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하늘의 道]

제13장 화광동진(和光同塵) 3

오늘의 쉼터 2016. 8. 6. 15:25

제13장 화광동진(和光同塵) 3



알성시에 급제한 조광조의 첫 관직은 성균관 전적(典籍)이었다.
 
  전적이란 정 6품 관직으로 성균관의 수장인 대사성을 보좌하고 유생들을 지도하는 벼슬이었다.

안당에게 천거 받은 조지서의 사지(司紙) 보다는 명예가 더 큰 자리였다.

성균관의 유생들로부터 존경과 신망을 얻을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었다.

  조광조는 전적의 벼슬을 받고서는 바로 용인 고향집으로 내려갔다.

부모의 산소를 찾아가 성묘도 할 겸 만삭인 아내 한산 이씨의 건강도 보살펴 주기 위해서였다.

아내가 아이를 갖게 된 것은 실로 16년 만의 일이었다.

공부를 하느라고 늦어진 것만은 아니었다.

합방을 해도 아내의 몸에서 수태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조광조는 내심 기뻐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돌아가신 부모에게 죄송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과천을 벗어나자 온 들녘이 황금빛이었다.

풍년도 아니고 흉년도 아니었으나 고개 숙인 벼이삭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넉넉해졌다.

조광조는 말고삐를 잡은 말구종더러 쉬엄쉬엄 가자고 했다.

  "하늘이 임금님을 돕는구나.

임금님의 은총 같은 햇살이 따사로우니 알곡이 여물고 있는 것이야."

  "맞습니다요. 높은 하늘을 보니 가을비는 없을 듯싶사옵니다."

  "저 맑은 하늘에 어찌 먹구름장이 몰려오겠느냐.

가을비가 저 하늘 밖으로 물러갔으니 올해는 그런대로 풍년이다."

  조광조는 자신이 한 말을 곱씹으며 미소를 지었다.

'맑은 하늘'이란 한층 기강이 바로 선 조정을, '먹구름장'은 조정의 법도를 흐리게 한 간신들을,

그리고 '따사로운 햇살'은 중종의 은총을 떠올리며 말했던 것이다.

  말이 돌부리에 걸려 휘청거리는 바람에 말 등에 올려졌던 보따리가 굴러 떨어졌다.

보따리는 데굴데굴 논둑 아래 풀밭으로 굴렀다.

조광조는 말에서 내려 구르는 보따리를 쫓아갔다.

  "나으리, 쇤네가 주어오겠습니다요."

  "아니다. 내가 가져 올 것이다."

  "무엇이온데 애지중지합니까요."

  "약이다. 약은 정성이라고 하지 않더냐."

  "아, 알겠습니다요."

  말구종이 보따리를 든 조광조를 보고 히죽 웃었다.

  "마님 보약이구먼요."

  "남자로서 자격이 모자란 사람이 바로 나다.

공부한답시고 늘 집을 떠나 있었으니 아내에게 미안하고 면목이 없구나."

  "그래서 보약을 지어 가시는구먼요."

  "그건 아니다. 어찌 이런 걸로 미안함이 지워지겠느냐.

다만 고마움을 잊지 않으려 할 뿐이다."

  "쇤네도 장가 들고 싶습니다요."

  "네 안사람을 외롭지 않게 해줄 자신이 있느냐."

  "쇤네야 공부하는 선비도 아니고 안사람을 위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요."

  "그렇다면 시간을 내어 짝을 찾아보자구나."

  "쇤네는 나으리만 믿겠습니다요."

  조광조는 석양이 기울 무렵에야 용인에 도착했다.

지붕을 덮은 볏짚이 썩어 초당은 흉가처럼 보였다.

만삭의 아내와 여종이 하나 집을 지키고 있지만 사내가 없는 집은

음양의 조화가 사라져 훈기가 돌지 않는 법이었다.

 여종이 조광조가 온 것을 보고는 반가워 날뛰었다.

  "마님, 나으리께서 오셨습니다요. 어서 나오셔요."

  "잘 있었느냐."

  말구종이 풋풋한 여종을 보더니 공연히 얼굴을 붉혔다.

  "어서 말을 매어 놓아라."

  조광조는 아내 이씨가 나오기 전에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어둑한 방에 드러누워 있던 이씨가 한 팔을 짚고 일어나려고 했다.

  "부인, 그대로 누워 있구려."

