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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재 이언적(晦齋李彦迪) 선생 신도비명(神道碑銘)

오늘의 쉼터 2010. 8. 27. 09:02

 

회재 이언적(晦齋李彦迪) 선생 신도비명(神道碑銘)


[해석문]

전액 조선국의정부죄찬성증영의정문원공회재이선생신도비

   명나라 조선국 고(故) 행직(行職)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 좌찬성 증직(贈職) 대광보국숭록대부

   (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領經筵弘文館) 춘추관관상감사(春秋館觀象監事)

   문원공(文元公) 회재 이선생의 신도비명.

  명종12년에 권간(權奸)을 방출(放黜)하고 정화(政化)를 크게 개혁하여 기숙(耆宿), 영준(英俊)을 등용하고

죄과(罪過)를 유사(宥赦)하였다.

을축년(을사사화) 이후로 찬적(竄謫)의 명부(名簿)에 있던 이를 혹은 서용(敍用)하고 혹은 천직(遷職)시켰으며,

 이미 죽은 이는 관직을 회복시켰다.

고(故) 의정부좌찬성 회재선생(晦齋先生) 이공(李公)은 직도(直道)를 씀으로서 척축(斥逐)되어 별세하였는데

대개 13년 뒤에 이제사 복관(復官)하는 열(列)에 참여케 되었다.

도(道)가 융평(隆平)하매 성치(聖治-임금의 정치)가 날로 새로워 져서 수년 동안에 간사(奸邪)를 제거하고

능부(能否)를 견별(甄別)한 것이 진실로 그 최선을 쓰지 않음이 없었으나, 하늘이 도우지 않아서

명종(明宗-1545~1567) 승하(昇遐)하심이 빨랐으니 신민(臣民)의 애통함은 어찌 다함이 있으리오.

지금 임금(선조)께서 즉위하신 초에 능히 선지(先志)를 계승하고 크게 지도(至道)를 회홍(恢弘) 시켰으니

산릉(山陵-명종의 릉)을 필역(畢役)하매 먼저 홍은(鴻恩)을 균점(均霑)시켜 그 다못 석방(釋放)한 것을 다 석방

하여 관사(官使)에 대비(對備)시켰다.

경연(經筵)에 자주 임어(臨御)하여 성학(聖學)을 힘써 강명(講明)함으로서 더욱 당세(當世)의 정무(政務)를

자문(諮問)하게 되니 이에 선비의 울결(鬱結)되어 포부(抱負)있는 이도 모두 머리를 들고 소회(所懷)를

토로(吐露)하여 유은(幽隱)한 것도 통달(通達)되지 않음이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공(公)의 도덕(道德) 문장(文章)의 아름다움도 또한 임금의 귀에 들리게 되어 드디어

유서(遺書)를 수구(搜求)하라는 명령이 있었다.

조금 뒤에 조정(朝廷)의 논의(論議)대로 공(公)에게 영의정을 증직(贈職)하고 문원(文元)이라 시호(諡號)하고,

또 명령하여 명종 조정에 배향(配享)시켰으니 아 ! 공(公)의 도(道)는 일세(一世)에 조금 나타나게 된 것이다.

공의 휘(諱)는 언적(彦迪), 자(字)는 복고(復古)이며 스스로 회재(晦齋)라 호(號)하였다.

초명(初名)은 적(迪)인데 중종께서 언(彦)자를 더 붙이게 하였다.

 가계(家系)는 여주(驪州)에서 나왔는데 두에 경주 양좌촌(良佐村)으로 옮겼다.

증조의 휘(諱)는 숭례(崇禮)이니 병조참판을 증직(贈職)하였고, 조(祖)의 휘는 수회(壽會)이니

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인데 이조판서를 증직 하였고, 고(考-부(父)의 휘는 번(蕃)이니 성균생원(成均生員)인데

 좌찬성(左贊成)을 증직 하였고, 비(妣-모(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손씨(孫氏)이니 계천군(鷄川君) 소(昭)의

여(女)이다.

公은 날 때부터 자질이 이상(異常) 했으며, 9세에 부(父)를 여의였다.

