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고려

제20대 신종(神宗,1197~1204 재위7년)

오늘의 쉼터 2009. 7. 30.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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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대 신종(神宗,1197~1204 재위7년)

 

  신종은 인종의 다섯째아들이자 공예왕후 임씨 소생으로 1144년 7월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탁(晫), 초명은 민(旼), 자는 지화(至華)이다. 평량공(平凉公)에 봉해진 뒤 최충헌(崔忠獻)형제가 명종을 폐하고 왕으로 추대하여 고려의 제 20대왕으로 대관전(大觀殿)에서 즉위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54세였다.

  1198년(신종 1) 산천비보도감(山川裨補都監)을 두었고, 관서(關西)민가의 안 대(방앗간을 차림)를 금하였다.

  그해 사노(私奴) 만적(萬積)의 난이 일어난 것을 비롯하여 이듬해에는 명주(溟州:지금의 江陵)·동경(東京:지금의慶州), 뒤이어 진주(晉州)·전주·합주(陜州:지금의 陜川) 등지에서 민란이 계속 일어났다. 
  신종은 즉위하였지만 이름뿐인 왕이였다.

조정 대소사의 모든 결정권은 최충헌을 비롯한 그의 측근들이 다 쥐고있었기 때문이다.
1199년에 최충헌이 문무관의 전주(銓注-人事行政)를 도맡아 행하였는데, 이로부터 모든 실권은 최충헌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해 수양장도감 (輸養帳都監)과 오가도감(五家都監)을 두었다. 1202년에 탐라(耽羅-지금의 濟州道)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소부소감(少府少監) 장윤문(張允文)과 중랑장(中郎將) 이당적(李唐積)을 안무사(安撫使)로 보내어 평정하였다.
신종은 이러한 비참한 상태로 왕위를 유지하다가 1203년 12월 등창이 심하여 병석에 누워 이듬해 1월 태자 덕에게 선위하고 둘째아들 덕양후의 저택에서 6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시호는 정효(靖孝)이며, 능은 양릉(陽陵)이다.


출처:
미르나라

 

  신종 정효대왕의 휘는 탁 고휘는 민이오 자는 지화이니 인종의 제5자요 명종의 동복형제로 인종 22년 갑자 7월 경신에 탄생하였다 자람에 미쳐 봉하여 평량공이 되고 명종 27년 9월 계해에 최충헌이 명종을 폐하고 왕을 맞이하니 대관전에서 즉위하였다. 을축에 대관전에 거동하여 군신의 하를 받고 의봉루에 이어하여 친히 구정의 숙위군을 위로하고 인하여 파하고 돌아가도록 명하였다 이튿날 충헌 형제도 또한 추밀원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갔다. 정묘에 최충헌으로 상장군 주국을 삼고 충수로 응양군 대장군 지도성사 주국을 삼고 박보재로 형부시랑을 삼고 조영인으로 판리부사를 삼고 기홍수로 참지정사 판병부사를 삼았다. 동 10월 을해에 왕이 개명하여 탁이라 하였다 일찌기 잠잠(#:2-496)저하였을 때 꿈에 어떤 사람이 명명하기를 천탁이라고 하더니 미기에 즉위하였다 이에 이르러 금주와 동명이므로 고치고자 하여 재상으로 하여금 헤아려(의)지어 바치게 하였더니 참지정사 최당이 탁자를 올리므로 왕이 마음으로 이상하게 생각하고 드디어 고쳤다. 병자에 고공원외랑 조통을 금에 보내니 전왕의 표에는 이르기를「학이 언덕에서 우니 오히려 들을만한 메아리가 있고 해바라기가 해를 따라 기우니 어찌 함빡 비치는 사은이 없으리오 감히 간독한 정성을 다하여 우러러 고명하신 감조를 모독하나이다 엎드려 생각건대 모가 외람되이 미력한 몸으로서 부질 없이 번봉을 이어 받아 동해의 기슭에 의표가 되었나이다 오래 성교의 훈도를 입어왔사오나 서산의 일에 추도하여 문득 괴 병을 앓게 되었나이다 한쪽 다리는 몹시 말라서 보행에 반드시 남의 부축을 빌려야 하고 두 눈이 다 어두어 시력은 일보 안에 지나지 못하오니 나이 탓으로 말미암아 이와 같이 되었음인즉 약이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바입니다 또 국정이 앞에 쌓여 있음에 당하여 생각 또한 거취에 혼미하오며 만약에 황사라도 경상에 다다랐을 때에는 맞이하는 