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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란전(烏有蘭傳)

오늘의 쉼터 2009. 5. 6. 20:32
오유란전(烏有蘭傳)
 

세조 임금 때에 한양 땅에 두 재상이 있었으니,

한 재상의 성은 김씨요, 또 한 재상의 성은 이씨라 했다.

다같이 문벌의 집안으로 지체가 같았고, 덕망도 같아서 세교가 매우 두터웠다.

하루는 김재상이 이 재상을 보고 말했다.


"우리 두 집안 자식들의 생년일시가 똑 같으니,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올시다.

마땅히 같이 공부하게 해서 그 성취를 보면 어찌 우리들 만년의 낙이 아니겠소이까?"

"네, 그것은 정말 나의 뜻입니다."

하고는, 한칸 정사를 소제하여 한 스승 밑에 배우며 같이 자고 같이 먹게 하니, 이생도 서로 의좋게 지냈다.

그들은 생각하였다.

'남아의 공명은 조만간 반드시 이루어진다. 우리는 공적도 함께 세우고 기풍도 함께 닦자,

뜰 가운데의 꽃과 시냇가의 소나무와 같이 설사 빠르고 늦는 사이가 있더라도,

피차 서로 돌봐주고 사랑하며 잊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마음 먹고는 금석과 같이 우정을 맺고 정답게 지냈다.

학문은 해와 더불어 깊어졌으며 과거를 볼 수 있는 실력에 이르게 되었다.

갑자의 해를 당하여 나라에 큰 경사가 있었다. 당연한 일로 과거가 열렸다.

그들은 손을 서로 붙들고 과거장으로 들어가서 실력을 다 기울여 과제를 지어 올렸다.

이윽고 급제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데 한 사람은 장원급제를 하였고 한 사람은 진사급제를 했으니,

진사급제한 사람은 이생이요,

장원급제한 사람은 김생이었다.

김생은 젊은 수제로서 벼슬길을 밟아 자질에 따라 진급하여 평안감사를 제수받는 날에,

즉시 이생을 맞이하여 같이 가자는 뜻을 말하였더니 이생은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는 곧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근심하는 관방장이요,

나는 오직 성인과 현인을 사모하는 선비가 아닌가? 

맡은 일이 전혀 다르고 조심함이 같지 아니하니

이것으로 불가할 뿐만 아니라 또 평양은 옛날부터 번화하고도 호탕한 땅이므로 나의 돌아볼 곳이 아닐세."

  "번화한 것은 번화한 것이고 공부는 고부이거늘 형의 말은 매우 고루하네. 무슨 방해됨이 있겠나."
하고는 같이 소매를 붙잡고, 수레를 타고 바로 임지로 나아갔다.

  김생이 부임인사를 하고는 이튿날 아침에 특명으로 분부를 내려 깊숙하고 조용한 곳에 있는 별당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경서를 갖추어 놓게 하고서, 이생을 조용히 거처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이생도 번화한 일에는 뜻이 없어 생각은 글자 위에만 둘 뿐이었다.

  하루는 감사가 이생을 위하여 주연을 베풀고, 방자를 보내어 이생을 초대했다.

  "오늘은 바로 형이 급제하고 처음 맞는 날이니 시인으로서의 시상을 어찌 능히 폐할 수 있겠나? 

날씨가 따뜻하고 바람도 화창하여 친구에 대한 생각이 간절하니

형은 금옥 같은 귀한 몸을 아끼지 말고 한 번 찾아와서 성긴 우정을 펴봄이 어떠한가?"

  이생은 마음 속으로는 비록 뜻에 맞지 않았으나,

거절할 만한 이유가 없어서 책을 덮고 바로 통인을 따라 선화당으로 오니,

차려 놓은 음식은 처음 보는 이생의 눈을 놀라게 하였다. 

42주의 원님들이 좌우로 벌려 앉았고, 72명의 기녀들이 앞뒤에 모시고 앉아서,

금슬관현 등의 오음을 방안에서 연주하고 있으며, 금석포토 등의 팔음을 뜰에서 연주하고 있었다. 

술잔과 쟁반은 헝클어졌고 안주 그릇은 얼켜져 있었다.

