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우기는 장영실 아닌 문종이 발명했다
내일 세종대왕 탄신 613돌 기념 세미나
측우기(測雨器)가 조선 세종대에 발명돼 강우량 측정이 이뤄졌다는 사실은 우리나라 국민 대부분이 알고 있다.
그러나 측우기의 발명자가 장영실이 아니라 세종의 장남인 문종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조선왕조실록 세종23년 4월 을미(양력 1441년 5월 28일) 기록을 보면 "근년 이래로 세자가 가뭄을 근심하여 비가 올 때마다 비온 뒤에 땅을 파서 젖어 들어간 깊이를 재었으나 정확하게 푼수를 알 수 없었으므로 구리로 만든 원통형 기구를 궁중에 설치하고, 여기에 고인 빗물의 푼수를 조사했다"고 돼 있다.
4개월 뒤에는 호조(戶曺)가 구리 측우기의 규격을 정하고 현(縣) 단위까지 구체적 측정장소를 지정하는 방안을 내놓았고, 이를 세종이 그대로 받아들여 세계 최초로 전국적 강우량 관측망이 구성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종 혹은 장영실이 측우기를 발명했다고 알고 있으나 이런 속설을 뒷받침하는 당대 문헌 기록은 없다.
제작 과정에 장영실 등이 관여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으나 150여년 뒤 만들어진 아산 장씨 족보를 제외하면 이를 입증할만한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측우기를 이용한 전국적 강우량 관측망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무너졌다가 영조대인 1770년에 서울과 8도 관찰사영과 유수부 등에 재건됐다. 관측 기록 상당수는 임진왜란과 조선 말기의 혼란으로 소실됐지만 1770년 이후 서울의 강우량 기록은 거의 완벽히 남아 있어 기후 장기변동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쓰인다.
측우기 관측 기록을 근거로 기후 변동을 추적해 주기성이나 태양 흑점 등 천문 현상과의 연관을 찾으려고 시도하는 연구도 종종 나오며, 이를 근거로 2030년대에 우리나라에 가뭄이 올 개연성을 거론하는 학자도 있다.
기상청은 14일 서울 홍릉 세종대왕기념관에서 '세종대왕 탄신 613돌 기념 측우기와 측우대 세미나'를 열어 이런 연구들을 소개한다. 이번 세미나에서는 측우기와 받침대인 측우대, 그리고 이를 이용한 조선시대의 강우량 측정에 관한 발표도 함께 이뤄진다.
기상청 관계자는 13일 "이번 세미나는 우리 선조들이 이룩해 놓은 기상 역사를 돌이켜 보고 보존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측우기, 中이 원조라는 주장은 낭설"
中 학자 1954년 제기 후 일부 해외서 의심 없이 인용
"1849년까지 중국 측우기록 전무"… 세종실록엔 생생
15일은 세종대왕 탄신 613돌이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대왕의 수많은 업적 중엔 농업기상(氣象)의 새 지평을 연 측우기가 있다. 측우기는 장영실이 발명했고, 세계 최초라는 게 우리네 상식.
그러나 측우기를 둘러싼 오해와 알려지지 않은 사실도 존재한다. 특히 중국은 고구려 역사를 왜곡하는 동북공정 (東北工程)도 모자라 "측우기는 중국의 발명품"이라고 주장한단다. 국립기상연구소가 14일 세종대왕 탄신을 기념해 측우기를 바로 알리는 세미나(측우기와 측우대)를 연다. 우리가 모르는 측우기의 비밀을 살펴보자.
측우기를 중국이 발명했다고?
중국이 측우기를 발명했다는 황당한 주장은 중국 기상연구소 소장을 지낸 주커전(竺可楨)이 1954년 "중국에서는 풍향 및 우량 관측이 한나라 시대부터 행해졌고, 명나라 때인 1424년 우량계가 널리 국내에 설치됐다"고 이설(異說)을 제기하면서 비롯됐다. 1424년이면 우리나라 측우기 보급시점(1442년)보다 18년이 앞선다.
그 뒤 일부 해외학자들은 이를 의심 없이 인용했다. 조지프 니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수가 대표적이다. 그는 저서 < 중국의 과학과 문명 > 기상학편에 "한국에 측우기 사료가 보존돼 있지만 발명은 중국이 먼저"라고 적어 오해를 키웠다.
주커전은 주장의 근거로 1247년의 중국 수학책에 원뿔이나 항아리모양의 그릇에 모아진 빗물의 깊이를 바탕으로 강우량을 추측하는 산수문제(천지측우ㆍ天池測雨)가 있다는 점을 꼽았다.
국내 전문가들은 이를 조목조목 반박한다. 우선 실제 빗물을 측정하는 도구를 만들었다면 원통형이어야 하는데 문제의 그릇은 곡물이나 물을 담아두는 원뿔이나 항아리모양이다. 그러므로 천지측우는 빗물 추측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이론상의 산수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또 청나라의 강우기록을 담은 고문헌 < 청대각지 청우일록 > 엔 1700년대까지도 중국에 측우기가 없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대목이 나온다고 지적한다. 180년간 베이징을 비롯한 전국 4곳의 강수 여부는 기록돼 있으되 정작 강우량 기록은 한 줄도 없다는 것이 그 증거다.
이날 세미나에서 전문가들은 이 같은 내용을 담은 김성삼(97년 작고) 전 서울대 대기과학과 교수의 88년 논문을 소개해, '측우기는 중국이 원조'라는 괴설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국제사회의 관심을 호소할 예정이다.
전영신 국립기상연구소 황사연구과장은 "1849년까지도 중국에는 측우기를 발명했다거나, 빗물의 양을 관측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며 "우리는 세종23년(1441년)에 이미 측우기 제작과정을 상세히 기록한 생생한 역사 자료가 있고, 우리 측우기야말로 처음부터 우량 측정을 목적으로 발명한 근대적 측정도구"라고 강조했다. 그는 "많은 외국학자가 잘못된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이를 바로잡기 위한 한국 스스로의 노력이 그간 너무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측우기는 누가 발명했을까?
세종대왕 외에 측우기 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단연 장영실이다. 관노 출신의 과학자로 우량계인 측우기와 수표, 물시계인 보루각과 자격루 등을 발명한 인물로 위인전기와 백과사전 등에 소개돼 있다.
그러나 한상복 한수당자연환경연구원 원장은 "측우기는 사실 세종의 장남인 문종이 발명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세종실록 23년 4월 을미(양력 1441년 5월28일) 기록을 보면 '근년 이래로 세자가 가뭄을 근심하여 비가 올 때마다 비 온 뒤에 땅을 파서 젖어 들어간 깊이를 재었으나 정확하게 푼수를 알 수 없었으므로 구리로 만든 원통형 기구를 궁중에 설치하고, 여기에 고인 빗물의 푼수를 조사했다'는 구절이 나온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 원장은 "문종이 세자시절에 우량계를 발명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며 "대부분 사람들의 믿음처럼 장영실이 측우기를 발명했다는 문헌 기록은 없다"고 말했다. 측우기가 발명되고 150년 뒤 제작된 아산 장씨 족보 외에는 장영실이 측우기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나와 있지 않다고 한다.
*********************************************<한국일보/김혜영기자 201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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