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상식/세상사는이야기

어머니, 영원한 그리움이여~~

오늘의 쉼터 2011. 7. 12. 16:36

 

    어머니, 영원한 그리움이여~~ 어제는 한식이라 오랜만에 어머니가 잠들고 계신 산소를 찾았다. 산소로 가는 길엔 벚꽃이 살갑게 우릴 맞았다. 웃는지 우는지 가지가 울먹이며 흔들릴 때마다 분홍빛꽃잎이 하나씩 내 머리위로 떨어져 내렸다. 파랗게 잔디가 덮인 묘지위로 바람이 지나갈 때는 앞이 안보이도록 꽃잎이 함박눈이 되어 내렸다. 이 꽃눈을 보노라니, 지난겨울 어머니를 그리며 쓴 글이 생각났다. 어머니, 영원한 우리들의 그리운 이름이여. 누군가는, 이 세상 누군가는 다시는 허공에 메아리쳐 부서지는 이름으로 만, 어머니를 기억하지 말길바래며 난 이글을 함께 다시 읽어본다. 살아계신 어머니를 가진 분들이시여. 아름다운 어머니와의 기억을 새롭게 만들어보세요. 평생 당신에게 아름다운 추억의 동행을 만들어 보시지 않으실래요? ......... 모처럼 함박눈이 내려 걷기로 한다. 거리의 수많은 상점들을 지나 보석상에 이를 즈음이면 갑자기 걸음이 더뎌지면서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화려한 쇼윈도 안쪽 어딘가에 진열되어 있을 반지들을 살피기라도 하는 양 눈길이 오래 머문다. 그런 날이면 거리를 오가는 낯선 이들의 표정이나 눈빛까지도 의미 있는 풍경이 된다. 어머니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의 빈 손가락 때문일 것이다. 유년시절을 나는 외딴섬에서 보냈다. 울릉도에는 겨울이면 눈이 어찌 그리도 많이 내리던지……. 펑펑 함박눈이 쏟아지는 길을 걸어 학교까지 가노라면 머리는 물론 어깨와 등에도 눈이 소복이 쌓였고, 마침내 얼굴까지 덮어버려 눈만 동그랗게 남게 되었다. 살아 있는 눈사람. 아이들은 서로의 눈사람을 보면서 깔깔 웃었고, 덕분에 두 볼은 봄까지도 능금처럼 빨갛게 익어있어야 했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이던 눈은 겨울방학이 되기도 전에 아이들의 키를 넘었고 지붕까지도 덮었다. 작은 섬이라 바다를 제외하고는 눈을 치워둘 마땅한 땅조차 없었다. 그래서 어른들은 눈 속으로 긴 새끼를 휘돌려서 터널을 만들었고, 아이들은 희미한 빛이 들어오는 그 터널 속을 지나 학교에 갔다. 폭풍우 때문에 육지 중학교로 진학을 못하게 되던 날, 나는 밤을 새워 울었고 어머니의 가슴은 검푸른 바다 빛으로 멍이 들어갔다. 바다를 원망하며 다른 중학교에서 3년을 보내야 했다.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러 육지로 나오던 날, 어머니는 빨갛게 피던 동백꽃을 꺾어 오셨다. “언휘야, 넌 틀림없이 이 동백꽃처럼 얼지도 시들지도 않고 예쁘게 꽃을 피우게 될 거야.” 맏딸을 육지로 유학 보내신 어머니는 매일, 보이는 곳마다 물을 떠놓고 기도하셨다. 그사이 나는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거쳐 의과대학에 진학을 했다. 어머니는, 몸이 약하면서도 약을 잘 못 먹는 나를 위해 겨울이면 감기에 특효라며 누렇게 잘 익은 호박으로 만든 호박엿이 보내주셨고, 여름에는 고향의 특산물인 자주감자떡을 손수 만들어 오셨다. 소풍만 갔다 와도 코피를 흘려댔고 그 코피까지도 무서워했던 내가 의과대학을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어머니의 기도 덕이었으리라. 유난히 멋 부리기를 좋아하셨던 어머니의 양쪽 장지손가락에는 항상 예쁜 금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물론 육지에 나오실 때도 손가락에는 어김없이 그 반지들이 반짝였다. 그 무렵,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나와 4명의 동생은 휴학을 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어머니가 오셨다. 눈 귀한 대구에 하루 종일 눈이 펑펑 내리던 날이었다. 어머니는 기꺼이 양손에서 반지를 빼내 우리 손에 쥐어주셨다. 한 번도 반지를 뺀 적 없던, 생일선물로 아버지가 해주셨다던, 그 반지였다. 그 반지로도 우리들의 학비를 다 충당할 수는 없어, 결국 나는 휴학을 했지만 동생들은 무사히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의과대학을 졸업했지만, 어머니의 반지를 도로 사드리지 못한 채 유학을 떠났다. 어디에서든 반지 파는 상점을 만나면 어머니의 양손에서 반짝이던 그 반지와 같은 모양이 있을까 하여 찾고 또 찾았다. 없었다. 3년 전, 봄볕이 따사롭게 문지방을 넘나들던 어느 날, 어머니의 반지와 같은 모양은 아니었지만 작은 반지를 하나 선물해드렸다. 며칠 뒤 경주 큰아버지 댁에 잔치가 있었다. 어머니는 곱게 차려입으신 모습으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왼팔을 번쩍 치켜드셨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쫙 펴고 흔드셨다. “이거 우리 딸이 해준 반지라네.” 그 반지가 어찌 자식을 위해 기꺼이 내어주셨던 그 눈 오던 날의 반지와 같을 수가 있겠는가. 어머니의 오른쪽 장지손가락은 여전히 비어있었고, 나의 반지 찾기는 계속되었다. 올해는 대구에도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린다. 눈을 맞고 서서 반지 찾는 마음이 한없이 허허롭다. 지난여름, 똑같은 반지를 찾아내기도 전에 어머니가 먼저 우리 곁을 떠나셨다. “너만 믿는다. 우리 딸이 있으니 난 아파도 걱정 안 해.” 내 손을 잡고 하시던 어머니의 말씀이 아직 귓전에 그대로 있다. 떠나시기 일주일 전 몹시 무덥던 어느 날, 바다냄새가 그립다며 고향에 가셨다. 다음날 돌아오실 때 입을 옷을 차곡차곡 챙겨 머리맡에 두고 잠드신 어머니는, 영영 그 옷을 입지 못했다. “나도 널 하늘만큼 땅 만큼 사랑해.” 마지막 말을 남기고 다시 못 올 곳으로 가셨지만, 나는 아직도 어머니를 보내지 못한 모양이다. 너무 늦어버린 반지 찾기지만 이 또한 영영 끝날 것 같지 않다. 오늘처럼 쇼윈도 안, 잘 보이지도 않는 진열장에 자꾸만 눈이 걸릴 것이다. "언휘야, 시들지 말고, 눈 속에서도 피어나는 동백꽃 붉은 열정과 사랑으로 세상의 어머니가 되거라." 하시던 어머니의 바람이 문득 내안에서 작은 꽃망울을 맺는다. <박언휘종합내과 원장,노화방지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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