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대구문화재자료

문화재자료 제19호 첨모재 (瞻慕齋) 해제

오늘의 쉼터 2010. 12. 11. 17:09

 

 

종 목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9호
명 칭 첨모재 (瞻慕齋)
분 류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인물기념/ 사우
수량/면적 1동
지정(등록)일 1989.06.15
해 제 일 1993.07.15
소 재 지 대구 수성구  황금동 258
시 대
소유자(소유단체) 달성서씨판서공파
관리자(관리단체) 달성서씨판서공파
상 세 문 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문화공보실 053-666-2172

 

일반설명

 
남은(南隱) 서섭(徐涉)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과 유림에서 묘소가 있는 이곳에 세운 건물이며 첨모재(瞻慕齋)이다. 서섭(徐涉)의 호는 남은(南隱), 判書公派(판서공파)의 派祖(파조)로 世宗朝(세종조)에 文科(문과)에 급제하여 文宗(문종)을 거쳐 端宗(단종)에 이르기까지 벼슬이 大護軍(대호군)을 거쳐 資憲大夫吏曹判書(자헌대부이조판서)에 이르렀다. 그는 端宗初(단종초)에 王族(왕족)과 奸臣(간신)들의 跋扈(발호)를 경계하여 斥姦疏(척간소)로 改革(개혁)을 주장하다가 流配(유배)당하기도 하였다. 首陽大君(수양대군)의 王位纂奪(왕위찬탈)에 벼슬을 버리고 落鄕(낙향)하여 號(호)를 南涯(남애)에서 南隱(남은)으로 바꾸고 세상을 떠날때까지 은둔생활을 했다. 그래서 그의 후손들도 그의 행적을 모르고 있다가 聞寧越事變痛哭(문녕월사변통곡), 聞六臣殉節感吟(문륙신순절감음), 在謫所時詩(재적소시시)와 與孫格齋(여손격재) 業瑞(업서), 戒子孫說(계자손설), 伯兄親監祭文(백형친감제문)들이 포함된 遺稿(유고)와 그 行狀(행장)이 1924년 그가 살던 낡은집 친정에서 발견되어 늦게나마 그의 忠節(충절)을 알게 된 후손과 儒林(유림)에서 1926년 그의 墓所(묘소)아래 膽慕齋(담모재)를 건립, 그를 主享(주향)하고 1994년 그의 子(자)인 徐次元(서차원)과 아울러 두 父子(부자)를 配享(배향)하면서 儒林(유림)에서 德山書院(덕산서원)으로 改稱(개칭) 重建(중건)하였다. 坎元(감원)은 成宗(성종)때의 忠臣(충신)이며 成均生員(성균생원)으로 求言上疏(구언상소)를 올려 成宗(성종)의 失政(실정)을 直談(직담)하였다가 忠反爲罪(충반위죄)로 심한 고문을 당한 直臣(직신)인데 成宗實錄(성종실록)에도 詳載(상재)되어있으며 文集(문집)도 刊行(간행)하였다. 境內(경내)에는 位牌(위패)를 모신 景義祠(경의사)를 비롯하여 방 3칸, 대청 1칸의 正寢外(정침외)에 東西(동서)의 存誠齋(존성재), 求仁齋(구인재)와 南隱先生(남은선생) 神道碑閣(신도비각)이 함께 있다.

 

 

 

 

첨모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