  이생을 맞이하여 좌석에 정하고 인사를 겨우 마치고 나니,

좌우에 앉아 있던 기생들이 다투어 이생에게 술잔을 권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에 이생은 화를 불끈 내며 소매를 뿌리치고 갑자기 일어나,

  "오늘의 이 잔치는 실로 인간의 도리를 위한 것이 아니오."
하며, 물러가겠다고 했다.
감사가 소매를 붙잡고 웃으며,
  "형은 무엇 때문에 이렇듯이 상을 찡그리고 지나친 행동을 하는가?"
하며 누누이 타일렀으나, 끝내 만류시키지 못했다.

  이 날 잔치하는 자리에서 이생의 행동을 보고 누구나

그 지나친 고집에 대하여 빈정거리고 비웃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잔치가 파하자 감사는 수노에게 분부하였다.
  "기녀 가운데서 지혜롭고 쓸만한 자가 누구냐?"
  "오유란이올시다.  나이 19세로서 가르쳐 주지 아니하여도 잘 할 것입니다."
  즉시 오유란을 불러 분부하였다.
  "너는 별당의 이랑을 알고있느냐?"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네가 이랑을 모실 수 있겠느냐?"
  "하루 저녁으로는 할 수 없거니와 한 달 동안의 말미만 주신다면, 반드시 할 수 있겠습니다."
  "한 달 동안의 말미를 주고서 혹 성공하지 못할 때에는 죽여도 좋겠지?"
  "네, 그렇습니다."

  오유란이 분부를 듣고 물러나와서 붉고 푸른 기녀의 옷을 벗어 흰옷으로 갈아입고는 한 계집아이로 하여금

두어 필의 베를 가져오라 해서 작은 동이에 담고 짤막한 방망이를 가지고 앞뒷 길을 인도하게 하여 별당 앞에

있는 작은 연못가로 가서 얼굴을 가다듬고 맵시 있게 앉아 빨래를 하기 시작했다.

  때는 병인년 춘삼월 보름께였다.  이생은 별당에서 달을 바라 보며 홀로 앉아 있었다. 

꽃시절을 당하여 춘정이 없을 수 없어 시를 읊으며 섬돌 위를 거닐고 있는데 갑자기 바람편에 빨래하는

소리가 높았다 낮았다 하며 우명지로부터 들려왔다.

  전에 들어 보지 못한 소리인지라 의심이 나서 고개를 들고 사방을 바라보니, 풍경이 바야흐로 새롭고

물색은 사랑스러워졌다. 

은행나무 밑 석가산가에, 두어 자나 되는 은비늘이 마름 위에서 뛰놀고 있었고 한 둥근 금빛이 물결 위에서

둥실거리고 있는 그 가운데 어떤 한 미인이 앉아 있는데, 언뜻 보매, 말로만 들었던 양귀비가 되살아온 것

같았다.

  꽃은 얼굴이 되고 옥은 모습이 되어 한 송이 금련이 이슬을 머금고 바야흐로 터지려고 하는 것과 같았다.

눈썹은 꼬부라지고 뺨은 부풀어져 외롭게 둥근 흰 달과 같은데, 얼굴에는 빛이 비치고 있었다.

  이생이 한 번 돌아보고는 비록 정절을 지키고 있는 선비의 아들로서도 경국의 미색임을 가만히 탄복하며,

흘겨보는 눈초리로 정을 보내면서 바라보고,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이윽고 오유란이 엿보고 있음을 깨닫고서 몸을 번득여 일어나 가는데, 걸음걸이가 단정하고 우아하여

흡사 서시가 월나라 궁정 뜰을 걷는 것과 같아서 정말로 한 절대가인이었다.

  이러한 후로부터 혹은 오 일을 사이 두고, 혹은 삼 일을 사이 두고, 오유란은 언제나 전과 같은 모습을 하고,

그곳에 가서 앉아 돌아보기도 하고 엿보기도 하면서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듯이 하고 있었다.

  여기에 있어 고이한 것은 이생이 오유란을 한 번 보고 난 후로 방탕하여져서, 공부하는 마음을 멀리하고

한 번 보면 두 번 보고 싶고, 두 번 보면 세 번 보고 싶고, 네 번 다섯 번 봄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마음을

그 미인에게만 두었다.

