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전남문화재자료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89호 고흥 김붕만 선무원종공신녹권과 신위단비

오늘의 쉼터 2018. 11. 29. 01:04



종 목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89

명 칭

고흥 김붕만 선무원종공신녹권과 신위단비

(高興 金鵬萬 宣武原從功臣錄券과 神位壇碑)

분 류

기록유산 / 전적류 / 전적류 / 전적류

수량/면적

전적 1책/(35.5cm×22.5cm), 단비 1기(높이 215cm, 너비 68cm)

지정(등록)일

2018.08.23

소 재 지

전라남도 고흥군 두원면 예회리 108-1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경주김씨 두계공파 장흥종중

관리자(관리단체)

경주김씨 두계공파 장흥종중

상 세 문 의

전남 고흥군 문화관광과 061-830-5225, 5244

 일반설명

 

고흥 김붕만 선무원종공신녹권과 신위단비는 김붕만은 조선시대 임진정유왜란기에 활약한 무관으로 1605년에 발급받은 공신녹권인 선무원종공신녹권은 충절역사인물들과 관련된다는 점, 17세기 초반에 간행된 목판본이라는 점에서 재평가 할 필요가 있음.


신위단비는 1914년에 건립한 석비로 비문을 통하여 김붕만의 행적과 후대의 추숭(追崇)에 대한 내용도 알 수 있음. 선무원종공신녹권이 국가차원의 선현 추숭이라면, 신위단비는 향토와 지역 문중 차원의 추숭 활동을 알 수 있는 기록유산으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있음.


선무원종공신녹권(宣武原從功臣錄券) 사급(賜給) 경위와 공훈 등급별 예우

[국역문] - 사급(賜給) 경위

선무원종공신녹권

판관 김붕만

1605년(선조 38, 만력 33) 4월 16일 행도승지 신흠이 경건하게 받들어 임금의 뜻을 전한다. 국가가 어려움이 많아 안정되지 못하자 그대들이 이미 중흥시키는 일에 힘을 썼으니, 공훈이 작은 것일지라도 갚지 아니할 수 없기에 내가 이에 원종(原從)에 추은(推恩)하여, 새로운 의전(儀典)을 크게 거행하여 옛날 전장(典章)을 따르는 것이다. 생각하건대 남쪽 왜적이 날뛰어 서쪽 지방으로 파천(播遷)하였고 마구 날뛰는 시호(豺虎) 때문에 참혹하게 종사가 몽진(蒙塵)하였으며 산 넘고 물 건너는 고달픈 여로에 군신(君臣)이 이슬 맞던 일을 차마 말하겠는가. 하늘이 이 나라를 중흥시키고자 부모(父母)같은 중국이 우리를 구제해 주었고, 사람들이 그래도 고국을 떠받들어 대소 신료들이 노고를 잊어버려, 다행히도 난리를 평정하고 환궁하여 마침내 공훈을 책봉하고 종정(鍾鼎)에 새기었다.

 

그대들 경대부 및 사서인(士庶人)이 혹은 우리 무열(武烈)을 선양하기도 하고 혹은 우리 군수품(軍需品)을 돕기도 하였으며, 몽둥이를 들고 치달려 목숨을 바친 선비도 있었고 무기를 들고 싸워 헌괵(獻馘)한 무리도 있었기에 여기에 모두 기록하여 길이 후세에 전하는 것이다. 경중에 따라 일시의 공로를 구분하였으니 그대의 자손들은 만세토록 안락을 누릴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교시(敎示)하니 잘 알기 바란다.

(중략)

