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충북기념물

시도기념물 제131호 (청원군) 송인수묘소및신도비(宋麟壽墓所및神道碑)

오늘의 쉼터 2010. 10. 30. 12:20

 

종 목 시도기념물  제131호 (청원군)
명 칭 송인수묘소및신도비(宋麟壽墓所및神道碑)
분 류 유적건조물 / 무덤/ 무덤/ 봉토묘
수량/면적 1곽
지정(등록)일 2004.09.17
소 재 지 충북 청원군  문의면 남계리 산69-3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송형근
관리자(관리단체) 은진송씨규암문충공파
상 세 문 의 충청북도 청원군 문하공보과 043-251-3057
 
일반설명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미수(眉叟)·태수(台叟), 호는 규암(圭庵). 아버지는 건원릉(健元陵) 참봉 세량(世良)이다. 엄용공(嚴用恭)과 윤탁(尹倬)의 문하에서 배웠고, 김안국(金安國)의 지도를 받았다. 1521년(중종 16)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정자가 되고, 1523년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김안로(金安老)의 권력남용을 규탄하고 인사행정의 공정한 실시를 주장하는 탄핵문을 홍문관원들과 함께 제출하였다. 1525년 박사·수찬을 거쳐 정언·지평·부응교를 지냈다. 김안로의 재집권을 막으려다 1534년 제주목사로 좌천되자 병을 핑계로 부임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김안로일파의 탄핵을 받아 사천(泗川)으로 유배되었다. 이때 강학에 전념했고, 이정(李楨) 등을 문하에 두었다. 1537년 김안로 등이 몰락하자 유배에서 풀려나 1538년 예조참의 겸 성균관대사성으로 후학들에게 성리학을 강론했다. 이어서 대사헌·이조참판 등을 지냈는데, 윤원형(尹元衡)·이기(李芑) 등의 미움을 받아 1543년 전라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관찰사로 있으면서 〈사서삼경〉을 간행하는 등 유학을 장려하는 데 힘을 썼다. 1544년 인종이 즉위하자 형조참판으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헌이 되었다. 이때 윤원형을 탄핵했는데,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한성부좌윤에서 파직당하고, 청주에서 은거중 윤원형 등에 의해 사사(賜死)되었다. 청주 신항서원(莘巷書院), 문의(文義) 노봉서원(魯峰書院), 전주 화산서원(華山書院), 제주 귤림서원(橘林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규암집〉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전경

 


신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