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전남문화재자료

문화재자료 제202호 여수호좌수영수성병설사적비

오늘의 쉼터 2010. 12. 23. 12:20

 

 

종 목 문화재자료  제202호 (여수시)
명 칭 여수호좌수영수성병설사적비(麗水湖左水營守城幷設事蹟碑)
분 류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
수량/면적 1기
지정(등록)일 1998.08.13
소 재 지 전남 여수시  연등동 376
시 대
소유자(소유단체) 유상열
관리자(관리단체) 여수시
상 세 문 의 전라남도 여수시 문화예술과 061-690-2222

 

일반설명

 

사적비란 어떠한 사건이나 사업에 관련된 사실이나 자취를 기록해 놓은 비이다. 이 비는 조선 영조 49년(1773) 호남좌수사로 부임해온 김영수가 전라좌수영의 성을 크게 다시 지어 새로이 하고, 군사를 정비하며, 군기, 잡물 등을 마련한 사실과 월과미(月課米:중앙에서 지방의 관아에 매달마다 부과하였던 세금), 털 없는 겉벼 등을 마련해 놓았던 사실을 적고 있다.

비각 안에 모셔둔 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습으로, 비몸 앞면에 ‘호좌수영수성창설사적비’라는 비의 명칭을 가로로 새겨 놓았다. 비문은 한줄에 42∼45자씩 14줄의 글을 세로로 적어 놓았다.

정조 3년(1779) 지방의 군사들과 승병들이 뜻을 모아 세운 것으로, 이 비를 통하여 영조 말·정조 초 호남좌수영의 시설과 설비, 운영경비 및 이의 마련방법, 사병·승병을 비롯한 지방민들의 협조상황 등을 알 수 있어 호남지방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에도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비문내용(번역문)은 다음과 같다.
호좌수영성창설사적비(湖左水營守城刱說事蹟碑)

무룻 병가에는 공수법이 있으니 이른바 지킨다는 것은 성을 지키는 것을 일컫는 것이다. 절도사 김공이 이곳에 성을 쌓으니 이는 중요한 장소에(출입의 요소에) 상토(桑土)의 갖춤이 아닌가?
공의 이름은 영수(永綏)요 안동(安東)인이다. 우리 영조조 계사년(1773년;영조49) 여름에 김해부사에서 옮겨와 수개월에 걸쳐 변무를 마쳤는데, 이때는 비록 태평한 때였으나 마음은 적을 대하고 있는 것 같이 하였다. 이에 이르기를 "이 영(營)은∼∼을 감당하는(또는, 이 영은 마땅히)∼∼한 요충지임에도∼∼이 없었도다.(또는, 어찌∼∼한 ∼∼요해처에 없는가) 비록 조잡하나마 수성(守城)을 완성 하였으나 성을 지키는 병사가 하나도 없으니, 배를 타고 출전하는 날에 성에 들어와 지킬 자가 누구인가. 바다와 육지를 동시에 방어하는 것은,∼∼을 지킴만 같은 것이 없다."
이에 조정에 요청하여 어명을 받아서 이 해 가을에 공역을 시작하였다. 둘레에는 모두 개석(盖石)을 두루 놓고, 돌은 모두 돈을 주고 모았으며, 칠초루(七초樓)를 짓고 철(鐵)로 두 성문을 만들어 쉽게 들어나는 것에 대비하는 설비를 이미 엄하게 갖추었고, 금토(金土)와 같은 것을 사들이고 물길을 뚫고 못물을 모았으니 설매지환(說梅之患)을 가히 면할 수 있게 하였다.
군기와 범백∼∼같은 것에 이르러서는 조총(鳥銃) 팔백을 조정에서 서울 경군문(京軍門)으로부터 마련하여 내려 보내 주었으며, 각색의 깃발을 스스로 마련하였고, 아홉 척의 전함에 비치할 것도 새롭게 하였다. 그 오래된 것들은 염색을 하거나 새롭게 보수하여 위로 옮겨서∼∼하였다. 육백매의 조총(鳥銃)과 팔백명의 장정과 3백명의 의승(義僧)을 얻으니 대오가 정돈되고 엄숙하여졌다. 그리하여 일군문(軍門)의 모양을 이루었고, 중군이하 제임(諸任)의 벼슬 몫도 세웠다. 함께 힘을 모으고 덜어내어 급료곡식∼∼을 마련해 낸 것은 곧 공이 스스로 마련한 것이다. 월과미(月課米)로 쌀 일천석이 배당되었는데 이것은 비국(備局: 備邊司)에 보고하여 얻었으며, 정조(正租) 3백석은 순영(巡營)에서 도와서∼∼한 것이다. ∼∼백삼십일량은 고인이 된 절도사 이여옥(李汝玉)이 따로 준비하여 이자를 늘리므로서 수성(守城)을 지키는 중군의 전렴분한이 평시와 어긋날때에 대비토록 한 것이다. 지방 사람인 박문욱(朴文昱)이 관에 아뢰어 토지를 살펴 다시금∼∼하여 온 것이다. 돈 일천냥을 공이 또 별도로 준비하였는데 이것으로 오래도록 이자를 늘려 봄 가을에 활쏘기 대회에서 상으로 주도록 하였다. 이로써 배불리 먹이고 힘을 북돋울 방도가 또한 가히 훌륭하다 하겠다. ∼∼종(鍾)을 구축함에 이르러서는 군졸된 자들이 무리를 불러 모아 서로 권유하여 한달이 못되어 완공을 고하였다. 이상이 그 사적(事蹟)의 대략이다.
공이 임기를 마치고 돌아감에 이르러 지방 사람들이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고이 부임하여 3년동안 선정을 ∼∼. 이런 즉 큰석∼∼돌에 ∼∼(함으로서)공경을 삼으니 위국진심으로 세움을 이룬 것이다. 이같은 것은 능히 우리 변방 백성들로 하여금 '죽는 한이 있어도 (백성들을)버리고 가지 않는다'는 의(義)와, 또 이와같이 산의 돌은 가히 갈라져도 수성(守城)은 무너지지 않음을 알게 하였느니 공의 ∼∼이로다. 우리가 마땅히 힘 쓸 바는 힘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 변방을 지키는 것인바, 이것이 김공의 마음을 저버리지 아니하는 바이다. 오호라, 어찌 가히 힘쓰지 아니할 것인가. 마침내 쇠를 녹이고 돌을 깎아, 천추에도 썩지 아니할 ∼∼누런 비단이 아님을 ∼∼말하노라. 건륭 44년 기해(1779) 시월일 지방민과 병사들이 뜻을 모아 세웠는데, 의승(義僧)들이 자원하여 조역하였다. 도감(都監) 가선 조대려(趙大呂), 동수(洞首) 가선 박동기(朴東起), 존위(尊位) 박경장(朴景章), 한호(韓湖)

 

 


여수호좌수영수성병설사적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