결심이 풀어져서 공부를 하여도 힘쓸 줄을 모르고 밥을 먹어도 밥맛을 알지 못했다.

책을 덮고 홀로 앉아 실신한 듯이,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사는 것이 얼마나 되며, 그 즐거움이 또한 얼마나 되는고?"
하면서 길이 탄식하였다.

  이로부터 날짜를 헤아리며 그 여인을 기다리는데, 오유란은 일부러 가지를 않았다.

이생은 하루가 삼추와 같아 항상 마음이 불안하였다.

못가를 살펴보니 언덕은 고요하고, 길게 뻗어 있는 담머리에는 사람의 그림자를 찾아 볼 수 없었다.

이생은 인정의 박정함을 슬퍼할 뿐이었다.

여인이 오지 않으므로 인하여 머리를 싸매고 이불을 덮어쓰고 누웠으니

곡기와 물이 목에 내려가지 못한 지가 수일이 되었다.

  하루는 해가 지자마자 빨랫소리가 은은히 베갯머리에 들려 왔다.

이생은 한편으로 기쁘고 한편으로 바빠서, 아픈 몸을 억지로 일으켜 맨발로 허둥지둥 중문 밖에 나가

머리를 들어 살펴보니,

가슴에 품고 있는 그 여인이 은연히(은은히) 못가에 앉아 손에 방망이를 쥐고 눈으로 추파를 보내고

있지 아니한가!

  이생은 기다린 지 오래인지라, 남은 걸음 바쁜 듯이 발을 재촉하고 나아가 머뭇거리면서 말을 하고자

하다가도 말을 멈추기를 서너 번 하다가는 체면을 불구하고 맹호가 수풀에서 뛰쳐나오는 것과 같이 걸어가서

푸른 매가 꿩을 차가는 것과 같은 모양으로 다가섰다.

  오유란은 반은 놀라고 반은 의아하여 어리둥절하면서 부끄러운 듯이 몸을 일으켜 앵두 같은 입술을

반쯤 열고 말하는 것이었다.

  "남녀가 유별한데 이 무슨 일이오며, 백주 대로에 이 무슨 모양입니까?"
  이생은 턱을 어루만지며 기꺼운 듯이 말했다.
  "성은 무엇이고 이름은 누구시며, 누구집 따님이시고 어느 곳에 사십니까?"
  오유란은 반은 아리따운 태도를 머금고 반은 부끄러운 입술을 다물고 눈썹을 나직이 하고 대답했다.

  "소녀는 본시는 양가의 딸이었으나, 일찍이 어버이를 잃고 외사촌댁에서 자라났었지요.

겨우 비녀 찌를 나이에 이르러서, 서촌 장사랑한테로 시집갔사오나 명도가 궁박하여 시집 간 지 몇 달도

못 되어 남편을 잃고야 말았어요.

그러나 삼종의 예를 쫓을 길이 없어 다시 외사촌댁으로 와서 대나무를 짝하고 소나무를 벗삼으면서,

오직 정절만을 생각하고 지내온 지 이제 삼 년이 되었어요.

저의 나이는 십구 세옵고, 성은 오이며 유란이라고 부릅니다.

알지 못하겠사오나 존군은 어찌하여 물으시는지요?"

 

  이생은 과부가 되어 수절하고 있는 여자임을 알고서는 더욱 들뜨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말했다.

  "나는 본시 서울사람으로서 감사를 따라왔다가, 요사이는 이별당의 주인이 된 이랑이오.

내게 간절한 청이 있으니 낭자는 이 청을 마음 깊이 생각해 주기 바라오.

낭자가 일찍이 이 못가에 오매 이 사람의 마음에 큰 감동이 일어났거니와 낭자가 이 못가에서 종적을

감추매 이 사람의 마음에 깊은 수심이 피어났소이다.

낭자께서는 나를 알기는 오늘이 처음이나 내가 낭자를 보기는 이제 거의 한 달이 되었소.

원한을 머금고 병이 된 것은 이 누구의 탓이겠소?

내 이제 한마디로 딱 잘라 청할 터인즉 낭자도 딱 잘라 승낙 여부를 말씀해 주기 바라오."

