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상식/인물평

헤각존자 신미대사(慧覺尊子 信眉大師)

오늘의 쉼터 2011. 2. 19. 17:47

 

 

헤각존자 신미대사(慧覺尊子 信眉大師)


1. 한글날을 맞으며 

 

훈민정음은 1940년 경상도 안동 어느 고가에서 처음 발견되었으니 진흙 속에서 진주보다 더 귀한 보물을 얻은 것은 우리 민족의 행운이요 우리의 보물(국보 70호)이 세계 속에 글의 씨를 뿌려 풀뿌리 한글이 아니라 무성한 대목에 서광의 꽃이 활짝 필 날이 눈앞에 선하다. 이를 발견한 간송 전형필 선생이 보관하다, 현재 간송미술관의 간송문고에 소장되어 있단다. 그  내용이 글자를 이루는 방법과 원리, 훈미정음의 용레 등이 상세하게 적 힌 해례가 수록되어 있어 “훈미정음 해례본” 이라고도 한다고 한다. 


한글날의 변천 과정은 1926년 11월 4일 조선어연구회(한글학회의 전신)가 주축이 되어 매년 음력 9월 29일을 '가갸날'로 정하여 행사를 거행했고 1928년에 명칭을 '한글날'로 바꾸었다. 1932, 1933년에는 음력을 율리우스력으로 환산하여 양력 10월 29일에 행사를 치렀으며, 1934~45년에는 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하여 10월 28일에 행사를 치렀다. 그러나 지금의 한글날은 1940년 〈훈민정음〉 원본을 발견하여 그 말문(末文)에 적힌 "正統十一年九月上澣"에 근거한 것으로, 이를 양력으로 환산해보면 1446년(세종 28) 10월 9일이므로 1945년에 10월 9일로 확정했다. 이 날에는 세종문화상을 시상하고 세종대왕의 능인 영릉(英陵)을 참배하며 전국에서 학술대회 및 각종 백일장을 거행한다.

 

 한글창제의 주역 혜각존자 신미대사

 

신미대사는 우리고장 충북 영동군 용산면 상요리 오얏골에서 태어나 행운일까? 불운일까? 손바닥에 임금왕(王)자를 새기고 탄생하여 반야사로 불문에 출가 속리산 복천사에서 불경과 4개국어 및 언어에 통달 세조대왕의 부름을 받아 집현전에서 근무하며 수양대군(세조)과 정희공주의 후원을 받아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으로 훈민정음을 탄생 시켰으나 숭유억불정책(崇儒抑佛政策)의 정국(政國)이라 승려의 공을 인정하지 않은 탓에 그 공과 인물이 암흑 속으로 묻히었으니 우리 고장의 성인(세조대왕 보다 더한)의 공적을 밝히고자 이 글을 쓰게 되었으며, 앞으로 신미대사가 훈민정음(한글)을 만들어 내는 과정을 연재(連載) 할 것이니 애독은 물론 홍보하여 우리 영동의 위상을 세게 속에 우뚝 세워 주기 바란다.                                                                                  


 2. 명당인 생가 오얏골(괴애골의 변형)

 신미대사는 신라 45대 신무왕의 넷째 왕자공 익광(益光)의 후손 김영이(金令貽)의 고손(5세손)으로 증조부가 고려조 판도판서 영산부원군 김길원(金吉元)이며 조부는 조선조 의정부 우찬성 김종경(金宗敬-贊成公)이고 부는 이종무와 대마도 정별에 큰 공을 세웠고 예문관사 숭문관사 춘추관사 관상감사 세자사 영산부원군을 지내신 김훈(金訓)의 4형제 중 장남으로 충청북도 영동군 용산면 상룡리(오얏골-서당골)에서 태어났으며 생가 터인 상룡리 오얏골(서당골)에 집터를 잡을 때부터 범상치 않는 일이 있었다 한다.


 조모(정경부인 경주김씨)의 상을 당하여 유명한 지관에게 부탁하여 명당을(한곡리 재양골-재상골) 얻어 장례를 치르는데 박장으로 모시라는 지관의 말에 명심하여 개토를 하니 판판한 암반이 나와 고심을 하다 틈새를 이용하여 넓적한 바위를 들추는 순간 세 마리의 큰 벌이 안쪽에 붙어 있다가 그중 한 마리가 날아가서 당황하고 있으니 지관이 황급히 와서 저 벌이 가는 곳을 찾아가서 집터를 잡으면 다음 대에 큰 인물이 날것이다 하여 하인을 시켜 그 벌이 앉은 곳이 상룡리 괴애골로 그곳에 새 집을 짓게 되었다.


