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전남무형문화재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33호 시조창(時調唱) <해제>

오늘의 쉼터 2011. 3. 11. 10:31

 

종 목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33호
명 칭 시조창(時調唱)
분 류 무형유산 / 전통연행/ 음악/ 민속음악
수량/면적개인
지정(등록)일 1999.08.05~2009.02.05
소 재 지 전남 목포시  용해동
시 대대한민국
소유자(소유단체)손한술
관리자(관리단체)손한술
상 세 문 의 전라남도 목포시 문예홍보과 061-270-8566

 설명

 

시조창(時調唱)은 시조시(우리나라 고유의 정형시)를 가사로 노래 부르는 것을 말하며, 시절가, 시절단가, 단가라고도 한다. 3장 형식으로 관현악 반주가 따르지 않는다. 고려 후기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가장 오래된 기록을 보면, 영조(재위 1724∼1776) 때 학자 신광수의 <석북집> 관서악부에 이세춘이 시조에 장단을 붙였다는 시가 나온다. 순조(재위 1800∼1834) 때 간행된 <유예지>에서는 경제(京制) 평시조 악보가 처음으로 나타난다. 시조창의 형식은 3장 형식이고, 음계는 3음·4음의 계면조(슬프고 처절한 느낌을 주는 음조)와 5음의 우조(맑고 씩씩한 느낌을 주는 음조)로 되어 있다. 시조창은 즉흥성을 가진 전달음악이기 때문에 종장 끝음절인 ‘하노라’, ‘하느니’, ‘하오리라’ 등은 생략한다. 또한 시조는 3음 또는 4음의 적은 음정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창법에 따라서 요성(搖聲), 전성(轉聲), 퇴성(退聲) 등의 여러 가지 기법으로 시조시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옛 선비들이 즐겨 부르던 대중음악이라 할 수 있고,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귀중한 문화재이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시조창의 창작 연대는 고려말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현재 부르고 있는 창법은 조선 말 영,정조 무렵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시조창은 가곡의 영향을 받아 시조의 곡조가 발생, 보급되었는데 서울·경기 지역의 경제(京制), 전라도의 완제(完制), 경상도의 영제(嶺制), 충청도의 내포제(內浦制)로 지역적 특징을 지니고 나뉘게 되었다. 경제는 평시조에서 중허리시조, 지름시조, 사설지름시조, 수잡가, 휘모리잡가 등 변화곡이 나오게 되었다. 장단이 잘 정립되었으며, 피리와 대금 등 여러 반주 형태를 갖고 있고, 속청을 올려가며 아름답게 부른다. 완제·영제·내포제는 평시조와 사설시조(또는 엮음시조, 편시조)가 중심이 된다. 장단은 각종 악기의 반주를 갖추지 못하고 기껏해야 장구장단이나 무릎장단으로 미봉하는 관계로 초장과 중장 끝장단에서 다섯 박자가 줄어든다. 완제는 ‘엇부침’, ‘시김새’, ‘꾸밈’ 등의 연결성이 발달하여 소리가 윤택하고, 전라도 토속의 언어와 발음에 영향을 받아 독특한 창법과 가락을 형성하였다. 영제는 연결성이 약하게 뚝뚝 끊어 소박하게 부르며, 내포제는 경제와 영제의 중간 성격을 지닌다. 보유자 손한술(孫漢述, 1925.5.28~)은 전남 신안군 암태면에서 태어나 청년시절부터 목포에서 살면서 호남의 전통적 시조창인 완제를 정제복, 정해남, 성길주로부터 익혀 전승하고 있는데 정재복 선생에게는 평시조와 가곡을 성길주 선생에게서는 사설시조, 엇시조를 정해남선생에게서는 평시조 등을 배웠다. 1969년부터 1970년사이 각종 시조창 경창대회에서 1등을 수상하였으며 그 후에는 주로 시조단체의 임원과 경창대회의 심사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70년대 후반 부터는 시조단체의 임원으로 활동하였고 1980년대부터는 각종 시조경창대회의 심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손한술은 고령이지만 목포를 중심으로 강진, 영암, 함평, 무안, 신안 등지까지 출입하면서 후진을 양성하는데 주력하고 있으며, 호남의 전통적 시조창인 완제의 평시조, 사설시조, 지름시조(사설지름, 남창지름, 온지름, 지름역음), 중허리 시조 등 각종양식을 제자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 보유자 사망으로 해제

 

 

 

시조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