  "급제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곧 태어날 아기에게 큰 선물이옵니다."

  "아기보다도 내 벼슬이 당신에게 위로가 된다면 더 바랄 게 없겠소."

  "돌아가신 아버님, 어머님께서 아신다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어서 산소로 가시어 아버님께 알리십시오."

  "아버님, 어머님은 내일 아침 일찍 산소로 올라가 뵐 것이오."

  조광조는 여종을 시키지 않고 자신이 직접 약탕기를 가져와 한약을 넣고

화덕의 나뭇가지에 불을 붙였다.

이씨가 문을 열고 보더니 기겁을 했다.

  "삼월이는 뭐하고 있는 것이냐."

  "마님, 용서해주셔요.

나으리께서 직접 약을 달이신다고 저를 자꾸만 물리치십니다요."

  "그것이 네 할 일이라는 것을 몰랐단 말이냐."

  "아니옵니다. 나으리께서 약탕기를 쇤네에게 주지 않습니다요."

  여종이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부인, 걱정 마시오.

산전에 먹는 이 약을 잘못 달이면 독약이 된다고 하오.

그래서 내가 달이고 있는 것이니 삼월이를 탓하지 마시오.

산후에 달여 먹는 약은 삼월이에게 맡기겠으니 그리 아시구려."

  그제야 이씨가 문을 닫았고, 여종은 약탕기 밑의 불이 꺼지려 하자 부채질을 해댔다.

그날 밤 조광조는 참으로 오랜 만에 이씨 옆에 누워 밤을 보냈다.

조광조는 손을 내밀어 박처럼 둥글게 솟은 이씨의 배를 만지기도 했다.

  "발길질하는 기세를 보니 아들인 것 같구려."

  "돌아가신 어머님께서 태몽을 꾸셨어요. 태몽대로라면 아들이 틀림없습니다."

  "태몽이 무엇이었소."

  "큰 구렁이 두 마리가 어머니를 물려고 치마폭으로 달려들었답니다.

구렁이는 아들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부인, 아기 이름을 생각해 본 적이 있소."

  "선비인 당신이 아기 이름을 짓지 않고 누가 짓겠습니까.

좋은 이름으로 어서 지어 주십시오."

  조광조는 누운 채 이씨가 바라는 대로 아기 이름을 하나 지어 보았다.

성리학의 근본이 되는 글자 중에서 하나를 골랐다.

  "아들이건 딸이건 정(定)이라 하면 어떻겠소."

  "무슨 뜻으로 그렇게 지은 것입니까."

  "<서경(書經)>에 보면 윤달이 있어 네 계절을 바로 잡고 해를 이룬다(以閏月定四時成歲)는

구절이 있소.

여시서 정(定)은 결정하다는 뜻이 아니라 바로잡는다는 뜻이지요.

 바로잡는다는 뜻의 정(定)은 집을 지을 때 큰 기둥과 같으니

아기가 세상에서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소."

  "저는 정(貞) 자를 쓰고 싶어요.

사내로 태어나면 바를 정으로 생각하면 되고,

여자로 태어나면 절개를 지키는 정(貞) 자로 생각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조광조는 아내의 사서삼경 실력에 자못 놀랐다.

아내가 풀이한 대로 <논어>를 보면 군자는 굳고 바르나 소신을 맹목적으로 고집하지 않는다

(君子貞而不諒)는 공자의 말씀이 있고, <역경(易經)>에는 여자가 절개를 지켜 동하지 아니한다

(女子貞不字)는 구절이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씨는 곧 조광조의 의견을 따르겠다고 말했다.

  "아기는 당신을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하오니 아기 이름도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결국 아기 이름은 정(定) 자로 결정했다.

아들이 됐건 딸이 됐건 정(定)으로 지어 부르기로 했다.
  
  중종 10년 11월.


  용인에서 서울로 올라온 지 보름 만이었다.

  조광조는 성균관에서 사간원 정언으로 임명을 받았다.

중종이 조광조를 성균관보다는 사간원에 두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중종이 젊고 패기 넘치는 조광조와 국사를 의논하겠다는

심중의 의지를 표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간원의 인원은 총 5명이었다.

수장인 대사간(정 3품)과 사간(종 3품) 1명, 그리고 헌납(정 5품) 1명,

좌우 정언이 각 1명으로 조광조는 막강한 조직의 말단에 오른 셈이었다.