  "옛말에 이르기를 말 한마디로 싸움을 일으키고, 한 마디로 화평을 시킬 수 있다고 하였으니,

말을 삼가지 않을 수 없으며, 듣는 사람도 또한 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들을 만하면 들을 수 있고 들을 수 없을 만하면 들을 수 없으니,

듣고 아니 듣고는 저에게 있사오니 존군은 말씀해 보소서."

  이생은 손바닥을 부비면서 한숨을 크게 쉬고 말했다.

  "나는 청춘이요 낭자도 또한 청춘입니다.

청춘으로서 청춘을 사모하여 심신에 병이 되었으니, 부디 마음을 허락해 주기 바라오.

내 병이 심히 깊으니 부디 나를 가련히 여겨 주시오 인명이 지중함을 낭자도 알 것이오."

  오유란이 잠깐 돌아보고 생긋 웃으며 말했다.

  "인명이 중하다 함은 미천한 몸도 잘 알지마는 여인에게는 목숨보다 정절이 중하다는 가르침도

이 귀에 쟁쟁합니다.

미천한 몸이 정절을 고집하여 인색함을 일삼으려 하는 것은 아니고....

부득이한 사정이 있어 두 낭군을 섬기지 못하겠사오니

부디 마음을 돌리시고 귀하신 몸을 보중하옵소서."

  "부득이한 사정이 무엇이오?"

  "존군은 서울의 귀족이요,

일시의 호걸이옵고 소녀는 지방의 미천한 여자로서 백 년의 해로를 마음에 맹세했다가,

하루 저녁에 바람이 불어 꽃이 시들어진 후면 반생 동안의 깨끗한 몸이 더러워지고,

흰 옥이 물들어 버린 수치를 말하기조차 추라고, 뉘우친들 어찌 미칠 수가 있겠습니까?

거울은 가시는 밝아지지 않을 것이며, 상중의 시한 마음대로 논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생은 웃으며 말했다.

  "그 무슨 말씀입니까? 내 금석같이 기약할 수 있으며 일월을 두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낭자께서는 이미 정절의 마음이 있고, 나 또한 뜻 있는 선비올시다.

우리 두 사람의 마음을 우리 두 사람이 서로 화합하고 한마음으로 서로 맹세한 후면

나의 뜻을 앗을 수 없을 것이요 낭자의 마음도 또한 더욱 굳어질 것입니다."

하고는 손목을 잡고 이끌었다.

  오유란은 즐거워하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싫은 빛은 없었다.

별당으로 같이 들어가서 밤이 이슥한 다음 잠자리에 드니,

공작이 붉은 하늘에서 날고, 원앙이 푸른 물에서 노는 것과 같았다.

  이러한 후로 오유란은 날마다 어두워서 와 가지고 어둠을 따라 돌아가니,

혹 바깥 사람이 알까 봐 두려워하는 것과 같았다.

이생은 이미 그 아리따운 얼굴에 도취되고 또 그 민첩한 행동을 기특히 여겨

스스로 신정(新情)이 미흡하다고 여겼다.

기특하다, 오유란이 사람을 선선히 유혹함이여!

  감사는 그 전후의 동정을 탐지하고 비밀히 분부를 내려 걸음을 잘 걷는 자를 골라서 편지 한 장을 가지고

서울로 올라 가다가, 모처에 머물러 있다가 여차여차 하라고 하였다.

또 편지 한 장을 써서는 한 노복을 주며,

  "내일 모시에 여차여차 하라." 고 했다.

 

  이튿날 아침 한 동자로 하여금 별당에 가서 전갈하라 하면서 말했다.

  "요사이 기체 어떠신가? 공부에 더욱 힘쓰고 있는지?

봄새는 남쪽을 그리워하고 가을 말은  북쪽을 싫어하는데 객회가 울적함은 피차가 일반이라.

형이 걷는 책 속의 길은 너무도 멀고 아득한 길이니

오늘은 잠시 눈을 돌려 친구와 함께 옛정을 되새겨 보는 게 어떤가?"

  이생은 이미 전일의 이생이 아니었다. 날씨가 화창하고 호탕한 흥취가 넘쳤다.

한 번 친구끼리 서로 만나 달이 넘도록 막힌 정회를 펴 보리라 마음먹고는,

즉시 선화당으로 가서 서로 인사를 나누니 감사는 이생을 위로하며 말했다.