  북쪽이 막히고 동남쪽이 확 트였으며 바로 앞에 바릿대산(鉢峰)이 있고 동쪽에 백화산이 바라보이는 전망 좋고 마음에 드는 명당자리에 터를 딲아 상기둥을 중심으로 사방에 기둥을 세워 집의 틀이 되어 부원군이 기분 좋은 끝에 밤이 되어 곤히 잠이 들었을 때 악몽을 꾸었다. 험상궂은 장정이 나타나서 “너 이놈 이 곳은 나의 터전이거늘 어찌하여 네놈이 이곳에 집을 짓느냐” “당장 날이 밝는 대로 중지하고 썩 물러가라 내 말을 뜯지 않으면 큰 화를 당할 것이다” 하고 사라진다. 악몽에 잠을 깨고도 첫날부터 기분이 상하여 깊은 생각에 잠기었으나 다음날 대들보를 얹고 서까래를 걸치고 산자를 엮으니 집 모양이 되었다.

  그날 밤 잠에 그 장정이 또 나타났다. “내 말을 헡으로 듣느냐? 내일 당장 집을 뜯지 않으면 너의 큰 아들을 잡아 가겠다. 정신 차려라” 하고 사라진다. ‘이상하다 이놈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집착을 할까?’ 곰곰이 생각에 잠기며 날이 밝았다. 이게 웬일이냐 어린 큰 아들이 새벽에 세상을 떴다. “정말 이구나” 한탄과 슬픔에 후회를 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또 하루 밤을  보내다 잠결에 그 장정을 또 만났다. “이래도 말을 안들이니 네 고집도 보통이 아니구나 너 이놈 둘째 놈까지 잡아가야 정신 차리고 항복 할래”하며 사라진다. 아침에 일어나니 새벽에 어린 둘째가 세상을 떴다. 기가 막일 일이다. “다 된 집을 뜯어야 하나? 어린 자식을 둘이나 잃은 이 마당에 또 무슨 짓을 할까?” 네 놈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하는 마음이 굳어지면서 기와를 얹어 지붕을 마무리하고 또 밤을 맞았다. ‘ 그 놈이 역시 또 나타났다. 네 고집도 대단 하구나 내 고집 보다 더 세니 내가 물러나마“ 하고 사라졌다. 이렇게 해서 양보 받은 집이 완성 되고 이곳에서 다시 4형제를 두었으니 그 맏이가 수성(신미대사-혜각존자) 둘째 수경 셋째 수온(괴애) 넷째 수화로 모두 조선 초 위대한 업적을 남긴 훌륭한 분들이다.


 지관의 예언대로 당대에 훌륭한 아들이 입신양명하여 세종대왕의 총애에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을 한 신미대사(수성)와 월인천강지곡을 지으시고 월인석보  몽유도원도제문 상원사 중창기 상원사 중창 권선문(국보 292호) 금간경 원각경 번역 등 100여 가지의 작품을 남긴 조선 초 4대 문장가인 김수온과 성주 목사를 거쳐 한성부윤 김수경 통정대부 공조참의를 지낸 김수화 4형제가 이곳에 살적에 터가 드세어 밤이면 밖에서 괴상한 소리가 시끄럽고 부엌 솥뚜껑이 들먹거리는 소리에 잠을 설치는 날이 비일 비재하여 이사를 하면서 이웃까지 없어지고 세월이 흐르면서 농토로 변하였다. 이곳에 사대부가에서 쓰던 고려자기 그릇 파손 유물이 개천에 무수히 굴러다닌다. 

                      
3. 왕(王)의 기운(氣運)

 초선초(朝鮮初-太宗-이방원) 영의정(領議政) 하륜이 태종(太宗)을 도와 태조(太祖)를 상왕(上王)으로 물러앉게 하고 수많은 정적(政敵)들을 단호(斷乎)하게 제거(除去)하고 후환(後患)을 없이 한다는 것이 그의 철칙(鐵則)이기에 자신(自身)의 외친(外親)이었던 남룡과 그의 자식까지 죽음으로 몰아넣고 1인지상(1人之上)에 만인지하(萬人之下)의 자리를 누리고 있을 때 남녘의 밤하늘에 기묘(奇妙)한 기운(氣運)이 서려 있는 것을 보고 ‘저 것은......왕의 기운이 아닌가!?’ ‘남쪽에 왕의 기운이 있다는 것은 아주 불길(不吉)한 조짐(兆朕)이다‘  당연(當然)히 왕기는 대궐(大闕) 안에 있어야 했다. 다른 어떤 곳에 왕기가 서려 있다는 것은 새로운 왕조(王朝)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조짐인 것이다.


1). 왕, 아니면 부처이어야 산다.