그런데 말단이라고 해서 권한이 작은 것은 아니었다.

사간원의 조직 인원 5명은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임금에게

개인적인 간언(諫言)을 올릴 수 있었다.

이러한 역할은 사헌부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두 기관은 사전에 의견을 조정해서 간언하는 것이 관례로 굳어 왔는데

조광조가 간관이 되면서부터 그 관례가 깨졌다.

조광조는 시비의 문제는 옳은 것을 찾는 것이지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 시비는 왕비 신씨의 복위 문제였다.

반정 공신들에 의해 신수근의 딸 신씨가 폐위되었기 때문에 반정공신과 새로운 세력 간에

힘겨루기를 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힘겨루기는 봄부터 시작되었으나 중종은 아직 결론을 내리지 않고 상태였다.

그만큼 조정의 대신들 간에 찬반의 의견이 팽팽한 상태였다.

  발단은 봄에 계비 장경왕후 윤씨가 원자(인종)를 낳고 며칠 만에 25세 나이로 죽게 되자,

왕비 자리가 비게 된 데서 다툼이 시작되었다.

이때 박빈(朴嬪)이 낳은 복성군(福城君) 미(嵋)가 원자의 나이보다 위였고,

박빈은 중종의 총애를 받음이 으뜸이었으므로 엉뚱한 마음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박원종의 수양딸이기도 한 박빈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잔존하는 반정 공신들의 생각도 그러했다.

  이를 두고 격분한 사람이 바로 순창군수 김정과 담양부사 박상이었다.

모두 조광조와 친분이 두터운 동지들이었다.

마침 중종이 어떤 의견이든 문책을 하지 않는다는 구언(求言)을 내렸으므로

김정과 박상은 상소를 올리기로 상의했다.

두 사람이 상의한 내용은 이러했다.

  '원자가 아직 강보에 있는데, 전하의 총애를 받는 후궁 박숙의에게 아들이 있으니,

만약 성종 때 비를 폐하고 자순대비가 후궁으로서 중전의 자리에 오른 예를 좇아

박숙의를 정비로 책봉하게 된다면 원자의 처지가 곤란하게 될 것이니

차라리 신씨를 복위시키고 무고하게 쫓겨난 것을 설원(雪冤)함과 동시에

 첩을 아내로 삼는 일이 의리가 아님을 명백히 해두는 것이 옳겠다.'

  이는 박원종의 수양딸이자 후궁인 박빈이 중전에 오를지도 모르므로

그것을 저지하기 위한 논리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 있어서는 국정을 농단한 박원종 세력의 힘을 무력화시켜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자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이는 그들만의 생각이라기보다는 조광조의 동지들이 회동할 때마다 거론되던 화제 중 하나였다.

아무튼 김정과 박상이 올린 상소문의 중요한 내용은 이러했다.
  
  <반정하던 처음에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 등이 신수근을 죽였으니,

비는 수근의 딸이라 그의 아버지를 죽이고 그 왕비 밑에 서게 되면

다른 날 환이 미칠 것을 두려워 하여 자신들의 보전책으로 폐비할 계책을 내었던 것이옵니다.

이 일은 본디 무고하고 명분이 없었던 것이옵니다.

신씨는 전하가 잠저에 계실 때 아름다운 인연으로 전하의 좋은 배필이 되었고,

 왕대비와는 고부의 의리가 미리 정해져 있었으며,

전하가 입승대통(入承大統)하시자 당당히 중전에 오르시어 신하와 백성들의 하례를 받은

왕비로서의 명분이 이미 분명하였습니다.

왕비대전에게도 무슨 잘못으로 견책을 받지 않으셨으며 내보낼 만한 잘못이 없었는데

전하가 강한 신하들을 누르지 못하시어 배필의 존중함을 보전하지 못하셨으니

얼마나 통탄할 일이옵니까. (…)

  저 원종의 무리들은 비록 왕실에 큰 공이 있다고는 하나 그때 천명과 인심이

모두 전하에게로 돌아간 때를 당하여 그들이 기회를 타서 성사한 것인데,

공을 믿고 방자하게 거리낌 없이 군부(君父)를 협박하여 국모를 쫓아내어

천하고금의 큰 명분을 범하였으니 이들은 만세의 죄인입니다.

그들의 공을 가지고 죄를 덮을 수는 없습니다.

