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대전문화재자료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51호 권시 묘

오늘의 쉼터 2012. 6. 28. 20:31

 

 

종 목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51호 

명 칭

권시의 묘 (權諰의 墓)  

분 류

유적건조물 / 무덤/ 무덤/ 기타

수량/면적

1기

지정(등록)일

2008.08.22

소 재 지

대전 서구 탄방동 239-1

시 대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
관리자(관리단체) ?
상 세 문 의

대전광역시 서구

 

일반설명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권시(權諰)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성(思誠), 호는 탄옹(炭翁)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생각과 행동이 남달라 공자의 제자 안회(顔回)에 비유되었다. 9살 때 이미 시를 짓기 시작하였으며 15살이 되어서는 이기지설(理氣之說)과 사칠지변(四七之辨)에 정통하게 되었다고 한다. 1636년(인조 14) 대군사부(大郡師傅)에 임명되고, 선릉참봉(宣陵參奉), 세자시강원자의(世子侍講院諮議) 등 여러 차례 관직이 주어졌으나 나가지 않았다. 1649년 효종 즉위 뒤 공조좌랑이 되어 처음 출사했으며 경상도사와 집의, 진선 등을 거쳐 1658년(효종 9) 승지에 임명되었다. 이어 찬선(讚善)에 오르고 1659년 현종이 즉위한 뒤 한성부우윤에 임명되었다. 예송논쟁(禮訟論爭) 당시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에 대립하여 윤선도(尹善道)를 지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같은 서인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어 광주(廣州) 선영 근처에 머물러 살았다. 1668년 송준길(宋浚吉)이 임금에게 “권시(權諰)는 애국우군하는 것이 늙을수록 더욱 돈독하니 버릴 수 없다.”고 주청하여 다시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이듬해 공주(지금의 대전)로 돌아왔다. 송시열(宋時烈)과 같은 기호학파로 예론에 밝았으며, 죽은 뒤 좌참찬에 추증되고 도산서원(道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원래 보문산 남쪽 산록에 묻혔으나, 안장한지 28년 뒤인 1700년(숙종 26) 지금의 자리로 이장되었다. 봉분은 야트막하여 크지 않으며, 주위를 지키고 있는 석물들 또한 처음 묘를 썼던 곳에서 옮겨 온 것들로 조선 중기의 일반적인 양반가의 묘제를 잘 보여준다.

 

 

 

 

 권시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