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밤의 대통령

8. 경기장의 두 사람

오늘의 쉼터 2014. 12. 9. 15:40

8. 경기장의 두 사람 (1)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끈 이무섭이 머리를 들었다

짙은 눈샙이 위쪽으로 치켜올라간 데다가 두툼한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어서

얼굴 표정만으로도 방안의 분위기를 압도하고 있었다.
"박 사장의 부하들은 20분이나 늦게 현장에 도착했어요.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으면서도 제일 늦은 거요."
"회장님, 지시는 제가 제대로 했는데 애들이 허둥대다가 늦었습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
박용근이 머리를 숙였다. 어젯밤에 과음한 모양으로 아직도 두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그의 앞자리에 앉은 안정태가 머리를 들었다.
"어젯밤에 제 부하 네 명이 죽고 네 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조웅남의 기습을 받았다고 하는데 우리가 협조만 잘 되었더라면 그놈을 잡을 수가 있었어요."
"글쎄, 나도 그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어요."
머리를 든 박용근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안정태를 바라보았다.
"우리 애들도 아침까지 골목골목을 뒤졌단 말입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어요."
"그만. "
이무섭의 목소리가 한계단 높아졌다.
"내 앞에서 그런 식의 다툼들은 하지 마시오, 앞으로. 알았습니까?"
"예, 회장님 ."
안정태가 머리를 숙였고 박용근도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자낸 빠르게 부하들을 동원시켰던데. 안 부사장의 부 상자들을 수습해 주었고,

앞으로 손발만 조금 맞추면 되겠어."
이무섭이 이철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제 처음으로 경찰 병력 대신 우리가 강남 지역을 장악한 것이 의미가 있어.

그것도 청장의 요청으로 말이야, 물론 비공식이지만."
"조웅남을 놓쳐 버렸으니 성과가 없습니다,

의미가 있을지는 몰라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철우가 말했다.
"도망치는 모습을 보았다고 하는데 시민들 때문에 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
"그건 잘한 거야, 칭찬해 줘야 해."
"청장이 최순태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었던 모양이군요."
이무섭이 머리를 』1덕였다.
"앞으로 이런 일이 또 다시 일어날지 몰라.

그때는 어젯밤같이 손발이 맞지 않는 경우가 없어야 돼."
그는 머리를 돌려 박용근과 안정태를 바라보았다.
"지난번에도 이야기했지만 당신들 세 조직이 어떻게 협조하느냐에 따라서

밤의 세계에 대한 미래가 변할 거요.

이제 우리는 다 이루었어. 마지막 마침표를 찍으면 되는 거요."
모두들 잠자코 이무섭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제 밤의 세계를 장악한 사람의 태도였다.

말투에는 상대방을 압도하는 기백이 서려 있었고 그의 표정은 엄숙했다.
"어젯밤 같은 경우에는 우리 조직의 힘을 보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소.

강남 지역을 우리 조직원으로 가득 메우고 조웅남인지 뭔지를 사로잡아 경찰에 인계할 수도 있었어요."
이무섭이 둘러앉은 사내들의 얼굴을 하나씩 훌어보았다.

아침부터 이무섭의 부름을 받고 달려온 보스들이다

그들은 긴장한 얼굴로 그 치 시선을 받았다

이무섭이 다시 말을 이었다.
"조직간의 알력이나 분쟁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조정해 드릴 거요.

그것을 꼭 명심하시도록."
이철우가 머리를 들었다.
"회장님, 어젯밤에 총격 사건이 있었습니다.

조웅남이 강남에서 난동을 피우기 전인데요."
"총격 사건이라니?"
"제 사무실에섭니다.

건널편의 오피스텔에서 쏘았는데 제 부하인 한명철이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
"저격을 받았단 말인가?"
눈을 부릅뜬 이무섭의 목소리에는 날이 서 있었다.
"그렇습니다.

저를 목표로 한 것 같은데 한명철이 베란다의 문을 열다가 당했습니다. "
"이놈들이 이젠 별짓을 다하는군."
"시체는 관에 넣어 두었습니다. "
"관에 넣에 두다니?"
"괜히 시끄러워질 것 같아서요.

김원국과의 싸움이 오래 갈수록 이젠 여론의 화살이 우리에게 집중되는 것 같습니다. "
"그건 자네가 잘 보았어."
"그래서 소문 내지 않고 안장할 생각입니다만 이무섭이 어깨를 늘어뜨리고 숨을 내쉬었다.
"어서 놈들을 끝장내야지. 이렇게 끌어 가다가는 조직의 사기에도 문제가 있어 ."
"곧 끝장날 겁니다. "
이렇게 대답한 것은 안정태였다.

그는 눈을 치켜뜨고는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제가 모든 부하들을 희생시켜서라도 놈들의 뿌리를 뽑겠습니다.
그리고 상황으로 보아 놈들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
"그렇지, 그건 그래 . 우리가 뭉쳐 있는 한 놈들은 어떻게 하질 못해."
이무섭이 맞장구를 쳤고 박용근이 머리를 끄덕였다.

이철우도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이중섭 대통령은 신문을 내려놓고 집무실에 들어온 윤성하 비서실장을 바라보았다.
"어젯밤에 강남에서 폭탄 테러가 있었구만. 사람이 여런 죽고."
"예,각하,김원국의 부하들이 일으킨 사건으로,지금 경찰에서는 
"신문 읽었어 ."
이중섭이 손을 들어 앞쪽 의자에 앉으라는 시능을 했다.
"테러가 끊기지 않아.서울의 밤거리가 마치 20세기 초의 미국같이 되어 버렸어 , "
"각하, 이제 놈들의 숫자도 몇 명 남지 않았습니다. "
자리에 앉은 윤성하가 말했다. L
"어제는 조직간에 싸움이 있었던 모양인데, 경찰은 그 자리에 없었나?"
"없었던 모양입니다, 각하 "
"경찰은 됫북만 치고 다니는 모양이군."
‥‥‥ 
"총리가 성명을 발표한 후로 조금 뜸해지는 것 같더니 다시 시작이군. "
"총리께서 성명을 발표하신 후에 경찰의 의욕이 떨어진 것이 사실입니다.

김원국의 조직을 많이 미화시킨 바람에 ‥‥‥‥ 
"이무섭이라고 했던가? 그 전에 마주일보에 나왔던 기사에 말이야, 그 배후 인물."
"아아, 예, 이무섭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증거가 없고 너무 일방적인 폭로 기사여서 ‥‥‥‥ 
이중섭이 잠자코 윤성하를 바라보았다.
"각하, 이무섭은 지난번 특별조사 때에도 사건과 무관한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
"자네 임종휘 알지?"
윤성하가 상체를 세웠다.
"예, 알고 있습니다, 각하."
"그 사람, 요즘 윌 하는지 아나?"
"집 밖으로도 거의 나가지 않고 은둔 생활을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자네도 그것밖에 모르는구만."
"예 , 각fl."
"눈앞에 닥친 일에나 급급하고, 그저 문제를 빨리 해결하려고 한다든지

아니면 덮어 버리려고 하는 습성들 때문에 이 지경이 되었어.
처음에 사건들이 일어났을 때 뿌리를 찾아 해결해야 했어 "
이중섭이 혼잣소리처럼 말하자

윤성하가 긴장한 듯 온몸을 굳혔다.

벽의 한쪽을 바라보며 이중섭이 말을 이었다.
"나부터가 이 일을 하찮게 생각했고 군 조직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그냥 덮어 버리려고 했어 나중에 알았을 때는 너무 늦었고‥‥‥‥ 
윤성하가 머리를 들었다.
"각하, 아신다면, 그러면‥‥‥‥ 
"안기부에서 보내 온 보고서를 읽었어.이찬형 부장과 고성섭 차장이 마지막으로 작성해서

보고한 것인데 ‥‥‥‥ 
"자네한테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그 보고서의 내용과 이제까지의 상황이 일치하고 있네."
"그렇다면 각하."
"이봐,서둘지 말어. 말이 나갈까 봐 자네한테도 보여 주지 않았어.