예조차 반드시 차리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생각컨대 이것이 비록 소방이라고 하더라도 그 위는 하루도 비울 수 없는 것입니다 도리켜 생각컨대 모름지기 가업은 아우에게로 전하라는 부왕의 말씀이 귀에 남아 있읍니다 그러므로 신도 일찌기 신형에게서 부탁을 받았사온즉 이제 마땅히 무겁고 어려운 일(중간)을 신의 아우에게 넘겨 주고자 하나이다 황차 신의 형에게 원자인 신 모가 있사오나 일찍 유훈을 전해 듣고 또한 신의 마음을 순종하여 말하기를 대숙의 현명하심은 따르지 못하겠사오니 원컨대 연능의 절에 부쳐 주소서 라고 하고 굳이 은퇴하고자 합니다 신의 동복형제인 탁은 덕이 인심을 감복시키고 명망은 척리에 높습니다 특히 하국(고려)을 능히 보전하여 다스릴 수가 있을 뿐 아니라 또한 가히 상조(금)에 번선할 수도 있사옵니다 이에 9월 23일에 아우 탁으로 권수군국사무를 삼고 감히 마음 속 미성을 펴서 써 복재의 은혜를 비는 바입니다」라고 하였고 신왕의 표에는 이르기를 「만물을 덮어 사사로움이 없음은 제왕의 지극한 덕이오 신의에 기대어 섬김으로써 함은 신자의 좋은 규범이오매 감히 정성스러운 말씀을 여쭈워 총청을 모청하나이다 엎드려 생각컨대 구방의 유자요 황복의 말신(증신)으로 해강의 때를 만나 수의의 덕화에 젖어있나이다 엎드려 보건대 신의 형 국왕 신 호는 선제께 체사하여 성조에 이르기까지 술직함이 거의 30연이 되도록 예에 잃은 바 없사옵더니 나이 60세를 넘으매 병으로 말미암아 일어나지 못하와 약은 만금의 좋은 것이 없고 병은 이수의 고통스러운 것과 같으니 무거운 짐(책임)을 벗어나서 여생을 보전코자 하고 신의 부 국왕 개의 유촉을 추술하여 9월 23일로써 신으로 하여금 군국의 사무룰 권수케 하였나이다 신은 이 간절한 말씀에 촉박케 되매 장차 무슨 꾀로 피하오리까 부탁함이 크고 무거움을 돌아볼 때 장차 호소하여 위에 알리고(유호이상문) 싶사오나 종묘에는 제사를 그만둘 수 없고 백성은 임금이 없을 수 없음을 생각하와 마지못하여 정성으로 청하는 것을 좇아 임시로 번잡한 기무를 맡게 되었나이다 못에 다달아 얼음을 밟음과 같아 혹은 운월에 이를가 하오니 만약에 서리를 돌리고 번개를 걷우시면 길이 생성을 감하하겠나이다 구구한 정성은 실로 하늘이 보시는 바입니다」라고 하였다. 11월 경자 삭에 의봉루에 거동하여 조하기를「짐이 신민들의 추대로 인하여 조종의 쌓아올린 터전을 이어 받아 밤낮으로 두려워하며 그 자리에 편안함이 없었다 바라는 바는 중흥하여 태평을 이루고자 함이니 비록 우근함을 지극히 하나 그칠 바를 알지 못하겠도다 옛 철왕을 보건대 형을 너그럽게 하고 죄를 용서하며 덕을 숭상하고 공을 보답하며 요역을 가볍게 하고 부세를 엷게 하였으니 다스리는 요체는 이에 지날 것이 없으므로 중외에 널리 은택을 입혀 백성으로 더불어 혁신(경시)코자 하노라 이달 초하루 새벽 이전의 내외 참교 이하로 속동 미와에 이르기까지 모두 사면 감제하고 국내의 명산 대천 및 탐라(제주)의 신지에게는 각기 가호하고 조성 및 역대의 명왕에게는 존시호를 가상하고 년 80이상과 및 독폐질의 승속남녀와 환과 고독과 의절 효순은 문여에 정표하고 분직 가함을 허하며 등극하던 날 시위한 재추 이하 및 군졸에게는 작호와 분직을 가하고 자손에게는 음직을 줄 것이며 그 나머지 직을 받을만하지 못한 자에게는 각기 물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할 것이며 문무량반에게는 각기 산직 1급의 전시를 허하고 동당 감시 인리는 동정을 모두 1도씩 허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전중서령 두경승이 졸하였다. 임자에 천우문을 고쳐 응명문이라고 하였다. 계축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계사에 종실 평으로 수태위 상주국을 삼고 연창공면으로  수사공 상주국을 삼고 광릉후 진으로 수사도 상주국을 삼고 영인백 우로 수사도 상주국을 삼고 창화백 항으로 수사도 상주국을 삼고 조영인으로 수태사 문하시랑 평장사 감수국사 판리부사를 삼고 기홍수로 수사도 중서시랑 평장사 감수국사 판병부사 태자태부를 삼고 임유 최당으로 모두 중서시랑 평장사를 삼고 이문중으로 참지정사를 삼고 우술유로 수사공 좌복사 판형부사를 삼고 최선으로 지추밀원사 태자소사를 삼고 금준으로 동지추밀원사 태자빈객을 삼고 채순희 차약송으로 모두 추밀원부사를 삼고 김언으로 상서 좌복사를 삼고 임유겸으로 상서우복사 판삼사사를 삼고 최충헌으로 추밀원 지주사를 삼았다.