점점 성장하매 학문에 힘쓰고 글을 잘 지었다. 중종8년 계유(明 무종(武宗)⦁정덕10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명년(明年-다음해-중종9년) 갑술년에 문과에 올라 교서관(校書館) 부정자(副正字)를 권지(權智)했다가

이내 돌아와서 정자(正字)가 되었으며 벼슬을 옮겨 저작(著作)에 이르렀다.

참군공(參軍公-조부)이 별세하거늘 公은 승중상(承重喪)으로서 상(喪)을 마쳤다.

박사(博士)에 승진(陞進)되고 홍문관박사, 시강원설서, 성균관전적, 병조(兵曹)⦁이조(吏曹) 양조(兩曹)의

좌랑으로 옮겼다.

외직을 원하여 인동현감(仁同縣監)에 임명되었으나 겨우 2년 만에 불려 와서 사헌부지평이 되고 병조(兵曹)⦁이조(吏曹) 정랑을 거쳐 문학(文學-세자시강원의 종5품)으로 옮기고, 장령과 보덕(세자시강원 종3품)으로 옮겼다.

 중종24년 기축(명나라 세종 가정8년)에 외직으로 나가 밀양부사가 되어 백성을 다스리고 이속(吏屬)을 거느림이 모두 조리(條理)와 법도(法度)가 있으니 이속은 나쁜 짓을 금지하고 백성은 선정(善政)을 사념(思念)하였다.

한 해 뒤에 사간원의 사간으로서 불려 들어왔다. 이때 조정의 의론(議論)은 김안로(金安老)를 인용(引用)하여

동궁(세자)을 보좌하고자 했으니, 대개 김안로의 아들(김희(金禧)이 공주에게 장가가서 동궁에게

친근(親近)한 까닭이었다.

그 말을 주창한 자는 정언 채무택(蔡無擇)이었으나 대사헌 심언광(沈彦光)등이 그 말에 따라 부동(附同)하니

온 조정이 함께 따라 가는지라,

공은 홀로 그 불가함을 역설하여 채무택등과 의론이 합치되지 않았나 채무택은 정언 벼슬이 갱질 되었으나,

외인(外人)의 의론(議論)은 도리어 공이 이의(異議)를 낸다고 비난했으므로 사예(司藝)로 좌천 되었다.

심광언은 공에게 묻기를,「이군(李君)은 어찌 김안로가 소인(小人)인 줄 압니까」하거늘,

공은「김안로가 경주부윤으로 있을 때에 그 마음가짐과 일 처리함을 보니 참으로 소인이었던 것이다.

이 사람이 뜻대로 된다면 반듯이 국가를 그르칠 것입니다」하였다. 혹은「김안로가 비록 들어오더라도

어찌 권병(權柄)으로서 맡기리오, 다만 동궁만 도울 뿐이지요」하거늘,

공은「그렇지 않습니다. 저 사람이 만약 들어온다면 반듯이 국권(國權)을 쥐고 제 마음대로 용사(用事)할

것이니 누가 감히 그를 막겠습니까. 또 동궁은 일국의 신민(臣民)이 다 촉망(囑望)하는 바인데

어찌 김안로가 도와야만 편안하겠읍나까」하니,

심광언은 노(怒)하여 가버렸다.

드디어 공은 논핵(論劾)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전리(田里)에 돌아가게 하였다.

그 뒤 7년만에 김안로가 패사(敗死)하매 임금께서 공의 충직함을 생각하여 불러와서 홍문관부교리로 삼았다가

교리,응교로 옮기고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에 임명 되었다가 사인(舍人)으로 옮기고, 직제학(直提學)에 임명

되었다가 병조참지(兵曹參知)로 승진되었다.

무술년(중종33년) 겨울에 전주부윤으로 나가서 한 해 동안에 전주 경내가 잘 다스려 졌다.

공은 비록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하여 외직을 희망했지만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일찍이 하루라도 잊지는

않았다.

때 마침 재이(災異)로 인하여 직언(直言)을 구(求)하거늘 이에 수천언(數千言)의 소(疏)를 올렸으니

진술(陳述)한 바가 모두 군심(君心) 바로잡고 시무(時務)를 시행(施行)하여 모모(謀謨)를 계옥(啓沃)하여

그 충당(忠讜)을 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임금께서 매우 장탄(獎歎)하여 동궁과 외조(조정)에 전시(傳示)하도록 하고 그 관질(官秩)을 승진시켜

이내 병조참판 겸 세자우부빈객에 임명하였다.

