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서울문화재자료

문화재자료 제33호 (은평구) 진관사칠성각(津寬寺 七星閣)

오늘의 쉼터 2010. 11. 9. 12:55

 

 

종 목 문화재자료  제33호 (은평구)
명 칭 진관사칠성각(津寬寺 七星閣)
분 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각루
수량/면적 1동/18㎡
지정(등록)일 2006.10.19
소 재 지 서울 은평구  진관외동 1번지
시 대 대한제국시대
소유자(소유단체) 대한불교조계종 진관사
관리자(관리단체) 대한불교조계종 진관사
상 세 문 의 서울특별시 은평구 문화체육과 02-350-1622

 

일반설명

 

진관사(津寬寺)는 거란의 침입을 막아내고 국력을 수호한 고려 제8대 현종(顯宗)이 1011년(顯宗 2년)에 진관대사(津寬大師)를 위해 창건했으며, 6.25 당시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복구된 고찰로 전해진다. 또한 '신라시대 고찰'이란 설과 조선 후기 승려 성능(聖能)이 찬술한 「북한지(北漢志)」에서는 원효대사가 진관대사와 더불어 삼천사와 함께 세웠다는 설도 전해진다. 전해 내려오는 연기설화(緣起說話)에 의하면 고려 제5대 경종(景宗;975~981) 때로 거슬러 올라가 981년(景宗 6)에 경종이 죽고, 성종(成宗)을 거쳐 경종의 왕비인 헌애왕후(獻哀王后;964~1029)는 그의 아들 송(誦)이 왕위에 올라 목종(穆宗)이 되었을 때 천추태후(千秋太后; 獻哀王后)가 되어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게 된다.  또한 태후는 성종년간에 김치양(金致陽)과 정을 통해 몰래 사생아를 낳게 되었고 마침내는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고 하였다. 이런 정쟁(政爭) 가운데 목종에게 아들이 없어 헌애왕후의 동생 헌정왕후(獻貞王后)와 태조(太祖)의 아들인 욱(郁, 安宗)의 사이에서 난 대량원군(大良院君) 순(詢)이 왕위 계승자로 봉해진다. 이를 기회로 태후는 자신의 사생아를 옹립하기 위해 목종에게 참소하여 대량원군을 숭경사(崇慶寺)에 가두고 죽임을 꾀한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대량원군을 다시 진관대사(津寬大師)가 혼자서 수도하는 삼각산(三角山)의 한 암자로 축출하게 된다. 대량원군의 신변이 위험함을 느낀 진관대사는 산문 밖에 망보는 사람을 배치하는가 하면 본존불을 안치한 수미단 밑에 땅굴을 파고는 그 안에 12세인 대량원군을 피신시켜 자객으로부터 화를 면하게 하였다. 대량원군은 이곳에서 3년을 보내게 되는데, 1009년 강조가 군사를 일으켜 목종을 폐위하고 왕순을 왕위에 옹립하니 대량원군 순이 제8대 현종(顯宗)으로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대량원군은 재생의 은덕에 대해 고개 숙여 감사하고, 진관대사와 눈물로 작별하면서 자신이 거처하던 땅굴을 신혈(神穴)이라 하고 절 이름을 신혈사(神穴寺)로 바꾸기를 청했다. 그 후 왕위에 오른 현종은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신혈사(神穴寺) 인근의 평탄한 터에 진관대사의 만년을 위해 크게 절을 세우게 하고, 진관대사의 이름을 따서 진관사(津寬寺)라 명하였으며, 그 후 마을 이름도 진관동이라 부르게 됐다. 칠성각은 진관사 가람의 서쪽 끝에 있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건물이다. 건물은 화강암으로 조성된 낮은 기단 위에 마름모꼴의 초석을 두고 그 위로 사각기둥을 올린 모습으로, 독성전과 같이 공포 없이 서까래를 이용하여 지붕을 올린 모습이다. 건물 외부는 전면에 2분합의 띠살문을 두고 좌우로 돌담을 세운 모습으로, 흔히 유교식 건축물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건물 내부는 후불벽에 맞닿은 불단 위에 조선후기에 조성된 석조여래좌상과 1910년에 조성된 칠성탱, 그리고 영탱을 봉안하였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독성전 옆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안에는 칠성탱화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칠성탱화는 치성광여래를 주존으로 붉은 해를 가진 일광보살과 하얀 달을 가진 월광보살이 협시를 하고 칠성들이 여래로 좌우에 배열되는 것이 일반적인 예입니다.


 

 

 

진관사칠성각

 

진관사 칠성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