   
오무 원년 춘 정월 기해 삭에 일식하였다. 경자에 조하를 쉬었다. 임자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갑자에 상장군 백존유로 서북면지병마사를 삼고 대부경 문후식으로 동북면지병마사를 삼았다. 3월 무술에 왕이 인종의 기신도장으로 장차 영통사에 행차하려 하였으나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아 혹시 변이나 있을가 하여 구태여 가지 아니하였다. 을사에 원자가 처음으로 서연을 보문각에 열었다. 병오에 중사를 분유하여 주 현의 원옥을 보살폈다. 정사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갑자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을축에 중방이 진하기를「대궐 서쪽의 땅은 무관의 위치이오니 청컨대 인가의 방아간 차리는 것을 금하소서」라고 하였다. 하 4월 계유에 현능(태조능)에 배알하였다. 을유에 창능에 배알하였다. 5월 무술 삭에 장 순 2능에 배알하였다. 기해에 유사가 상의 혐명을 피하여 탁성을 가진 자들은 모두 외가의 성을 따르도록 하고 만약 내외가의 성이 같을 때에는 내외조모의 성을 따르도록 하기를 청하였다. 병자에 조통이 금으로부터 돌아왔다 전왕의 표문에 답하는 조에 이르기를「경이 먼 지역에서 작을 이어받아 봉강을 수무하기 해(세)가 오래였는데 갑자기 퇴양하여 위를 떠나겠다 하므로 무슨 비상한 사변이라도 일어난 줄 의심하였더니 주함을 읽고서야 그 간절히 나타낸 것을 알았노라 스스로 말하기를 쇠질의 핍박(박)으로 기무의 번잡함에 견디기 어렵다 하고 또 부언을 추술하여 동생으로 하여금 이어 받게 한다 하고 번선의 중임을 오래 비워둘 수 없어 이미 권섭하는 편의를 좇았다고 하니 비록 경의 정성에서 울어난 것 같으나 그래도 짐의 듣기에는 믿어지지 않음으로 뒤이어 신사를 보내어 가서 그 상세한 것을 묻게 하겠노라」고 하였다. 기말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6월 정묘 삭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신미에 재우하였다. 계유에 전민유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금이 선문사 대리경 손우)를 보내왔다 우가 전왕의 손위한 사유를 힐문하므로 대답하기를 전왕의 표에 말한 대로 하였더니 우가 말하기를 조가 있는데 반드시 전왕을 만나 친히 주겠다고 하므로 조의가 이를 어려워하였다 문하시랑 조영인이 말하기를「전왕은 남주에서 요양하고 있는데 노정을 헤아려보면 30일이라야 도착할 수 있는 곳입니다 꼭 조서를 친히 주시려면 청컨대 2∼3개월 이곳에 머무르며 기다린 뒤라야 될 것입니다」라고 하니 우가 말하기를「진실로 그렇다면 반드시 친히 전할 것이 없다」라고 하고 다음 날 조서를 왕에게 전하였다 조에 이르기를「오래 해방을 무육하다가 갑자기 성간함을 나타내어 스스로 말하기를 병에 걸려 번무를 받들기에 어렵다 하고 이에 부언을 추술하고 또 아울러 그 아들의 사양함을 말하여 동복형제로 하여금 작봉을 전수토록 한다 하여 그 상조를 능히 섬길 수 있음과 이미 (그로) 하여금 국정을 섭행토록 하였다는 것을 말하여 빨리 나의 청문에 전달하여 왔으므로 좇을 바를 살피지 못한지라 특히 사신에게 명하여 곧 가서 묻게 하노라 경의 정성을 얻어 상세히 주독할 것을 바라노라 혹시나 숨김이 없도록 하라」고 하였다. 추 7월 정미에 왕의 생일로 함성절을 삼았다. 을묘에 예부랑중 백여주를 금에 보내어 봉책을 청하고 시랑 정방보는 방물을 바쳤다. 8월 임오에 태백(성)이 경천하였다. 9월에 호부시랑 정세충을 금에 보내어 천수절을 하하였다. 동 10월 계유에 태백(성)이 2일간 경천하였다. 12월 무인에 최충헌으로 추밀원지주사를 삼았다.  