공은「만약 이 말이 채용(採用)된다면 다행이겠사오며 드디어 외람된 포상(褒賞)까지 있게 됨은 감히

감당할 수 없읍니다」하고 글을 올려 간곡히 사양하였으나 위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예조참판, 성균관대사성, 사헌부대사헌을 역임하고, 홍문관부제학에 임명되었다.

또 소(疏)를 올려 성학(聖學)의 본말(本末)과 시정(時政)의 득실을 남김없이 진술하였다.

신축년(중종36년) 가을에 자헌대부(정2품)로 승진되고 한성부판윤이 되었는데 이내 정헌대부(정2품)로

가자(加資)되고 의정부우참찬으로서 동지성균(同知成均)을 겸하고 이조(吏曹)⦁형조(刑曹)⦁예조판서로

옮겼다가 다시 대사헌(大司憲), 우참찬이 되었다.

외직을 원하여 안동부사(安東府使)가되니 간원(諫院)이 계청(啓請) 만류(挽留)시켜 이내 참찬(參贊) 겸

홍문관제학이 되었다.

공은 모부인(母夫人)께서 노병(老病)으로 멀리 떠나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서 여러번 돌아가 봉양(奉養)하기를

원했으나 임금께서 위유(慰諭)하시고 허가하지 않았으며, 또 모부인을 모시고 서울로 오도록 지시 하시니

공은 더욱 황공(惶恐)하여 외직을 강청(强請)하여 드디어 본도(경상도) 감사(監司)로 나갔다.

갑진년(중종39년) 8월에 한성판윤(漢城判尹)으로서 좌부빈객을 겸직 했는데 때 마침 병(病)으로 사직하였다.

 인종(仁宗)이 즉위하매 불려와서 우찬성에 임명되었다가 좌찬성으로 옮기고 지경연사(知經筵事)를 겸직하였다. 공은 다시 병으로서 사직하니 임금께서 교지(敎旨)를 내려 간곡히 타이르시고 이내 약물(藥物)을 하사 하거늘

공은 다시 고사(固辭)했으나 허가하지 않았다.

병이 조금 차도가 있음으로 비로소 조정에 나아갔다. 공은 양조(兩朝-중종⦁인종)의 지우(知遇)의

융숭(隆崇)함에 감격하여 스스로 병을 무릅쓰고 한번 나갔으니 대개 일하고자 한 것이 었으나,

인종께서 오랫동안 병환으로 계시니

나라의 숨은 걱정은 말할 수 없는 것이 었다. 공은 영의정 윤인경(尹仁鏡)에게 사적(私的)으로 말하기를

「지금 주상께서 세자가 없고 대군(大君)은 나이 어리나 어찌 일찍 건의하여 대군을 세제(世弟)로 책봉하여

국본(國本-세자)을 정하지 않읍니까」하니, 윤인경은 공의 말을 옳게 여기면서도 능히 그 말을 쓰지 않았다.

울사년(인종원년) 7월에 인종이 승하(昇遐)하고 명종(明宗-1545~1567)이 왕위를 계승하매 마땅히

왕대비(王大妃)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는 의식을 거행해야 될 것이므로 백관이 회의를 하였다.

윤인경은「지금 대왕대비(大王大妃-문정왕후)와 왕대비(王大妃-인종의 후)가 계시니 어느분이 마땅히 정사를

보살펴야 도겠는가」하니,

좌우가 말 없이 잠잠하거늘 공은「옛날 송나라 철종때에 태황태후가 함께 정사를 보살폈으니

예전의 예가 있으므로 의문(疑問)을 가질것은 없으며 지금은 다만 수렴청정하는 의제(儀制)만 결정할 뿐인

것이라」하니 논의는 드디어 결정 되었다.