 그 무렵에 자모산 연봉사에서 50대의 슬려(僧侶) 한 사람이 역시(亦是) 남쪽 밤하늘을 바라보며 탄식(歎息)을 하고 있었다. ‘왕의 기운이라 ... 왕조가 바뀐 지 3대를 넘지 않는 지금, 새로운 왕의 기운이 나타남은 무슨 연고(緣故) 인가?’


고려의 중심 사상이었던 불교는 쇄약해지고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왕조로 다시 한 번 세상을 개혁할 필요가 있다고 믿어 왕사의 자리마저 사양하고 이태조를 따라 역성의 혁명을 성공시킨 무학대사의 기대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정도전을 비롯한 강력한 유학자(儒學者)들의 거센 바람에 불교는 새 시대의 뒤 배경으로 밀려나게 되었고, 유학자들은 한 번 얻은 기회를 놓칠세라 불교의 씨를 말려버리려고 안간 힘을 다했으니 절의 숫자는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만큼 줄어들었다. (억불 사례는 다음 기회에)

 과거칠불(過去七佛)로부터 석가모니 부처님으로 이어져온 불법의 맥이 행호(行乎-태종))의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석가모니의 법을 이은 가섭존자...인도의 지공화상과 중국의 평산선사로부터 모두 법을 이어 행동으로 법을 가져온 나옹..혜근(慧根)...그리고 그 뒤를 이은 무학 자초(無學 自初)...行乎스님이 금장암에서 무학 대사 입적을 마치고 이름 없는 걸승(傑僧)의 행색으로 이산 저산의 암자(庵子)만을 전전하며 때를 기다리던 그가 십여 년을 떠돈 끝에 머문 곳이 바로 자모산  연봉사였다. 이곳에서도 이름 없는 중으로 처신(處身)하며 남쪽 하늘에 푸르스름한 제왕의 기운이 점점 커져가고 있는 것을 보다 북방에서 내려온 붉은 기운이 그 왕기를 비수와 같은 형상으로 침범하고 있었다. 시각이 급하다 남쪽으로 달리자...다다른 곳이 영동(영산) 용산 상용리 오얏골(괴애골=고야골, 서당골)을 지나 황간 반야사에 이르렀다.   

 

2) 하륜과 구륙

조선 개국 후 관직을 받지 않고 두문동에 은거하던 고려문신-차원부의 일가족을 몰살하라-는 하륜(영의정-태종)의 명을 받고 3년에 걸쳐 추적 끝에 기어코 지리산에서 그들을 벤 일의 공로로 하륜대감에게 신뢰가 두텁게 맺어진 인물 구륙이 자객으로 하륜의 밀령을 받았다.  하륜이 머리라면 구륙은 손발이라 할 만큼 아끼고 믿는 이유는 무술뿐 아니라 말이 적고 특별한 감각(냄새)으로 일을 처리하며 대감에게 위해가 될 일은 절대 남기지 않는 위인이었기에 “영산(영동)으로 내려가 범상치 않는(손바닥에 임금 王자) 남자 아이를 찾아 출가한 아이가 아닌 바에는....베어라” “출가 했다면 위험하지는 않을 것이니 베지 않아도 된다.”라는 밀령을 받고 바랑 속에 수족 같이 써 오던 두 자루의 칼을 숨기고 충청도 영산(영동) 땅 용산이라는 곳을 찾아 떠났다.   

 

3) 구륙의 실수

  흑립을 눌러 쓰고 용산 상용을 찾은 구륙은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한 빗줄기 속에 갈 바를 잃고 서서 열댓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을 때 한 아이가 비를 맞으면서도 한가롭게 그의 곁을 스쳐갔다. 가늘게 뜬 그의 눈이 순간 눈꺼풀 사이에서 번득였다.

 그는 걸음을 빨리하여 소년의 뒤를 따르며 바랑을 옆구리로 돌려 손을 집어넣고 칼을 찾았다. 엄지손가락으로 칼집의 덮개를 재꼈다. 칼을 오른손에 쥐고 비속을 무심코 걷는 어린 아이의 멱살을 잡는 것을 조금 떨어져 뒤따라오던 어머니가 달려들어 말리려 하자 순간 여인의 심장을 찌르고 아이마저 찌르니 두 모자의 낭자한 피가 빗물에 엉켜 흥건히 흐른다.