기미 2년 춘 정월 계사 삭에 조하를 쉬었다. 예빈경 백원식을 금에 보내어 하정하였다. 2월 갑자에 백여주가 금으로부터 돌아왔다 조에 이르기를「경이 요사이 사신을 시켜 엄숙하게 주상을 달려보내어 자세히 형의 양위한 것을 서술하고 아울러 부언을 미하여 무봉을 오래 비울가 염려하고 이에 권도를 좇아 섭사케 되었다고 하였으므로 그 단서를 조사하여 보았더니 역시 이미 부합하였다. 이에 다시 정성으로 공물을 바치고 세작을 이어 계승하기를 바라니 공의를 상고하여 이에 유음을 내리며 뒤이어 마땅히 사신을 보내어 책명하겠노라」고 하였다. 도적이 명주에 일어나 삼척 울진 2현을 함락시켰다 도적이 또 동경에서 일어나 명주적과 합세하여 주군을 침략하므로 낭장 오응부와 차각문지후 송공작을 명주도에 보내고 장작소감 조통과 낭장 한지를 동경에 보내어 이를 초무하였다. 임진에 왕이 영통사에 행차하는데 어가가 환비(감옥)를 지날새 형부에 신칙하여 수도를 감면토록 하였다. 3월 무오에 여수하였다. 송공작이 동경 적괴 김순과 울진 적괴 금초 등을 초유하여 와서 항복케 하매 주식과 의복을 주어 돌려 보냈다. 하 4월 계유에 친히 대묘에 체제하고 사하였다. 을유에 금이 봉책사 대리경 송안유와 상서병부시랑 조탁 등을 보내오니 상절이 18인 산상절이 14인 중절이 27인 하절이 100인 차 21양 마 114필 강담부 100인 이었다. 5월 무술에 평장사 기홍수에게 명하여 대관전의 무일편을 고쳐 쓰도록 하였다. 신축에 왕이 금의 조서를 대관전에서 받았다 조에 이르기를「조토에 규범을 존상함은 나아가 국정을 전하기 위함이오 어진 이를 법 받고 덕을 세움도 또한 오직 세봉을 편안히 누리려 함이로다 기자의 옛 구자(터)는 진실로 변한의 옛 땅이라 근본이 든든하여야 비호함이 오래가고 지엽이 무성하여야 그 이어 받음이 번성하나니 이 대대로 미쳐온 경사(휴)를 누림은 결국 경사의 흐름이 긴데로부터 오는 것이다 신은을 폄에 있어 특이한 은총을 빛나게 할 것이다 아아 그대 탁은 품성이 안화하고 마음 가짐이 협목하여 현명함은 본래 천성에서 우러났고 명예는 점점 국인으로부터 일컬어졌도다 마침 그 형의 병이 날로 더함에 미쳐 그 아들을 놓아 두고 왕위를 장차 그대에게 주려고 노장을 와서 올리니 성의가 가상할만하도다 드디어 짐의 청문한 바가 확인케되었음으로 나라의 의식을 차려(관) 나아가 대행케 하노라 이제 사신 대장군 대리경 완안유를 보내어 절을 가지고 그대를 책명하여 개부의동삼사를 삼나니 길이 번보가 되도록 하라 아아 조두(기예)의 유속은 오히려 구습을 따름이 오래 되었고 곤제간에 가업을 전함은 다시 연방으로 누대를 거듭하였도다 면원함을 잘 생각하여서 총수함을 잊음이 없도록 할 것이다 나아가 그대 마음을 공경히 하여 짐의 명령을 복종토록 하라」고 하고 또 조하기를「후방을 분명함은 이는 병한이 되게 함이니 그 세통을 게승함에는 고래의 상전이 있는지라 이에 사신을 보냄에 임하여 가서 전책을 가하도록 하나니 은수를 받거든 더욱 충근을 힘쓸지어다 이제 모관을 사신으로 보내어 그곳에 가서 책명토록 하고 인하여 경에게 차복 금인 필단 궁전 안마 등물을 별록과 같이 사하나니 도착하거든 영납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6월 임술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중서(성)에서 주하기를「적신 조원정과 석충의 여당이 비록 덕음을 입어 이미 유방을 면하였으나 청컨대 다시 직전을 주지 말고 써 난적을 징계하소서」라고 한대 이를 청종하였다. 