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전남기념물

전라남도 기념물 제79호 충효리정려비각 <해지>

오늘의 쉼터 2014. 5. 18. 10:27

 

 

종 목 전라남도 기념물  제79호 
명 칭 충효리정려비각 (忠孝里旌閭碑閣)
분 류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인물기념/ 사우
수량/면적 일원
지정(등록)일 1985.02.23~1986.11.01
소 재 지 전남 전남전역광주시 충효동 440
시 대 ??
소유자(소유단체) ??
관리자(관리단체) ??
상 세 문 의 전라남도 
 
일반설명
 
임진왜란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충장공 김덕령 장군과 그 부인 흥양 이씨, 그형 덕홍과 아우 덕보 등 일가족의 충,효,열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비각이다. 1788년(정조12)왕명으로 '충효리'라는 마을 이름을 하사 받고 이듬해 그 유래를 밝힌 이 비는 1792년(정조16)에 처음 세웠다
비석의 비각은 정면3칸 측면1칸의 맞배지붕으로 전면에는 '조선국증좌찬성 충장공김덕령 증정경부인 흥양이씨 충효지리'라고 새겨져 있다. 비각은 삼문과 담장으로 둘러져 있다.

 

전문설명

 

충장공 김덕령(1567~1596)장군과 그의 부인 흥양 이씨, 그 형 덕홍과 동생 덕진 일가족의 충, 효, 열을 기리기 위해 충효리 마을앞에 세운 비각이다.
이것이 여느 문과 다른 것은 이 비각 앞의 현판에 새겨 있는 내용에서
"...1788년 정조가 윤음으로서, 표리비를 세우라" 이르고,
충효지리[忠孝之里]라는 마을 이름을 지어 하사한 점이다.
비는 1789년(정조 13년)에 세운 것으로 전면에는 비명 [朝鮮國贈左贊成忠壯公金
德齡 贈貞敬夫人 興梁李氏 忠孝之里]가 3행으로 새겨져 있다.
이 면에는 정헌대부호조판서 서유린이 選하고 全羅道觀察使 서용보가 쓴 음기가 새겨져 있다.
비의 크기는 총 높이 220Cm, 기단 높이 110Cm, 비신 높이 171Cm, 비신 너비68Cm이며 비갓이 얹혀 있다. 비각은 정면 3칸, 측면1칸의 맞배지붕이며 삼문과 담장으로 둘러져 있다.
비각의 건립 연대는 1792년이며, 그 뒤 수 차례의 중수를 거쳤다.
비각 전면에는 전주부윤 한용구가 쓴 정조어제윤음[正祖御製倫音]이란 현판이 있다.
비문에 나타난 김덕령 일가의 사적은 다음과 같다.
김덕령 : 자는 경수 본관은 光山이며 오계 성혼에게서 글을 배웠다.
임진왜란때 형 덕홍이 금산 전투에서 전사하자 상중임에도 의거하여 담양부사 이경린,
장성현감 이귀의 천거로 종군의 명을 받고 의병을 모아 남원에서 훈련을 마친 뒤 선전관에 임명되어 권율 휘하에서 왜의 호남진출을 막는 데 힘썼다.
1594년 진해, 고성에 나가 의병장 곽재우와 협력하여 왜병을 물리치고 1595년에는 고성에 상륙하는 적을 격퇴하였다.

1596년 도체찰사 윤근수의 노비가 상전의 권세를 믿고 군율을 어기므로 장살하여 한 때 체포되었으나, 왕명으로 석방되자 대신들과의 사이에 갈등이 생기게 되었다. 때마침 이몽학의 난으로 그와 내통했다는 모함을 받아 옥사했다.
후에 복권되어 1788년 의정부좌성에 추증되고 충장의 시호를 받았다.
흥양이씨 : (?-1597): 김덕령 장군의 부인으로 정유재란 때 왜병의 추격을 받고 순절했다.    
김덕홍(1558-15920): 김덕령 장군의 형이며 호는 성암이다. 우계 성혼의 문인이며 임진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고경명 휘하에 참여하여 의주행재소로 가던 중 금산에서 왜병과 싸우다 전사했다.
김덕진(1571-1627): 김덕령의 아우이며 자는 자룡, 호는 풍암이다. 효성이 지극했다.
두 형을 잃은 뒤 다시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지리산 백운동에서 난을 피하여 겨우 가계를 보존했다. 난 후에 풍암정을 짓고 독서로 일생을 보냈는데 인조때 잠시 창릉 참봉으로 나가 있다가 더 이상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은거하였다.
1785년에 집의(執義)에 추증되었다.

 

 

해지사유 : 행정구역 개편으로 광주시 기념물 4호로 재지정 됨.

 

 

 

 

 충효리정려비각

 

충효리정려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