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대한민국

우리나라 건국 대통령은 이렇게 갔다

오늘의 쉼터 2011. 5. 5. 15:02

우리나라  건국 대통령은 이렇게 갔다


이승만 대통령이 우리나라의 건국 대통령이고 우리나라에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웠으며

6.25 동란때에는 유엔군을 불려드려 우리나라를 지켰습니다.

오랜 집권과 독재 정치로 4.19 혁명으로 대통령에서 밀려나
말년에는 망명 생활을 하시다가 돌아 가셨지만, 애국자이시고 우리의 국부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 1934년 막 결혼했을때의 이박사와 프란체스카 여사

李承晩 박사의 전 생애에 걸쳐 그녀는 훌륭한 비서의 역할을 했다.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에 한인 동지회측은 碧眼(벽안)의 이방인을 아내로 맞은
李承晩에 대해 거부감이 일어나 공식행사에는 혼자 참석하도록 종용하기도 했지만
李承晩 박사는 아내를 끝까지 데리고 나갔다.

아내에 대한 남편의 존중 못지않게 프란체스카 女史의 남편에 대한 존경은
그녀의 전 생애에 걸쳐 면면히 이어 졌다.
나라를 잃고 망명중이었던 李承晩 박사와 함께 자청 해서 망명생활의 짐을 나누어지고
내핍생활을 견지하며 항상 한국을 자신의 內面(내면) 속으로 받아들였던 프란체스카 女史.
그녀의 남편에 대한 존경과 인내하는 자세는 전통적인 한국 여성들에게도 찾기 어려울 만큼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그녀는 1992년 3월19일 梨花莊 에서 92세로 타계했다.


또다시 좌절된 서울行


 

現代史 발굴 연재④
“내가 가는 것이 나라를 위하여 나쁘다면,

내가 가고 싶어 못 견디는 이 마음을 참아야지...
누가 정부 일을 하든지 잘 하기 바라오...”
李東昱  (前월간조선 기자)


▲ 1960년 하와이에 도착한 이박사 내외분

프란체스카 女史(여사)와 吳重政(오중정)씨 그리고 催伯烈(최백렬)씨가 상의를 했고,
李承晩(이승만) 박사가 돌아가시기 전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고국으로 모셔야겠다는
목적하에 催伯烈씨가 아무런 정치적 의도도 고려하지 않은 채로 작성한 것이다.
이로써 국내의 귀국반대 여론을 무마시켰다고 생각한 李박사측은 귀국 준비를 서둘렀다.

催伯烈씨는 한국의 날씨를 생각해서 오버코트와 모자를 마련했고, 윌버트 최씨는
마키키가의 목조 주택을 팔려고 내 놓았으며, 李박사와 가족들의 비행기표까지 예매해 두었다.
李박사는 그제서야 안도감을 표시하고 휠체어에 앉아서 떠날 시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출발 예정일(3월17일) 사흘 전부터 李박사는 보행에 불편을 느껴 휠체어에 의지해야 했다.
귀국할 것이란 소식이 하와이 교민사회에 알려지자 많은 교포들이 달려와 작별인사를 했다.
李박사는 어린애처럼 밝은 표정이 되어 “우리 모두 서울 가서 만나세”하며 손을 흔들고 기뻐했다.
그야말로 완전히 준비가 된 셈이었다.

1962년 3월17일 아침 일찍 일어나 간단한 식사를 한 뒤 李박사는 외출복을 입고
소파에 앉아 출발 시간만을 기다렸다.
오전 9시30분. 검은 세단차가 李박사의 집 앞에서 멈추더니

金世源(김세원) 총영사가 굳은 표정이 되어 내렸다.

잠시 후 방안에서는 李박사의 왼쪽에 李仁秀(이인수)씨, 오른쪽에는 催伯烈씨가 앉았고
윌버트 최씨와 프란체스카 女史가 李仁秀씨 맞은편으로 앉았다.
金 총영사는 윌버트 최씨 옆에 앉게 되어 李박사를 바로 볼 수 있는 자리가 되었다.
金 총영사와 함께 영사관으로부터 왔던 催伯烈씨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李박사님, 우리나라를 위해 일 많이 하시고 늘 우리나라 잘 되게 하시고 계신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총영사가 말씀드리는 것을 바다와 같이 넓으신 마음으로 알아들으시고

결심하셔야 되겠습니다.”

李박사는 ‘무슨 얘길 하는 거냐’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윽고 金 총영사가
“아직은 本國實情(본국실정)이 가실만한 때가 아닙니다”라는 식으로

정부의 귀국 만류 권고를 전했다.

조용히 듣고 있던 李박사의 눈은 붉게 충혈되고 있었다.
李仁秀씨는 李박사의 싸늘해진 왼손을 계속해서 어루만지며 진정시키려 했다.
다 듣고 난 李박사는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진정시키며 아주 작게 말문을 열었다.

“내가 가는 것이 나라를 위하여 나쁘다면, 내가 가고 싶어 못 견디는 이 마음을 참아야 지...
누가 정부 일을 하든지 잘 하기 바라오...”

그리고는 갸날프게 “나라... 나라...” 하며 조국을 찾는 듯 뒷말을 잊은 채 눈물을 글썽거렸다.
곧이어 李박사는 휠체어로 옮겨 앉은 채 부인과 함께 침실로 사라졌다.
李박사는 그날 이후로 휠체어에서 두 번 다시 일어날 수가 없게 된다.

귀국이 실현됐더라면 함께 귀국했을 愛犬(애견) 해피만이 조용히 엎드려 주위 사람들에게

눈길을 주고 있었다.