총리하고 나하고만 알고 있었던 7·1야.

지금 우린 임종휘와 이무섭이 꾸미고 있는 거대한 음모 속에 빠진 상태야.

밤거리의 저 총성들은 우리에게 위험을 알려 주는 경고음이고."
윤성하가 침을 끌어모아 삼키고는 이중섭을 바라보았다.
"강한석이나 박동호, 그리고 몇몇 주요 공직자들은 그들의 꼭두각시가 되어 버렸어.

약점이 잡혔거나 아니면 그들의 힘을 이용하려고 작정한 자들이지.

이봐, 실장, 우린 지금 위급한상황에 빠져들어 있어."
"각하, 설마‥‥‥‥ 
"김원국이 우리의 희망이야.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가 버터고 있는 한 희망이 있단 말이네

그들의 조직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세력은 지금 김원국밖에 없네."
"각하 그것을 어떤 근거로 말씀하시는지‥‥‥‥ 
"근거? 이봐,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살펴봐.

이철우와 안정태를 봐. 이무섭이를 보고, 임종휘를 봐. 이젠 이무섭을 감시하는 기관도 없어.

강한석이는 이찬형과 파워 게임을 벌였던 거야.

그리고는 이무섭이나 임종휘의 덫에 걸렸겠지. 박동호는 말할 것도 없고."
이중섭은 목소리를 억누르며 말했다.
"그들은 밤의 세계를 장악하고 곧 낮의 세계도 조종하게 될 거야.
이것은 일종의 쿠데타지. 반역이야."
윤성하의 얼굴빛이 하얗게 되었다 
"각하, 그것은‥‥‥‥ 
"어젯밤 경찰 병력은 강남에서 이태원으로 이동했어.

박 청장의 지시로 말이야.

강남 지역은 치안 공백 상태가 되었는데 그 자리를 세 개 조직원들이 메웠다고 하더구만 "
하얗게 된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윤성하가 나무토막처럼 앉아 이중섭을 바라보았다.
"그건 무엇 때문인지 아나? 김원국 측께서 협박을 했기 때문이지.
병력을 철수시키지 않으면 최순태를 죽이겠다고.

그래서 경찰은 엉뚱한 이태원으로 몰려갔네 ."
"그렇지만 그 자리를 세 개 조직의 사내들이 채웠지. 박 청장의 부탁을 받고 말이야."
"각하, 저는 도무지 ‥‥‥‥ 
"나는 나대로의 정보망이 있네, 윤 실장. 꼭두각시 대통령은 아니야.

자네도 잘 알다시피 꼭 복선을 깔거나 제2, 제3의 대책을 마련해 놓는 사람이지. 그렇지 않나?"
윤성하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각하께서는 언제나 완벽한 대책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
그리고 그가 어떤 방식으로 대책을 마련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 1는 것이다.
"그 시키들은 내가 누군지도 몰랐당게 어중이 떠중이들을 모아 놓아서 말이여. 참, 빙신 같은 놈들."
술병을 내려놓은 조웅남이 붉은 입안을 보이며 웃었다.
"내가 즈그털 편인 줄 알았던 거여. 안 그러냐?"
"네 , 아마도‥‥‥‥ 

백동혁이 머리를 』1덕였다.
그들은 횟집에 무사히 돌아왔고 부랴부랴 논현동의 연립 주택으로 거처를 옮긴 참이었다.

이제 20명도 안되는 인원이어서 이동하는 것은 쉬웠으나 홍콩의 황용성이 가져온

무기의 부피가 상당했으므로 그것이 신경에 쓰였다.

그러나 검문에도 걸리지 않고 무사히 서울에 진입하여 연립 주택 세 채를 빌려

다시 합숙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한바탕 몸을 풀고 낭게로 술맛이 난다. 안 그러냐?"
소주병 세 개째를 들어올리며 조웅남이 백동혁을 바라보았다.
"예, 형님 . "
그러나 백동혁은 앞에 놓인 술잔을 입에 대지 않았다.

무표정하게 늘어진 눈시울로 조웅남의 가슴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점심 시간이 조금 지난 오후 1시경이었다.

옆채에는 김원국이 묵고, 아래층인 2층에는 김칠성이 기거하고 있었다 
조웅남은 다시 술병을 들어 벌적이며 소주를 삼켰다.

술 방울이 입가로 흘러내려 가슴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는 옆채에 김원국과 함께 있는 백동혁을 불러냈는데 이틀 전의 무용담을 나누고 싶은모양이었다.
"나는 오늘밤에도 또 나갈 거여. 경찰놈들은 계속 헛다리나 짚으 라고 혀."
그가 술병으로 입술을 닦으며 말했다.

그는 백동혁이 박동호에게 전화를 해서 경찰을 이동시키지 않으면 최순태를 죽이겠다고

사실을 모른다.
현관문이 열리며 수선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손채석이 방으로 들어섰다.
"형님, 큰형님이 동혁이를 부르십니다 "
그가 방바닥에 놓인 술병을 바라보며 말했다.

술병은 대여섯 개가 되었고 두어 개는 빈병이 되어 나동그라져 있다.

안주라고는 가게에서 사온 오징어포뿐이다.

백동혁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조웅남이 손을 까불어 대신 손채석을 불렀다.
"야, 니가 일루 와. 여그 앉어."
"처도 같이 오라고 하셨습니다. "
"지기미 ,  펌시 부른대여?"
"그건 모릅니다, 형님."
오만상을 찡그린 조웅남을 방에 남겨 두고

그들은 현관을 나와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옆채로 들어섰다.

실제 평수는 20평이 겨우 넘는 연립 주택으로 방 두 개에 응접실과 주방, 화장실이 전부였다.

응접실에 앉아 있던 김원국이 머리를 들었다.
"준비해라. 4시에 약속이 있다. "
"네, 형님 ."
우선 대답을 하고 나서 백동혁이 주춤거리며 그의 앞에 섰다.
"어떻게 준비할까요?"
"그냥 나만 따라오면 된다. "
"저, 같이 갈 사람은‥‥‥‥ 
"너 하나야. 너하고 나하고 둘이서 간다. "
백동혁은 잠자코 있었으나 손채석이 분주하게 눈을 깜박였다.

그러나 선뜻 입을 열지는 못하고 뒷걸음질을 치더니 밖으로 나갔다.
"저 , 어딜 가십니까, 형님?"
바바리 코트를 집으면서 긴장된 얼굴로 백동혁이 묻자 김원국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철우를 만나러 간다. "
백동혁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쪽도 두 명만 나을 것이다. 그렇게 약속이 되었어 ."
"하지만 형님 ‥‥‥‥ 
"걱정할 것 없다. "
그때 현관문이 열리더니 김칠성이 들어섰다.

그의 뒤를 손채석이 따랐다.
"형님, 동혁이만 데리고 가시게요?

아무리 두 명 씩이라고 이야기가 되었다지만 몇 명은 더 가야 합니다.

근처에서라도 대기하고 있어야 해요."
김칠성의 말소리가 집안을 울렸다.
"무모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런 약속 같은 것은 지키지도 않을 놈입니다, 그놈은."
"그럴 놈 같으면 만나지도 않는다. "
코트를 걸치면서 김원국이 입가에 웃음을 띄었다.
"그리고 그놈도 지금 곤경에 처해 있어. 나를 치고 조직에 충성을 보일 기력도 없을 것이다. "
"그건 형님 생각입니다 그놈은‥‥‥‥ 
김원국이 머리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김칠성이 얼른 다른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가자 "
몸을 굳히고 서 있던 백동혁이 코트의 단추를 채웠다.
"야 임마, 그 작대기 버려. "
김칠성이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치켜뜬 눈으로 백동혁의 허리께를 가리켰다.
"예, 형님 ."
얼굴이 붉어진 백동혁이 코트를 헤치고 허리춤에 찔러 넣은 목검을 빼내었다.
"황용성이 보내 준 기관총을 가져가라. 탄창도 대여섯 개 넣고, 수류탄도 대여섯 개 넣어 "
"예, 형님 ."
김원국이 백동혁이 꺼내어 구석에 세워 놓은 목검을 집어 들었다.
"왜 무겁구나."
검정색 목검의 날을 살피듯이 눕혀 보면서 그가 말했다.
"멋진 무기다, 매끄럽기도 하고."
그는 자신의 코트 안에 목검을 찔러 넣었다.

