혀 떨어뜨렸다.

태조가 탄복하며 평산을 관향(貫鄕·성씨의 고향)으로 삼게 했다.

임금이 내려준 사성(賜姓)이다.

그래도 진짜 성씨가 무엇이었는지는 여전히 궁금하다.

 

 

◇장절공 신숭겸 장군 동상. 1970년대 문중의 성역화 사업으로 묘역 전체를 말끔히 단장해 놓았다.

 

묘역 주변을 살피다 보니 당판 좌우로 흙을 북돋아 아름답게 단장해 놓았다.

얼핏 보아도 눈에 띈다.

윤 교수에게 물었다.

 

“사람이 만들어 백년이 되면(人作百年·인작백년) 원래 하늘이 만든 것과 같다(天作如同·천작여동)는데 생기도

발산되는 것입니까.”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내젓는다.

“후손으로서야 묘역을 가꾸고 단장하는 건 마땅한 도리지요.

그러나 복토무기(複土無氣)라 하여 사람이 인위적으로 조영한 곳에는 기가 머무를 수 없습니다.

큰비가 내려도 부토(浮土·새로 쌓은 흙)는 씻겨 나가는데 용맥은 더욱 선명히 드러날 뿐 끊어지거나 잘려 나가질 않아요.

용맥은 물길을 가로막질 않습니다.

물이 막아서면 오히려 산진수회(山盡水廻)하고 환포장풍(環抱藏風)되어 자리가 형성되는 것이지요.”

 

나라마다 묘제와 풍습이 다르겠지만 중국에서는 오히려 묘를 가꾸지 않고 방치해 둔다.

수년 전 중국 산둥성의 맹자 묘를 방문했을 때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봉분 정상에 아름드리 고목이 수십그루 자라고 있었다.

우리 관념으로는 불효막심하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태조는 신숭겸 장군을 죽도록 잊지 못했다.

장절공이란 시호를 내린 후 연회 때마다 그의 허상을 만들어 놓고 술잔을 권하기도 했다.

 

간산 길에서 비석이나 신도비를 살펴보며 얼버무리고 대충 넘겨 버리는 게 있다. 관직명이다.

‘시호’는 무엇이며 ‘보국숭록대부’와 ‘숭록대부’는 무엇이 다른가.

한 묘역 내에도 ‘정경부인’ ‘정부인’ ‘숙부인’이 있는데 어찌 구분해야 하는지-.

옛날 관직제도를 알아 무엇하랴 싶지만 벼슬에 따라 술잔 올리는 헌작례(獻酌禮)가 달라지기도 한다.

최근에는 민속씨름대회서 1품, 2품의 장사 칭호를 쓰고 있어 그리 낯설지도 않다.

관직 품계는 근세 왕조인 조선조의 제도가 도움될 것 같아 3품까지만 기술한다.

 

 

◇신숭겸 장군 묘역 입구에서 지팡이를 들고 사신사와 국세를 설명하는 윤갑원 교수. 그 왼쪽이 정통풍수지리연구학회 박민수 춘천지회장이다. 뒤로 보이는 묘역에 복토한 흔적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묘 뒤에 운무가 서려 있다.

 

조선조는 1품에서 9품까지의 관직 등급을 두었고 각 품에서는 정(正)과 종(從)으로 다시 구별했다.

요즘의 공무원, 군대조직, 대학, 경찰, 정부투자기관에 모두 적용된다.

공무원 직급이 1급에서 9급까지 있는 것도 유사성이 많다.

 

현재의 대통령, 국회의장, 대법원장은 무계급이며 왕조 시대의 대군, 군, 왕비, 공주, 옹주가 해당된다.

▲정1품은 삼정승인 영의정(대광보국숭록대부·부인은 부부인), 좌·우의정(보국숭록대부·정경부인)으로

  현 국무총리. 종1품은 좌찬성(숭록대부·정경부인)과 우찬성(숭정대부·정경부인)으로 부총리.

▲정2품은 판서(정헌대부·정부인), 좌참찬(자헌대부·정부인) 우참찬(자헌대부·정부인)으로 현재의 장·차관,

  도지사, 대장, 대법원 판사, 경찰본부장, 교육감이 해당된다. 종2품은 참판(가의대부·정부인)

  관찰사(가선대부·정부인)로 차관보, 대학총장, 중장, 법원장, 검사장.

