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대한임정

대한민국임시정부 부주석 김규식

오늘의 쉼터 2008. 9. 3. 15:38

 

 


이승만 전 대통령과 함께 있는 김규식(오른쪽}

 

 

출생

1881년 1월 29일
대한제국 조선 부산광역시 동래구
사망 1950년 12월 10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북도 만포진 처형        
거주지 대한민국, 중화민국
국적 대한민국
직업 독립운동가 · 정치가 · 학자
자녀 김진동(男), 김우애(女)
부모 김지성(父)

 

 

 

김규식 (金奎植, 1881년 1월 29일 - 1950년 12월 10일)은 대한민국의 독립 운동가, 정치가, 학자이다.

교명(敎名)은 요한(Johann), 아호는 우사(尤史)이다.

1940년부터 1947년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냈으며 주로 외교활동을 전개해나갔다.

주에서 대한독립군단의 지휘관으로도 활약하였고, 광복 후에는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앞장섰다.

1948년 남한의 단독 총선거에 반대하여 김구와 함께 북한으로 건너가 남북협상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자

정계를 떠났다.

 

[생애]

[출생 및 성장]

중방파(仲房派) 23세손으로 1881년 1월 29일 경상남도 동래부의 관리 아버지 김지성(金智性)과 어머니 경주이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지성은 인텔리로 일본에서 신학문을 익혔으며 개항 이후에는 외무관리로 러시아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왔으며 당시 동래부사의 부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 우리 나라에 파견된 청나라위안스카이(袁世凱)가 내정간섭을 단행하자, 일본과의 불평등한 교역으로

인해 많은 문제점이 발생하여 민씨정권의 대일무역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린 것이 빌미가 되어 유배를

당하고, 어머니마저 6세 때 죽었기 때문에 숙부들의 집에 맡겨졌으나 친척들도 생활형편이 어려웠다.

고아로 지내다가 미국 북장로파의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의 고아원에서 보내졌다.

그러나 유아를 맡기 힘든 언더우드의 고아원은 다시 김규식을 그의 일가에게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아이가 몹시 아픈데도 아무도 돌보아주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은 언더우드는 어린 김규식을 데려왔고,

이후 언더우드의 집에서 그가 세운 학당을 다니며 소년기를 보냈다.

[독립운동]

[청년기]

1895년 언더우드 학당을 마치고 서재필이 경영하는 〈독립신문〉에 잠시 근무하다가, 서재필의 권유로 1896년 미국에 건너갔다.

1897년 미국 버지니아 주에 있는 루터교계 인문대학 로노크 대학교에 입학하여 1903년까지 로노크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로노크 대학교 재학 당시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라틴어 등에 뛰어났고 웅변부에서 활동하였다.

1903년 뉴욕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에 입학, 1904년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1905년 8월 미국 포츠머드에서 개최된 강화회의에 참석하고자 중화민국 상하이까지 갔으나 실패하고 돌아왔고, 1906년 한양 조씨 조은수와 결혼하였다.

1904년부터 1913년까지 언더우드의 비서로 있으면서 YMCA학교 간사 및 교사, 경신학교 학감, 배재전문학교

영어강사, 연희전문학교 강사를 지냈다.

그의 종교 활동으로는 1910년에 새문안교회의 장로가 되었으며, 1911년 한양 조씨 부인과 사별하였다.

같은 해 12월 경기·충청도장로교 연합회 서기로 뽑혔고, 1912년 2월 전국주일학교연합회 집행위원회 부위원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1911년 일본의 교회탄압이 시작되자,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1914년부터 2년간 화북몽고 지방에서 상업에 종사하기도 하였으며 동제사에

가입하였고 신채호·홍명희·서병호(1885~1972) 등과 친분관계를 맺었다.

1916년에 앤더슨&마이어회사(Anderson & Meyer Company)에 입사하여 몽골 접경의 장가구에서 2년간 근무했으며, 1918년 3월에는 외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 있는 앤더슨&마이어회사 울란바토르 지점장으로 부임했다.

[정치 및 외교활동]

1918년 여운형 등의 초청으로 중국 상하이로 건너왔고, 신한청년당 창립에 참가하였다.

이후 1919년 1월 신한청년당은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 대표단의 수석 대표로 임명하고 프랑스로 파견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 명의로 된 탄원서를 제출하고〈한국민족의 주장〉·〈한국의 독립과 평화〉등의 인쇄물을 출간하여, 각국 대표들에게 일제의 침략상과 한민족의 독립에 대한 당위성을 널리 홍보했다.

김규식은 재혼후 보름만에 김탕, 여운홍 등 대표단을 이끌고 프랑스로 출국하였다.

이어 1919년 4월 상하이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파리 현지에서 외무총장에 선출되었다.

1919년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이 되어 독립공채표를 작성, 상하이에 독립운동자금을 보내는 일을 하다가 1920년 상하이에 귀환하여 임시정부 학무총장 등에 선임되었으며,

1921년 동방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여 상설기구를 창설하고, 1923년 임시정부가 창조파와 개조파로 나뉘었을 때는 여운형, 서병호 등과 더불어 창조파에서 활동하였다.

1924년 8월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가 다시 돌아와 1927년에동방피압박민족대회의 회장직을 맡으면서

기관지 《동방민족》을 창간하였다.

1932년 겨울 ‘중·한 민중대동맹’을 결성하였다.