김칠긍이 힐끗 그것 바라보고는 한걸음 다가와 섰다.
"형님, 모험을 하실 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그놈을 만나는 것이 말입니다. "
"그럴지도 모르지 ."
"차라리 제가 만나는 것이 ‥‥‥ 놈과 형님의 급수가 다릅니다. 수준이 틀려요."
"마치 일 대 일로 싸우러 가는 것처럼 생각하는 모양이구나, 너는. "
"그런 놈은 동혁이나 채석이 상대도 안됩니다. "
"오늘은 웅남이 밖으로 못 나가게 해라. 집안에 있도록 해."
"그 양반은‥‥‥‥ 
김칠성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어금니를 물었다. 안팎으로 일이 겹친 것이다.
"걱정 말아라, 돌아올테니 까 "
김원국이 현관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코트의 안쪽에 기관총을 매달고 허리춤에 탄창을 울타리 치듯이 꽃은 백동혁은

바지와 양복 주머니에 수류탄을 넣었다.

그리고는 서둘러 김원국의 뒤를 따랐다 
"자, 이것, 찔러 넣어라."
구두를 신은 김원국이 목검을 fHH내 백동혁에게 내밀었다.
"난 영 거북해서 안되겠다. "
"빌어먹을 자식, 놈은 이미 눈치를 채고 있을지도 모른다.

김원국이는 이제까지 저격병을 써본 적이 없어 ."
안정태가 담배를 발로 비벼 끄면서 말했다.
"그 따위 솜씨로 무슨 일을 한단 말이냐, 병신 같은 놈아 "
"부시정설, 밤이어서 시야가 흐렸습니다.

다음에는 꼭‥‥‥‥ 
몸을 굳히고 선 조운경이 머리를 숙였다.
"다음?이 자식아,이 일이 고스톱할 때처럼 다음 패를 기다릴 수 있는 줄 알아?

이미 끝난 일이야."
안정태가 한걸음 그에게로 다가섰다.
회사의 지하 주차장 안이었는데 입구 쪽에 부하 한 명이 등을 보이고 서 있을 뿐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네 일은 끝났다 이걸 가지고 네 갈 데로 가라, 창석이하고 같 01."
안정태가 호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그에게로 내밀었다.
"2천만 원짜리 수표 두 장이다.

당분간,그렇지, 6개월쯤 숨어 있어. 그가 찾으러 나설지도 모르니까. 잡히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압니다, 부사징힘 , "
두 손으로 봉투를 받으며 조운경이 대답했다.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
"멀리 떠나라, 당분간 서울에 나타나지 말고."
"염려 마십시오."
"저격병은 뻔하니까 그가 마음만 먹으면 금방 너를 찾을 수 있어.
아마 지금 그의 부하들이 너를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
조운경이 눈을 점벅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주차장 안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그들의 귀에 들렸다 옆쪽의 기계실에서 나는 소리였다.
"최춘식이가 너희들을 서울 변두리까지 데려다 줄 게다. 서울만 벗어나면 될 거야."
"고맙습니다, 형님 ."
"천만에, 너희들이 아무 일 없어야 나도 마음을 놓는단 말이다,

이 병신 같은 놈들아."
한걸음 다가선 안정태가 그의 어깨 위에 한 손을 올려놓았다.
"잘 가거라,조 중사."
"대위님도 안녕히 ‥‥‥ 6개월 후에 뵙겠습니다. "
"그래, 그땐 모든 것이 정리되어 있을테니까."
안정태가 몸을 돌리자 주차장 입구에 등을 보이며 서 있던 최춘식이 돌아서더니

조운경에게로 다가왔다.
사무실로 돌아온 안정태는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들었다.

그는 다섯 대의 휴대폰을 가지고 있었는데 제각기 번호를 붙여 용도를 구분해 놓았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휴대폰을 들었는데 거는 전화는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보세요."
수화기에서 이무섭의 목소리가 흘러 나오자 안정태는 허리를 곧추세웠다.
"단장힘, 접니다. "
"어떻게 되었어?"
그가 대뜸 물었다.
"네, 오늘중으로 처리하겠습니다. "
"또 다시 미사리 사건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겠지?"
"염려 마십시오."
"서툴어, 서틀단 말이야 "
그의 목소리에는 짜증기가 섞여 있었다.
"일의 매듭이 분명하지가 알아, 자네가 한 일은."
"죄송합니다. "
안정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면목이 없습니다. "
"이왕 어긋난 일이야. 마무리나 깨끗이 하도록 해. 알았나?"
"예 , 단장님 ."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어."
"무엇이 말씀입니까?"
"경찰청장이 바필 것 같아."
"대통령이 지난번 강남역 사건으로 대단히 화를 내었다는 거야. 1래서‥‥‥

 

 

 

 

 

 

경기장의 두 사람 (2)

 

 

"새삼스럽게 무슨, 그런 일이 한두 번입니까?"
"총리가 내무장관과 청장의 사표를 받았는데 내 생각은 청장의 사표만 수리될 것 같아."
"이봐, 경계를 단단히 해. 이런 상황에서 조직이 흔들리면 안돼.
당분간은 움직이지 말고 기다려 . 알았나?"
"철저히 경계하고 있습니다. "
안정태는 손바닥으로 이마에 번진 땀을 닦았다.

방안이 덥다는 생각이 들었고 겨울이라고 무작정 히터만 틀어 놓은 직원농들에 대해서 짜증이 났다.

휴대폰의 스위치를 내린 그는 넥타이의 매듭을 잡아당겨 늦추면서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오후 4시가 되어 있었다.
88 올림픽이 끝난 이후로 종합운종장은 시민들에게 보다 안락하고 편리한 체육 시설로 익숙해져 갔다. 거대한 메인 스타디움에서는 국제 경기나 국내의 큰 경기가 자주 열렸고 근처의 지하철 역과 버스
정류장은 언제나 붐볐다

그러나 겨울철 한동안은 다르다. 무거운 적막에 싸인 스타디움은 종이 조각만 바람에 흩날리고

있을 뿐이다.

지난날의 환상과 화려한 색채가 머리속에 남아 있는 사람은 그 삭막함에 더욱 가슴이 내려앉는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12월의 오후 4시였다.

햇살은 스타디움을 비스듬히 비치고 있었는데 벌써 지붕의 거대한 그림자가 그 라운드의 반을 덮었다.
겨울 바람이 소용돌이치며 불어 와 종이 조각들을 하늘 위로 솟구쳐 오르게 하더니 다시 잠잠해졌다. 오른쪽의 경기장 입구에 두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두 명 모두 검정색 코트 차림이었는데 비슷한 체격이었다.

그들은 잠깐 멈추어 서서 주위를 둘러보더니 곧장 경기장의 복판을 향해 걸어 나왔다.

다시 바람이 불어 와 그들의 코트 자락을 날렸다.
"형님, 저기 ."
왼쪽의 경기장 입구에 서 있는 김원국에게 백동혁이 낮게 말했다.
그의 시선은 경기장을 가로질러 오는 검정색 코트 차림의 사내들에게 향해져 있었다.

머리를 끄덕인 김원국은 그들을 향해 발을 떼었다

코트 자락을 여미며 백동혁이 서둘러 그의 옆을 따랐다 
이철우는 그를 향해 다가오는 두 사내를 보았다.

한걸음쯤 앞장서서 이쪽을 향해 똑바로 다가오는 사내는 김원국이다.

그의 가슴은 자신도 모르게 빠른 속도로 뛰었다.

김원국은 검정색 코트 차림이었다.
햇볕을 등지고 있어서 짙은 재색이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그는 키가컸고 어깨가 넓었으며 걸음걸이는 보폭을 넓게 하여 이쪽을 향해 똑바로 걸어왔다.