지금은 이미 죽고 없으나 마땅히 그 죄를 밝히어 벼슬을 추탈하고

중외에 효유(曉諭)하여 지금이나 앞날에 대분(大分)은 엄연히 범할 수 없다는 것을

밝게 알리시옵소서.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의리로 정하시어 주저하고 지체함이 없이 기왕의 잘못된 것을 씻어버리시면,

인륜의 근본이요,

 왕화(王化)의 근원인 부부의 도리가 맑고 깨끗하게 빛나서 천지가 막혀 어둡다가

다시 열려 트이는 것과 같이 될 것입니다.

전하가 또 한결같이 자신의 마음을 삼가시어 성의정심(誠意正心)으로 정사를 보아 나가신다면

곧 왕가와 나라에 덕화가 이루어져 복이 올 것이옵니다.>
  
  구언의 명을 내렸을 때 대궐로 올라온 상소문은 임금이 직접 개봉하여 보는 것이 원칙이었다.

중종은 김정과 박상의 상소문을 보고서는 마음이 심란해졌다.

계비 장경왕후가 원자를 낳고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뿐더러 신씨에 대한 애정은

귀여운 후궁 박빈이 나타남으로 해서 식어버렸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신씨에 대한 죄책감이 지워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중종은 한동안 잊었던 인왕산을 바라보기 위해 정전을 나와 서성거렸다.

승지와 내시의 우두머리인 상선이 따라 나와 수심에 잠긴 중종의 안색을 살폈다.

중종의 손에는 김정과 박상이 올린 상소문이 들려 있었다.

  "전하의 용안에 근심이 어른거리옵니다. 마음을 편히 하소서."

  "음-."

  중종이 바라보고 있는 곳은 한때 장인이었던 신수근의 집 뒤쪽의 인왕산이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신씨의 치마는 자취를 감춘 채 보이지 않았다.

궁에서 쫓겨난 신씨가 몇 해 동안은 자신의 치마를 대궐이 내려다보이는

바위에 벗어놓아 중종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곤 했는데,

이제는 그것도 지쳤음인지 신씨의 치마가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다.

  "신씨는 잘 있느냐."

  "요즘에는 소식을 듣지 못했사옵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하니 무사히 잘 계시올 것입니다."

  "알겠다. 이 상소문의 내용은 중대한 일을 다루고 있으니

작은 신하들의 말만 듣고 시행할 수는 없다.

예조에 내려 보내더라도 또한 시행하기 어려울 터인즉

이 상소문을 승정원에 두는 것이 옳겠다."

  그러나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상소문에 대한 내용을 검토하고는 서빈청(西賓廳)으로 모였다.

양사(兩司)가 모여 회의를 앞두고 다시(茶時)를 가졌다. 의녀 중에서 차출된 다모(茶母)가

서빈청으로 나와 차를 따르고 있었다.

  상정한 안건을 논박하기 전에 차를 마시는 것은 그것의 성품처럼 맑은 기운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대사간 이행이 먼저 차를 마시다 말고 말했다.

  "만약 신씨를 다시 세웠다가 왕자를 탄생하게 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가례의 선후를 따진다면 신씨가 먼저 했으니 당연히 원자는 뒤바뀔 것이나

이것은 이미 원자가 정해진 상태이니 혼란을 크게 부추기는 일입니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가상일 뿐입니다.

장경왕후가 낳은 원자가 이미 있지 않습니까."

  대사헌 권민수(權敏手)도 신씨 복위를 반대하는 이행의 의견을 따랐다.

  "장경왕후가 낳은 원자도 있고, 또 박빈이 낳은 복성군도 있지 않습니까.

김정이 올린 상소문은 불순한 의도가 있는 사론(邪論)이 분명합니다."

  양사의 두 수장이 상소문을 사론으로 규정하자 회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참석한 인원 모두가 연명하여 중종에게 글을 올렸다.
  
  <박상 , 김정의 상소가 감히 간사한 의견을 끄집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극히 해괴한 일입니다. 의금부에 잡아다가 문초하여 그 사유를 캐내야 하겠고,

그 상소문을 정원(政院)에 묻어 둘 것이 아니라 속히 대신들에게 보여 주어 사람들로 하여금

임금의 뜻을 명백하게 함이 옳겠습니다.>
  
  합계(合啓)에 연명한 이는 대사헌 권민수, 대사간 이행, 집의 허지(許遲), 사간 김내문(金乃文),

장령 김영(金瑛), 지평 채침(蔡枕) 문관(文瓘), 헌납 유돈(柳墩), 정언 표빙(表憑) 등이었다.