 구륙은 새벽녘이 되어서야 눈을 떴다. 어제 저녁에 있었던 장면들이 꿈인 양 아스라하게 느껴졌다. 소매 끝에 묻은 핏자국은 그것이 꿈이 아니었음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길 옆 논두렁에 거적으로 덮어둔 두 구의 시체가 생각났다

  간밤에 마신 농주가 아직도 뱃속을 훌치고 있음을 느끼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물을 찾아 문을 열자 하늘은 아직 어두웠다. “아...저 기운이 아직도...? 아니였구나 괜한 생명을...” 하며 물을 마신 후 오얏골(괴애골)로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1) 구륙 - 태조실록 10권, 5년 1월 21일 을사 3번째 기사와 태조실록 11권, 6년- 부하 왜인 3명과 해안가 마을을 노략질하다가 관군에 잡혀 죽음에 이르렀을 때 하륜대감을 만나 살려 주었고, 바로 하륜대감을 따라 한양에 와서 입궁하여 왕에게 후도 한 자루를 바치어 투항함으로 무술이 인정되어 쌀 30석과 콩 20석을, 반인2명에게는 의복-갓(笠) 각각 한 벌식응 내려 주었다

(2) 엤적 부터 임금왕(王)자가 몸에 있으면 왕기를 가졌다하여 살려 두지 않고 나라에서 죽였다 한다


4) 행호(行乎)스님의 방문

 반야사에 여장을 푼 행호화상은 백화산 싸리재를 넘고 용산땅 배고개를 넘으니 해가 서산에 걸렸다. 산세가 용과 같다하여 용산(龍山)이 있는 용두봉 아래 조촐한 기와집 한 채에 이르렀다. 화려하지는 않으나 사대부의 품격을 간직하고 있는 듯한 집, 서산에 해가 진 뒤라 어둠이 묻은 대문 밖에서 허름한 도포차림의 걸승의 목탁 소리에 초로의 여인이 별 말 없이 그를 맞았다.

 “지나던 길에 물 한 목음 얻어 마시려 들렸습니다.” 걸승이 툇마루 걸쳐 앉으며 말하자 여인은 미소를 띠며 물을 떠다 올렸다.

 “날도 저물어 가는데 저녁도 드시고 쉬어 가시지요.” 하고 권하니 지나가는 말인 듯 “자녀들은 어디 있나요?” 하며 “맛있는 물을 대접 받았으니 아이들 관상을 한 번 봐 드릴까 합니다만....” 낯선 이의 기척을 느낀 아이들이 미리 방문을 열고 삐죽 얼굴을 내 밀고 있다가, 인사드리라는 어머님의 말에 밖으로 나와 스님에게 절을 하였다. 

 ‘큰 애는 열다섯 살 수성(守省)이고요, 둘째는 열한 살 수경(守經), 셋째는 아홉 살 수온(守溫), 넷째는 수화(守和)라 합니다. 성은 김가이고요.’

  행호화상은 네 아이들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는 “부인은 참으로 복이 많소이다. 커다란 기둥을 넷이나 품고 계시니...아이들의 아버지가 우선 높은 자리에 오르셨을 터이고...두번째 셋째 넷쩨 모두 관직에 오를 것으로 보입니다.” 하며 되는대로 자란 수염을 손가락으로 꼬며 나직하게 말 하였다. “그런데...장남 수성이는 말씀 드리기가...” 이 말을 들은 이씨(麗興) 부인은 조바심이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4. 반야사에서


1) 불문(佛門)의 문턱 반야사

 한 밤중에 행호의 손을 잡고 얼떨곁에 따라나선 수성은 산길을 타고 반야사에 이르러서는 몸이 녹초가 되어있었다.

아닌 밤중에 두 손님을 보곤 반야사의 주지는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이내 행도를 알보고는 깜짝 놀랐다.

 무학대사의 법을 이으셨다는 행호스님에게 주지인 연희(衍喜)사문은 선 자리에서 엎드려 절을 올렸다. 

 “연희사문이 여기 있는 줄은 몰랐네. 내가 오늘 제대로 찾아 왔군, 이 아이를 이 절에서 머리를 깎아주려고 데려왔네.

  수성아! 들어가서 주지스님께 절을 올리도록 해라.”

 머리를 다 깎은 후, 대얏물에 머리를 씻어주고 나서는 행호대사도 피곤하였는지 요사채에서 눈을 붙였다.

 ‘아침이 되면 어머니는 내가 없어진 것을 아시고 얼마나 놀라실까?’ 아버지도 유배중인 이때- 장남마저 집에 없다는 것이 얼마나 어머니를 힘들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니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밤중에 절을 빠져나와 어머니에게 가려다 구륙을 만났고, 구륙에게 잡힐뻔 했을 때 다행히 행도스님의 도움으로 다시 반야사로 돌아가게 되었다.


 행호대사는 다음날부터 연희스님에게 부탁하여 수성에게 불가의 모든 것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수성의 첫 스승은 만덕사(萬德寺) 주지였다가 지금은 반야사의 주지인 연희인 셈이다.