계유에 최당으로 문하평장사를 삼아 치사케 하고 우술유로 중서평장사를 삼아 치사케하니 무릇 청하지 않고 인하여 치사케 한 자가 20인이었다. 을해에 왕이 보살계를 받았다. 추 7월 을미에 대장군 김척후와 예부시랑  왕의를 금에 보내어 책명을 사하였다. 무술에 황충풍재로 근신을 분유하여 중외에 여수하였다. 신축에 정방보를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무오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9월 임진에 최득검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신축에 호부시랑 유공순을 금에 보내어 천수절을 하하였다. 동 11월 임인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12월 임술에 태백(성)이 경천하였다. 을유에 기홍수로 수태위 문하시랑 평장사를 삼았다.
경신 3년 춘 정월 무자 삭에  조하를 쉬었다. 예빈소경 백원식을 금에 보내어 하정하였다. 기유에 최충헌이 중외의 옥수를 감면하고 또 유배인의 연월의 구근과 노소를 헤아려서 방면할 것을 아뢰었다. 3월 갑자에 태백(성)이 경천하였다. 윤월 무신에 원자가 요속에게 말하기를「사람은 모두 그 허물을 모르는 것이니 나도 또한 어찌 능히 스스로 알 수 있으랴 청컨대 경들은 숨김 없이 모두 말하라」고 하니 조야가 가탄하였다. 3월 계해에 원자 연의 이름을 고쳐 덕이라고 하였다. 정묘에 중서 평장사 이문충이 졸하였다. 무인에 태백(성)이 이틀 동안 경천하였다. 하 4월 계사에 원비 김씨를 책하여 궁주를 삼았다. 을미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무술에 우박이 내렸다. 경자에 원자 덕을 책하여 왕태자를 삼고 교하기를「원자 덕은 천자가 위려하고 본성이 영명하니 장자의 어짐으로서는 신기를 주관케 함만 같지 못하여 성인의 교훈에도 반드시 명분을 바로 하라 하였으니 이에 이의를 따라 특히 이수의 은을 베푸노라 이제 사신을 보내어 조서를 주어 절을 가지고 너를 책명하여 왕태자를 삼노라」고 하고 책에 이르기를 「아들을 세움에 장자로 써 함은 옛날부터 그러하였도다 하물며 한사에 일찌기 정한다(조정)는 말이 있고 상사에 이정의 뜻이 실려 있으니 마땅히 창주를 주관하는 위를 높일 것이며 써 입방의 터전을 굳게 할 것이다 아아 너 원자 덕은 의젓한 바탕으로 온자한 성품을 타고 나서 독서 저문 조필 연묵이 모두 숙습한 것 같으니 결코 우연이 아니로다 덕은 이미 원량으로서 풍성하며 신분은 또한 저부(태자)로서 마땅하도다 특히 귀서 협종의 길조 뿐만 아니라 또한 중외의 대망하는 정성을 충족(새)시킬 것이라 이에 좋은 때를 택하여 빛나는 책명을 가하게 하고자 이제 사신을 보내어 절을 가지고 예를 닦아 너를 책명하여 왕태자를 삼노라 아아 인이 아니면 계체의 중임을 감내할 수가 없을 것이며 의가 아니면 중인의 마음을 제어할 수가 없을 것이다 바른 말을 즐겨 듣고 모든 선을 힘 써 닦아 써 방가의 창성하는 경운에 대응하고 조선의 누적한 휴미를 떨어뜨리지 말 것이니 가히 힘쓰지 않을소냐」라고 하였다. 