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목 | 문화재자료 제239호 (여수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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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칭 | 여수손죽도이대원사당(麗水巽竹島李大源祠堂) |
분 류 |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인물기념/ 사우 |
수량/면적 | 1동 |
지정(등록)일 | 2003.05.27 |
소 재 지 | 전남 여수시 삼산면 손죽리 1164 |
시 대 | 조선시대 |
소유자(소유단체) | 손죽리 |
관리자(관리단체) | 여수시 |
상 세 문 의 | 전라남도 여수시 문화예술과 061-690-2222 |
일반설명 여수 손죽도 사당은 임진왜란 5년 전인 1587년에 침입한 왜구를 당시 녹도수군만호진의 책임자였던 이대원(李大源, 1566∼1587) 수군만호가 격전을 벌이다 왜적을 물리치고 전사한 곳으로 섬 주민들에 의해 세워진 사당이다. 이대원은 1583년(선조 16) 4월 18세의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고, 21세에 전라도 흥양(고흥)에 설치된 녹도수군만호진의 만호(종4품)가 되었다. 1587년(선조 20) 2월에 고흥 앞바다 손죽도 인근 해상에 침공한 왜구 20여척을 무찌르고자 출병하여 이를 대파하고 1차 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개선하였다. 2월 17일경에 다시 외적이 손죽도 해상으로 쳐들어 오자 전라좌수사의 명에 의하여 불리한 점이 있었으나 출전하였고 후속 군사가 오지 않아 적에게 잡혀 순절하고 말았다. 손죽도는 원래는 흥양현(현재의 고흥군)에 속하였으나 1896년 지방제도 개편 때 돌산군 삼산면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여수에 편입되었다. 이대원 사당은 처음에는 주민들이 1칸 모옥(茅屋)을 지어 춘추로 향사해 왔으나 1919년(기미년)에 사옥이 쓰러져 섬 주민들이 사우를 새로 지어 제사지내도록 했다고 한다. 건물은 초가로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도민들은 장군의 제일이 돌아오면 1주일 전에 인줄(부정을 막기 위해 길이나 문에 건너질러 매는 금줄)을 띠고 동물이나 사람들의 통행을 금지시키고, 매년 집집마다 쌀 1되씩을 공납시켜 엄숙히 제사를 지내고 있다. 조선시대에 건립된 사당은 1590년(선조 23), 1597년(선조 30), 1637년(인조 15) 등 세가지 기록이 있으나 모두 전거(典據)가 불확실하다. 다만, 정협이 방문하여 손죽도이장군조사를 지었는데, 이 시기가 1590년 어간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1923년에 쓴 사당 중수기에 1919년에 퇴락한 사우를 고쳤다는 내용이 있어 그 이전에 사당 건물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이처럼 1919년과 1923년에 중수를 거쳐 1983년 마을 주민의 정성으로 현재 사당 건물을 중창하여 이때부터 충렬사라 하였다. 현재의 사당은 팔작지붕 겹처마 형태로 정면·측면 각 1칸의 규모이다. 약간 다듬은 초석에 두리기둥을 세웠다. 내부는 마루로 되어 있고, 전면에 영정(1983. 6 제작, 난사(蘭史), 73×165㎝)과 위패(병조판서이공대원장군신위, 11.5×53.5㎝)를 봉안하고 있다. 내부에는 현판 2매와 추증 교지 사본 등이 걸려있다. 정문은 솟을대문 형식으로 1칸의 맞배지붕집이고 담장으로 둘러져 있다. 이대원 사당은 마을 수호신으로 당제 형태로 모셔져 왔고, 조선시대에 건립된 사당은 1919년, 1923년, 1983년 등에 보수하여 건축적 특성은 떨어지지만, 이대원 장군의 행적을 통하여 국난을 극복한 역사적 현장이고 육지부에 멀리 떨어진 섬 지방의 호국유적지로서 선현 현창의 의미를 살려 역사성과 장소성에서 가치가 있다.
여수손죽도이대원사당
여수손죽도이대원사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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