걸음걸이는 가벼워 보이나 힘을 느끼게 한다.
그의 옆쪽을 따르는 조금 왜소한 듯한 사내에게 시선을 준 이철우는 그의 바바리 코트를 보고는

그가 누구인지 금방 짐작이 갔다.

개백정 백동혁이다.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살인자인 것이다.

이철우는 옆을 따르는 서대식이 긴장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두 손을 코트 주머니에 넣고 있었는데 서대식은 주머니 속의 권총을 움켜쥐고 있을 것이다.

거리가 20미터에서 10미터로 가까워졌다.
이철우는 김원국의 얼굴을 보았다.

시선이 마주쳤으나 그의 표정은 변화가 없다.

이윽고 그들은 경기장의 한복판에서 마주쳤다.
 "저쪽 관람석으로 가지."
김원국이 옆쪽의 본부석을 턱으로 가리키며 불쑥 말하자 이철우가 머리를 끄덕였다.

김원국이 먼저 왼쪽으로 발길을 돌렸고 이철우도 그를 따랐다.
이제 그들 네 명은 나란히 본부석을 향해 걸었다.
"난 조직의 보스였던 사람이야. 말을 놓을테니까 그렇게 알도록."
김원국이 앞을 향한 채 다시 던지듯 말하자 이철우가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선뜻 입을 열지는 않는다.
그들은 잠자코 걸어 본부석으로 들어가는 계단을 올랐다.

바람이 그들의 뒤쪽에서 불어와 코트 자락을 날렸다.

본부석은 이미 짙은 그늘에 덮여 있었다.

햇볕도 따사롭지 않았지만 그늘 속으로 들어서자 추위가 새삼 더 느껴졌다.
김원국은 본부석 의자 하나를 골라 앉았다.

그의 옆으로 다가간 이철우가 및자리에 앉았고 백동혁이 망설이다가

김원국의 뒤쪽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서대식을 바라보자 눈치를 챈 서대식이 두 개의 의자를 사이에 둔 및자리에 앉았다.
"날씨가 춥군."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김원국이 말했다.

시선은 경기장을 향하고 있다 
"자네도 섬에 가보았지만 그곳은 언제나 따뜻해. 습기도 없고 그렇다고 건조하지도 않아."
백동혁에게는 바로 앞자리에 앉아 있는 그의 말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마치 부하에게 세상살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난 당신 가족을 그렇게 한 것에 대해 사과나 변명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섬 이야기는 하지 맙시다. "
이철우의 목소리는 조금 딱딱하게 들렸다.
백동혁이 눈시울을 젖히고 그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불과 1미터 쯤의 거리였다.
"나도 듣고 싶지 않아. 일부러 한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반응이 예민하군."
김원국의 말소리에는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백동혁은 지금 둘이 붙는다면 김원국이 이긴다고 믿었다.

굳어 있는 쪽은 이철우다.

기세에 눌린 것이다
"만나자고 한 용건을 말해 주시오. 쓸데없는 이야기를 할 시간이 없으니까."
머리를 돌린 이철우가 김원국을 바라보았다.

백동혁은 옆쪽의 서대식이 몸을 굳히는 것을 보고는 코트의 아래 단추 하나를 풀었다.
그와의 거리는 1미터 50센티미터쯤되었는데 목검이 충분히 닿을수 있는 거리였다.
"넌 이제 "1무섭이나 임종휘에게 쓸모없는 존재가 되칙 있어.그 걸 알려 주고 싶었다. "
김원국의 목소리가 날씨처럼 차가워졌다.
"넌 조만간 제거돼 . 그래서 묻고 싶었다. 배신당한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들에게

목숨을 내놓는다면 할수없는 일이다.

하지만 분하다면 내가 도와주지. 그것은 날 위한 일도 되니까."
"이간책이군."
혼잣소리처럼 이철우가 말하자 김원국이 그를 돌아보았다.
"이봐, 네가 나에게 원한을 가질 일은 없다, 그렇지 않나?"
"당신은 적이오. 적의 개개인에게 원한을 가진다는 이야기는 들어 보지 못했소."
"바보 같은 놈이로군, 너는."
부드러운 말투였으나 이철우가 어깨를 치켜세우면서 그를 마주 보았다.
"말을 함부로 하지 말어."
백동혁이 상체를 조금 굽혔고 서대식이 온몸을 굳혔다 김원국이 입을 벌리고 소리없이 웃었다.
"너를 내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이곳에 오지는 않았다.

네 가족을 죽인 자가 누군지를 너는 알았고 네가 지금 그들의 경계 대상이 되어 있다는 것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적의 적은 친구라는 말도 있지만 우선 너를 내세워 놈들을 치고 싶었다.

그리고 나서 나와 너의 관계를 해결할 생각이었어."
그의 말소리는 낮았으나 본부석에 앉은 세 사람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네놈들의 행위는 배신과 모략으로 이루어진 구역질나는 반역 행위야.

권력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썩어 빠진 놈의 사주를 받고
그저 상관에 대한 충성심만으로 자위하면서 일해 왔겠지.
그리고 이제 이 꼴이 되었다.

불쌍한 놈같으니 , "
이철우가 자리를 차고 일어났으므로 백동혁이 엉겁결에 따라 일어섰다.

그의 손은 목검의 손잡이를 움켜쥐고 있었다.

