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경기기념물

경기도 기념물 제224호 화성 화량진성

오늘의 쉼터 2017. 10. 20. 18:46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224호 

명 칭화성 화량진성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지

수량/면적121,348㎡
지정(등록)일

2016.05.30

소 재 지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지화리 산 90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관리자(관리단체)

화성시

상 세 문 의

경기도 화성시 문화홍보과 031-369-2644

 
일반설명
 

남양반도의 지형은 굽이마다 곶이다. 땅의 생김새가 입을 내밀듯 바닷가로 삐죽이 뻗어 있기 때문이다. 화성시 송산면 지화리와 건너편 전곡리까지 300m 거리는 해안과 맞닿아있다. 입구는 좁지만 내륙으로 들어서면 칠곡리, 중송리까지 포함해 3km가 호리병처럼 드넓다. 현재는 농토가 됐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바다와 연결됐던 곳이다. 이곳으로 수많은 배가 드나들던 포구어귀를 한눈에 감시하던 와룡산(100m)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산성이 하나 있다. 황해에서 불어오는 풍우를 맞으며 성벽 위를 넘나들었을 옛사람들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서려있는 화량진성이다.
산성 뿌리까지 바닷물이 출렁거렸고, 뱃길이 트이자 포구에는 아득한 옛날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중국 대륙문화가 한반도로 들어오는 뱃길 중 가장 빠른 곳이었다.
이 지역을 차지하려는 삼국들의 쟁탈전도 치열했다. 백제가 터를 닦고, 고구려가 왔다갔다. 신라는 국운을 걸고 이곳에 깃발을 세웠다. 영토사수의 결의를 다짐하며 진흥왕(564년)은 이곳에 수군기지 화량진을 설치하고. 당나라와 동맹협상을 추진하면서 삼국통일의 발판을 마련했다.
원효대사와 의상대사는 당나라로 유학을 떠날 때 당항성에 이르러 한 무덤에서 잠을 자게 되는데, 잠결에 목이 말라 마신 물이, 아침에 보니 해골에 괸 물이었음을 알고 사물 자체에는 정(淨)도 부정(不淨)도 없고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음을 크게 깨닫고 그냥 돌아왔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화량은 서해안 신라 최대의 항구였다. 
왕건도 후삼국을 통일할 때 이 지역을 가장먼저 차지한 후, 나주 무안을 점령했다. 조선 태종은 1413년 남양도호부를 설치할 정도로 행정과 군사적으로 중요시했다. 산성 앞은 탄도가 앞을 막고, 대부도와 제부도 사이는 마산수로가 형성돼 있어 육지로 들어오는 왜구를 막는 군사요충지였다. 이런 지형지물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곳에 쌓은 것이 화량진성이다
천수백년에 걸쳐 화려한 영화를 누렸던 화성일대는 크고 작은 성터 20여개소를 쌓을 만큼 우리역사에서 늘 긴장을 풀 수 없었던 지역이다. 선조 8년(1575)에는 수군절도사가 영종포와 초지량, 제물량을 관할 할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 하지만 청나라의 침략이 두려웠던 인조는 1629년 도성방어를 위해 강화도 교동으로 수군절도사를 옮기면서 화량진성은 수군기지로서 막을 내렸고, 산성기능만 유지하다가 폐성되고 말았다.
화량진성은 와룡산 정상에서 남쪽 산줄기를 타고 내려온 산등성이에 있다. 서신당성에 비해 유명하지 않지만 화성시 관할의 석축 산성으로서는 유일하다.




화성 화량진성 원경

화성 화량진성

화성 화량진성

화성 화량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