 8월에 정부서계(政府書啓) 십조를 올렸으니,

1조는 자전(慈殿-대왕대비)께서 임금의 자질을 잘 도양(導養)해 주시기를 청(請)하였고,

2조는 경연관(經筵官)을 널리 선임하여 (상시 그들과 더불어) 강론(講論) 자문(咨問)하여 임금의 학문을 성취할 것을 청하였고,

3조는 임금께서 대행왕(인종)에게 자식된 도리도 있고 신하된 도리도 있으니 상례(喪禮)에 성효(誠孝)를 다하지 않아서는 안될 것이라 하였고,

 4조는 궁금(宮禁)을 엄중히 하고 척리(戚里)를 방두(防杜)할 것을 청하였으며,

5조는 궁인(宮人)을 신중히 선택할 것을 청하였으며,

6조는 특지(特旨)를 쓰지 말도록 청하였으며,

7조는 판부(判付)를 쓰지 말도록 청하였으며,

8조는 승정원의 직책은 왕명을 출납하는데 성실히 할것이니 내지(內旨)가 적합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봉(封)하여 돌려 보내도록 할 것이라 하였고,

9조는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정부)은 마땅히 일체가 되어야만 될 것이니 사문(私門)을 열지 말아서 평명(平明)한 정치를 밣히도록 청하였으며,

10조는 대행왕(大行王-인종)은 학문의 효과로서 공도(公道)가 크게 행(行)했으므로 사람들이 지치(至治)를 우러러 바랐나 갑자기 이러한 망극(罔極-罔極之痛)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주상께서 위(位)를 계승하시매 국인(國人)들은 대행왕에게 기대하는 것으로서 주상에게 기대하게 되므로 그 기틀이 매우 중요하니 양전(兩殿-문정왕후와 명종)께서는 류신(留神-留念)하시기를 바랍니다. 하였으니,

 대개 공의 필정(筆定)한 것이었다.

처음에 윤원형(尹元衡)은 윤임(尹任)과 원구(怨仇)가 이미 깊어졌는데 임백령(林百齡)과 이기(李芑)는

그 심복(心腹)이 되어 사림(士林)을 경함(傾陷)하여 그 간사(奸邪)를 성취시키고자 하였다.

윤원형은 밀지(密旨)라 핑계하고 대간(臺諫)을 꾀어서 윤임을 치게하니 대간이 따르지 않거늘 이기(李芑)등은

합문(閤門)에 나아가서 아뢰고자 하였다.

양전(兩殿-문정왕후와 명종)께서 즉시 충순당(忠順堂)에 함께 임어(臨御)하고 재신(宰臣) 추신(樞臣)을

들어오게하여 장차 윤임등의 죄를 가(加)하려 했는데,

이 때 임금의 위엄이 대단했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조금도 그 뜻을 거스리지 못 하였다.

공은 조용히 말하기를「신하의 의리는 마땅히 제가 섬기는 데에 전심(專心)할 것이니

그 때에 있어서 대행왕(인종)에게 전심(專心)한 것을 어찌 큰 죄를 주겠습니까.

또 일을 거행하려면 마땅히 현명(顯明)하게 해야 할 것이니 그렇치 않으면 사림(士林)들이 부당(不當)하게

화(禍)를 당할 사람이 많아질 것입니다」하였다.

 이 말을 들은 이는 목을 움추렸으나 공은 기색(氣色)이 두려워하지 않았다. 조금 뒤에 이기 등은 공(功)을

록(錄)하고 위사공신(衛社功臣)이라 칭호했으며, 그 날에 입시(入侍)한 재신(宰臣) 추신(樞臣)을 아울러

록공(錄功)했으므로 공도 또한 참여하게 되었다.

공은 굳이 사양하면서,

「어찌 공(功)이 없으면서 공신칭호를 부당하게 받아 국전(國典-국법)을 문란하리오」하였으나

들어 주지않았다.

병오년(명종원년) 봄에 차자(箚子)를 올리되,

「선현의 말에 군주의 덕을 성취시킴은 그 책임이 경연(經筵)에 있다 하니 신(臣)은 이 직책을 외람히 맡았으므로 책임을 감내하지 못할까 걱정했습니다.

삼가 선현의 격언(格言) 지론(至論)이 성덕(聖德-군주의덕)에 도움이 있고, 금일에 시행할만한 것을 취하여

조목별로 기록하여 드리오니 전하께서 진실로 능히 깊이 믿으시고 힘써 이를 행하신다면

그 성공(聖功-군주의 공부)에 도움됨이 어찌 작다고 하겠읍니까」하였다.

