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대한임정

원자폭탄에 희생된 조선의 왕자 이우

오늘의 쉼터 2011. 4. 14. 19:53

 

조선의 마지막 왕조. 고종황제의 손자이자 의친왕(고종황제 아들)의 차남. 이우 왕자.

참 반듯하니 얼굴도 미남이시다. 지금시대에 영화배우 뺨칠 정도로.






1912년에 태어나 1945년 생을 마감한 이우 왕자.

그 영화같이 짧은 인생 속의 그의 업적은 고개를 숙이게 한다.






일화를 하나 소개하자면,

조선인을 사랑한, 조선인에게 따스했다던 이 분.


일본군들이 곡창지대인 호남평야에 작전 도로를 내면서 땅을 가로챈 후

보상을 해주지 않아 그 지방의 농부들이 이우 왕자에게 호소했다고.





이 호소를 들은 이우 왕자는 그 즉시 사령부로 달려가 공사 취소를 요구.

이를 들어줄리 없는 일본인. 공사 취소요구를 거절하자 이우 왕자는

그 일본인의 머리에 권총을 겨누며 이렇게 말했다고.



"황족이며 공작인 나는, 너 하나 죽여도 감옥에 가지 않는다. 즉시 죽여주마"

이 위협으로 이우 왕자는 결국 목적을 달성.







일본은 황제의 자손인 이우 왕자에게 '일본여성'과 결혼할 것을 강요.

독립운동가인 유동렬의 딸과 정혼한 상태였으나,

황족과 독립투사 가문의 결혼을 일제가 강렬히 반대.

조선인과의 결혼을 고집한 이우 왕자는 결국 친일파 대신의 손녀와 결혼하는 것으로 타협.


 


대한 제국의 황복으로서 일제의 요주 감시대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굽힘이 없었으며,
일본말이 아닌 조선말을 사용하고, 술자리에서는 당시 금지곡인 '황성옛터' 노래를 불렀다고.
일제의 장교로 근무한 이우 왕자는 동기인 이형석에게

"일본 군복을 입고 있는 것이 부끄럽다. 우리 군복을 입고 당당히 살 때까지 기다리라"

조선의 황족이라는 자신의 위치를 늘 잊지 않고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고.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추진했던 이우 왕자.

직접 비밀 결사대를 조직, 일본군 정보 참모라는 직위를 통해 얻어낸 고급정보들을
독립군들에게 전달해주며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줌과 동시에 정신적 지주로 활약.

치밀하게 준비한 일본의 관동군과의 전투계획을 눈치 챈 일본이
그의 보직을 교육참모로 변경, 일본 히로시마에 발령을 내게 되고.
히로시마 전출을 거부하며 한국 배속 청원을 넣고 버텼으나,

청원을 거절당하며 히로시마 행에 오름.



히로시마에 첫 출근하던 1945년 8월 6일. 이 날, 미국의 원자폭탄이 투하.

이에 부상을 입은 이우 왕자는 병원으로 후송되었고, 도쿄의 전문병원으로

옮겨저 상태가 호전되어가고 있었는데

옮겨진 그 날밤, 34살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

일각에서는 일제에 의해 독살된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으나,

진실은 밝혀진바 없음.

당시 이우 왕자를 간호하였던 한 일본인 간호사는

"그 분은 매우 큰 분이셨다.

 아마도 그분이 살아 계셨더라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다."
라고 했다고.





이우 왕자의 시신은 경기도 마석에 모셔졌고,

그의 장례식은 1945년 8월 15일.
이우 왕자는 조국의 해방을 죽어서야 맞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