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상식/병법서

김해병법

오늘의 쉼터 2009. 7. 21. 14:34


   [김해병법]

무경칠서 중 하나인 이정이 쓴 이위공문대라는 책을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연개소문은 자신이 병법을 잘 알기 때문에, 중국이 고구려를 정벌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폐하의
명령을 어기는 것 같습니다." 이 말의 뜻을 살펴보면 이정이 연개소문을 비하하는 것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 말 속에 연개소문과 그의 병법에 관한 것을 왠만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김해병서라는 연개소문이 쓴 병법이 나온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도 고구려 같은 삼국시대에도 병법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연개소문은 당태종과 맞붙어서 안시성에서 그를 대패시켰습니다.
그런데 당시 당나라 군사의 총사령관이 바로 당태종이었는데,
웬만하면 당태종은 그냥 자기자리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직접 친정에 나섰어요.
자기가 친정에 나서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당나라에는 이정(李靖)이라는 유명한 장군이 있었습니다.
당태종이 이정 장군에게 고구려를 치는데 지휘를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정은 '우리 선생님의 나라여서 갈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정은 연개소문에게 병술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손자병법은 알아도 김해병법은 잘 모를 겁니다.
김해병법이라는 우리 고유의 병법이 있었다고 합니다.

대만의 모서점에서 이정병법이라는 책을 찾았습니다.
이 병법은 이정이 당태종에게 가르친 병법으로서 그렇게 길진 않습니다.
'고구려를 칠 때는 요렇게 요렇게 해서 싸우시오'라고 유의사항을 적어놓은 것입니다.
이정이 연개소문에게서 김해병법을 배웠기 때문에 고구려의 병법을 잘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연개소문의 호는 김해입니다.
 그래서 김해병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찾으면 있을 것 같지만, 이 책은 현재로서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단면이라도 보고자 이정병법을 대만에 가서 샀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문화종속주의에 빠져 있는가 하는 것을, 중국의 손자병법은 알면서
우리의 김해병법은 모른다는 사실에서 단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대만에 가면 경극이라는 오페라에 연개소문이 등장합니다.
연개소문의 가면은 무시무시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연개소문의 허리에는 다섯개의 칼이 꽂혀 있습니다.
 다섯개의 칼을 어떻게 사용했는가는 검법이 전수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연개소문은 칼 다섯개를 썼습니다.
 일본인은 짧은 것과 긴 것 두개를 찹니다.
싸움이 나면 일본 사무라이는 먼저 긴 것을 뽑아서 쓰고, 그것이 부러지면 작은 걸로 합니다.
그런데 연개소문이 칼 다섯개를 어떻게 썼는지는 모르겠어요.
어쨌든 특유한 병법과 검술을 가지고 당태종의 대군을 안시성에서 무찔렀을 뿐만 아니라

패퇴하는 당나라 군대를 몰살시키고 요하를 건넜습니다.
요하를 건너면 바로 북경입니다.
그래서 연개소문이 북경을 점령해서 고려진을 거기다가 설치했다는 사실은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고려진이 많아요.
지금도 고려진이 많습니다.
당시 고구려인이 쏜 화살이 당태종의 왼쪽눈을 명중했습니다.
당태종은 당시 왼쪽눈을 맞아 돌아가며,
"왜 내가 고구려 같은 작은 나라를 정복하는데 직접 가서 이런 수모를 당하느냐"며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리곤 3년 뒤에 죽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 화살촉 끝의 청석이라는 돌은 철판을 뚫는다고 합니다.
그것이 적함에 명중되면 격침까지 된다고 합니다.
그러한 무서한 대궁입니다.