  조광조는 연명하지 않았다.

구언으로 올린 상소문은 그것이 무엇을 지적하든 문책하지 않는 것이 관례인데,

박상과 김정을 잡아 문초한다는 것은 원칙에 벗어난 일이기 때문이었다.

사간 김내문이 조광조더러 연명할 것을 종용했으나 조광조는 병을 핑계로

회의에 들어가지 않았다.

  중종은 양사의 합계에 대한 전교를 내렸다.
  
  <나도 그 상소를 보고 국가 대사를 너무 경솔하게 논의하였다고 생각하였다.

내 뜻도 그 이유를 추문하고 싶었으나 다만 내가 구언을 하여 상소한 것이므로

일부러 덮어 두었을 뿐이다.

반드시 문초하여 다스릴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하여 정원에 두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지금 대신들의 아룀을 들어보니 과연 그렇다. 그대로 문초하라.>
  
  또한 중종은 양사의 건의대로 당상관의 대신들을 불러 상소문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영의정 유순, 좌의정 정광필, 우의정 김응기, 좌참찬 장중손, 우참찬 남곤 등은

중종의 생각과 달랐다.

  "국가 대사가 정해진 지 이미 오래된 지금에 와서 망녕된 말을 하는 것은 그른 일입니다.

그렇다고 잡아다 문초한들 무슨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반드시 상소에 말한 그 뜻대로 대답할 것이니,

대체로 구언의 명을 내린 뒤이오니 그들의 말한 것이 심히 망녕되더라도

잡아다 추문하는 것까지는 과한 듯합니다."

  그러나 중종은 어찌 된 일인지 신씨에 대한 그리움을 접고

자신의 속마음과 달리 지시를 했다. 양사 대간들의 편을 들었다.

  "박상 등이 시종으로 오래 있었으므로 그때 말하기가 어렵지 않았을 터인데,

삼공신이 이미 죽은 뒤에야 감히 이런 의논을 제기함이 왜 다른 뜻이 없다는 말이냐.

그 뜻을 문초하면 인심도 가라앉고 사특한 의논도 없어질 것이다."

  조강(朝講)에서 정광필과 신용개가 박상과 김정을 치죄할 수 없다고 말하였으나

중종은 끝내 듣지 않았다.

  "장경이 세상을 떠났으므로 서둘러 말한 것이리라.

만일 장경이 돌아가지 않았더라면 장경을 어찌하려 했던 것이냐.

너희들이 신하로서 장경을 섬겨 왔으니 장경이 돌아갔으매 슬퍼하는

정의가 마땅히 아직도 다하지 아니했어야 할 것이다.

헌데도 이러한 것은 필시 평소에 왕후를 왕후로 알지 않은 것이 명백하다."

  중종은 느닷없이 장경왕후를 들먹이며 금부낭관을 보내어 김정과 박상을 잡아오게 하였다.

결국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8월 하순에 박상과 김정은 의금부에서 문초를 받은 후,

박상은 남원현으로 김정은 보은현으로 귀양을 갔다.

  그들이 귀양 간 후에도 이조판서 안당은 경연에서 중종에게 아뢰었다.

  "박상과 김정이 구언의 명을 받들어 충성을 다하여 말한 것을 한두 사람의 말에 따라

엄하게 죄를 가하니 이것은 실상 언로를 막고 사기를 저하시켜 후세의 비방거리를 만든 것입니다.

재상은 국론을 주장하여 국사를 결단하는 것이고, 대간은 조정의 과실을 지적하여 바로잡을 뿐입니다. 대간이 홀로 아니라고 할 뿐인데 이것을 공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또 과감하게 말하는 선비를 죄주면 누가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하여 죽으려 하겠습니까."

  안당이 말한 한두 사람의 대간이란 이행과 권민수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이행이 박원종의 사람이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중종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신하는 아무도 없었다.

중종은 과거의 일을 하루빨리 잊고 법도와 기강이 바로 선 나라의 새 군주가 되고 싶은데,

박상과 김정이 과거의 일을 또 들추어내어 자신의 발목을 잡는다고 여겼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