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전남기념물

전라남도 기념물 제72호 양씨삼강문 <해지>

오늘의 쉼터 2014. 5. 18. 08:44

 

종 목 전라남도 기념물  제72호 
명 칭 양씨삼강문 (梁氏三綱門)
분 류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인물기념/ 사우
수량/면적 일원
지정(등록)일 1985.02.25~1987.12.31
소 재 지 전남 전남전역광산군 송정읍 박호리 131-1 박산마을
시 대 조선
소유자(소유단체) 사유
관리자(관리단체) 양승용
상 세 문 의 전라남도 
 
일반설명
 
전남광주시 광산구 박호동에 양씨삼강문(梁氏三綱門)이 서있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순절한 양산숙(梁山璹) 등 제주양씨 일가 7인의 충 효 열행을 기리는 정려문으로 1635년(인조 13)에 세워졌다. 이곳에는 충신 양산숙을 비롯하여 양산숙의 형제인 양산룡과 양산수, 양산숙의 모친 죽산박씨, 처 광산이씨, 양산룡의 딸인 김광운 처 양씨와 회진 임모씨 처 양씨 등이다. 이들 중 회진임씨 문중으로 출가한 양씨는 임씨 문중에서 모시고 있어 현재는 양산숙을 포함하여 모두 6명의 정려만을 모시고 있다. 이가운데 양산숙(1561-1593)은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광주시 박호동에서 대사성 양웅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천문, 지리, 병법에 밝아 삼량면 현종촌 (현 무안군 삼향면)에 살면서 전란이 있을 것을 미리 알고 보행과 수영 연습을 하면서 대비하였다. 1591년(선조 24)에는 전란에 대비하자는 상소를 올렸다가 세상에서 미친 사람 취급을 받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큰형 산룡과 함께 의병장 김천일 장군의 참모가 되어 수원 전투와 금령 전투에서 왜병을 크게 격파하였다. 김천일은 국왕에게 승전 소식을 보고하는 장계(狀啓)를 써서 그에게 맡겼다. 그는 곽현과 함께 낮에는 숨고 밤에만 걸어서 의주까지 가서 선조에게 승전소식을 보고하고, 아울러 한강 이남의 상황과 의병들의 활동을 보고하였다. 선조는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공조좌랑을 제수하고, 김천일 및 삼남지방의 관찰사와 의병장들을 격려하는 교서(敎書)를 전해주면서, “돌아가 네 장수 김천일에게 전하라. 하루 속히 이겨서 짐이 삼각산과 한강을 다시 볼 수 있게 하라”는 분부를 내렸다. 그러나 그는 다음해 진주성 2차 전투에서 김천일 장군과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양산룡과 양산수는 효자이다. 이들은 정유재란(1597) 때 모친 죽산박씨를 모시고 피난하다가 삼양포에서 왜군을 만났다. 이 때 죽산박씨는 바다에 투신하여 순절하였고, 양산룡과 양산수는 어머니를 구하려다 같이 순절하였다. 김광운에게 출가한 양산룡의 딸은 나주 회진에서 왜적에게 붙잡혀 압송되던 중에 영산강에 투신하여 순절하였다. 양산숙의 처 광산이씨 또한 정유재란 때 무안 승달산에서 왜적을 만나 자결하였다.

고봉 기대승이 임류정에서 읊은 시를 소개한다.

 

소나무 끝에 맑은 달 유유히 떠오르니 松梢淸月上悠悠
술을 잡고 물에 임해 모든 걱정 흩노라 把酒臨流散百憂
인간 세상에 몇 번이나 영췌를 보았던가 人世幾看榮又悴
취중에도 이 인생 떠 있음을 알겠네. 醉中渾覺此生浮

 
<고봉선생문집 권1 - 임류정에서 공섭이 화답하기에 다시 차운하다[臨流亭公燮和韻復次之] >

 

해지사유 : 행정구역 개편으로 광주시로 이관

 

 

 

 양씨삼강문

 

 양씨삼강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