대궁에서 소궁까지 온갖 무서운 활을 개발했는데,
 이 때 당태종은 소궁에 맞아서 3년 뒤에 저승으로 갔습니다.
당태종은 중국의 역사에 있어서 우리의 세종대왕 같은 분입니다.
그런데 고구려인의 화살촉에 맞아서 죽었다고 하면 그의 위상에 문제가 생기니까 설사로 죽었다,
 독감으로 죽었다 등 당서에 보면 온갖 엉터리 얘기들이 나옵니다.
 그래서 사인(死因)이 분명치 않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연개소문

단재 신채호 선생이 연개소문에 대하여 ‘조선역사 4천년 이래 최고의 영웅’이라며
극찬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인물일진대, 그의 인품, 성장과정, 업적에 대해서 우리 민족 모두가
자세히 알아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하지만 실상 그렇지 못하다는 것은 우리나라 국사교육이 뭔가 잘못되어 있음을 반증해주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김부식이『삼국사기』에서 그를 임금을 시해하여 정권을 포탈한 잔악무도하고 포악한
역적으로 규정하고 악평으로 채워놓은 이래, 그의 이름은 오명을 뒤집어쓴 채 지금까지 내려왔다.
 
역사교육이 절멸한 오늘의 현실에서 드라마 <연개소문>은
우리 민족의 뿌리와 정신을 일깨우는 계기가 될 듯하다.
그러면 실제로 연개소문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고구려의 정신을 되살리다
 연개소문은 한민족의 웅혼한 정신을 이어받아 고구려 말,
위기로부터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일어난 당대 동북아 희대의 대영걸(大英傑)이었다.
그는 망해가는 민족정신의 불씨를 지펴 올려 백전백승의 전과를 이뤄냈던 살아있는
고구려의 정신이었다.
 
당시 동아시아의 두 영웅, 연개소문과 당 태종 이세민의 충돌은
어찌 보면 피할 수 없는 숙명과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단재는 『조선상고사』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무릇 고구려와 당은 피차 강약을 다투는 양립할 수 없는 나라요,
연개소문과 당 태종은 서로의 우열을 겨루는 양립할 수 없는 인물이니,
이 같은 두 인물이 두 나라의 정권을 잡았으니 양국 전쟁의 폭발은 조만간 필연적인 사실이라.”
 
당 태종은 처음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시해한 것을 빌미로 고구려를 침공하려다
장손무기의 충고를 받아들여 침공을 연기했다.
그 후 고구려가 신라 사신의 당나라 조공을 막고 있다는 말을 듣고 상리현장(相里玄奬)을 보내
협박했지만 연개소문은 이를 일축했다.
태종은 다시 장엄(莊儼)을 보내 최후통첩을 했으나 연개소문은 오히려 사신을 토굴에 가두었다.
 이로써 양국의 외교적 타협은 결렬되었다.
 
 연개소문은 일전도 불사한다는 정신으로 당의 협박을 무시하고, 사신을 토굴에 가둔 것이다.
당의 위세에 고개를 숙였던 고성제(영류왕)에 비하면,
 연개소문은 당을 그렇게 볼 가치가 없다고 여긴 것이다.
이것은 연개소문이 고구려 역사와 문화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으며,
또한 고구려민의 우월성에 대한 확신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당태종 이세민은 고구려 보장제 3년(644) 11월 원정명령을 내린다.
정벌의 명분은 영류왕을 시해한 연개소문을 응징하고 백성을 구원하겠다는 것이었다.
『삼국사기』가 기록하고 있는 이러한 내용은 <구당서>, <신당서>의 내용을 베낀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은 제 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이세민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당나라 명장을 길러낸 최고의 명장
 당태종은 당의 위세가 커지자 고구려를 우습게 본 나머지, 휘하 장수 이정의 충고도 무시한다.
태종이 출병하기 전에 이정(李靖)을 행군대총관으로 삼으려고 하자
이정은 “제가 일찍이 태원(太原)에 있을 때 연개소문을 만나 병법을 배워 그 뒤로 폐하를 도와
천하를 평정함이 다 그 병법의 힘을 입었음인즉, 오늘날 신이 어찌 감히 전날에 사사하던
개소문을 치리까”하고 사양했다.
스승에 대한 기본 예법을 어길 수 없다는 것이다.
 
태종이 “개소문의 병법이 과연 옛 사람의 누구와 견주겠느냐”라고 묻자
이정은 “옛 사람은 알 수 없으나 오늘날 폐하의 모든 장수 가운데에는 적수가 없고,
비록 천위(天威)로 임(臨)하실지라도 가히 승리하기 어려울까 하나이다”라고 대답했다.
천위, 하늘의 위엄! 천자를 자칭하는 당태종에게는 자존심을 거스르는 소리다.
 