조금 뒤에 장차 모부인을 뵈오러 갈 새 또 차자(箚子)를 올려「학문을 강구(講究)하고 의리를 밝히며,

현인(賢人)을 친근(親近)하고 사녕(邪佞)을 멀리 하도록」청하였으니 그가 군부(君父)에게 기대한 것이

더욱 심절(深切)하였지만 그러나 빙탄(氷炭)같은 형세(形勢)는 실로 서로 용납하기 어려운 것이 있었다.

이미 고향에 돌아가매 세 번이나 글을 올려 사직하기를 원했으므로 이에 체직(遞職)하여 판중추부사로 삼았다. 수월(數月) 뒤에 이기(李芑)는 장계(狀啓)하되「이언적은 세자에게 도부(謟附)하고 중종(中宗)을 배반했으므로

서계(書啓) 십조는 군주의 수족(手足)을 묶는 것이었으며, 유인숙(柳仁淑)과 서로 결탁하여 역적을

구해(求解)한 말이 많이 있습니다.

언적(彦迪)은 신(臣)에게 은혜(恩惠)있지마는 신은 지금 나라를 위하여 사사일을 돌볼 수 없으므로

감히 아뢰 옵니다」하였다.

양사(兩司-사헌부⦁사간원)에서 잇달아 이를 논(論)하여 이에 훈작(勳爵)을 삭탈(削奪)하였다.

정미년(명종2년) 9월에 양재역(良才驛)의 비방(誹謗)한 글로 인하여 을사(乙巳) 제인(諸人)에게

죄(罪)를 가(加)하게되니, 공도 또한 강계부(江界府-평안도)에 안치(安置)하게 되었다.

가인(家人)들은 귀양간다는 명령을 듣고 서로 호읍(號泣)하였으나 공은 태연(泰然)히 평일과 같았다.

가인에게 부탁하기를「대부인(大夫人)을 잘 봉양하여라.

황천(皇天)이 굽어 보시는데 나는 얼마 안가서 돌아올 것이라」하였다.

명년(明年)에 대부인께서 별세하시거늘 공은 남긴 의복(衣服)으로서 신위(神位)를 베풀어 놓고 조석으로

통곡하여 몸이 파리해지면서도 삼년상을 마치었다.

공은 궁액중(窮厄中)에 있으면서도 스스로 안정함이 있었으므로 학문을 강구(講究)하고 글을 저술(著述)하여

그 공부를 중지하지 않았다.

새벽에 일어나서 종일토록 자강불식(自强不息)하였다.

 궤안(几案) 사이에 자계(自戒)의 사(辭)를 쓰되

「나는 날마다 내 몸을 세 번 살피는데 하늘을 섬김이 미진(未盡)함이 있는가.

군친(君親)을 섬김이 성실(誠實)하지 못한점이 있는가.

마음 가짐이 바르지 못한 점이 있는가」하였다.

갑자기 함명관(銜命官-어사)이 빨리 달려와서 성(城)에 들어오니 온 부중(府中)이 놀라면서

「좋지 않은 일이 있을 것이다」하였으나 공은 얼굴빛을 변하지 않고 바로 앉아서 글만 보았으니,

그는 생(生)과 사(死)를 한결같이 보고 평소의 지조(志操)를 변치 않음이 이와 같았다.

계축년(명종8년) 11월 을축일 병(病)으로 별세하니 향년(享年)이 63세이었다.

갑인년(명종9년) 봄에 경주로 반구(返柩)하여

11월 갑진일에 흥해군(興海郡) 남(南) 달전리(達田里) 도음산(禱陰山) 선영의 묘차(墓次)에 장사하였다.

그 전에 공의 선부군(先府君)은 소시(少時)에 유학(儒學)으로 이름이 들렸었다.

일찍이 본도(경상도)의 하과(夏課)에 장원하매 성종(成宗)은 그 사(詞)⦁부(賦)를 칭찬하여 불러 보시고

의물(衣物)을 하사하시며, 국학(성균관)에 남아서 배우도록 하였다.

뒤에 향리에 돌아와서 날로 후생(後生)을 훈육하는 것으로서 일삼았으니

공은 비록 직접 교훈(敎訓)을 받지 못하였지만 그 가업(家業)은 진실로 소자래(所自來)가 있었던 것이다.