이후 항일독립을 위해 민족정당의 통합을 역설하다 1934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이 되었으며, 1935년 민족정당 지도자를 소집하여 민족혁명당을 창당하여 그 주석에 선출되었고, 1940년 민족유일당 운동의 확장으로 김구와 협의하였으나 유일당은 실패하고 대신 항일 공동연합전선 설립을 결정하여 임시정부에 입각, 1942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냈다.

1944년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부주석에 선임되었다.

[건국 활동]

[해방후 정치활동]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광복이 되자 1945년 9월 7일 조선인민공화국의 외무부장에 선임되었다.

1945년 11월 2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때 김구 등과 함께 임정 1진으로 귀국하였으며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문을 국민에게 발표하고 즉각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뒤 김규식은 모스크바 3상회의의 내용을 신중하게 검토하였으며, 그 내용이 현실적으로 남북이 미소에 의해서 분할 점령되어 있는 상태에서 결코 우리에게 불리한 내용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리자 그는 반탁운동으로부터

이탈하였다.

그러나 반탁운동에서 탈퇴하였다고 하여 모스크바 3상 협정의 내용을 찬성하는 좌파들의 조직에도 가담하지는 않았다.

1946년 2월 13일 비상국민회의(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비상정치회의 주비회 통합체)에서 최고정무위원직

(총 28명)에 선출되었다.

또한 미군정청의 존 하지 장군은 이승만 박사의 동의를 얻어 김규식을 좌우합작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임명하였으며, 과도입법의원의 의장이 되었다.

1946년 2월 14일 민족혁명당 당수직을 사퇴하고 탈당하였으며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진행하였다.

7월 3일 김규식은 친일파 처단을 요구하다가 안재홍과 함께 용공분자로 모는 삐라가 나돌고 벽보가 붙기도 했다. 기독연맹 모임에서 김구의 연설에 이어 김규식이 연설을 하였을때 참석자들이 모두 귀를 막아 김규식은 퇴장하였다.

거리에는 그들을 공격하는 내용이 잔뜩 담긴 전단이 살포되고 벽보가 나붙었다.

전단이 뿌려진 그날 괴청년들은 김규식의 집을 둘러싸고 김규식과 안재홍의 사퇴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으며,

안재홍의 사무실을 습격하여 반탁, 반과도입법위원의 내용을 담은 전단을 살포하였다.

1947년 2월 14일에는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남북협상과 최후]

7월 여운형이 괴한에게 피습 절명하자 원세훈, 조소앙, 안재홍, 여운홍 등과 함께 남북협상을 진행하였다.

1947년 10월 1일 민족자주연맹 결성에 참여하였다.

1947년 12월 20일 민족자주연맹의 의장에 선임되었다.

김규식은 자신이 머무르는 삼청장 안에서도 침실을 자주 옮겨다니기까지 했으며, 측근들은 만일의 테러

사태를 염려해 강원도 홍천에 있는 선친의 묘소에 참배를 가는 것도 만류하였다.

1947년말 김구의 협력을 얻어냈고 1948년 1월 단독정부 수립 반대를 주장하였다.

이후 김구와 함께 북행길을 결심하여 1948년 2월 16일 북한김두봉에게 서신을 보내 남북 지도자 회담을

제안하였다.

김구1948년 4월 10일 북조선으로 갔고, 김규식 일행은 4월 21일 남북연석회의가 열리는 북조선으로 갔다. 1948년 4월 30일 평양의 김두봉의 집에서 김구, 김일성, 김두봉과 함께 '4김 회동'에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구와 김규식은 이승만의 단선·단정 반대를 주장하면서 김일성에게도 북한의 단독정부 건설을

중단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1948년 5월 5일 김구와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

그러나 성과없이 돌아온 이들은 5월 14일 북조선측의 제2차 남북협상 제의를 거절하고, 5월 21일 김구와 함께

통일독립촉성회를 결성하여 5·30남한단독총선거에는 ‘불반대·불참가’의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건국기초작업에

대한 그의 정치활동에 종지부를 찍었다.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 총선거가 예정되자 김규식의 지지자들은 그의 총선 참여를 권유하였으나 2대 총선에도 불반대 불참가 성명을 발표하였다.

6월 김규식은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으며, 만포진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재평가 노력]

남북협상에 실패한 후 납북되어 잊혀졌다가 2000년대 이후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2000년 8월 김규식의 생애와 사상 5권이 출간되었으며 그해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저서]

[유족]

부인 김순애(金淳愛)도 독립운동가였다.

 

 

 (1889. 5. 12∼1976. 5. 17)

1919. 상해 대한애국부인회 회장 상해 대한적십자회 이사

1926. 임시정부 경제후원회 참여

1930. 한인여자청년동맹 간부

1943. 한국애국부인회 재건대회 주석

 

귀국후 교육사업을 하였으며 정신여자고등학교의 재단 이사장이다.

둘째 아들 김진동, 딸 김우애는 미국에서 살다가 사망하였다.

셋째 아들 김진세씨는 미국 텍사스 샌안토니오에 살고 있다.


  • 아버지 : 김지성(金智性)
  • 어머니 : 경주이씨
  • 부인 : 조은수
  • 부인 : 김순애(金淳愛, 1889년 음력 5월 12일 ~ 1976년 5월 17일), 독립운동가
  • 아들 :
  • 아들 : 김진동(金鎭東), 독립운동가(1997년 사망)
  • 아들 : 김진세
  • 딸 : 김우애(2001년 1월 미국에서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