서대식도 백동혁과 거의 동시에 일어섰는데 코트 호주머니가 불룩 튀어 나와 있는 것
                                           경기장의 두 사람 287
이 보였다.
   김원국이 머리를 들어 이철우를 올려다보았다.
   "네가 안정태를 쳐라. 너희들의 규율대로라면 놈은 상관인 너를
배신한 놈이지. 살아갈 가치가 없는 놈이다. "
   이철우가 눈을 부릅뜬 채 김원국을 내려다보았으나 입을 열지는
않는다.
   "이무섭의 정확한 거처를 알 수가 없다. 그것을 나에게 알려 주도
록. 놈들을 제거할 때까지는 너와 나는 휴전이야."
   "지난번에 조웅남을 위기에서 구해 준 것이 네 부하였다고 믿는
다. 나는 이미 네가 마음을 굳혔다고 믿고 있어."
   이철우는 두 눈을 서너 차례 깜박이더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 백
동혁이 따라 앉았고 옆쪽의 서대식도 그를 따랐다
   경기장을 횝쓸고 온 바람이 종이 조각과 함께 본부석으로 밀려 들
어왔다 경기장의 그늘은 더욱 넓어져 있었고 햇볕이 차지한부분은
조금밖에 되지 않았다.
   정원의 마른 잔디 위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담장 가의
나무들이 앙상한 가지를 저녁 하늘로 내뻗었고 담을 뒤덮고 있는 넝
쿨은 검은 줄기를 흥하게 드러낸 채 바람에 흔들렸다
   임종휘가 찻잔을 내려놓고는 헛기침을 했다
   "어차피 우리는 같은 배를 탄 입장입니다. 서로 도와야 할 처지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글쎄요, 나는 잘‥‥‥‥
288 밤의 대통령 제2부 -3
   강한석이 소파에 등을 기대고는 임종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30
분 전에 현관에 들어섰을 때보다 더 딱딱해진 표정이었다.
   여당의 대표 위원이자 차기 대선의 후보자인 강한석은 임종휘의
갑작스런 전화 연락을 받고 그의 저택을 방문하게 되었다. 아무리 급
한 일이 있다손 치더라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어떻게 보면 모
욕적인 일이다.
   "같은 배라고 하셨는데, 표현이 조금 과장되신 것 같군요."
   강한석이 입술 끝으로만 웃었는데 눈동자가 가볍게 흔들렸다.
   "그리고 난 임 선생의 도움은 사양하겠습니다, 배려는 고맙습니다
만."
   임종휘와는 지난 정권 때 서너 번 만난 일이 있었을 뿐지었고 그
것도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동석했던 것이어서 이렇게 단둘이 마주
앉아 있기는 처음이다.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려는 강한석이 다시
웃었다. 그러자 잇몸이 드러나 보였다.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잘 아시다시피 요즘 정국이 혼란스러워요. 각하께서도 심려가 많
으시고.문제는 김원국을 소탕하는 것뿐인데 조만간에 정리될 겁니
다. "
   "대표 위원께서는 오해하고 계십니다. "
   임종휘가 따라 웃으며 말했다
   "나는 대표 위원님을 염려하고 있는 겁니다. 김원국 문제가 아니
예요."
   "날 염려하다뇨?"
    웃음기가 가신 얼굴로 강한석이 물었다.
                                          경기장의 두 사람 289
   "대표 위원께서는 요즘 정국에서 제외되신 것 같습니다. "
   "뭐라구요?"
    강한석이 두 눈을 치켜떴다. 그에게는 이보다 더 모욕적인 표현은
없다.
   "내가 정국에서 제외되다니? 무슨 말을 그렇게‥‥‥‥
   "각하께서는 더이상 대표 위원님을 신뢰하고 계신 것 같지 않습니
다. "
   "예민하시니까 눈치를 채셨겠지요. 대통령과 총리는 대표 위원을
겉돌게 하고 있습니다. 아마 다음달 쯤에서 전당 대회가 열리겠지요
그전에 대표 위원의 실책에 대한 내부 반발이 있을 것이고‥‥‥‥
   "요즘 각하와 독대할 기회가 없으셨지요? 한 달이 넘도록 말입니
다. 하지만 총리는 세 번, 이찬형씨가 두 번 각하를 만났지요, 고성섭
과 함께 "
   "이찬형이가?"
   강한석의 얼굴이 금방 나무 껍질처럼 딱딱해졌다.
   "그 사람이 왜?"
   "나와 대표 위원과의 관계,이무섭이나 이철우 등의 관계에 대해
서 이야기를 나누었을 겁니다. "
   "나는 아직도 정보력이 왜 있습니다. 정보는 핏줄입니다. 피가끊
기떤 사람은 오래 가지 않아 죽어요."
290 밤의 대통령 제2부 -템
   "이찬형이가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보고서를 내었어요. 그것을 각
하가 심각하게 검토한 것 같습니다. "
   "말도 안되는 소리 ."
   "현실을 부정하지 말아요. 우린 시간이 없습니다. 이 상황을 돌파
해 나가야 해요. 그래서 내가 우리가 같은 배를 타고 있다고 말씀 드
린 거요."
   "각하를 만나겠소. 만나서 해명해 드릴 거요."
   "이미 늦었습니다. 각하의 결심은 굳어져 있을 겁니다. 차기 대표
위원은 장희만 총리나 이찬형 전 안기부장 둘 중의 하나가 될 거요."
   "대표 위원과 나는 내란음모죄로 구속될지도 모릅니다. "
   "이것봐요, 말을 함부로 하지 말아요."
   강한석이 눈을 부릅떠 임종휘를 노려보았다.
   "그건 당신이 한 일이지 나하고는 상관이 없어! 그런 식으로 날 끌
어들였다가는 당장에 당신을 고발하겠어."
   "이미 늦었다고 말씀 드렸지요."
   임종휘의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내가 얼마나 대표 위원께서 차기 대통령이 되기를 바랐는줄 아
십니까? 그것을 내가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 주기를 바라십니까?"
   입을 쩍 벌린 강한석이 멀거니 임종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방법이 있지요. 아직도 기회는 있다는 말인데
   찻잔을 든 임종휘가 녹차를 한모금 삼켰다.
   "경찰청장이 곧 바뀌게 된다는 건 알고 계시지요?"
    한동안 임종휘를 바라보던 강한석이 이윽고 머리를 끄덕였다
                                           경기장의 두 사람 291
   "준비를 서둘러야 합니다. 늦으면 안돼요."
   임종휘가 찻잔을 내려놓고는 강한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얼굴의
표정이 어느 사이에 굳어져 있었는데 그를 바라보는 강한석은 아직
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임종휘의 다음 말을 기다
리는 표정이었다.
   손채석은 턱을 조금 치켜든 얼굴로 벽을 바라보았고 이강일은 그
와 반대로 방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 명 모두 방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것이 얼핏 보면 학생
이 벌을 받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들의 앞쪽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것은 조웅남이다.
   그는 물컵에 따른 소주를 냉수 마시듯이 벌컥이며 삼키고는 물컵
을 내려놓았다
   "느그덜도 한잔씩 혀라."
   "예, 형님 ."
   대답은 얼른 하였지만 손채석은 앞에 놓인 잔에 손을 내밀지 않았
다. 그 옆에 앉은 이강일은 주춤거리며 조웅남과 손채석의 눈치를 살
피다가 역시 술잔을 잡지 않는다. 그는 아래층에서 심부름을 왔다가
조웅남에게 잡힌 몸이 되었던 것이다.
   "내가 술에 약혀졌어. 왕년에 소주 30병은 족히 먹었는디 ."
   물컵에 소주를 따르며 조웅남이 말했다. 벌써 빈 소주병 7,8개가
한쪽으로 놓여져 있다.
   "지금은 열댓 병만 먹어도 알딸딸허단 말여."
   스무 번도 더 듣는 이야기였으므로 손채석은 잠자코 벽을 바라보
292 밤의 대통령 제2부 -3
았다. 그는 이제 조웅남의 레퍼토리를 훤히 외우고 있었다. 술 이야
기 다음에는 오유철의 이야기였고 마지막에는 강만철 순서가 된다.
조웅남이 말을 이었다.
   "내가 유철이허고 제수씨를 합장시켜 주고 말여, 쇠주를 덕었는디
한 50병은 먹었을 거여.근디 배만 불르고 하나도 안 취혀.그리서
오짐을 합는디 오짐에서 술 냄새가 나더란 말여."
   그는 다시 별컥이며 술을 삼켰다.
   이강일이 힐끗 손채석을 바라보았다. 좀이 쑤시는지 연신 몸을 꼼
지락거리고 있었다. 술잔을 내려놓은 조웅남이 말을 이었다.
   "그리서 양푼에다가 오짐을 받어서 마셔 봉게로 그것이 쇠주여
하,그것 참, 희한허드만.그리서 그걸 마셨당게.술병을 깔 필요가
없었단 말여 오짐싼 걸 마시고, 또 싸고, 마시고."
   방문이 열리더니 부하 한 명이 전화기를 손에 쥐고 들어섰다.
   "형님, 전화가 연결되었습니다 "
   조웅남이 수화기를 받더니 귀에 대었다.
   "여보시오."
   "여보세요, 저예요."
   만탄 섬에 있는 김경지의 목소리가또켠하게 귀에 들렸다 조웅남
은 트림을 했다.
   "거시기, 제수씨 바꿔."
   "아이 참, 오랜만에 목소리 들었는데‥‥‥‥
   투정이 섞인 김경지의 목소리는 그래도 반가움에 밝게 들렸다. 섬
에 온 후 처음 받는 전화인 것이다.
   "별일 없으시죠?식사 제때에 하시구요?"
                                          경기장의 두 사람 293
   "그려, 잘 있어, 근디 제수씨 얼릉 바꿔."