 그는 당대의 선승이던 벽계정심(碧溪正心)과 더불어 『금강경』을 교정 간행했던 고승이었다. 그가 워낙 이론에 박식하여 세상에서는 그를 교학사라고 불렀다. 연희는 수성에게 절 하는 법, 예불문, 목탁 두드리는 법, 등과 저녁이면 부처님의 생애를 이야기해주었고, 행호는 대장경을 직접 설해 주었다. 그 중에도 반야경을 비롯하여 원각경이 있었고, 수능엄경이

있었으며 금강경이 있었다. 수성은 하나를 들으면 일곱 가지 기억이 깨어나는 특출한 이해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스승의 가르침이 그다지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행호스님도 또한 법기(法器)를 만난 기쁨에 하루해가 뜨고 저무는 것을 잊어가며 수성을 다듬어가고 있었다.


 반야사로 갔을 것이라 생각한 이씨부인은 날이 새기를 기다려 험한 산길을 넘어 반야사를 찾아갔다. 절에 올라온 수성의 어머니는 머리 깎은 자식을 보고 말문이 막히어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암살자를 대면해서 그 끔찍한 공포를 겪은 터라 차라리 자식을 부처님의 품에 맡기는 것이 더 낫겠다는 마음을 하게 된지도 모른다. 무사히 있음을 확인한 이씨 부인은 자식을 남기고 떠나는 길에 마지막으로 돌아서서 근엄한 얼굴로 당부하였다. “수성아! 이왕에 머리를 깎고 출가했으니 반드시 큰 스님이 되어라.” “예, 어머니, 명심하겠습니다.” 모자의 눈에는 방울방울 눈물이 맺혀 떨어졌다.


 남편 김훈은 진사에 오른 후에 문무에 고른 능력을 보여 왕세자의 지도까지도 맡은 적이 있었다. 옥구(沃溝) 병마사(兵馬使)로 있을 때 조모가 돌아가시고 그 빈소에 참여하지 않고 한양으로 올라가야할 형편으로 한양으로 갔다하여 불효했다는 죄목으로 상소되어 터무니없는 중벌을 받아 전라도 내성이라는 곳으로 유배를 당했다. 이씨 부인이 아는 남편은 결코 그럴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녀는 너무나 억울했고, 기가 막혔다. 그런 와중에 남편과는 상의도 못한 채 장남을 출가시키게 된 자신의 심정이 너무나도 서러웠으니 아들이 보이지 않는  곳 까지 한참을 내려오다 이끼 덮인 바위를 끌어안고 한 없이 울었다.

 

2) 스승과의 이별

 15살에 어머니 곁을 떠나 행호스님을 따라 반야사에서 머리를 깎은 후 행호스님과 연희사문의 지도로 4서3경과 불경 불서를 익히는데 1년의 세월이 흘렀다.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탓인지 영리하기가 남달라 한가지를 가르치면 두세 가지를 이해하고 생각하는지라 이제는 자신이 스스로 연구하며 몸과 마음을 키울 수 있다고 믿어짐에 행호 스님은 어느 날 수성을 불러 “주지 스님께 경전을 잘 배워 두어라 나중에 긴히 쓰일 일이 있으리라. ”하며 “너의 길은 지금 대승경전 공부를 충실히 해 두는 것이다. 나중에 긴히 쓰일 일이 있으리라. 나는 미처 못 마친 본성의 일을 마치고 돌아 올 것이다.”

 

 “스승님께서도 못 마친 공부가 있습니까?”

 “하핫... 이놈이 나를 부끄럽게 하는구나! 나도 아직 멀었다. 마음의 근원-생명의 본성의 일을 확실하게 깨닫기 전에는 본래의 공부를 다 마쳤다고 할 수 없느니라. 그러니... 밥을 먹어도 잘 넘어가지 않고 잠을 자도 발을 뻗고 잘 수가 없었지.”

 “스승님! 저는 아직 어립니다. 저를 출가 시키셨으니 제 앞길을 열어주고 가셔야합니다. 지금 가버리신다면 저도 환속해 버릴 것입니다.” 떠나지 마십시오. 수성은 결사적으로 스승의 발길을 붙잡았다.

 스승의 눈은 사랑과 연민으로 제자의 가슴 위에 따사로운 햇볕처럼 내리쪼였다. 수성은 눈물이 어룽거린 채로 스승의 눈만 빤히 쳐다보았다.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이다. 너는 그 사이에 배울 것을 충분히 배워두어라. 난 그 뒤에 너에게 가르쳐 줄 것이 또 있으니....” 말을 남기고 스승은 방향을 알리지 않고 떠나셨다.


 스승 행호스님이 어디론가 떠난 뒤 수성은 경전공부를 꾸준히 해 나갔다. 그러나 기다리고 기다려도 그립고 보고 싶은 스승은 돌아오지 않았다.