계묘에 아들 서를 봉하여 덕양후를 삼았다. 계축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5월 기사에 소부감 조통과 중랑장 이당적을 보내어 진주를 안무케 하였다. 이 달에 밀성 관노 50여인이 관의 은기를 도적질하여 운문적에 투합하였다. 추 8월 계사에 경주의 이의민의 족인들이 이미 방환되매 주리로 더불어 틈이 생겨 각투하여 서로 죽일제 의민의 족인들이 이기지 못하였다 그 때 안찰사인 전원균이 주에 들어와 능히 제어하지 못하는지라 이에 방수 별장 통인이 모두 피살되고 원균은 두려워하여 곧 다른 읍으로 달아났다. 금주의 잡족인들이 무리로 모아 난을 꾀하고 호족의 사람들을 죽이니 호족이 성 밖으로 달아나 피하였다 이에 군사로써 부사 아문을 포위하니 부사 이적유가 옥상에 올라가 활을 쏘니 수모자가 화살에 맞아 거꾸러지매 그 무리들이 4방으로 흩어졌다가 이윽고 다시 돌아와서 고하기를「우리들은 강폭하고 탐오한 자를 제거하므로 써 우리 고을을 맑히고자 하는데 어찌하여 우리를 쏘나이까」라고 하거늘 적유가 거짓 놀라며 말하기를「내가 일찍 이를 생각하지 못하고 잘못 외적으로 알았구나」라고 하고 이에 성 밖의 호족에게 밀유하고 협격하여 모조리 죽여버렸다. 동 11월 병인에 팔관회를 설하였다 이제 14일로 한 것은 묘일을 피함이다. 신사에 금이 예부시랑 유공헌을 보내와 생신을 하하였다 함성절(왕의 생신)은 본래 7월에 있었는데 전조의 대정 갑오년 예에 따라 12월 초하룻날로 절을 삼으니 드디어 상례가 되었다. 계미에 금사를 대관전에서 향연하였다. 12월 정미에 최선으로 수대위 문하시랑 동중서문하 평장사 판리부사를 삼고 기홍수로 수대사 주국을 삼고 임유로 수대부 문하시랑 평장사를 삼고 최충헌으로 수대위 상주국을 삼고 안유부로 우부승선 중서사인을 삼고 조준으로 호부시랑 우간의대부를 삼았다. 경주부유수 방응교를 파면하고 낭중 위돈겸으로 바꾸었다 처음 충헌이 의민의 족속을 주멸할 때 경주 별장 최무가 주관의 명을 받고 의민의 족인 사경 등 몇 사람을 잡아 죄벌에 처하였더니 이에 사경의 족인 백유 직재 등이 이를 원망하여 응교에게 호소하기를「무가 난을 일으키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더니 응교가 이 말을 믿고 (무를) 잡아 가두었다 백유과 직재가 밤에 옥에 츨어가 무를 죽였으나 응교가 천살죄를 불문에 부치고 도리어 무의 족인 용웅 대의 등을 포살코자 하니 주인이 분원하였다 얼마 후에 용웅 대의 등이 백유 직재를 죽였더니 용웅도 또한 사람에게 피살되었다 이에 이르러 대의 등이 주중의 무뢰배를 모아 함부로 횡포한 짓을 심히 하였으나 응교가 또 능히 제어하지 못하더니 조정에서 이 말을 들은 고로 이 명이 있었다.