손부인(孫婦人)도 또한 현철(賢哲)하고 식려(識慮)가 있어 자애(慈愛)함으로서 교독(敎督)을 늦추지 않았었다.

이미 구씨(舅氏) 손사재(孫四宰) 중돈(仲暾)에게 가서 배우게 하고,

또 빈궁(貧窮)을 무릅쓰고 원근지방(遠近地方)에 학자(學資)를 대어 주었다.

공은 천자(天資)가 도(道)에 가까웁고 영오(英悟) 함은 남보다 뛰어나서

이에 시속(時俗)의 학문 밖에 이른 바,「자기를 위하는 학문」이 있음을 알고 그것을 구(求)하고자 하여

체이(體履)를 강명(講明)하고 치지(致知) 성의(誠意)의 지(地-곳)에 용역(用力)하였다. 

나이 27세에 오잠(五箴)을 짖고, 30세에 또 입잠(立箴)을 지었으니

그 말은 모두 옛날 성현(聖賢)의 절요(切要)한 뜻이므로, 대개 조존(操存) 성찰(省察)하고 징분(懲忿),

질욕(窒欲), 천선(遷善), 개과(改過)한 것이 실로 이미 실천한 바이며 공언(空言)은 아닌것이다.

그가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와서는 자옥산(紫玉山) 중에 집을 지어서 일실(一室)에 정좌(靜坐)하여

도서(圖書) 속에서 연구하고 생각하였으니

이미 공부가 전일(專一)하고 세월이 오래됨으로서 소견도 비로소 더욱 친절하여졌다.

어버이를 섬길 즈음에는 사랑과 공경이 모두 지극하여 거처(居處)를 보살피고 음식을 만드는 절차에도

또한 정성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조선(祖先)을 제사(祭祀) 지내는 예절도 그 성심을 다하기에 힘섰고,

아우 언괄(彦适)과도 우애가 더욱 돈독하였다.

집을 다스림이 법도(法度)가 있고, 사람을 접대함에 예절로서 하며,

종족(宗族)을 무휼(撫恤)하고 동복(僮僕)을 거느림에도 모두 그 도리에 합당하였다.

사람된 품이 안중 단상(安重 端詳)하고 본래 고취(高趣)가 있어 종일토록 말 없이 잠잠하니

사람들은 능히 그 마음 언저리를 엿볼 수가 없었다.

그가 조정에 있을 적엔 건의(建議) 시행(施行)함이 정대(正大) 광명(光明)하고,

그 언론(言論) 풍지(風旨)는 족히 권강(勸講)에 대비하여 군주의 직(職)을 보좌할만 했으며,

간사(姦邪)를 물리치고 위의(危疑)를 결정하는 경우에는 용감히 나아가 두려워함이 없었으니 비록 맹분(孟賁),

하육(夏育)같은 용사(勇士)일지라도 그뜻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저술(著述)은『봉선잡의(奉先雜儀)』『구인록(求仁錄)』『진수팔규(進修八規)』『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속혹문(續或問)』이 있고, 또『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를 편수(編修)하여 미처 성서(成書)하지는 못했으며『문집(文集)』약간권(若干券)이 있다.

공의 배필 정경부인(貞敬夫人) 박씨는 선무랑(宣務郞) 숭부(崇阜)의 女인데  아들이 없었으므로 종제(從弟)

경역(經歷) 통(通)의 아들 응인(應仁)으로서 후사(後嗣)를 삼아 지금 송라도찰방(松羅道察謗)이 되었다.

서자(庶子) 일인(一人)은 전인(全仁)이고 女가 一人이 있다.

 전인(全仁)이 이자(二子)를 낳으니  준(浚)과 순(淳)이다.

전인(全仁)은 시(詩) 서(書)를 읽고 의방(義方)을 알며,

그 아들을 교회(敎誨)하여 또한 모두 입신하게 하였다 한다.

공의 장사(葬事)지낼 적엔 미처 묘도(墓道)에 표(表)하지 못 했지마는 덕업(德業)의 빛남은 스스로 엄폐(掩蔽)할 수 없으므로 일시 포대(褒大)의 은전(恩典)은 실로 인심이 사모(思慕)하여 그칠 수 없는 데서 나온 것이니,

공의 도(道)는 오래될수록 더욱 나타나게 된 것을 가히 알겠다.