 2년의 세월이 지난 후 마침내 행장을 꾸려 스승을 찾아 길을 떠나기에 이르렀다. 이르는 곳마다 절에 묵으면서 행호스님이 계신 곳을 묻고 물어 찾아가는 고달픈 여정이나 스승의 행로는 일정치도 않고 막연한 것-

 스승의 행적을 찾아 머문다는 절을 가보면 스승은 또 다른 곳으로 떠난 후였으니 한 발 늦은 것을 한탄하며 원망도 많이 했다.


3) 반야사(般若寺)의 연혁

 반야사 큰스님이 만든 사찰 소개문에 의한 연혁은 720년(신라 성덕왕 19) 의상(義湘)의 10대 제자 중 한 사람인 상원(相源)스님이 창건했다. 이름을 반야사라고 한 것은 문수보살의 반야를 상징한 것으로 이 절 주위에 문수보살이 상주한다는 신앙에 기인한 것이다.

 그 뒤 수차례의 중수를 거쳐서 1464(조선 세조 10)에는 이 절의 승려들이 세조의 허락을 얻어 크게 중창했다. 세조는 속리산 복천사(福泉寺)에 들러 9일 동안의 법회를 끝낸 뒤 혜각 신미(慧覺 信眉) 스님 등의 청으로 이 절의 중창된 모습을 살피고 대웅전에 참배했다.

 그 뒤의 자세한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설화-세조가 법회를 마친 뒤 이 절에 들렀을 때의 설화가 전한다. 세조가 대웅전에 참배했을 때 문수동자가 세조에게 따라오라고 하면서 절 뒤쪽 계곡인 망경대(望景臺)의 영천(靈泉)으로 인도하여 목욕할 것을 권했다.

 동자는 ‘왕이 불심이 갸륵하여 부처님의 자비가 따른다’는 말을 남기고 사자를 타고 사라졌는데 목욕을 마찬 후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이에 세조는 황홀한 기분으로 절에 돌아와서 어필(御筆)을 하사했는데 이것이 지금까지 보관되어 있다.

 

4) 산사에서 스승 재회

 목적지가 없는 방랑(放浪)의 길은 고통(苦痛)의 고뇌(苦惱)였다. 수성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추위와 굶주림이었다. 하루에 한 끼만 먹어도 그날은 힘이 나는 날이었다. 산중의 절을 찾아가도 절의 사정 역시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우선 폐사가 되어버린 곳이 대부분이었고 남아 있는 절 조차도 떠돌아다니는 행자승을 반가이 맞아 줄 이가 없었다. 이렇게 몇 개월을 헤매던 중 수성은 남해의 어느 산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아이쿠!” 갑자기 발밑이 푹- 꺼져 내리면서 그의 몸은 어둠속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곳은 사냥꾼들이 파 놓은 함정이었다. 그는 그 곳을 빠져나가려 안간힘을 다 했으나 자꾸 미끄러지기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시간은 흘러 밖은 어둠이 내리고... 추위와 허기가 심각하게 느껴지면서 불현듯 공포심이 엄습해 왔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고 마는 것인가’

 기진맥진하여 탈진한 그가 몸을 웅크리고 잠이 들었다가 인기척에 눈을 떠 보니 눈앞에 밧줄이 하나 흔들거리는 것이 보였다.

 “어서 밧줄을 붙들고 올라와요! 정신 차리고, 어서요!” 

 꿈속인 듯 아득히 들려오는 여인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수성은 밧줄을 붙들고 사력을 다해 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를 구해준 여인은 놀랍게도 삼십대쯤 보이는 곱상한 여인이었다.

 “아니, 어쩌다가 젊은 총각이 사냥꾼들 함정에 빠졌나? 얼마나 추웠을까?. 쯧쯧!...”

 밧줄을 잡고 간신히 밖으로 나오니 측은하게 보였는지 여인은 수성을 데리고 자신이 가고 있던 산사를 향했다. 그 곳에서 수성은 언 몸을 녹였고, 빈속을 어는 정도 채울 수 있었다. 법호가 자심월 이라고 밝힌 그녀는 자신이 모시고 있는 큰스님을 소개해 주겠노라고 하였다. 해가 저물 무렵이 되어서야 큰스님은 산에서 약초 걸망을 매고 내려 왔다. 수성은 그의 모습을 보자 자기도 모르게 부르짖고 말았다.

 “스승님-!!”

 그가 바로 꿈에도 못 잊던 스승 행호스님 이였던 것이다. 스승은 모든 군더더기가 씻겨나간 사람처럼 고요하게 웃었다. 수성은 엎드려 절하고 나서는 다가서서 스승의 거친 손을 잡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스승과 수성은 방에 들어가 정회(情懷)를 풀었다. 자심월도 기뻐하며 곁에서 차를 달였다.