모두 허탈함과 서러움에 빠져 넋을 잃은 표정이었는데 李仁秀씨는 단신으로 귀국할 결심을 한다.
어차피 모든 준비는 다 되어 있었기에 李仁秀씨는 그 길로 귀국해서 이 문제를 풀어보려 한 것이다.
어머니 프란체스카 女史는 그 말을 듣고 눈물을 보이긴 했지만 아들을 막지는 않았다.
영문도 모르는 李박사에게 평소처럼 “다녀오겠습니다”한마디 인사를 남기고 李仁秀씨는

마키키의 집을 나섰다.
현관에서 백발에 여윈 서양 할머니가 李仁秀씨에게 손을 흔들며 작별인사를 했다.
“아가야, 몸조심 해라” 

제 3부 슬픈 황혼


1962년 3월17일 귀국이 좌절된 87세의 李承晩 박사는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혈압이 급속도로 올라가 뇌출혈 증상이 생겼다.
급히 트리풀러 육군병원에 입원하여 응급조치를 받고서야 정상을 회복했다.
그러나 수족은 거의 마비상태가 되어 회복이 불가능해졌다. 중풍이 든 것이다.

이제는 아들도 귀국해 노인 부부만 남게 된 마키키에서 62세의 노파가
87세의 수족이 마비된 남편을 간병하며 살아야 할 형편이 되었다.
이런 사실이 하와이 교민사회에 알려지자 각처에서 동정과 호의가 베풀어지기 시작했다.
그가 구했던 나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을 하와이 교민들은 끝내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교포들은 한국 정부의 처사에 대해 말할 수 없이 섭섭해 했다.
특히 나이든 노인들일 수록 더했다.
모두가 李박사의 뇌출혈이 중풍으로 발전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함에 대한 울분이 폭발해서였다고들 말했다.
이 시기에 무엇보다 큰 변화는 거처를 마키키의 목조 주택에서

마우나라니 요양원으로 옮기게 된 일이다.
하와이에서 5대 재벌의 하나로 꼽히는 딜링햄씨는
李承晩 박사와 독립운동 시절부터 익히 잘 알고 지내온 막역한 사이였다.
그의 재정으로 움직이다시피 하는 최고의 요양원이 바로 마우나라니 요양원이었다.
일종의 노인병원인 셈이다. 


 

▼ 마우나라니 요양원에서

물론 이 과정에서는 吳重政 씨와 崔伯烈씨

그리고 이 요양원의 후원자였던 윌버트 최씨의 노력이 컸다.
막막했던 프란체스카 女史 앞으로

마우나라니 요양원 원장 존슨 女史의 편지가 도착한 것은 그 해 3월22일이었다.

“우리 모두 존경하는 李박사님을 저희 양로원에서 모시고 싶습니다.
모든 비용은 무료로 해 드리겠으니 女史님의 회답을 바랍니다.”

프란체스카 女史는 평소 일기를 쓸 때도 감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그 후 여러 기록을 통해 그 당시 존슨 女史에 대한 고마움을 남겨놓았다.
뿐만 아니라 작고할 때까지도 이 편지를 고이 보관했었다.
프란체스카 女史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도움이었다. 

“國父와 國母의 자격을 갖춘 분” 


▲ 1961년 하와이에 온 양자 이인수씨

문제는 병실 하나에 침대가 하나뿐이었다는 점이다.
이 문제도 교포들의 노력에 의해 어렵지 않게 해결됐다.
프란체스카 女史를 위해 요양원측에서는 본관 건물 뒤편에 자리한
고용인 숙소의 작은 방 하나를 따로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프란체스카 女史를 李박사의 간호보조원으로 인정해 주어 항상 곁에 머물 수가 있었다.

1962년 3월29일에는 李박사 부부가 마우나라니 요양원으로 이사를 하는 날이었다.
이 날 박사의 엄명에 의해 주위 사람들은 李박사의 집안에 들여놨던 가구들을
모두 원래 주인들에게 찾아 돌려주고 나서야 요양원으로 떠날 수 있었다.

요양원 생활을 시작한 李박사는 언제나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다.
낮에는 부인의 도움으로 휠체어에 앉아 창밖에 펼쳐진 바다를 보기도 했다.
이 무렵에도 항상 “빨리 가야 되는데, 빨리 가야 돼...” 하며 귀국의 열망은 식을 줄 몰랐다.
요양원 시절에는 吳重政씨와 崔伯烈씨가 자주 찾았다.
吳씨를 통해 들어 본 프란체스카女史의 간병 생활은 어떠했을까?

“그런 烈女(열녀)가 없었지요.
아침 8시부터 저녁 10시까지 쇼핑하러 나가거나 외출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지요.
마담은 항상 李박사 옆에서 성경을 읽어 드리고 찬송가를 불러 드리고,
손발이 마비되니까 손발을 주물러 드렸습니다.
필요한 물건은 제가 심부름해 드렸지요.
점심 때는 李박사가 기르던 개 해피에게 밥을 주기 위해 잠시 떠났을 뿐
망명생활 5년 동안 그녀는 李박사의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다고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교포들도 ‘저런 분은 처음 봤다’고 들 했지요.
그렇게 훌륭 한 분이 없었습니다.”

吳重政씨는 프란체스카 女史와 李박사의 병동에서 종종 옛날 이야기를 했다.
그 무렵 생활비가 오스트리아에서 매월 200달러씩 오고 있었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프란체스카 집안에서는 커다란 종이 상자 두 개분의 옷을 부쳐 주었다.
그녀는 이 종이 상자를 개조해 옷장으로 썼고,
이‘종이 옷장’은 지금도 梨花莊(이화장) 전시관에 보존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