  "형은 공부하기에 과로하였던가? 식음이 달지 아니하였던가? 요사이 얼굴이 어찌 그리 수척해졌는고?"

  "객이 된 사람으로서 자연 생각이 많아 그러하겠지."

 

  이윽고 밥과 술을 가지고 왔다. 갑자기 삼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려 왔다.
  감사가 그 까닭을 물어 보라하니, 한 노복이 서울에서 급보를 가지고 왔다고 했다.
  즉시 불러들이게 하니 부복하고 한 봉서를 올렸다.

  이생이 객중에서 바쁜 손으로 열어 본즉 이재상의 환후가 조석으로 시급하다는 사연이었다.

이생의 안색이 별안간 변해지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감사는 슬픈 듯이 위로의 말을 했다.

 "연세도 젊으시고 옥체도 건강하시온대 어찌 그리 빨리 돌아가시게 되었을까?"
 하고는, 급히 노복으로 하여금 좋은 말을 골라 떠날 준비를 해 주었다.
 행구가 갖추어지자 감사는 이생을 말에 오르라 하고는 말했다.
 "부디 몸조심 하게."

 이생은 주저하고 떠나기 싫어하는 듯 하면서 말을 하려고 하다가도 차마 못했다.

뜻이 있는 것 같았으나 말을 하지 않고 벅찬 가슴을 누를 수 없어 눈물을 떨어뜨렸다.

실은 오유란을 위하여 작별의 말을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어서 그러한 것이었으나,

보는 사람들은 사람의 자식된 도리로 보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말을 몰아 채찍을 두르며 대동강을 건너서면서부터 만수와 천산은 아득하여 수심을 돕고,

장정과 단정은 그윽하고 멀어서 슬픔을 더했다.

병점과 주점이 많음이 없지 아니하였지만, 먹어도 스스로 단 줄을 모르고, 노류장화로 지나지 아니하였지만,

먹어도 스스로 단 줄을 모르고, 노류장화로 지나지 아니함이 없었건만 자위코자 하는 마음이 없었다.

전진하면서 가는 길에 밤낮으로 걷다가 피로하면 쉬고 하였다.

 하룻밤 자고는 봉강을 지나고 이틀밤 자고는 개성을 지났다. 사흘밤 자고는 양철평에 다다르니,

산천은 옛과 같으며 물색도 다름이 없었다. 해는 이미 기울어졌고 마음은 조마조마하였다.

이때 어떤 건강한 노복이 화살과 같이 나는 듯이 앞을 향하여 와서는 길왼쪽에서 절을 하며 물었다.

 "행차는 어느 곳에서 출발하였으며 장차 누구의 댁으로 가십니까?"
 종녀석은 서울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다 보다 의심하고 주저하면서 대답했다.
 "평양감영으로부터 서울 이승상댁을 향하여 가거니와 어찌하여 묻습니까?"

 이에 그 노복은 꿇어앉아 편지 한 장을 올렸다.

이생은 말 위에서 뜯어 보니 곧 본집에서 온 편지로서 부친의 병환이 완쾌하여 뜻하지 않았던 경사이나,

꺼리는 일이 있으니 집에 들어오지 말고 바깥으로부터 도로 돌아가라는 사연인데 친교가 매우 엄하였다.

 이생은 이미 기쁜 소식을 듣자 실로 만행이라 여기고,

또 되돌아가라는 가르침은 더욱 다시 없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며 편지의 뜻을 종들에게 알리고는

즉시 말을 돌리라고 명령하였다. 이생은 즐거운 듯이 마부에게 분부하기를,

 "채찍을 휘둘러 말을 달리되, 다른 생각은 말고 빨리 가기만을 생각하라." 고 했다.
 

 마부는 곧 채찍을 휘둘러 말을 재촉하는 척하였다.

그러나 이미 은밀히 지시 받은 것이 있는 마부는 교묘하게 눈속임을 하여 말을 도리어 지체 시켰다.

 이생은 말이 잘 달리지 않음을 보고 괴이쩍게 여겨 마부를 바꾸라고 호령하면서 몰아치기를 마지 않았다.

빨리 가고자 하나 방법이 없었다.