신유 4년 춘 정월 임자 삭에 조하를 쉬었다. 2월 갑진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3월 신해 삭에 왕이 영통사에 행차하였다. 하 5월 경신에 우박이 내렸다. 경오에 최종준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6월 신사에 재우하였다. 임진에 금이 이부시랑 유규를 보내와 양을 사하였다. 추 7월 신해에 태백(성)이 낮게 나타났다. 공부시랑 태수정을 금에 보내어 횡선을 사하고 위위경 진언광은 생신 하함을 사하였다. 갑술에 도재고 어사 낭장 노언숙이 권귀가 간청한다고 거짓말하고 창고 쌀 여러 섬(석)을 내어 창고의 원리들과 나누려 하였는데 직고장교가 달려와 승선우승경에게 고하니 사건을 헌대에 회부하여 도적한 쌀은 물리고 언숙과 서리 등 20여인은 해도로 귀양 보냈다. 예빈경 조숙을 금에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9월 정묘에 참외군관으로 하여금 서교에서 사술을 연습토록 하였다. 임신에 이부시랑 정공순을 금에 보내어 천수절을 하하였다. 동 10월 기해에 백좌회를 구정에 설하였다. 11월 무신 삭에 일식하였으나 가려서 보이지 않았다. 신해에 태백(성)이 5일간 낮에 나타났다. 12월 정축 삭에 금이 공부시랑 납합현을 보내와 생신을 하하였다. 무자에 형부상서 민식이 졸하였다. 임인에 최선으로 개부의동삼사 상주국을 삼고 기홍수로 문하시랑 동중서문하 평장사를 삼고 임유로 수대위주국을 삼고 김준으로 중서시랑 평장사를 삼고 차약송으로 수사공 참지정사를 삼고 최충헌으로 추밀원사 이병부상서 어사대부를 삼았다.
임술 5년 춘 정월 정미 삭에 조하를 쉬었다. 2월 신사에 중외의 경계를 방면하였다. 3월 정사에 총재 최선과 승선 우승경이 예빈성에 앉아 역어(통역관)를 시취하였다. 임신에 여수하였다. 하 4월 임오에 우설이 내렸다. 5월 정미에 우박이 내렸다. 을축에 황극중 등 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추 7월 병오에 장군 한저를 금에 보내어 생신 하함을 사하고 사우는 천수절을 하하였다. 9월 병오에 문하시중 조영인 졸하였다. 동 10월에 탐라가 반하매 소부 소감 장윤문과 중랑장 이당속을 보내어 안무하였다. 경주 별초군이 영주로 더불어 평소에 틈이 있었더니 이 달에 이에 운문의 적도와 부인 동화 양사의 승도를 끌고 영주를 공격하였다 영주인 이극인 견수 등이 정예를 거느리고 성 밖으로 돌격하여 나와 싸우니 경주인이 패주하였다 충헌이 이 말을 듣고 재상과 제장을 대관전에 모아 의논하기를「경주인이 함부로 불의를 행하였고 이제 또 당을 모아 이웃 고을을 공벌하니 마땅히 군사를 내어 칠 것이다」라고 하였다. 11월 병신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무오에 전왕이 창락궁에서 붕어하였다. 기사에 금이 호부시랑 이중원을 보내와 생신을 하하였다. 12월 을해에 탐라 안무사 장윤문과 이당적이 적괴 번석 번수 등이 모두 복주되었음을 아뢰었다. 병자에 경주 적 패좌 등이 일어나매 김척후 최광의 강순의 등을 보내어 길을 나누어 토벌하게 하였다. 윤월 임인에 명종을 지능에 장사지냈다. 갑신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기미에 최충헌으로 수대부 참지정사 이병부상서 판어사대사를 삼고 왕규로 어사대부를 삼고 백존유로 동지추밀원사를 삼고 김평 이자정으로 모두 추밀원부사를 삼고 우승경으로 추밀원 지주사를 삼고 안유부 이항으로 좌우승선을 삼고 김척후로 지어사대사를 삼고 최혁으로 전중소감 어사잡단을 삼고 정덕우로 우사간을 삼고 박득문 박인석으로 전중시어사를 삼고 임효명으로 전중내급사를 삼고 이승백 이득소로 좌우정언을 삼았다.