[국역문] - 공훈 등급별 예우

1605년(선조 38) 4월 16일, 행도승지 신 신흠이 경건하게 임금의 뜻을 받들어 전한다. 선무원종공신 1등은 각자 품계를 한 등급씩 높여주고, 그의 자손들은 조상의 음덕을 이어받아 후세에 전하도록 하고 부모에게는 봉작을 주라. 2등은 각자 품계를 한 등급씩 높여주고, 자손에게는 음덕을 이어받게 하여 후세의 자손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면 직무가 없는 벼슬(散官)을 하나 주고, 만일 그중에서 자손이 없는 자에게는 형제나 사위 및 조카 중에서 원하는 사람에게 직무가 없는 벼슬 하나를 주라. 3등은 각자 품계를 한 등급씩 높여주고, 자손들에게는 선조의 음덕을 이어서 후세에 전하게 하라. 각 등급의 통훈대부이상에게는 그의 자손, 형제, 생질, 사위 가운데 한사람에게 그가 원하면 직무가 없는 벼슬(散官)을 하나 주고, 고인(故人)에게는 각각 본 법에 의하여 시행토록 하며 품계를 한자리씩 추증하도록 하라. 지은 죄가 사하여졌거나 벼슬을 하지 않고 있는 사람(散人)은 본 법으로 다시 임용(敍用)토록 하며, 영원히 재 등용할 수 없는 사람은 벼슬길(仕路)에 나아가도록 허락해 주라. 직첩(벼슬 임명장)을 회수당한 사람은 다시 반환해 줄 것이며, 첩의 자식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구제해 주고, 공사(公私)를 막론하고 종(賤口)으로 부리고 있는 사람은 다만 종의 신분을 면제해주게 하라. 역당에 관련이 있었거나 역적으로 인하여 공개적으로 죄를 지은 사람은 벼슬자리 하나를 마련하여 서서히 쓰도록 하게하고 이조로 하여금 시행토록 하라.

 

[원문] - 사급경위

   宣武原從功臣錄券

      判官金鵬萬

   萬曆三十三年四月十六日 行都承旨 臣申欽 敬奉

傳旨 國多難而靡定 爾既宣力於中興 功無微而不酬

  予乃推恩於原從 誕擧新典 式遵舊章 言念南寇之

   陸梁 致有西土之播 越縱橫豺虎 慘見

宗社之蒙塵 跋涉山川 忍說君臣之中露天 欲興唐而

  父母拯己 人猶戴晋 而大小忘勞身 幸戡亂 而回鑾 遂策

   勳 而銘鼎 惟爾卿士大夫曁士庶人 或揚我武烈 或

   助我軍需 執殳驅馳 或有捐軀之士提兵戰伐 或有

   獻馘之徒 悉錄於兹未傳於後 惟輕惟重分 一時之

   功勞 爾子爾孫享萬世之安樂 故玆敎示想宜知悉

  (중략)

[원문] - 공훈 등급별 예우

   萬曆三十三年四月十六日 行都承旨 臣申欽 敬奉

  傳旨 宣武原從功臣一等乙良 各加一資 子孫承蔭宥

   及後世 父母封爵 二等乙良 各加一資 子孫承蔭宥

   及後世子孫中 從自願加散官一資 其中無子孫者

   兄弟壻姪中 從自願加散官一資 三等乙良 各加一

   資 子孫承蔭宥及後世爲乎矣 各等通訓以上乙良

   子孫兄弟甥姪女婿中一人 從自願加散官一資 物

   故人乙良 各依本等施行爲旀 各追贈一資爲齊 犯

   罪作散人乙良 並於本品叙用爲齊 永不叙用人乙

   良 許通仕路爲齊 職牒收取人乙良 幷只還給爲齊

   妾子乙良 限品安徐爲齊 公私賤口乙良 並只免賤

   爲齊 係干逆黨及因逆賊公事間事被罪者乙良 官

   爵一款 擧行安徐爲只爲下 吏曺爲良如敎


 

* 신위단비

[국역문]

충의교위행제주판관김공 배숙부인여산송씨 신위단비

 

공(公)의 휘(諱)는 붕만(鵬萬)이고 자(字)는 봉서(鳳瑞)이며 김씨계출(金氏系出)은 김해(金海)로 흥무왕(興武王) 유신(庾信)의 후손이며, 문간공(文簡公) 저(著)의 아들 박사(博士) 경문(慶門)이 경술(經術)로 이름을 드날렸다. 이로부터 잠영(簪纓)이 대대로 이어져 내려왔다. 호조참판(戶曹叅判)을 지낸 영진(永珍)과 참봉(叅奉) 세걸(世傑)과 판중추(判中樞)를 지낸 황(璜)은 공의 증조(曾祖), 조(祖) 부[禰]이다. 비(妣)는 고령신씨(高靈申氏) 현감(縣監)을 지낸 치례(致禮)의 따님이다.