노상에서 오래 머무르면서 여러 날을 헛되이 보냈다.

일순이 지난 후에야 겨우 영제교를 건넜다.

차차 긴 숲속으로 들어가니 풍경은 어제와 같은데 생각은 새로웠다.

 오호라, 괴이하다.

수풀 밑 길 왼쪽에 한 새로운 무덤이 우뚝한 봉우리를 이루고 있는데 길에서도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있었다,

이생은 그 어제 없던 것이 오늘 있음을 괴이하게 여겨 말을 멈추고는 마부를 보고 말했다.

 "아침의 이슬은 마르기 쉽고 사람의 일은 헤아릴 수 없도다.

어떠한 사람이 별안간 죽어서 이 큰길 옆에다 묻었을까?"

 때마침 이삼 명의 초동이 노래를 부르면서 지나갔다. 이생은 초등을 불러 물어 보았다.
 "저기 있는 새 무덤을 너희들이 혹 기억하고 있느냐?"
 초동들은 머리를 긁으며 얼굴을 돌리고 한참 있다가 대답했다.
 "일인즉 비참하고, 말할 것 같으면 슬픈 사연이니 처음부터 즐겨 말 할 것이 못됩니다."
 이생은 이야기해 보라거니, 초동들은 말 못하겠다거니 실랑이를 하다가, 초동들은 마지 못하는 듯이 말했다.

 "이 성중에 천하에서 제일 가는 수절하고 있는 열녀가 있었지요?

삼 년을 과부가 되어 살았으나 곧은 마음은 백 년이 하루 같았답니다.

신사또가 부임한 후 별당에서 거처하고 있는 객으로서,

천하의 무도하고 호래자식인 이가란 자는 감히 도적놈의 마음을 품고 가만히 행실을 팔기를

짐승의 행동과 같이 했답니다.

그 처음 친함에 있어서는 백년가약으로서 유혹하고는 그 뒤 헤어짐에 있어서는 일언반구의 말조차 아끼고

나눔이 없었으니,

그것을 사람이라고 한다면 누구인들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이럼으로써 그 과부는 정심을 품고 죽었답니다

한때의 사랑을 한하고 반생의 원한을 품고 식음을 물리치니 날로 쇠하고 시시로 말라가서 백약이 무효하고

죽음에 임하여 유언하기를 '나를 유혹한 사람도 이랑이옵고 나를 병들게 한 사람도 이랑이옵니다.

그러하오나 나는 살아서 이미 이씨의 사람이 되었거니와 죽어도 또한 이씨의 혼이 될 것입니다.

이씨는 서울의 거족으로 조만간에 반드시 등룡할 것이며 벼슬을 제수받아 여기를 지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나를 여기에다 묻어 두고서 이랑으로 하여금 거칠은 무덤을 한 번이라도 돌보게 해 준다면

어찌 황천에서도 외로운 넋의 영광이 아니겠습니까'하는 뜻을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써가지고

세상에 남겨 놓았었지요.

이웃 사람들이 불쌍히 여겨 여기에다 묻고 그 소원을 풀어 주거니와, 행차는 어찌하여 물어 보십니까?"

 이생은 원래 유정한 사람이라 정신을 잃고 마음과 창자가 끊어지고 찢어지는 것과 같아서,

스스로 슬픔을 금하지 못하고 거의 미친 사람과 같았고 취함 사람의 모양과 같았다.

 말에서 내려 상점으로 들어가 즉시 한 노복으로 하여금 성중으로 들어가서 술과 과일을 사오게 했다.

그리고 한 제문을 지은 후에 몸을 무덤에 던지고 엄숙히 종이를 불사르면서 운감하기를 청하지

그 제문은 이러하였다.

 '유세차 병인사월 을축삭 삼십일 갑오에 한양의 정인 이랑은 변변치 못한 주찬을 삼가 차려놓고

두어 줄의 제문을 이어 가지고, 한을 머금고 기성의 절부, 고오유란낭자 영혼 앞에 고결의 말씀을 사뢰나이다.

 오호 슬프고도 원통합니다.

부창부화는 백년의 가약을 지켜나가기 위함이요,

부생모육은 저버리기 어려운 망극한 은혜입니다.

우리들의 아름다운 인연이 겨우 정해지려고 할 때 친환의 급보를 어찌하리이까?