   "영옥이 엄마 말씀이세요?"
   "이런 지기미 ."
   조웅남이 와락 이맛살을 찌푸렸다.
   "거시기 상도동 말여, 상도동."
   상도동은 강만철이 살았던 곳이다.
   "어쩌나,지금 묘지에 갔는데. 형님하고 태훈이 묘를 손질한다고
영옥이 엄마하고 이재영씨하고 같이 갔어요."
   "뭐여?"
   조웅남이 눈을 껌벅이며 앞에 앉은 손채석을 바라보았다.
   "뭐라고 혔어? 시방, 태훈이 묘에 갔다고?"
   "네, 묘에 풀들이 많이 자라서요."
   침을 삼키고 난 조웅남이 숨을 커다랗게 들이마셨다.
   "태훈이가 묘지에 왜?"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가 형님하고 태훈이 묘도 돌보는 것
은 당연한 일인데. 우린 매일 묘지에 가요."
   "죽었어?"
   손채석은 조웅남의 눈에 초점이 잡혀 있지 않은 것을 보았다 반
쯤 벌린 입가에 술인지 침인지는 모르지만 물기가 흘러 나와 있다.
   "긍게, 죽었단 말여? 그러고 형수님은 또 무슨‥‥‥‥
   "당신,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동문서답 비슷하게 조웅남과 말을 주고받던 김경지가 이제는 짜증
을 내었다.
   "당신, 술 마셨어요?"
294 밤의 대통령 제2부 -린
   "묘지에 있단 말여, 형수님허고 태훈이가?"
   "그래요. 편히 잠들고 계세요."
   "언지 죽었는디?"
   그러자 김경지가 말을 멈추었다. 무언가 이상한 것이다.
   "빨리 말 안혀?"
   조웅남이 버럭 고함을 치자 앞에 앉아 있던 이강일이 번쩍 상체를
세웠다. 손채석은 이제 술잔을 내려다보고 있다. 수화기를 내던진 조
웅남이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그는 방문을 박차고 나가서는 곧장 아
래채의 현관으로 들어섰다. 방에서 나오던 김칠성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너, 이 시키, 이리 좀 와. "
   그는 김칠성의 멱살을 움켜쥐고는 방으로 끌었다. 집안에 있던 부
하들이 놀라 움직임을 멈추었고 김칠성이 그의 팔을 쥐었다.
   "왜 이러는 거요, 형님?"
   "나는 니 형님 아녀. 너 같은 동생 없고."
   입맛을 다신 김칠성이 멱살을 잡힌 채 방으로 발을 옮겼다.
   "너 이 시키 ."
   방문이 닫히자조웅남이 김칠성을 벽에다 세차게 밀어붙였다. 얼
굴이 검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악문 잇사이에서 지독한 술법새가풍
겨 나왔다.
   "도대체 왜 ‥‥‥‥
   김칠성도 눈을 치켜떴다.
   "대낮부터 술마시고 이게 뭡니까?"
   "이 씨발놈아, 형수씨허고 태훈이가 죽었담서?"
                                          경기장의 두 사람 295
   악문 잇사이로 조웅남의 말소리가 흘러 나오자 김칠성이 온몸을
굳혔다
   "왜 나헌티는 말 안혔냐? 나는 형제간 아니냐, 이 씨발놈아?"
   "형님 "
   "내가 미친놈이 될랑가 겁나서 그렸냐?"
     "왜 나헌티만, 나헌티만 말 안허고·
    "형님."
    "어이고, 어쩐디야."
    갑자기 김칠성에게서 떨어져 나간조웅남이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
 았다.
    그는 두 손으로 방바닥을 짚은 채 머리를 숙이고 있었으므로 그의
앞에 선 김칠성에게 절을 하는 모습이 되었다.
    "어이고, 형님 ‥‥‥‥
    조웅남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몸을 비껴 조웅남의 옆으로 다가
온 김칠성이 무릎을 꿇었다.
    "형님."
    그러자 조웅남이 번쩍 머리를 들었다.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칠성아, 형수씨허고 태훈이는 어뜨케 죽었냐?"
   "고통없이 죽었습니다. 만철 형님이 그렇게 말했어요.저는못 봤
습니다. "
   "갸가 봤다냐?"
   "예, 봤답니다. "
296 밤의 대통령 제2부 -lif
"직사혔단 말이지?"
‥‥‥‥fl."
"그 씨발놈은 그리서 죽었고만."
   "긍게로 섬에 묘똥이 세 개고만."
   "형님, 죄송합니다. "
    김칠성이 머리를 떨구었다.
   "저도 그때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녀, 다 이해혀."
   조웅남이 손을 들어 김칠성의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
   "니가 살어서 다행여. 만철이가 죽은 것도 이해허고. 나헌티 말들
을 안혀 준 것도 그 속 다 알어. 그런디 형수씨허고 태훈이가 죽은
것은 이해 못혀."
   조웅남은 소매를 들어 눈물을 훔쳤다.
   "갸들이, 아니 형수씨허고 태훈이가 무신 죄가 있다고."
   이제는 김칠성이 손바닥으로 눈을 씻었다.
   김연수 경위는 차 안에 들어가 앉자 카폰을 꺼내어 빠른 동작으로
다이얼을 눌렀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강 순경이 백미러로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아침 출근 시간이어서 길가에 세워 둔 그들의 승용차 옆
으로 차량들의 행렬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신호음이 들리자 김 경위
는 허리를 세우고는 카폰을 힘주어 잡았다.
   "여보세요."
   "과징림, 접니다. 김 계장입니다. "
                                         경기장의 두 사람 297
   "그래 , 어떻게 되었어?"
   기다리고 있던 양인재 경감이 서두르듯 물었다. 그는 방배 경찰서
의 직속 상관이었다.
   "연립 주택 세 채에 나누어 살고 있습니다. 인원은 모두 열 명 정
도, 입주한 지는 일주일 가량 되었다고 합니다. "
   "김원국이나 조웅남, 그놈들을 보았다는 사람은 없고?"
   "바깥 출입을 좀체로 하지 않고,밤에만 외출해서 어디 술집 종업
원들인 줄 알고들 있던데요. 부동산에서 계약한 것은 이민철과 정훈,
강용식 세 사람 이름으로 되어 있습니다. "
   "놈들은 지금 집에 있나?"
   "네, 과장님. 그런 것 같습니다. "
   "그런 것 같다니?"
   "모두 문이 잠겨 있어서요."
   "지금 몇 명 데리고 있지?"
   "형사반원 다섯 명을 데리고 왔는데요."
   "기다려, 잠시 후에 연락할테니 까."
   전화가 끊겼으므로 김연수는 머리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흐
린 날씨여서 아침부터 눅눅하다 했더니 흰 눈이 내리고 있었다. 출·근
길을 서두르는 사람들을 헤치고 오 형사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
는 머리에 붙은 흰 눈을 털더니 차의 앞자리로 들어왔다.
   "계장님, 2층과 3층으로 나누어 살고 있는데 무작정 조사하러 들
어갔다가는 봉변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
   40대 중반의 오 형사는 행동이 다소 느린 것이 흠이지만 수사에는
베테랑이다. 그리고 관내에 있는 여관이나 음식점, 하다못해 포장마
298 밤의 대통령 제2부 -lB
차에 이르기까지 달달 외우고 있는 고참이었다. 연립 주택 세 채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전세로 나가고 입주자가음식점 종업원과 회사
의 독신사원들이라는 정보를 얻어 온 것도 그였다.
   그는 이틀 밤낮을 꼬박 연립 주택 부근을 배회하면서 동정을 살피
다가 김연수에게 보고했던 것이다. 만일 입주자들이 김원국 일당이
라면 오 형사는 일계급 특진에 5천만 원의 보상금을 받게 될 것이다.
   "과장님이 다시 연락한다고 했으니까 기다리자구.이봐, 조 형사
랑 딴 사람들은 그쪽에 있지?"
   김연수가 묻자 오 형사가 머리를 끄덕였다
   "예, 출입구가 두 곳인데 양쪽을 감시하고 있어요. 하지만 여기는
지대가높은 데다가 찻길이 좁고 골목이 많아서 인원이 많이 필요하
겠습니다. "
   "인원이야 얼마든지 있어. 연립 주택을 통째로 포위해도 돼."
   그때 카폰이 울렸다. 서둘러 전화기를 wur든 김연수가 귀에 대었다.
   "김 계장입니다. "
   "나야. 서장이 청장에게 보고했어. 청장의 지시가 곧 내려질 거야.
 1때까지 잘 감시해야 돼."
   과장의 목소리였다.
   "알겠습니다, 과장님 "
   "놈들이 눈치채지 않도록 주의하고."
   "염려하지 마십시오. "
   "이번 청장은 전의 박동호 청장하고는 성격이 다른 모양이야.서
장 이야기로는 신중한 성격이래 ."
   이쪽의 김이 빠질 것을 염려했는지 과장은 묻지도 않은 말까지 해
                                            경기장의 두 사람 299
주었다. 하긴 박동호 같았으면 당장에 기동대를 동원하고 인근 경찰
서의 지원을 받는 등 난리를 피웠을 것이다. 카폰을 내려놓은 김연수
가 머리를 들자 그를 바라보던 오 형사와 시선이 마주쳤다.
   "청장이 기다리래, 곧 지시를 내리겠다고."
   "새로 온 청장 말이군요?"
   머리를 끄덕인 오 형사가 물었다.
   "그 양반, 간판하게 일한다고 소문났던데."
   "그런 모양이야."
   "그 양반이 오고 나서 일주일이 되었는데 이상하게도 김원국 일당
의 테러가 없었습니다. "
   "청장이 무서워서 숨은 모양이군 그래 "
   웃음 띈 얼굴로 김연수가 말하자 오 형사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
