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일본만행

‘민족시인’ 윤동주-폭압의 겨울, 봄을 그리며 별로 지다

오늘의 쉼터 2009. 5. 14. 19:12

                                   1945년 3월 복간도 용정에서 열린 윤동주 장례식.



#외마디 비명이 품은 뜻

1945년 2월16일 후쿠오카형무소의 한 독방 감옥에서 외마디 비명이 내질러진다.

한 간수가, 혹시 그것이 독립만세를 외치는 소리가 아닌가 하고 바짝 청각을 돋우고 달려갔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복역수 평소동주(平沼東柱, 도일 유학을 위해 창씨개명해 얻은 윤동주의 이름)가

이 지상에 남긴 마지막 소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향년 만 27년2개월의 죽음이었다.

윤동주가 특수고등경찰에 체포된 것은,

42년 도쿄 닛교대학을 거쳐 편입해간 교토 도시샤 대학 시절인 43년 7월이었다.

치안유지법을 위반한 독립운동, 이른바 ‘재경도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의 핵심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2년형으로, 45년 11월30일이 출감 예정일이었다.

윤동주보다 더 오래 옥살이를 해야 하는, 또 한 사람의 핵심인물은 송몽규였다.

송몽규는 윤동주의 고종사촌으로 같은 해 같은 마을에서 태어나 같이 성장한 죽마고우이며,

연희전문과 일본 유학을 함께 하고 같은 사건으로 같은 형무소에 투옥까지 된 평생의 지기였다.

이해 들면서 두 사람은 형무소 복도에서 만날 때마다 서로에게서 죽음의 그림자를 느끼고 있었다.

그 무렵 거의 매일 규슈 제국대학의 레지던트들이 찾아와 복역수들의 팔뚝에 이름 모를 주사를 놓고는 했다.

이 주사를 두어 대 맞고부터 살이 빠지고 걸음이 느려졌다.

눈앞에 사람이 있고 물체가 있어도 그저 흐릿해 보였다.

강제 노역 때와는 차원이 전혀 다른 이상 증세였다.

 아니나 다를까,

독방을 쓰는 사람 몇이 밤 사이에 주검이 되어 나가는 일이 연이어 일어났다.

송몽규는 주사를 놓으려는 의사에게 소리쳤다.

“난 이 주사가 싫어. 이 주사를 맞지 않겠소.”

그래도 막무가내였다.

 한 사람이 붙드는 정도인데도 도무지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어느날 윤동주가 주사를 맞고 나오는 걸 보았다.

얼이 빠진 표정으로 송몽규를 보며 지나가는데, 서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튿날부터 윤동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윤동주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도 송몽규는 통곡을 할 힘이 없었다.

#이상한 주사, 끊이지 않을 증언과 발굴

        윤동주가 복역한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의 1940년대 말모습.

 

 

윤동주의 시신을 찾으러 오라는 연락을 받은 아버지 윤영석은 일본으로 건너가

사촌인 도쿄 유학생 윤영춘과 함께 후쿠오카 형무소로 갔다.

두 사람은 먼저, 살아 있는 송몽규를 면회했다.

알이 반쯤 깨진 안경을 간신히 걸치고 있는 송몽규를 두 사람은 쉽게 알아 보지 못했다.

피골이 상접한 그가 먼저 무슨 말인가 건네 오는데 그게 마치 저세상에 들려오는 말소리 같았다.

윤영춘이 간신히 입을 뗐다.

“어째 모양이 이러냐?”

“저놈들이 주사를 놓아서 이 모양이 됐고, 동주도 이 주사를 맞고….”

간수의 눈을 피해 몰래 간신히 주고 받은 우리말이었다.

두 사람이 윤동주의 유해를 찾아간지 한 달도 되지 않은 3월7일 송몽규 역시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47년 윤동주의 시가 경향신문에 처음 소개되고 이듬해 유고 시집이 발간된 이래,

그의 문학은 시를 사랑하는 한국인들이 결코 빼놓지 않는 애송작이 되었다.

그를 거론할 때 또한 빠지지 않는 이야기가 그가 감옥에서 강제로 맞았다는 주사에 대해서이다.

결론을 말하면 그 주사는 일제의 생체실험용 주사다.

80년 고노 에이지(鴻農映二·문학평론가)는 그 주사를 당시 규슈 제대에서 실험하고 있었던 혈장 대용

생리 식염수라고 주장했다.

혈장은 인체의 혈액 속에 있는 유형 성분 즉,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을 제외한 나머지의 액체 성분을 말한다.

그 실험은 사람 몸에서 피를 이루는 일부 액체 성분 대신에 소금물을 넣어서 견딜 수 있는 한계를 측정하는

생체실험으로, 말할 것도 없이 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피를 흘린 병사에게 귀한 혈장 대신 값싼 생리 식염수를

주입해 살리는 방법을 얻으려는 실험이었다.

이부키고(伊吹鄕)도 당시 후쿠오카형무소 재소자들의 사망자 수와 사망률이 대단히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다는

통계 자료에 주목하면서 당시 후쿠오카 형무소의 생체실험을 외면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 밝혀내고 있다.

공공연한 사실로 인정되는 2차 대전 중의 생체실험마저도 여태 공식적으로는 부정되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윤동주와 송몽규가 맞았다는 그 주사가 진짜 생체실험용 주사였다는 사실을 입증할 만한 증거는 더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보라. 윤동주의 죽음을 송몽규가 증언하면서 그 ‘주사’의 실재가 사실로 알려지게 되었다.

송몽규에게 그 말을 들은 윤영춘이 그걸 전파하고, 그 증언을 믿게 된 고노 에이지와 이부키 고가

더 확실한 증거를 찾아 내지 않았는가.

윤동주의 생애를 샅샅이 추적해 역저 ‘윤동주 평전’을 낸 송우혜는 그 책에서 그들의 활약을 자세히 밝혀두고

있다.

윤동주는 그냥 시인이 아니다.

그의 몸은 역사를 증언하는 실체로 살아남아 있다.

〈박덕규/ 소설가·단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