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산(壽山) 이태식(李泰植). ㅡ 독립운동가
사진설명=수산 묘소(맨 위)와 추모비(가운데).
한말 의령의 대표적 선비로서 일제 시대 광복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수산(壽山) 이태식(李泰植).
그는 면우 곽종석이 주도한 유림 광복 운동인 파리장서 서명자이다. 뿐만 아니라 만주 일대에 독립운동 기지를 개척하려던 2차 유림단 사건에도 가담해 7년 동안 수배를 당한 것을 비롯해 천석이나 되는 재산을 독립운동 군자금으로 사용하는 등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 침탈에 온 몸으로 항거한 선비이다.
수산은 1875년 4월 의령군 정곡면 오방리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철성(鐵城)으로 임란 당시 경상도 초유사 학봉 김성일의 종사관으로 왜적을 무찌르는데 큰 공을 세운 정의공(貞義公) 송암(松巖) 이로(李魯)의 후예이다.
어릴 때부터 용모가 준수하고 기상이 남달랐다. 하지만 당시 문중은 쇠락해져 재주가 출중한 선비들은 요절을 하니 문학은 거의 집안에서 기피하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수산은 어릴 때부터 배우고자 하는 뜻이 있어 마을 노인들을 따라 글자를 부지런히 물어 익혔다.
1896년 집안 어른으로 한주 문하의 뛰어난 선비 8인 중 한 사람인 자동 이정모의 문집 간행의 일로 면우 곽종석 선생을 배알했다. 수산의 남다른 자질을 알아본 면우는 3~5년 마음을 가다듬고 앉아 독서를 하라고 격려했다.
수산은 집으로 돌아오자 마자 방 한 칸을 깨끗이 청소하고 다시 논어 맹자 등을 반복하여 읽으면서 하나라도 의심나는 곳이 있으면 반드시 이를 기록해 면우 선생께 질정을 했다.
이로부터 면우의 가르침을 더욱 독실하게 따랐다.
이를 두고 중재 김황은 “면우 선생 문하에서 배운 학자들이 많다. 진실된 마음으로 시종일간 한결같이 섬긴 사람을 구한다면 반드시 수산을 천거할 수 있다”라고 했다.
이처럼 수산은 면우를 진실된 마음으로 시종일간 스승으로 섬겼을 뿐 아니라 지역의 석학들을 두루 찾아가 배움을 청하기도 하였다.
오래 전부터 의령에 퇴계 선생의 학덕을 기리는 덕곡서원이 있었는데, 향사(享祀)가 중간에 폐지되었다.
또 퇴계 선생이 손수 쓴 가례동천(嘉禮洞天)이란 4자의 글씨도 가례동 석벽에 새겨져 있었다.
1900년에 수산이 안동을 다녀오고 나서 수찬 안효제와 계를 조직하고 퇴계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한 자금을 마련해 곧 서원 터에 덕곡서원을 다시 세우고 가례동천을 보수했다. 의령 가례는 퇴계선생의 처가 곳으로 지금도 수산 등이 이때 다시 세운 덕곡서당과 가례동천을 잘 보전하고 있다.
이어 집안 선조인 남명선생의 제자 도구 이제신을 위하여 자골산 유허지에 한천정(寒泉亭)을 세우는 일을 주도적으로 했으며, 인하여 '도구실기'를 간행했다. 봄 여름이면 한천정에 가서 독서를 하는 등 여러 선비들과 자주 모여 학문을 강론했다.
당시 삼가 현감 신두선이 후산 허유, 노백헌 정재규를 청하여 뇌룡정에서 매년 봄가을로 인근의 학자들에게 강학을 했는데, 수산은 반드시 이에 참석을 했다. 뿐만 아니라 강록을 필사해 밤낮으로 쉬지 않고 익히면서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여러 사람들이 수산의 이러한 태도에 탄복을 했다.
1905년에는 대원사에서 ‘주자어류’ 간행의 일에 참여를 했다. 일제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을사늑약 때 수산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스승인 면우 곽종석에게 편지를 보내 의병을 일으킬 것을 청하였다. 비록 의병을 일으키지는 못했지만 하루도 이러한 마음을 잊지는 않았다.
1919년 스승인 면우 곽종석이 주도한 파리장서 운동에 참여해 스승의 명으로 함안 칠원 달성 등지의 동지를 규합하는 등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행동으로 실행을 했다. 그 뒤 만주일대 독립운동 기지를 개척하려던 제2차 유림단 사건에도 참여를 했다. 2차 유림단 사건은 면우 제자 심산 김창숙이 1925년 3월부터 7월까지 4개월간 송영호 김화식 이봉로 등과 만주 내몽고 일대에 독립운동기지 건설과 무장 독립운동 세력 양성을 위해 군자금 모금 실행방안을 강구하려던 거사였다.
1927년엔 의령 애국지사인 수파 안효제 문집 교정에 참여해 일제로 부터 수배를 당하였다. 파리장서와 제2차 유림단 사건에 가담해 수년동안 수배를 당해 전국 각지를 다니다 고향으로 돌아와
“시대의 어지로움은 진실로 하늘의 운명”이라고 탄식하며 1928년 임천정(臨川亭)을 건립해
독서와 자연을 완상하며 노년을 보낼 계획을 세웠다.
수산이 직접 지은 임천정 기문을 보면 “나는 타고난 재질이 소략하고 어리석으나 처음부터 자못 성현의 학문에 뜻을 가졌고 늦게는 세태의 변란을 만나 회오리 바람에 휘말려 수염과 모발이 이미 희끗희끗해졌다.(중략)
지금 눈 앞에 우주가 기울어져 큰 물이 길로 넘쳐 흐르듯 하여 우리 도가 기울어짐이 위태롭기가
한가닥 털끝 같으니 장차 고요하고 외진 이곳에서 자연을 완상하며 스스로를 지키고 산마루에 걸린 달과 시내 위에 뜬 구름이 경치를 돋움으로써 문사가 창달되고 나 자신의 몸과 마음이 휴양(休養)이 되어 이 사이에서 너그러움을 얻고자 하였다.”라고 한 것을 알 수 있다.
1930년 임천정에서 ‘의춘지’ 3책을 간행했으며, ‘송암선생 문집’도 간행을 했다. 수산은 본래 성현의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나라의 위태로움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어 광복운동에 몸소 뛰어들었다.
하지만 여러가지 여건이 여의치 않아 만년엔 고향으로 돌아와 임천정을 짓고 선비로서의 고고한 삶을 보내고자 한 것을 알 수 있다.
수산은 1951년 11월 향년 77세로 그의 강학지소(講學之所)인 임천정에서 별세를 했다. 수산의 일생은 나라잃은 시대를 살아간 강우지역 선비의 전형이라고 할수 있다.
수산은 일제의 국권침탈에 항거하여 민족자존의 기치를 높이 세운 독립공적 등이 인정되어 2004년 광복절에 건국훈장을 추서 받았다.
기자는 수산이 학문을 강론했던 임천정을 찾았다. 현재 임천정은 폐허나 다름이 없었다.
독립운동가의 후예로서 평생을 곤궁하게 살아온 수산의 후손들이 임천정을 관리할 여력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최근 수산의 후손들과 지역 유림들이 그의 학덕과 애국심을 기리기 위해 추모비를 세웠으나,
임천정은 아직 복원하지 못하고 있다.
수산의 광복정신이 깃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의령 ‘의춘지’를 편찬했던 유서깊은 의령의 유적지인 임천정이 지금 폐허로 방치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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