내 물었다.
   "저도 그래요. 놈들을 잡아서 특진에 상금도 타고 싶지만 왠지 놈
들이 밉지가 않습니다. "
   "무슨 쓸데없는 소리야?밉고 곱고가 어디 있어?법을 어기면 잡
는 거지 . "
   "그거야 당연한 일이지만 아마 약자를 동정하는 심리인가 봐요.
  1건 저뿐만이 아닙니다. "
   "이런 제기, 총리가 인터뷰를 하고 나서 경찰들까지 이런 물이 들
었다니까."
   김연수가 혀를 찼다. 눈발이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출근 시간이
막 지나서 거리가 조금 한가해져 있었다. 옆쪽을 차들이 눈가루를 흩
날리며 달려나갔다.
300 밤의 대통령 제2부 -iB
   김연수는 시계를 내려다보고는 길게 하품을 했다. 어차피 다섯 명
을 가지고는 일을 하지 못한다. 상부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만 하는 것이다.
   "이봐, 차를 저기 안쪽에다 대. 그리고 오 형사, 당신은 조 형사하
고 민 형사한테 가서 기다리라고 전하고 와.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심
하라고 하고."
   김연수가덕을들어 앞쪽을가리키며 말하자오 형사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김연수는 입을 다셨다. 오 형사에게 잔소리는 하였지
만 맥이 떨어지는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문창인 청장은 한동안 앞쪽의 벽을 바라보았
다. 넓은 얼굴에 턱이 사긱헝이어서 다부져 보이는 인상이었고 머리
는 반백으로 단정히 뒤로 넘겨져 있었다.
   이윽고 벽에서 시선을 뗀 그는손을 뻗어 책상 옆에 내려놓은 무
선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생각난 듯이 가슴 안주머니를 뒤
져 조그만 수첩을 꺼내어 펼쳤다 전화기의 스위치를 올린 그는 수첩
에 적힌 번호를 바라보며 다이얼을 하나씩 눌러 나갔다. 신호가 가는
동안 그는 상체를 똑바로 세운 채 굳은 얼굴이 되었다.
   "여보세요."
   사내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아, 난 경찰청장 문창인입니다. 고성섭씨 계신가요?"
   "접니다. 그런데 청장께서 웬일로‥‥‥‥
   청와대에서 파견 근무를 하고 있다가 경찰청장으로 임명된 문창인
이었다. 고성섭을 청와대에서 두 번쯤 만난 일이 있지만 길게 이야기
                                           경기장의 두 사람 301
를 나눈 사이는 아니었다.
   "말씀 드릴 일이 있어서요. 기밀 사항인데 옆에 누가 있습니까?"
   "아니, 저 혼자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
   문창인은 어깨를 올리면서 숨을 들이마셨다가 뱉어냈다.
   "저, 지금 김원국씨 조직원이 기거하고 있는 숙소가 포착되었어
요. 방배 경찰서의 형사들이 감시하고 있는데 ."
   저쪽은 긴장한 듯 입을 다물고 있다.
   "저로서는 연락할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고 차장께서는 연락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됩니다. "
   고성섭이 자르듯 말했다.
   "지금 감시당하고 있습니까?"
   "네, 아직 기동대는 보류시키고 있는데, 시간이 촉박합니다. "
   "알겠습니다. 그럼 전화 끊습니다 "
   저쪽에서 먼저 전화를 끊었으므로 문창인은 천천히 전화기의 스위
치를 내렸다.
   특실은 열 사람이 앉아도 충분할 만큼 넓었다. 장방형의 탁자 위
에는유리판이 깔려 있었고 그들이 앉아있는소파는흰색의 가죽제
품이었다. 탁자 위에 놓여진 고급 위스키와 꼬박 사이로 안주가 정갈
하게 놓여 있다. 정성스럽게 차린 술상이었다.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은 안정태는 주위를 둘러보던 시선을 멈추
었다. 이곳은 박용근이 관리하는 명성 클럽의 특실이다.
   "자, 듭시다. 우선 목부터 축이고‥‥‥‥
302 밤의 대통령 제2부 -lB
   박용근이 잔을 들어올렸다. 이미 그의 벗겨진 머리는 붉게 달아을
라 있었다.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한모금을 마시고 난 안정태는 박
용근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박 사장님, 술은 천천히 마셔도 되니까 우선 이야기부터 들어 봅
Al다. "
   "이야기는 무슨, 우리끼리 친선을 도모하는 것이지요."
   술잔을 내려놓은 박용근이 튀어나온 배를 흔들며 웃었다.
   "요즘 돌아가는 모양을 보니 어쩐지 허전해서 안형을 모신 겁니
다. 이형을 함께 모시려고 했는데 그쪽은 바쁜 일이 있으셔서 ‥‥‥‥
   "그렇습니까?난또 말씀하실 이야기가 있다고 해서 긴장하고 있
었지요."
   안정태가 흰 이를 보이며 따라 웃었다
   "단장님 말씀대로 서로 도우면서 지내야지요. 이런 자리를 만들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
   "원 천만에요."
   박용근이 민망한 듯 한 손을 들어 보였다.
   "요즘은 일주일이 넘는 동안 김원국이 사건을 일으키지 않았어요
그래서 주변을 정리할 건 하고 인원 보충이나 조직 배치도 다시 마무
리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렇게 모신 거지요."
   술잔을 들어 위스키를 한모금 삼킨 안정태가 머리를 끄덕였다.
   "제가 오면서 둘러봐도 그렇고 듣기로도 조직 관리는 뛰어나신 것
같습니다. 이젠 단단히 기반을 굳히셨어요."
   "아니 부끄럽게 무슨 말씀을‥‥‥ 그런데 신임 경찰청장은 대통령
의 신임이 각별한 모양이지요?"
                                            경기장의 두 사람 303
   박용근이 묻자 안정태가 머리를 ll덕였다.
   "아무래도 청와대에서 파견 근무를 하면서 각하를 많이 뵈었을테
니까요."
   "박동호씨하고는 스타일이 다르다고 하던데 "
   "손자병법에 전대의 왕이 강압 정치를 하였으면 새로운 왕은 국민
들을 제한과 속박에서 풀어놓아 주어야 기뻐한다고 씌어 있지요. 신
임 청장이 아마 그대로 하는 모양입니다. "
   "인기 전술이겠지요."
   "어쨌든 국민의 인기를 얻어야 투표에도 당선되는 것이니까요. 인
기 따로 투표 따로 하지는 않습니다. "
   안정태는 자신의 빈잔에 위스키를 채웠다. 박용근이 술기운에 붉
어진 얼굴을 들고는 안정태를 바라보았다.
   "지난번 이형 이야기를 하셨을 때 솔직히 고민을 조금 했지요. 내
가 집착이 조금 강한 편입니다. 미련을 쉽게 버리지 못해요. 그래서
며칠간 생각을 했는데‥‥‥‥
   "안형께서 제 업체 몇 군데를 관리하고 싶으시다면 말씀하세요
이건 단장님이 조정하실 문제도 아니니까 말씀하시면 내가 검토하겠
습니다. "
   "아니, 박 사장림,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안정태가 정색을 했다.
   "제가 언제, 그리고 이 고문님도 지금 관리하고 계신 업체들을 다
시 점검하느라고 바쁘신 모양이에요. 그럴 경황이 없으실 겁니다. "
   "그렇다면 말씀하실 때까지 기다리지요."
304 밤의 대통령 제2부 -lU
   조그맣게 머리를 끄덕인 박용근이 말했다.
   "요즘 강한석씨가 핵심에서 벗어나 겉돌고 있다던데 괜찮을까
요?"
   "글쎄요, 그건 잘‥‥‥ 하지만 그 사람하고 우리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안정태가 부드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건 단장님께 의지하면 되겠지요. 우리와는 상관 없습니다. "
   "어쨌든 박 사징힘은 우리 중제일 연장이시고 이 세계에 먼저 발
을 디디신 데다가 기반을 굳혀서 저희들이 들어오는 발판을 만들어
주셨지요. 군대말로 전입고참이란 말도 있지 않습니까?"
   "어디 제가 혼자서 한 일입니까?두 분 아니 모두가 도와주신 덕
분인데. "
   말을 마친 박용근이 안정태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안형, 여자들을 부르지요. 모처럼 흥을 내어 술 한잔하십시다. "
   "좋습니다. 봐서 회포까지 풀고 돌아가지요."
   박용근이 손을 뻗어 옆쪽에 놓인 탁자 위의 벨을 눌렀다. 십초도
되지 않아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사내 한 명이 들어와 섰다.
   "여자들을 들여보내라."
   박용근이 던지듯 말하자 그는 몸을 돌렸다.
   문이 열리고다시 닫힐 때까지 바깥의 음악소리가 희미하게 들렸
다가 다시 방안은 적막에 싸였다. 그들은 시선을 두어 번 마주쳤고
그때마다 입술로 웃으면서 머리를 돌렸다.
   곧 방문이 열리더니 사내 뒤를 따라 여자 두 명이 들어섰다. 그들
                                           경기장의 두 사람 305
은 미리 지시를 받은듯 잠자코 박용근과안정태의 옆자리에 앉았는
데 박용근의 옆자리에 앉은 것은 이혜경이다.
   그녀는 안정태와 시선이 마주치자 기볍게 머리를 숙여 보였다. 박
용근이 팔을 뻗어 이혜경의 어깨를 끌어당겨 안았다. 그녀가 잠자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대었다.
"이 여자는 내가 요즘 귀여워하고 있는 여자지요,