▲정3품은 당상관(참의, 통정대부·숙부인)과 당하관(목사, 도호부사, 통훈대부·부인)으로 구분했으며

  서반(무관)은 절충장군(숙부인)이 해당됐다. 정부기관의 1급으로 관리관, 주임교수, 소장도 같은 급이다.

종3품은 집의(중직대부·숙인)와 사관(중신대부·〃), 서반의 건공장군(〃) 보공장군(〃)이 같았다.

   현재의 정부기관 2급으로 이사관, 국장, 교수, 준장, 경찰치안정감, 정부투자기관 이사가 동급이다.

 

오늘날의 직제 개편에 따라 약간 다를 수도 있겠으나 조상들의 관직 품계를 현재와 견줘 보는 것도

보학(譜學·족보학) 공부에 도움 될 듯싶다.

나라에 공적이 있어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것이 시호(諡號)였고 존호(尊號)는 조정에서 임금에게

올리는 것이었다.

휘호(徽號)는 조정에서 왕비에게 올리는 절차였으며, 묘호(廟號)는 임금이 승하한 후 치세와 업적을

담아 봉정하는 칭호였다.

 

이순신 장군의 충무공은 시호요, 숙종은 묘호다.

 

◇2001년 10월 중국 산둥성 맹자묘를 방문한 필자. 봉분 정상에 수십그루의 아름드리 수목이 자라고 있었다. 우리 예법으로는 용납 안 될 일이다(왼쪽), 가운데 묘 앞의 비석. 신숭겸은 평산 신씨 시조로 장절공이란 시호를 받았다. 어느 봉분이 옳은 것인지 몰라 중앙의 묘에서 제향을 올린다. 안타까운 일이다.

 

장절공 묘 좌측 청룡맥은 힘 있고 우렁차다.

우람한 기복을 거듭하며 길게 뻗어 내려간다.

그곳의 풍양 조씨 묘 당판에서부터는 용맥이 엎치락뒤치락하며 좌우로 꿈틀댄다.

윤교수가 “이런 내룡이 큰 자리를 내줄 번신(몸을 틀어 바꿈)이니 끝까지 가보자”며 잰걸음으로 앞선다.

아니나 다를까, 기어코 자리를 찾아냈다.

 

숙인(정3품) 청주 한씨 묘 바로 위에 거대한 원훈이 형성돼 있다.

결인목이 확실하고 큰 바위가 바로 앞에서 기가 멈추도록 버티고 있다.

건해(乾亥) 내룡에 술건(서북쪽) 용 입수로 술좌진향이다.

주변 국세를 살피니 안산이 곱고 수려하며 산진수회하여 제대로 갖췄다.

더구나 술건(戌乾) 용이면 천룡(賤龍)으로 큰 인물이 난다는 자리가 아닌가.

 

탐색봉으로 토질을 살피니 폐묘 자리다.

인좌(동쪽에서 우측으로 30도) 신향(서쪽에서 우로 30도)이다.

이 국세에는 가당치도 않은 좌향이다.

풍수에 관심 있는 후학이라면 나경만 들고 따라나서도 곧바로 찾아낼 뜻밖의 큰 자리다.

 

원래 춘천에는 명당도 많고 인물도 많다.

서면에서만 100명에 가까운 박사가 배출돼 ‘박사마을’이란 칭호까지 얻게 되었다.

춘천의 안산이 되는 ‘봉의산’을 시민 모두가 아끼고 섬긴다.

그 안산도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니 묘터도, 집터도 제대로 택하고 볼 일이다.

천하명당도 후손이 돌보지 않으면 폐묘가 되고 만다.

천년이 넘은 묘를 조상의 성지로 가꿔놓은 문중의 노고가 돋보인다.

원래 “문중 돈 임자 없고 문중 돈 떼먹고 잘된놈 없다 했는데 평산 신씨 문중의 단합된 힘이 부럽다.

 

인간에게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쳤을 적 제 목숨 아깝지 않은 자 어디 있을까.

죽는 줄 뻔히 알면서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일, 그대는 할 수 있겠는가.

 

 

출처 : 한국의 능원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