 열여덟 살이 된 수성은 여드름이 난 얼굴을 하고 턱 밑에 잔 수염도 거뭇거뭇하게 돋아나 있는 채로 활짝 웃으며 스승을 바라보았다.

 “스승님 본분사는 마치셨어요?”

 “그래! 이제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잔다!”

 “에이! 그게 본분사에요? 그건 저도 할 줄 알아요!  해해해....”

 “그간 공부는 많이 하였느냐?”

 “이제 밑바탕은 좀 다진 것 같아요. 연희스님께서 공부 안한 날은 밥도 안 주셨거든요.”


 행호스님은 여러 사찰을 순례한 일, 어느 이름도 없는 사당에서 무학화상의 진영을 참배한 일 등 그간에 겪은 이야기를 수성에게 간략하게 해주었다. 그는 스승인 무학의 진영 앞에서 일주일을 머물게 되었고. 그 곳에서 꿈에 신인을 만났었다고 한다.

 그는 행호에게 알 수 없는 문자가 빽빽이 적힌 책을 보여 주었단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것은 고대의 불경이었고 그 문자의 이름은 실담문자라 했고. 또 하나의 글은 신지문자라고 하였다. 스승 무학에게서 약간은 배운 적이 있었던 것이 기억이 났다. 진언에 쓰이는 문자이기도 했고 그 변형이 부적 등에 쓰이기도 했다.

 “너는 이 문자를 가슴에 새겨 두어라! 이것을 익혀 나중에 인연 있는 제자에게 전하여라!. 세상을 위해 크게 쓰이리라!” 하렸다.

 그 이후 행호는 그곳을 떠나 이곳 남해정사에 머무르며 실담문자와 신지문자를 가슴에 담고 삼관(三觀)의 수행을 하여 결국은 깨달음을 크게 이루게 되었다.

 그는 문자라는 것이 단지 의미 전달만이 아닌 영혼의 진화에도 관련이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5. 복천사(福泉寺, 지금의 福泉庵)에서


1)  경전과 우리의 고대문자

 행호스님은 수성을 데리고 속리산을 향하여 발걸음을 재촉했다.

 해가 저물어 어둠이 깔릴 무렵 속리산중턱에 있는 복천사에 도착했다.

 여장을 풀고 저녁상을 물린 뒤 행호스님은 수성에게 강화(江華)에 가서 대장경을 자주 열람하라고 하였다.

 “모름지기 중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경전공부를 소홀이 해서는 안 되느니라”


 스승의 당부대호 수성은 방대한 장경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인쇄본을 들고 와서는 밤늦도록 읽고 나서 머리맡에 두고 잠시 눈을 붙였다가 다시 일어나면 장경을 손에 들었다.

 그야말로 공부한 것을 씹어 삼킬 듯한 정렬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성은 스승 행호tm님에게 여쭈었다.

 “스승님, 공(空)이 무엇입니까? 정녕 비었다는 뜻입니까?

 행도스님은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 

 “공을 이해한다면 장경의 뼈를 만졌다 할 수 있으리라. 너는 반야경에 나오는 색즉시공(色卽是空)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색은 곧 공이다. 즉 들어난 것은 비어있는 것이다...라고 해석 해 보았습니다만...”

 “다들 그렇게 해석하곤 하지. 그것이 한자를 우리말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이니라.” 

 “그러면 다른 해석도 있습니까?”

 “공은 생명의 근원인 적정상태를 말하며 의식적 측면에서는 경계에 대하여 아무렇지 않음이다.

 그냥 텅 비어있는 것을 말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말이지. 그러하니 색즉시공이란 드러난 것,

 감지된 모든 것은 곧 근본으로 가는 표식이라는 뜻이 된다. 그러면 무(無)는 무슨 뜻인 줄 알겠느냐?”

 “무(無)란 없음이 아닙니까?“

 “무(無)란 없다는 뜻 말고도 끊는다, 쉰다는 뜻도 있다. 또한 비춘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그러한 고로 속박으로 부터의 해탈이 이루어진다. 무슨 속박 인고 하니 덧붙임의 속박, 분별의 속박, 그 습관으로부터의 해탈을

 의미하는 것이다.”

 수성은 비밀의 궁전을 막 열어젖힌 소년처럼 놀라움에 가득차고 말았다.

 “그렇다면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란 눈 귀 코 혀 몸 뜻으로 느낀 모든 대상에 대해 덧붙임,

  분별심을 쉬라는 뜻이 되는군요?”

 “그렇지! 그냥 눈 귀 코 혀 몸 뜻이 없다는 말이 아님을 이해하겠느냐?”

 수성은 새로운 지혜의 충격 앞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한동안 있다가 겨우 말을 했다.