이에 태종이 “중국의 거대함과 인민의 수로나 병력의 강함으로 어찌 일개 개소문을 두려워하랴” 하고
불쾌해하자
이정은 “연개소문이 비록 1인이나 재주와 지략이 만인에 뛰어난즉 어찌 두렵지 아니하리까”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이정은 돌궐, 토욕혼(吐谷渾)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유능한 사령관이었다.
중국 능연각(凌煙閣)에 걸린 초상화의 24공신의 한사람이며, 이적(李勣)과 함께 2대 명장이다.
그가 저술한 <이위공병법(李衛公兵法)>은 당대 최고의 병법서로 알려져 있다.
단재는 이 병법서와 관련해 노상운(盧象雲) 선생이라는 한 노인의 구전(口傳)을 『조선상고사』에
소개하고 있다.
 
“연개소문은 자(字)가 금해(金海)이니 병법이 고금에 뛰어난 바 그가 저술한 ‘금해병서’(金海兵書)가
있는데 고려 때도 임금께서 늘 각 방면의 병마절도사에게 그 부임시에 한 벌씩을 하사했다.
지금은 그 병서가 전해지지 않거니와 연개소문이 그 병법으로 당나라 이정을 가르쳐 이정이
당의 최고 명장이 되었다.
그 이정이 저술한 ‘ <이위공병법(李衛公兵法)>’은 ‘무경칠서’(武經七書)의 하나로 치는 바,
연개소문에게 병법을 배운 이야기를 자세히 썼다.
그 뿐 아니라 연개소문을 숭앙(崇仰)한 어구가 많으므로 당나라 사람들이 연개소문과 같은 외국인에게
병법을 사사해 명장이 됨은 실로 중국의 큰 수치라고 하여 드디어 그 병법서를 모두 없애 버렸다.
오늘날 유행하는 <이위공병서>는 후인의 위작인 고로, 이는 원본이 아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당 최고의 명장을 키워낸 인물이 바로 연개소문이었다는 것이다.
 
 
 
한민족의 정신을 이은 조의선인
 그렇다면 연개소문은 그 병법을 어떻게 배웠을까?
《규원사화》에는 그가 봉황산에서의 10년 수도 끝에 도를 통하여,
 만고에 뛰어난 호걸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신라의 명장, 김유신 장군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이 동방에 있어 만세에 걸친 나라의 제전이 되었으니,
고대의 나라 임금은 반드시 먼저 상제(上帝)(한 분의 큰 주신이다)로부터 단군에 이르기까지
삼신(三神)을 삼가 섬기는 것을 도리로 삼았다.
관직에 있어서는 또한 대선(大仙), 국선(國仙), 조의(?衣) 등의 명칭이 있었으니,
동명성왕에 이르러서는 조천석(朝天石)이 있었고, 명림답부(明臨答夫)가 일찍이 조의의 직책을
맡았던 것과 같은 것이다.
연개소문은 봉황산에 들어가 십년을 수련한 뒤 마침내 만고에 뛰어난 호걸이 되었으며,
김유신은 중악의 바윗굴에 들어가 십년을 수도한 뒤 결국에는 명장이 되어 태종을 도와 나라를
강성함에 이르게 하였다.”
 
조의선인  연개소문 

연개소문 은 중국 경극(獨木關) 등에도 등장할 정도로 중국인들이 두려워했던 인물이다.

그 줄거리는 당태종이 봉황산에서  연개소문 에게 쫓겨 위기에 처하자 설인귀가 구해준다는 내용으로

연개소문 과 설인귀가 주인공이고 당태종이 조연이다.

경극에 나온  연개소문 은 용맹한 장군이지만 잔인하고 포악한 인물로 묘사된다.

얼굴은 푸른빛으로 화장하는데, 푸른빛의 얼굴화장은 동방 즉 고구려의 장군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삼국사기』는 고구려의 적이었던 당나라인들이 변모시킨  연개소문의 모습을 담고 있다.

