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대한임정

◐ 안창호(安昌浩)

오늘의 쉼터 2008. 10. 29. 16:48

 

◐안창호(安昌浩, 1878년 11월 9일 ~ 1938년 3월 10일)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호는 도산(島山)이며 종교는 기독교이다.

  서울특별시 강남구에 있는 도산대로(島山大路)와 도산공원은 이 호를 따서 이름 지었다.

목차

  • 1 생애
    • 1.1 생애 초기
    • 1.2 수학
    • 1.3 민족운동
    • 1.4 생애 후반
  • 2 가족 관계
  • 3 어록

 

[생애]

[생애 초기]

도산 안창호는 평안남도 강서(江西)초리면 봉상도에서 1878년 11월 9일 안흥국(安興國)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선대는 대대로 평양 동촌(東村)에서 살았으나 아버지 때에 대동강 하류의 도롱섬으로 옮겨왔다.

[수학]

8세까지 가정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9세에서 14세까지는 강서군 심정리에 머물며 김현진(金鉉鎭)에게 한학을 배웠다.

 이때 서당 선배인 필대은(畢大殷)과 알게 되어 그로부터 민족주의사상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받았다. 1895년 청일전쟁을 계기로 교육을 통해 나라의 힘을 길러야 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리하여 그 자신은 미국 장로교 선교사인 호러스 언더우드가 경영하는 구세학당(救世學堂)에 입학하였고, 부인 이혜련 여사는 장인의 허락하에 정신여학교에 입학하였다. 이곳에서 3년 간 수학하면서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서구문물과 접하게 되었다. 구세학당 졸업후인 1898년에는 미국 유학을 떠나 노동으로 학비를 벌면서 공부하였다.

[민족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기념 사진(1919년 10월 11일) 앞줄 왼쪽부터 신익희, 안창호, 현순. 뒷줄 김철, 윤현진, 최창식, 이춘숙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기념 사진(1919년10월 11일)
앞줄 왼쪽부터 신익희, 안창호, 현순. 뒷줄 김철, 윤현진.최창식, 이춘숙

 

 

유학생신분이던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대일본제국이 빼앗자,

1907년 도산은 귀국하여 대한 사람은 실력을 길러야 한다고 역설하는 계몽활동 외에도,

1904년 의친왕, 정재관(鄭在寬) 등과의 공립협회(共立協會) 창립,

1909년 김좌진·이갑(李甲) 등과의 서북학회 창립등으로 민족운동을 하였다.

또한 1908년 대성학교를 평양에 설립하였는데, 당시 대성학교의 교육방침은 정직하게 살자는 것이었다.

1913년 흥사단을 창립하였으며, 이후 박용만, 정순만, 이승만과 함께 미국 한인사회의 지도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1919년 4월 13일 선포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에 임명되었다.

1923년에는 만주에서 이상촌 건립을 위해 노력하기도 하였으나, 일본의 만주 침략으로 물거품이 되었다.

그가 실력 양성과 인재 육성을 부르짖자 급진파는 당장 싸울 인력이 필요한데 무슨 말이냐며 반대하였으나,

안창호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는 우선 인재를 육성할 필요가 있다며 인재육성과 실력양성을 강조하였다.

[생애 후반]

1930년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다가 1932년 체포되어 5년간 옥살이를 하였는데, 출소후 고향에 머무르면서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였다.

1937년 동우회사건으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이듬해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현재 서울대학교병원)에서 60세를 일기로 간경화로 별세하였다.

 사망당시 자신이 총애하던 애제자 유상규의 묘소 근처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했다고 한다.

  • “나 죽거든 내 시체를 고향에 가저가지 말고.”
  • “그러면 엇더케 할래요.”
  • “달리 선산 가튼데도 쓸 생각을 말고.”
  • “서울에다 무더 주오.”
  • “공동묘지에다가…”
  • “유상규군이 눕어잇는 그겻 공동묘지에다가 묻어주오 제발.”

시신은 망우리공동묘지에 묻혔으며,1973년 도산공원으로 묘소가 이장되었다.

그가 망우리에 묻힌후, 수주일간 양주경찰서는 묘지입구에서 방문객을 일일이 심문하였고 그 후 1년간 묘지기에게 안창호의 묘를 묻는자의 주소와 이름을 적게 하였다. 그만큼 일제는 조선인들에게 존경받는 안창호를 그가 죽은 뒤에도 무서워했고, 그 묘소를 찾는 국민들을 경계하였던 것이다.

[가족 관계]

  • 아내: 헬렌 리(Helen Lee, 한국이름 이혜련)
  • 첫째 아들: 안필립(安必立, 영어 이름: 필립 안 Philip Ahn, 1905년 3월 29일 - 1978년 2월 28일)
  • 둘째 아들: 안필선(安必鮮, 영어 이름: 필슨 안 Philson Ahn, 1912년 - 2001년)
  • 첫째 딸: 안수산 {Susan Ahn Cuddy, 1915년 -

                                          장녀인 안수산 여사의 94세 생일 축하파티 모습

                    고 이혜련 여사(도산 안창호 선생 부인)의 국민훈장 서훈을 축하

  • 둘째 딸: 안수라 {Soorah Ahn, 1917년 -
  • 3남 랄프 안씨

[어록]

 

 

사후에 만들어진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안창호 동상

캘리포니아주 안창호 동상

 

 

우리 민족의 불행의 책임을 자기 이외에 돌리려고 하니 대관절 당신은 왜 못하고 남만 책망하려고 하시오? 우리나라가 독립이 못되는것이 다 나때문이로구나 하고 가슴을 두드리고 아프게 뉘우칠 생각은 왜 못하고 어찌하여 그 놈이 죽일 놈이요, 저 놈이 죽일 놈이요라고만 하고 가만 앉아계시오? 내가 죽일 놈이라고 왜들 깨닫지 못하시오? 우리 가운데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이 되려고 마음먹고 힘쓰는 사람이 없는 까닭이요.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그 사람 자신이 왜 인물될 공부를 아니하는 것이오?
 
— 안창호
우리가 나라를 잃은 것은 이완용 일개인 탓도 아니오, 일본 탓도 아니라 우리가 힘이 없어서였다. 그러하니 나라의 독립은 국민 개개인이 힘을 가질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므로 점진적으로 힘을 키워나가는 방향으로 투쟁을 할 것
 
— 안창호
운둔하는 것이 내 일신으로 보면 가장 편안한 일이다. 내 쇠약한 건강 상태를 보아서도 그러하지마는 내 심신이 아직 활동할 기력이 남아 있고, 우리 민족의 현상이 우려할 형편에 있는 이때에 제 일신의 평안이나 명성을 위하여 가만 앉아 있을 수는 없다
 
— 안창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