 “스승님! 문자의 심오한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않고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한문으로 번역된 경전을 풀이하는 것만으로는 터무니없는 해석에 빠질 수도 있겠군요!”

 “그렇다 문자의 뿌리를 알아야 모든 글을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이지.“

 “문자의 뿌리란 무슨 뜻입니까?‘

 “우리민족에게는 본디 여러 가지 글이 있었었니라. 지금 그 글들은 거의 다 실전되어버렸다.

  그러나 그 고대의 문자를 다시 찾아내어야 하며 그 의미를 다시 찾아내야 할 소중한 사명이 남아 있다.”

 “우리민족의 글이라니요. 금시초문입니다. 어떤 끌이 있었습니까?”

 신시에 녹서(鹿書), 자부에 우서(雨書), 치우에 화서(花書), 복희에 용서(龍書), 서역(西域)에 실담(悉曇),

 단군에 신전(神篆) 등  문자가 있었다 하였느니라. 그것은 태고시대에 문자와 글이 있었다는 것이니라.“

 

2) 문자의 뿌리

 “용서(鏞書)...화서(花書)...녹서(鹿書)...신전(神篆)...우서(雨書)...실담(悉曇)...도무지 모르겠습니다.

  그 것이 어떻게 생긴 글입니까?”

 “그건...나도 모른다. 그런 글이 있었다는 기록만을 보았으니...”

 수성은 알면 알수록 놀라움에 빠져 들어갔다.

 “그러한 문자는 처음에 누가 만들었습니까?”

 “네가 연구 해 보아라. 여러 가지 말이 있다. 내 생각으로는 그것은 최소한 성인(聖人)이 만드신 것이며

   어쩌면 신불(神佛)이 만든 문자라고 느껴진다.”

 “성인...신불...?!”

 “그러 하니라. 인간의 교화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문자이며 말이니라.”

 수성은 어둠 속에서 광명을 본 듯 스승에게 엎드려 절하며 청하였다.

 “스승님! 부디 제게 성인의 글, 신의 문자를 가르쳐 주십시오.”

 행호스님이 기특한 듯 제자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나는 네게 방향만을 가리켜 줄 수 있다. 네 자신이 무던히 탐구해서 문리를 틔워야 할 것이다.“

 “스승님께서는 문자의 이치를 깨치시게 되었습니까?”

 “ 내 사조 되시는 분이 천축국에 다니시면서 범어문자를 비롯하여 우리의 옛 문자를 알게 되셨다.

    그것이 내 스승인 무학대사께 이어졌고, 다음 내가 미흡하나마 이어 받았단다.”

 “사조 되시는 그 분이 누구신가요?”    

 “고려말의 대선사이시며 공민왕의 왕사(王師)였던 나옹 혜근 화상이니라.”

 “나옹화상이요?”

 “그래. 너도 이 시를 아느냐?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수성이 눈을 반짝이며 뒤를 이었다.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물 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옳거니!”

 행호스님은 흥겨운 듯 얼굴에 웃음을 가득 지었다.

 “그 시가 바로 나옹화상께서 지으신 시다. 화상께서 범어에 통탈하게 되신 것이...

천축국까지 가서 지공화상께 인가를 받고 범 제자가 되셨지.

그러니까 부처님의 정법이 지공화상까지 와서 고려의 나옹화상께 전해 졌고...그리고 무학대사님...”    

 “그리고...지금의 스승님께 이르렀군요!”

 “그리고...그 소중한 법이 이제 너에게 전해지려 하고 있다..!.”

 스승의 말에 수성은 엄청난 감격과 더불어 어깨를 누르는 중압감에 쥐구명에라도 들어 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스승님 저 같이 무지한 것이 어찌 부처님의 정법을 어찌 감당 하겠습니까?”

 행호스님은 마애불과 같은 미소를 지으며 수성의 어깨를 두드리며 다독여 주었다.

 “나도 처음에 무학화상께 너와 같이 그렇게 엄살을 부리고 싶었느니라.“


수성은 매일 같이 스승에게 범어를 배우면서 범어(梵語)로 된 장경(藏經)을 한자(漢字)로 번역(飜譯)한 우리의 장경은 그 뜻을 이해하기에 어려움이 많아 장경을 알려면 범어를 알아야 되겠다는 일념으로 더욱 열심히 범어를 배우며 날로 깊어져가는 불법(佛法)의 오묘(奧妙)한 세계를 맛보게 되었다.

 “세존(世尊)이란 무슨 뜻입니까?”

 ‘세존은 범어로는 바가반이라...순수한 우리의 옛말로 밝아범이다. 밝음 즉 지혜(智慧)를 밝힌 아범이라는 뜻이지.“

 수성(守省)은 더 어려운 말에 이해가 안 가는지 고개를 갸우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