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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전(兩班傳)

오늘의 쉼터 2009. 5. 6. 21:15

 

양반전(兩班傳)

양반이란,

사족(士族)들을 높여서 부르는 말이다.

정선군(旌善郡)에 한 양반이 살았다.

이 양반은 어질고 글읽기를 좋아하여

매양 군수가 새로 부임하면 으레 몸소 그 집을 찾아와서 인사를 드렸다.

그런데 이 양반은 집이 가난하여 해마다 고을의 환자를 타다 먹은 것이 쌓여서 천 석에 이르렀다.

강원도 감사(監使)가 군읍(郡邑)을 순시하다가 정선에 들러 환곡(還穀)의 장부를 열람하고 대노해서,

  "어떤 놈의 양반이 이처럼 군량(軍糧)을 축냈단 말이냐?"

하고, 곧 명해서 그 양반을 잡아 가두게 했다.

군수는 그 양반이 가난해서 갚을 힘이 없는 것을 딱하게 여기고 차마 가두지 못했지만

무슨 도리가 없었다.

양반 역시 밤낮 울기만 하고 해결할 방도를 차리지 못했다.

그 부인이 역정을 냈다.

  "당신은 평생 글읽기만 좋아하더니

   고을의 환곡을 갚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군요.

   쯧쯧 양반, 양반이란 한 푼어치도 안 되는 걸."

 

  그 마을에 사는 한 부자가 가족들과 의논하기를,

  "양반은 아무리 가난해도 늘 존귀하게 대접받고 나는 아무리 부자라도 항상 비천(卑賤)하지 않느냐.

   말도 못하고, 양반만 보면 굽신굽신 두려워해야 하고, 엉금엉금 가서 정하배(庭下拜)를 하는데,

   코를 땅에 대고 무릎으로 기는 등 우리는 노상 이런 수모를 받는단 말이다.

   이제 동네 양반이 가난해서 타먹은 환자를 갚지 못하고 시방 아주 난처한 판이니

   그 형편이 도저히 양반을 지키지 못할 것이다. 내가 장차 그의 양반을 사서 가져보겠다."

 

부자는 곧 양반을 찾아가 보고 자기가 대신 환자를 갚아 주겠다고 청했다.

양반은 크게 기뻐하며 승낙했다.

그래서 부자는 즉시 곡식을 관가에 실어가서 양반의 환자를 갚았다.

  군수는 양반이 환곡을 모두 갚은 것을 놀랍게 생각했다.

군수가 몸소 찾아가서 양반을 위로하고,

또 환자를 갚게 된 사정을 물어보려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 양반이 벙거지를 쓰고 짧은 잠방이를 입고 길에 엎드려 '소인'이라고 자칭하며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지 않는가.

군수가 깜짝 놀라 내려가서 부축하고,

  "귀하는 어찌 이다지 스스로 낮추어 욕되게 하시는가요?"

하고 말했다.

양반은 더욱 황공해서 머리를 땅에 조아리고 엎드려 아뢴다.

  "황송하오이다. 소인이 감히 욕됨을 자청하는 것이 아니오라,

이미 제 양반을 팔아서 환곡을 갚았읍지요.

동리의 부자 사람이 양반이올습니다.

소인이 이제 다시 어떻게 전의 양반을 모칭(冒稱)해서 양반 행세를 하겠습니까?"

  군수는 감탄해서 말했다.

 

  "군자로구나 부자여! 양반이로구나 부자여!

부자이면서도 인색하지 않으니 의로운 일이요,

남의 어려움을 도와주니 어진 일이요,

비천한 것을 싫어하고 존귀한 것을 사모하니 지혜로운 일이다.

이야말로 진짜 양반이로구나.

그러나 사사로 팔고 사고서 증서를 해 두지 않으면 송사(訟事)의 꼬투리가 될 수 있다.

내가 너와 약속을 해서 군민(郡民)으로 증인을 삼고 증서를 만들어 미덥게 하되

본관이 마땅히 거기에 서명할 것이다."

 

  그리고 군수는 관부(官府)로 돌아가서

고을 안에 사족(士族) 및 농공상(農工商)들을 모두 불러 관정(官庭)에 모았다.

부자는 향소(鄕所)의 오른쪽에 서고, 양반은 공형(公兄)의 아래에 섰다.

  그리고 증서를 만들었다.

 

 건륭(乾隆) 10년 9월  일

 위에 명문(明文)은 양반을 팔아서 환곡을 갚은 것으로 그 값은 천 석이다.

  오직 이 양반은 여러 가지로 일컬어지나니, 글을 읽으면 가리켜 사(士)라 하고,

정치에 나아가면 대부(大夫)가 되고, 덕이 있으면 군자(君子)이다.

무반(武班)은 서쪽에 늘어서고 문반(文班)은 동쪽에 늘어서는데,

이것이 '양반'이니 너 좋을 대로 따를 것이다.

