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전남유형문화재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1호 구례 화엄사 화엄석경 <해제>

오늘의 쉼터 2010. 7. 12. 14:33






종 목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1호
명 칭

구례 화엄사 화엄석경 (求禮華嚴寺華嚴石經)

분 류유물 / 불교공예/ 장엄구/ 장엄구
수량/면적

일괄 (8980점)파편

지 정 일1972.01.29~1990.05.21
소 재 지전남 구례군 마산면 화엄사로 539 (황전리)
시 대고려시대
소 유 자화엄사
관 리 자화엄사

 

설명

 

석경(石經)은 경전의 원문을 돌판에 새긴 것인데, 화엄석경(華嚴石經)은 화엄경을 엷은 청색의 돌에 새긴 것이다.

통일신라 문무왕 17년(677)에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아 화엄사에 각황전을 세우고 이곳에 화엄석경을 보관하였다. 각황전의 안쪽 벽에는 현재 그림이 걸려 있으나, 원래는 여기에 화엄석경이 벽을 이루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석경에는 네모진 돌들을 서로 맞추어 끼웠던 듯 모서리에 연결을 위한 홈이 파여져 있다.

기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화재로 석경들이 파손되었고, 색깔도 회갈색 등으로 변하였다고 한다. 파손된 것을 모아 지금은 약 9천여 점이 남아 있다. 글씨체는 해서체로 최치원이 정강왕 2년(887)에 쓴 쌍계사 진감국사비문과 비슷한데, 당시의 글씨체를 잘 보여주고 있어 희귀한 석경의 대표적인 예로 주목되고 있다.

이 화엄석경은 우리나라 화엄종 사찰의 상징적 유물로서 비록 파편이기는 하나 신라 후기의 불교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추가설명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화엄사(華嚴寺)에 있던 ≪화엄경≫의 석경.

670년(문무왕 10) 의상(義湘)이 화엄사를 중창할 때 왕명으로 3층의 장륙전(丈六殿)을 건설하고 주위에 석각(石刻)의 화엄경을 둘렀다고 ≪봉성지 鳳城誌≫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석각된 경은 797년에 반야(般若)가 한역(漢譯)한 정원본(貞元本) 40권 ≪화엄경≫이 포함되어 있어, 의상이 만들었다는 것은 시기적으로 100년 이상의 차이가 있으므로 타당성이 없다. 근세 화엄사의 대강백(大講伯)이었던 진진응(陳震應)의 조사에 따르면, 석경은 60권 ≪화엄경≫뿐만 아니라 40권 ≪화엄경≫까지도 모두 포함하고 있다.

더욱이 필적은 조금씩 다르나 서법(書法)이 비슷하여 시대를 두고 점차로 석각한 것 같은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이 석경의 건립연대를 장륙전보다 훨씬 후대인 신라말로 추정하면서 그 실증으로, 첫째 80권과 40권 ≪화엄경≫은 의상 때 새겼을 수 없다는 점,

둘째 석각의 자체는 거의 해서(楷書)이고 서법으로 보아서는 우군서법(右軍書法)을 쓰고 있는데, 그 자체는 신라 말에 최치원(崔致遠)이 쓴 진감국사비(眞鑑國師碑)와 비슷하다는 점, 셋째 화엄결사(華嚴結社)와 각화엄경불사(刻華嚴經佛事)가 최초로 시도된 것은 헌강왕 때의 일인데, 그때 최치원이 원문(願文)을 쓰고 조야(朝野)의 노력으로 40권 ≪화엄경≫ 10질을 완성하였다는 점 등을 들고 있다.

따라서, 진응은 이 석경이 문무왕 때의 것이 아니라 헌강왕대에서 경순왕대에 이르는 기간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또한, 석경의 돌이 모두 경주에서 가져온 옥석(玉石)이라는 속설에 대해서도 그 돌들이 모두 지리산에서 볼 수 있는 납석(蠟石)이며 원래는 옅은 청색의 것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면서 변색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장륙전을 두르고 있던 이 석경은 산산조각으로 파손되어 일제강점기까지 각황전(覺皇殿)의 둘레에 돌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 말기 각황전의 해체 보수 때에 진응의 노력으로 그 파편들이 일차 정리되어 상자에 분류, 포장되었다.

그러나 6·25 때 분류, 포장되었던 상자가 파손되고 석경 파편이 다시 노천에 퇴적되게 되었으며, 1961년 9월 8일부터 10월 6일까지 29일에 걸쳐 재정리되었다. 현존하는 석경편은 1만4000점에 달하고 있다. 이들은 대중소로 나누어져 163상자로 분류, 정리되었는데, 석경편의 크기는 몇 자에서부터 50자 이상에 달하는 것도 있다.

그 색깔은 회갈색·담홍색·암회색의 세 가지 색조를 띠고 있는데 이러한 변색은 화재시에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석경의 크기는 현존품에 비추어 방전(方塼:네모 반듯한 벽돌)의 크기였음을 추정할 수 있고, 아래위에 홈을 발견할 수 있어 은구(隱具)를 끼워 고정하여 사방 벽에 장엄하였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때때로 부조(浮彫)된 것과 선각(線刻)된 문양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경판화에서 볼 수 있는 화엄변상도로 추정된다. 중국에서는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난에 이르러 불경의 소멸을 막기 위해서 석경의 조각이 유행하였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석경이 크게 유행하지 못하였다. 다만,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배리에서 수습된 법화석경(法華石經)과 경주 남산 칠불암(七佛庵)에서 출토된 금강석경(金剛石經) 파편 등이 발견되었을 뿐이다.

이 화엄석경(華嚴石經)은 국내(國內) 화엄종찰(華嚴宗刹)의 상징적(象徵的)인 유물(遺物)로서 비록 파편(破片)들이긴 하나 통일신라하대(統一新羅下代)의 불교사(佛敎史) 연구에 귀중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불경(佛經)·서체(書體) 등(等) 학술적으로 중요한 유물이다.


1972년 1월 29일 전라남도의 유형문화재 제31호로 지정되었다가, 1990년 5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040호 승격되었다.





구례 화엄사 화엄석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