『삼국사기』는 고려의 김부식이 ‘묘청의 난’4)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쓴 역사서로서,

 중국을 사모한 김부식이 사대주의 눈으로 썼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반면 『태백일사』는 전혀 다른 면에서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가 불과 9살에 ‘조의선인’으로 선발되었다고 하면서 그의 인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의표(儀表)가 웅위(雄偉)하고 의기가 호협하여 늘 병사들과 함께 섶에 누워 자고,

손수 표주박으로 물을 떠 마시며, 무리 속에 섞여 있어도 자신의 최선을 다하고,

일이 혼란하게 얽혀 있어도 미세한 것까지 분별해 내었다.

상을 줄 때는 반드시 고루 나누어주고, 정성과 믿음으로 두루 보호해 주었으며,

 자기의 처지를 미루어 남의 심정을 뱃속에 갈머두는 아량을 가졌다.

 … 한번 기쁨을 나타내면 신분이 낮고 미천한 사람들도 가까이 할 수 있었고,

노하면 권세 있고 부귀한 자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태백일사』가 그리는 한 인간의 모습은 진정한 영웅의 모습이다.

여기서 ‘조의선인’이란 말에 우리가 그에 대해서 인식할 수 있는 모든 핵심이 깃들어 있다. 

 연개소문은 조의선인의 한 사람으로서 당시 꺼져가는 고구려의 기상을 되살려 강성해져가는

당의 세력을 제압했다.
 
 612년부터 618년까지 중원은 혼란기였다. 수양제의 살수 패전 이후 전국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태원의 군사령관이던 이연을 20살이던 아들 이세민이 부추겨 수왕조를 무너뜨리고 당왕조를 세웠다.

이때 돌궐, 설연타, 고창, 고막해, 아사나 등 여러 민족들이 일제히 중원을 공략하여 당왕조는

이들을 제압하는데 정신이 없었다.

고구려도 이때 중원을 공격하자는 세력들이 있었으나, 618년 고성제(영류왕)가 즉위하면서

중원 공략을 포기하고 만다.

고성제는 수군사령관으로 수양제의 침입 때 패수에서 수나라 수군 30만을 한번 싸움으로 격파하여

물리친 태자 건무였다.

그러나 수와의 전쟁 이후 고구려의 국력이 약해지자 당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굴욕적인 외교를 펼친다.
 
 고구려가 좌시하고 있는 가운데 당의 세력은 점차 커졌다.

 이때 을지문덕을 비롯한 주전파들은 고성제에게 강력히 중원공격을 건의했으나 고성제는

평민출신으로 백성들의 신망을 크게 얻고 있는 을지문덕을 경계하여 천금같은 기회를 방치했다.

젊은 무장들의 분노는 높아졌고 목숨을 내놓고 적과 싸웠던 조의선인들은 왕을 비난했다.
 
 심지어 고성제는 당의 국교인 도교를 수입하여 백성들에게 청강하게 했다.

 당이 도교를 장려한 것은 노자의 성이 이(李)씨로 당의 창업자 이연, 이세민과 성이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민족 본래의 신교사상과 민족주의로 뭉친 고구려인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당시 고구려는 심각한 분열상황으로 가고 있었다.

본래의 뿌리 문화인 신교문화는 점차 쇠퇴하고, 신교문화의 일면을 취하여 성장한 줄기 문화인

유교 불교 도교가 중국에서 유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고구려 승려 승랑(僧朗)이 중국 삼론종(三論宗)1)의 큰 스승이 되기도 하는 등

고구려의 불교도 꽤 깊은 수준에 이르렀다.
 
반면 본래의 신교를 숭앙한 조의선인들은 그 위상이 점차 떨어져 고성제는 이들을 천리장성 축조에

동원하기도 하였다.

 삼신신교 신앙을 바탕으로 민족의 주체적인 역량을 동원할 것을 주장했던 조의선인은 아웃사이더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바람 앞에 서있는 촛불처럼 위태로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연개소문이 일어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조의선인이 누구이며, 그들이 추구했던 바를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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