계해 6년 춘 정월 신미 삭에 조하를 쉬었다. 기축에 신중원에 행차하였다. 을미에 친히 제석도장을 수문전에 설하였다. 2월 을사에 법운사에 행차하였다. 무오에 압병무능승도장을 수문전에 설하였다. 임술에 보제사에 행차하여 오백나한재를 설하고 써 적을 멸하기를 기도하였다. 기사에 왕이 영통사에 행차하였는데 때에 어련의 축두가 갑자기 불어져 왕이 말을 타고 선군문에 이르렀다 상승국에서 연축을 고쳐 바치니 왕이 다시 연을 탔는데 태자의 호행마가 또 뛰어 달아났으므로 다른 말로 바꾸어 탔다. 3월 무자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을미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병신에 여수하였다. 하 4월 정미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갑인에 소재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였다. 6월 무술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계축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추 7월 무신에 왕현으로 수사공을 삼고 이춘로로 참지정사를 삼아 인하여 치사케 하고 강석후로 우정언을 삼았다. 신미에 소재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였다. 장군 윤공직을 금에 보내어 생신 하함을 사하였다. 무인에 좌사랑중 곽공의를 금에 보내어 천수절을 하하였다. 신사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을유에 중서평장사 김준이 졸하였다. 8월 신해에 참지정사 정국검이 졸하였다. 계축에 보제사에 행차하여 오백나한재를 설하였다. 9월 갑오에 최충헌이 봉은사에 나아가서 태조 진전에 제하고 인하여 의친을 바쳤다. 동 10월 신축에 소재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였다. 을묘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11월 정묘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신미에 불정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였다. 무인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무자에 왕이 공예태후 기신으로 장차 영통사에 행차하려는데 일관이 주하기를 천문에 경계함이 있으니 출행함이 마땅치않다 하므로 행차하지 않았다. 임신에 금이 병부시랑 윤효를 보내와 생신을 하하였다. 12월 을미 삭에 금사를 대관전에서 향연하였다. 무오에 차약송으로 수대위 중서평장사를 삼고 최충헌으로 중서시랑 평장사 이부상서 판어사대사 태자소사를 삼고 왕규로 참지정사를 삼고 정광서 김봉모로 모두 추밀원부사를 삼고 박진재로 상서좌승을 삼고 장윤문으로 시대부경 우간의대부지제고를 삼고 이단림으로 우정언 지제고를 삼았다. 경신에 왕이 배달(등창)을 발하니 신유에 최충헌이 입내하여 문병하였다.

갑자 7년 춘 정월 정묘에 최충헌이 또 문병하였다 왕이 이르기를「과인이 번저를 거쳐서 보위에 즉위하게 됨은 공의 힘이오 나이도 이미 늙었는데 병세가 또한 무거워서(미유) 능히 조정을 청단할 수 없으므로 태자에게 전위코자 한다」라고 하니 충헌이 대답하기를「원컨대 성상께서는 잘 섭양하소서 선위하시겠다는 어명은 신이 감히 따를 수 없나이다」라고 하고 드디어 퇴출하였다. 무신에 충헌이 총재 최선과 평장사 기홍수를 사제에 맞이하여 내선의 일을 밀의하였다. 기사에 충헌이 다시 입내하여 문병하였다 왕이 내선을 말하고 뜻이 심히 간절(견권)한 바 있었다 충헌이 이것을 태자에게 고하니 태자가 울면서 굳이 사양하였다 왕이 천령전에 이어하여 태자에게 조하기를「짐이 양덕으로 그릇 비기를 승습하여 나이 이미 늙고 병도 또한 무거워 감히 조정을 청단할 수 없노라 돌아보건대 너 원자는 학문이 밝음(광명)에 나아갔고 덕은 민망에 믿음직하니 이에 대보를 너에게 부치노라」고 하니 충헌이 태자에게 말하기를「군부의 명은 굳이 사양하지 못하나이다」라고 하고 강안전으로 인도하여 들어가 어복을 올리고 북면하여 재배하고는 받들고 대관전으로 나와 백관의 조하를 받았다 왕이 부축되어 일어나 충헌에게 말하기를「오늘에 짐의 지원이 이미 다 이루어졌으니 병도 따라 나은듯 하도다 경의 짐 부자에 대한 공덕은 얕은 것이 아니니 갚을 길이 없노라」고 하고 드디어 눈물을 지우니 충헌이 재배하고 물러나왔다 왕이 승선 및 중방 등에게 이르기를「오늘 이후로는 다시 경들을 볼 수 없겠구나 마땅히 모두 사군을 잘 보필하여 지치를 이룩하도록 하라」고 하니 듣는 사람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정축에 왕이 덕양후 저에 이어하여 드디어 붕어하니 유조에 건시전에 빈하지 말라 하였으므로 무인에 내사동 정안궁에 빈하였다 재위 7년에 수 61이요 시호를 정효라 하고 묘호를 신종이라 하였으며 성남에 장사지내니 능을 양능이라 하였다 고종 40년에 경공이라 가시하였다.
사신이 찬하기를「신종은 최충헌이 세운 바로 생 살 폐 치가 모두 그(최충헌) 손에서 나오니 다만 허기를 안고 신민의 위에 섬이 마치 목우인과 같을 따름이었다 애석하도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