  야비한 일을 딱 끊고 옛을 본받고 뜻을 고상하게 할 것이며,

늘 오경(五更)만 되면 일어나 황(黃)에다 불을 당겨 등잔을 켜고

눈은 가만히 코끝을 보고 발꿈치를 궁둥이에 모으고 앉아

동래박의(東萊博義)를 얼음 위에 박 밀듯 왼다.

주림을 참고 추위를 견뎌 입으로 설궁(說窮)을 하지 아니하되,

고치·탄뇌(叩齒彈腦)를 하며 입안에서 침을 가늘게 내뿜어 연진(嚥津)을 한다.

소매자락으로 모자를 쓸어서 먼지를 털어 물결 무늬가 생겨나게 하고,

세수할 때 주먹을 비비지 말고, 양치질해서 입내를 내지 말고,

소리를 길게 뽑아서 여종을 부르며,

걸음을 느릿느릿 옮겨 신발을 땅에 끄은다.

그리고 고문진보(古文眞寶),

당시품휘(唐詩品彙)를 깨알같이 베껴 쓰되 한 줄에 백 자를 쓰며,

손에 돈을 만지지 말고, 쌀값을 묻지 말고, 더워도 버선을 벗지 말고,

밥을 먹을 때 맨상투로 밥상에 앉지 말고, 국을 먼저 훌쩍 훌쩍 떠먹지 말고,

무엇을 후루루 마시지 말고, 젓가락으로 방아를 찧지 말고, 생파를 먹지 말고,

막걸리를 들이켠 다음 수염을 쭈욱 빨지 말고, 담배를 피울 때 볼에 우물이 파이게 하지 말고,

화난다고 처를 두들기지 말고, 성내서 그릇을 내던지지 말고, 아이들에게 주먹질을 말고,

노복(奴僕)들을 야단쳐 죽이지 말고, 마소를 꾸짖되

그 판 주인까지 욕하지 말고, 아파도 무당을 부르지 말고,

제사 지낼 때 중을 청해다 재(齋)를 드리지 말고, 추워도 화로에 불을 쬐지 말고,

말할 때 이 사이로 침을 흘리지 말고, 소 잡는 일을 말고, 돈을 가지고 놀음을 말 것이다.

이와 같은 모든 품행이 양반에 어긋남이 있으면, 이 증서를 가지고 관(官)에 나와 변정할 것이다.

  성주(城主) 정선군수(旌善郡守) 화압(花押). 좌수(座首) 별감(別監) 증서(證書)

  이에 통인(通引)이 탁탁 인(印)을 찍어

그 소리가 엄고(嚴鼓) 소리와 마주치매 북두성(北斗星)이 종으로, 삼성(參星)이 횡으로 찍혀졌다.

  부자는 호장(戶長)이 증서를 읽는 것을 쭉 듣고 한참 머엉하니 있다가 말했다.

  "양반이라는 게 이것뿐입니까?

나는 양반이 신선같다고 들었는데 정말 이렇다면 너무 재미가 없는 걸요.

원하옵건대 무어 이익이 있도록 문서를 바꾸어 주옵소서."

 

  그래서 문서를 다시 작성했다.

  "하늘이 민(民)을 낳을 때 민을 넷으로 구분했다.

사민(四民) 가운데 가장 높은 것이 사(士)이니

이것이 곧 양반이다.

양반의 이익은 막대하니

농사도 안 짓고 장사도 않고 약간 문사(文史)를 섭렵해 가지고 크게는 문과(文科) 급제요,

작게는 진사(進士)가 되는 것이다.

문과의 홍패(紅牌)는 길이 2자 남짓한 것이지만 백물이 구비되어 있어 그야말로 돈자루인 것이다.

진사가 나이 서른에 처음 관직에 나가더라도 오히려 이름 있는 음관(蔭官)이 되고,

잘 되면 남행(南行)으로 큰 고을을 맡게 되어, 귀밑이 일산(日傘)의 바람에 희어지고,

배가 요령 소리에 커지며, 방에는 기생이 귀고리로 치장하고, 뜰에 곡식으로 학(鶴)을 기른다.

궁한 양반이 시골에 묻혀 있어도 무단(武斷)을 하여 이웃의 소를 끌어다

먼저 자기 땅을 갈고 마을의 일꾼을 잡아다 자기 논의 김을 맨들 누가 감히 나를 괄시하랴.

너희들 코에 잿물을 들이붓고 머리 끄덩을 희희 돌리고 수염을 낚아채더라도

누구 감히 원망하지 못할 것이다."

 

  부자는 증서를 중지시키고 혀를 내두르며

  "그만 두시오, 그만 두어. 맹랑하구먼. 나를 장차 도둑놈으로 만들 작정인가."

  하고 머리를 흔들고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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