퇴계(退溪) 이선생(李先生)은 일찍 공의 행장을 지으면서「우리 조선은 옛날에 인현(仁賢)의 교화(敎化)를 입기는 했으나 그 학(學)은 전(傳)함이 없었다.

고려의 말기에서 본조(이조(李朝)에 이르기까지 호걸(豪傑)의 사(士)로서 도(道)에 뜻을 두기도 하고 세상에서도 또한 이 명칭(名稱-도학자(道學者)으로서 그들에게 돌려졌던 이가 없지는 않았으나, 그러나 그 당시를 상고해 보면 거개 명성(明誠)의 실(實)을 다하지 못하였고, 후세를 따져 보아도 또한 연원(淵源)의 명징(明徵)이 없으므로 후세의 학자들에게 심축(尋逐)할 바가 없이 되어 지금까지 깜깜한 형편이었다.

 우리 선생처럼 스승의 전수(傳授)한 곳이 없었음에도 자기 스스로 이 학(學)에 분기(奮起)하여 암연(闇然)히

날로 빛남으로서 덕(德)이 행(行)에 부합(符合)하고, 병연(炳然)히 저술(著述)이 나옴으로서 말이

후세에 전(傳)하게 된 분은 조선에서는 찾아 보아도 그와 같은 이가 적을 것이다」하였으니

이것은 공의 도(道)에 대하여 깊이 알고 이를 잘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서자 전인(全仁)이 또 비(碑)에 새길 말을 퇴계선생에게 구하고자하니 선생은 공의 성덕(盛德)을 칭술(稱述) 함이 마땅히 한 사람의 손에서 모두 나와서는 안된다는 이유로서 드디어 기대승(奇大升)에게 명령하시었다.

기대승은 이를 사양 했으나 되지 않았으므로 마음 속으로 어렵게 여겼었다.

그 간에 또한 왕복(往復) 상정(詳訂)한 뒤에 결정된 것이 있으므로 이로서 오랫 동안 성취(成就)시키지 못하였다. 지금은 선생(퇴계)께서도 이미 별세하시고 찰방(察訪-응인)의 사팽(使伻)이 와서 비석(碑石)이 구비 되었다고

고함으로 이에 감히 다시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행장을 의거하고 관직을 역임한 서차(序次)를 아울러 상고하여 그 큰 것만 취하고 이를 저록(著錄)하고 명(銘)을 붙이게 된다.

명(銘)은 이러하다.

  상제(上帝)는 현명(顯命)이 있어, 사람에게 성(性)을 주었다.

성(性)의 사덕(四德-仁⦁義⦁禮⦁智)은 실로 사람마다 가진 것이다.

기(氣)와 질(質)에 가리 워 져서, 성(性)은 이로 말미암아 잃게 된다.

학(學)로서 회복(回復)하면, 그 성(性)은 같게 된다.

아 ! 우리 공(公)은 이 일방(一方)에 탄생하시었다.

기(氣)는 관후(寬厚)하면서도 장중(莊重)하고, 덕(德)은 혼연(渾然)하면서도 강직(剛直)하였다.

처음부터 학(學)을 알아, 몸을 닦고 천이(踐履)에 힘을 섰다.

부지런히 충양(充養)하여, 잘 자기에게 간직하였다.

집에서는 효(孝)를 다하고, 나라에서는 충(忠)을 다했다.

원(遠)하기도 하고 근(近)하기도 하매, 도(道)는 오륭(汚隆)을 겸해(兼該)하였다.

일시(一時)에는 훼자(毁訾) 되었지마는, 만세(萬世)에는 광채(光彩)가 있다.

유서(遺書)를 수구(搜求)하고 관직을 포증(褒贈)하며, 묘정(廟廷-명종 묘정)에 배향(配享)하여 양양(洋洋)하였다. 이것이 선왕(先王)의 뜻인데, 우리 임금(선조)께서 받드셨다.

무궁한 내세에 각시(刻示)하매, 우리 도(道)가 흥륭(興隆)할 것이다.

 

   통정대부 전성균관대사성지제교 기대승은 찬술(撰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