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대한민국

이유립 (李裕酌,1907~1986)

오늘의 쉼터 2009. 7. 30. 10:00

이유립 (李裕酌,1907~1986)

본관은 철성(鐵城)으로 이암의 후손. 자는 채영(采英) 또는 중정(中正)

호는 한암당(寒闇堂) 또는 정산초인(靜山樵人).

한암당(寒闇堂) 이유립 선생은. 1907년 평북 삭주군 구곡면 안풍동 구령포 청계령산 아래 청계곡에서 독립운동가 단해(檀海) 이관집(李觀집) 선생의 4남으로 출생하였다.
세살부터 어머니로부터 천자문을 배우고 6세에《동몽선습童蒙先習》을 읽다가「한무제토멸지(漢武帝討滅之)하시고」라는 구절에 이르러 "위만조선이 우리나라면서 우리나라를 토멸한 한무제는 분명 우리나라 원수인데, '하시고'라는 토씨를 붙여 읽는 것은 나는 싫다"하여 끝내《동몽선습》을 읽지 않았다.

13세 때인 1919년 4월 7일 신안동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그해 10월에 아버지를 따라 단학회(檀學會)가 주관하는 '배달의숙(倍達義塾)'에서 계연수(桂延壽), 최시흥(崔時興), 오동진 등의 강연을 듣는 한편 조선독립소년단 조직 활동에 참가, 단장이 되었다.

의민사(義民社) 천마산대의 소년통신원으로 뽑혀 전봉천과 함께 국내의 통신연락을 도왔다.

 

24세인 1930년 「삼육전재 국권회복(三育全材 國權回復)」이라는 해학 이기(李沂)선생의 신교육의 뜻을 발휘하기 위하여 삼육사(三育社)를 조직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회람잡지《三育》을 발행하기도 하였는데.《三育》7월호에「광개토성릉비문징실고廣開土聖陵碑文徵實考」등의 기사로 인하여 삼육사는 1931년 7월 31일 강제 해산되었다.

33세인 1939년 이상유의 5만원 희사에 선대로부터 경영해 오던 구성재(求誠齋) 재산을 합하여 '신풍학원(新豊學院)'을 설립하고 학감 겸 교사로 종사하였으나, 1942년 '학생들의 신사참배 기피', '조선교육', '창씨개명불응', '무궁화 심기' 등 12항을 이유로 강제 폐쇄 당했다.

39세인 1945년「단학회(檀學會)」기관지《태극(太極)》의 주간으로 취임하였다가 1946년 1월 1일 발행 신년호에「신탁통치반대론」기사 필화사건으로 소련군에 의해 구금되고 잡지는 폐간되었다.

 

57세때인 1963년 단학회의 3대강령인 '제천보본(祭天報本)', '경조홍방(敬祖興邦)'. '홍도익중(弘道益衆)'을 완전 계승하여 단단학회(檀檀學會)로 조직 확대하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63세인 1969년 이석영씨의 재정 후원으로 강화도 마리산 단학동에 커발한 개천각을 세워 신시개천의 창시자 한웅천왕을 비롯하여 치우천왕. 단군왕검을 봉안하고 매년 대영절(大迎節. 음 3월 18일) 개천절(음 10월 3일) 두 차례 제천의식을 거행하였다.

69세인 1975년 5월 8일《세계문명동원론(世界文明東源論)》을 미국의 하버드. 워싱턴. 콜롬비아. 하와이. 캘리포니아 등 5개 대학교에서 주문해 갔다.

 

70세인 1976년 박창암. 안호상. 유봉영. 문정창. 박시인. 임승국 제씨와 함께 [국사찾기 협의회]를 조직하고 잡지《자유》에 옥고를 기고하기 시작하였으며,

78세인 1985년 배달문화원 대상을 수상하신 이듬해 1986년 4월 19일 새벽 1시 자택에서 운명하셨다.

 

출처:한배달2001년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