 

공은 기우(氣宇)가 헌활(軒豁)하고 기국(器局)이 굉원(宏遠)하였으며 『사기(史記)』를 읽다가 충신입절(忠臣立節) 부분에 이르면 일찍이 격절(擊節)하며 흥탄(興歎)하지 않음이 없었다. 갑오(甲午, 1594)에 무과(武科)에 오르고 정유왜변(丁酉倭變)때 제주판관(濟州判官)으로서 이충무공(李忠武公) 순신(舜臣) 막하(幕下)로 내달려가 수차례 전쟁에 참여해 큰 공을 세웠지만 한산도에 이르러 날아온 탄환을 맞아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충무공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가 김모(金某)를 잃고 나니 군루(軍壘)가 텅 빈 것 같다.”고 하였으며 선무원종훈(錄宣武原從勳)에 녹선되었다. 배(配)는 숙부인(淑夫人) 여산송씨(礪山宋氏)이다. 두 아들(二男)은 응추(應秋), 사과(司果) 운추(運秋)이다. 손자는 방남(房男), 훈련판관(訓練判官) 두남(斗南), 종사랑(從仕郞) 익남(益南), 가선(嘉善) 여남(汝南)이다. 증손(曾孫)은 성발(聲發), 경발(慶發)로 모두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공이 순절(殉節)한 사실은 『충무공일기(忠武公日記)』에 나타나 있으나 그 생몰(生歿) 연월(年月)과 행치(行治)한 이력(履歷)은 모두 증거할 만한 것이 없다. 『가승보(家乘譜)』에 이르기를 ‘묘(墓)는 선롱(先壟) 아래에 있다.’고 되어 있으니 그 선롱은 지금의 흥양(興陽) 두원면(豆原面) 사가리(四街里)에 있다. 그러나 공의 묘(墓)가 실전(失傳)된 것을 자손들은 오래도록 통한(痛恨)으로 여겨왔다. 그 후손 정립(正立), 대현(大賢), 필기(必基) 등이 비로소 옛날 말에 ‘조(祧)는 단(壇)의 예제가 된다.’는 것에 근거해 선롱 아래에다 단을 설치하고 해마다 제사를 올렸다. 그 족손 진하(鎭廈), 진화(鎭華)가 나를 찾아와 비문을 지어 달라 청하기에 나는 실로 공의 충의(忠義)에 감복한 터라 마침내 사양하지 못하고 힘차게 글쓰기를 이처럼 하였으니 백세 후에는 오히려 공이 진정한 충신이었음을 믿게 할 수 있게 되었다.

 

  1913년(소양적분약, 昭陽赤奮若, 계축) 태(泰, 정월)월 하한(下澣)에 덕은(德殷) 송병화(宋炳華)는 서술하고 성균진사(成均進士) 송병길(宋炳吉)은 쓰다.

  1914년(갑진) 10월 종손 11대손 응기, 우기, 천기 12대손 진노, 진두 세우다.

 

[원문]

忠毅校尉行濟州判官金公 配淑夫人礪山宋氏 神位壇碑

公 諱鵬萬 字鳳瑞 金氏系出金海 興武王庚信之后 而至文簡公著之子

博士慶門 以經術顯 自是世襲簪纓 戶曹叅判永珍 叅奉世傑 判中樞璜

曾祖祖禰 而妣高靈申氏 縣監致禮之女也 公氣宇軒豁 器局宏遠 讀史

至忠臣立節處 未嘗不擊節興歎 甲午 登武科 丁酉倭變 以濟州判官 馳

赴李忠武公舜臣幕下 累戰立功 至閒山中流丸 而卒 忠武公歎曰 吾失

金某軍塁如空 錄宣武原從勳 配淑夫人礪山宋氏 二男應秋 運秋 司果

次房男斗南訓鋉判官 益南從事郎 汝南嘉善 曾孫聲發慶發 皆通德郞

公之殉節事實 見於忠武公日記 而其生殁年月 行治屨歷幷無可徵 而

其家乘云 墓在先壠下 其先壠 今在興陽之豆原面四街里 而公之墓則

失傳焉久爲 子孫痛恨 其後孫正立大賢必基等 始據古去祧爲壇之禮

就先壠下 設壇而歲一祭之 遣其族孫鎮厦鎮華謁碑文於余 余固服公

之忠義者也 有靡忍牢辭 力疾書之如此 百世之下 尙有以考信知公之

爲忠臣也

昭陽赤奮若 泰之 下澣 德殷 宋炳華述 成均進士 宋炳吉書

甲寅十月 日 宗孫 十一代孫 應基 佑基 千基

十二代孫 鎭魯 鎭斗




선무원종공신녹권

선무원종공신녹권

선무원종공신녹권

선무원종공신녹권

선무원종공신녹권

신위단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