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경남유형문화재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7호 양산이씨 고문서 <해제>

오늘의 쉼터 2010. 7. 24. 19:38



종 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7호 
명 칭

양산이씨 고문서(梁山李氏고문서)

분 류기록유산 / 문서류/ 국왕문서/ 교령류
수량/면적

6종 16점

지 정 일1979.05.02~1989.05.23
소 재 지경남 양산시 하북면 삼수리
시 대조선시대
소 유 자이근수
관 리 자이근수

 

설명

 

이 문서는 거의 조선 전기의 것으로, 양산이씨(梁山李氏)의 시조(始祖)인 이전생(李全生)을 비롯하여 그의 장남(長男) 이징석(李澄石) 그리고 이징석(李澄石)의 장남(長男) 이팔동(李八仝) 그리고 사대후손(四大後孫)인 이몽란(李夢鸞) 등 이전생(李全生)의 직계(直系) 장남(長男) 장손(長孫)의 문서(文書)가 주(主)가 되고 있다. 총 6종 16점이다. 이전생(李全生)은 고려시대 문과에 급제하여 공민왕 20년(1371) 순찰사로 경남지방을 돌아보았고, 지금의 양산군 하북면 삼수리에 정착하여 살게 되니 여기서 양산 이씨(梁山李氏)가 시작된다. 조선시대에는 공조전서, 예조판서중추부사 등의 벼슬을 지냈고, 후에 양산부원군(梁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전생(李全生)이 조선 태조 7년(1398)에 가선대부공조전서(嘉善大夫工曹典書)로 임명받는 내용이 담긴 사령서인 왕지(王旨) 1점과 이징석(李澄石) 관련 문서로 왕지(王旨) 4점, 장수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내용이 담긴 유서 1점, 왕이 신하에게 토지와 노비를 내리는 내용의 사패교지 3점, 그리고 이징석(李澄石)이 죽은 후 세조임금이 내린 사제문 등이 있다.

그리고 이징석(李澄石)의 장남 이팔동(李八仝)이 받은 교지와 이징석(李澄石)의 직계후손인 이몽란(李夢鸞)이 병조에서 발급받은 교첩, 무과에 급제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교지, 이몽란(李夢鸞)이 임진왜란 때 세운 공을 인정하여 공신으로 인정한다는 내용의 「이몽란선무원종공신록권」 등이 있다.

각 문서의 크기는 연도와 내용에 따라 다르다. 이전생(李全生)은 고려조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했다. 공민왕(恭愍王)20년 신해(辛亥)(1371)에 순찰사(巡察使)로 경남지방(慶南地方)을 순시(巡視)했다. 양주(良州) 북면(北面) 초산리(草山里)에 거처(居處)를 정하고 그곳에 정착(定着)하여 살게되니 지금의 양산군(梁山郡) 하북면(下北面) 삼수리(三帥里)가 된다.

양산이씨(梁山李氏)의 비조(鼻祖)가 되는 분이다. 이징석(李澄石)의 호(號)는 취봉(鷲峯)이다. 공민왕(恭愍王)22년 계축(癸丑, 1373)생(生)이다. 태조조(太祖朝)에 무과(武科)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고 관(官)은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이르고 추충좌익공신(推忠佐翼功臣)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이르고 양산군(梁山君)으로 봉군(封君)되었다. 태종(太宗)시(時) 보양장군호분시위사대호군자(保陽將軍虎賁侍衛司大護軍者)가 되었으며 선덕팔년(宣德八年)에 가정대부동지중추원사자(嘉靖大夫同知中樞院事者)가 되었다. 세종(世宗)때 조전절제사(助戰節制使)로 3천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파저강(婆猪江)에 침입(侵入)한 북로(北虜)를 평정(平征)하여 혁혁한 공(功)을 세웠다. 활의 명수(名手)로 화살을 쏘면 말은 화살을 쫓아 달렸는데 말이 멈추는 곳에 화살이 박혀 있었다는 것이다. 하루는 이징석(李澄石)이 화살을 쏘았고 화살을 쫓아 말은 달렸는데 말이 멈춘 곳에 박혀 있어야 할 화살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성질이 다급한 이징석(李澄石)은 가지고 다니던 칼을 뽑아 말의 목을 잘라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화살이 날아와 그 자리에 박혔다고 한다. 말이 화살보다 앞서 온 것이다.

그후부터 이징석(李澄石)은 자신의 다급하고 경솔한 마음을 후회하고 달랬다고 하는데 지금 양산(梁山)에 전해오는 전설같은 이야기다.

바로 말이 쓰러진 그 자리에 지금 다리가 있는데 말의 목을 자른 곳이라 하여 다리 이름을 도마교(倒馬橋)라 부르고 있다. 배(配) 정경부인(貞敬夫人)은 김해허씨(金海許氏)로 부친(父親) 허형(許衡)은 자(字)를 중평(仲平)이라 하고 호(號)는 노재(魯齋)라 하며 시호(諡號)는 문정(文正)이다. 삼형제(三兄弟)의 장수(將帥)를 배출한 곳이라 하여 그들이 출생(出生)한 마을 이름을 지금 삼수리(三帥里)라 부르고 있다.

이팔동(李八仝)의 자(字)는 차옹(次翁) 태종(太宗) 14년(1414) 갑오생(甲午生)이다. 취봉(鷲峯) 이징석(李澄石)의 아들이다. 위용장군행의흥위중부간사직겸선전관(威勇將軍行義興衛中部揀司直兼宣傳官) 및 행고성현령(行固城縣令)을 역임(歷任)했다. 성종(成宗) 10년(1479) 기해(己亥)에 졸(卒)하였다.

배(配) 숙부인(淑夫人)은 전의이씨(全義李氏)이며 판서(判書) 이예조의 따님이다. 

이몽란(李夢鸞)의 자(字)는 응소(應韶) 호(號)는 죽헌(竹軒)이라 한다.

중종(中宗) 39년(1544) 갑진생(甲辰生)이다. 선조(宣祖) 41년(1608) 무신(戊申)에 졸(卒)하였다.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훈련원(訓鍊院) 첨정(僉正)을 지냈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배(配) 숙인(淑人) 김해김씨(金海金氏)는 위원군수(渭源郡守) 김효량(金孝亮)의 따님이다.

보물 제1001호 양산이씨 종손가 소장 고문서로 승격지정됨에 따라 1989년5월23일 해제. 




양산이씨종손가소장고문서

교지

이팔전의교지

이몽란의교지

이몽란의교지

권수 권말

사교지

이징석의왕지

양산이씨종손가소장고문서

양산이씨종손가소장고문서

양산이씨종손가소장고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