들으셨을 줄로 압니다만."
박용근의 말에 안정태가 이혜경을 바라보며 웃었다.

흰 이를 드러내는 밝은 웃음이었다.
"들었습니다. 물론 알고 있는 여자지요."
"이 기회에 보여 드리고도 싶었습니다.

그리고 안형의 기분이 언 많으시다면 가까이 하지 않겠습니다. "
"원 천만의 말씀을."
정색을 한 안정태가 한 손을 들어 저어 보였다.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힘든 일인줄 알고 있는데,그렇게까‥‥‥ 
"그렇다면 되었습니다 "
박용근이 밝은 얼굴로 이혜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해하실 줄도 알았구요."
"박 사장님은 철저하십니다,

말씀하시는 것이나 행동하시는 것이 오늘 새삼스럽게 느꼈습니다. "
술잔을들며 안정태가박용근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의 얼굴은 환하게 펴져 있었다.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안재일이 들어섰다.

그는 안정태를 향해 머리를 숙여 보이고는 박용근을 바라보았다.             
-사장님,경찰청의 김 경감이 잠깐 뵙자고 하는데요.

지금 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
"아니, 그 사람이 갑자기 왜?"

박용근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자네가 알아서 처리해. 난 외출했다고 하고 말야."
"계신지 알고 있습니다. "
그러자 방문이 열리더니 최춘식이 들어섰다

안정태의 심복으로 눈에 철창이 많은 장신의 사내이다.

그는문 옆으로 비켜 서서 잠자코 그들을 바라보았다.
"잠깐이면 된다는데요, 사장님." 

재촉하듯 말하자
뒤쪽에 서 있는 최춘식을 힐괏 바라본 안재일이 박용근이 혀를 찼다.
"어디에 있어?"
"저기, 사무실에 있습니다. "
박용근이 안정태를 향해 몸을 돌렸다.
u안형, 경찰청에서 난데없이 손님이 찾아와서 요.

김 경감이라고 이쪽 담당인데 ‥‥‥‥ 
"사무실에 있습니까?"
안정태가 부드러운 얼굴로 묻자 박용근이 머리를 끄덕였다.
"기다리고 있는 모양입니다. "
"언제 왔는데?"
그가 안재일을 향해 머리를 돌려 물었다.
"예, 조금 전에 ."
"그렇다면 나에게 연락이 왔어야 하는데 ."
그러자 최춘식이 입을 열었다.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
모두들 머리를 돌려 최춘식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렇게 물은 것은 박용근이다.

그는 안재일과 최춘식을 번갈아 바라보며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구?"
안정태가 입술 끝으로 웃었다.
"박 사장님, 만일 밖에서 손님이 들어오면 나에게 즉시 연락이 오기로 되어 있지요.

안 온 것이 틀림없습니다. "
"아니, 그렇다면‥‥‥‥ 
"박 사장님의 계획이 틀어진 것이지요."
"아니, 뭐요?"
"네가 말해 봐라 "
안정태가 최춘식을 바라보았다.

표정 없는 얼굴로 최춘식이 입을 열었다.
"홀 안에 있던 세 놈은 조금 전에 해치웠습니다. 흘의 무대 뒤에 숨어 있더군요."
"그렇다면 흘 안에 아무도 들여놓지 않았던 것이 아니군."
"예, 세 놈은 모두 소음기가 낀 권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안정태가 머리를 끄덕이며 박용근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럼 누군가를 만나러 방을 나가신 다음에 그놈들을 이 방으로 들여보낼 생각이셨습니까?"
"아니, 안형 ‥‥‥‥ 
박용근이 선 채로 눈을 치켜떴다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나는‥‥‥ 
"박 사장님이 나를 제거할 이유는 하나뿐이지요. 이철우와 손을 잡은 경우인데 ."
"아니 ‥‥‥‥ 
안재일이 주춤 몸을 움직이는 순간

어느 사이에 꺼내 든 최춘식의 권총이 그의 옆구리를 뚫었다.

권총에서는 둔탁한 소리만 들렸는데 소음기를 끼웠기 때문이다.

눈을 하알게 치켜뜬 안재일이 옆구리를 움켜쥐고 탁자 위로 쓰러졌다.
술병이 넘어지고 안주 접시가 엎어졌다. 

여자들이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비명을 억눌러 참는다.

최춘식이 쥐고 있는 권총의 총구가 이제 박용근의 가슴을 향해 겨누어졌다.
"내가 여기까지 찾아왔을 때 그저 대비 없이 왔다고 생각한 모양인데."
안정태의 말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네가 이철우와 두 번 접촉했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리고 나를 초대한 이유도 석연치 않았고. 뭐? 조직 관리를 맡기겠다고?"
안정태는 바지 뒤쪽 혁대에 찔러 넣은 권총을 꺼내어 들었다.

소음기가 끼워진 권총은 금속성 빛을 반사하며 번쩍였다.
"이철우가 제 손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하는군."
"이것봐요, 안형, 나는‥‥‥‥ 
박용근이 한 손을 저으며 입을 열었으나 그 순간 안정태의 권총에서 흰 불꽃이 튀었다.

가슴을 움켜쥔 박용근이 소파 위로 털썩 주저 앉았다.

안정태는 다시 권총을 그의 이마에 겨누었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침착한 태도였다

다시 둔한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었고 이마에 구멍이 뚫린 박용근이 머리를 뒤쪽으로 눕혔다.
"이것들도 없애라."
몸을 돌린 안정태가 여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의 시선이 이혜경을 스쳤으나 머물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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