서산의 해가 기울어지려고 함에 있어서 오직 어버이를 섬길 날이 적음을 생각하였을 뿐 동상의 가약을 맺음에 있어 거문고 줄의 끊어질 때가 그렇게도 빨리 닥쳐 오리라는 것을 어찌 생각하였겠습니까?

작별의 말을 전하고자 하다가 전하지 못하였음은 사세가 그렇게 되어서 그러하였습니다.

그러하오나 증로에서 뒤돌아서면서 즐거움을 화려한 휘장 속에다 두었으며, 긴 숲을 지나 다리를 건넌 후로는 희망을 별당에다 두었더니 어찌 이리도 천리는 믿기 어렵고 인사는 어그러짐이 많은지요?

꽃은 갑자기 뜰 앞에 떨어지고 옥은 이미 방안에서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가기가 막히고 말았으니 청한이 홀로 날음을 상심하고 고혼이 원한을 품게 되었으니 단봉이 울음 잃었음을 애석히 여길 뿐입니다.

달밤에 두견의 울음과 봄바람에 호접의 꿈은 천겁토록 이미 헛되고 말았으며 다시는 같이 만나 놀 수 없게 되거 말았습니다.

순탄하지 못한 인생을 스스로 불쌍히 여기고 봄이 늦게 찾아온 것을 하나지 않습니다.

창자는 비록 끊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정은 끊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살아서 이미 날 따랐으니 몰하였어도 또한 나를 따르겠지요?

낭자의 평생에 있어서 모든 범절이 남과 아주 달랐으니 만일 저승에서 나의 뜻을 알아줌이 있다면 돌보시와

황천에서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도록 하여 주신다면 조랑의 지정에 감동하여 애랑의 전연을 이으겠습니다.

 글은 말을 다할 수 없고 말은 뜻을 다할 수 없사오니 오호 슬프오이다.'

 한 구절을 읽을 때마다 소리를 삼키면서 흐느꼈다.

고하기를 마침에 무덤을 치며 소리를 내어 크게 우니 숨이 세 번이나 막히었다.

노복은 안타까이 여겨 손으로 붙들어 일으키면서 말했다.

 "일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한갓 상심만 더할 뿐이오니 몸 조심하시고 좀 진정하십시오."
 이생은 흐느껴 울면서 목쉰 소리로 말했다.

 "너야 어찌 알겠느냐? 내 이 사람에 있어서 비록 육례는 갖추지 못하였으나 일찍 백년해로의 약속은 있었으니

나로 인하여 병이 들었어도 약 한 첩 보내지 못하였고, 나로 인하여 주었어도 장례에 참예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으며 어찌 슬프지 않겠느냐?

곡은 저를 위함이 아니고 나는 사사를 위함이다.

사사는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저의 정에 있나니,

정과 사가 서로 얽히고서 누군들 이와같지 않겠느냐?

나 아니고서 네가 당했다고 하면 어찌 능히 홀로 그렇지 아니하겠는가?"

하고는 소매를 들어 눈물을 닦고 물을 떠서 얼굴을 씻고는 마부에 기대어 말에 올라 선화당으로 돌아갔다.
 감사는 바삐 나와 맞이하면 놀란 듯이 이생을 보고 물었다.
 "춘부장의 병환은 어떠하오며 갔다가 돌아오기가 어찌 이같이 빠른가?"
 이생은 소매 속에서 가서를 내어 보이며 말했다.
 "친환이 완쾌하시고 또 교회가 이와같기로 마지 못하여 돌아왔네."

 "형이 길을 떠난 후로부터 즐거운 밤이 불안했는데, 이는 실로 안후 듣기를 원한 바 있었으니 만행일세.

그런데 형의 얼굴이 어찌 그리 수척한가?"

 "급보가 온 이래로 여러 날을 길에 있었으므로 자연 먹어도 맛을 모르고 잠을 자도 편치를 못하여 그러하겠지."
 "이것은 한때의 액회를 다시는 깊이 근심하지 말고 공부에 더욱 힘을 써서 속히 어버이를 영화롭게 해 드리게."
하고는 술상을 가져오라 했다.
 술이 한 순배 돌기도 전에 이생은 몸이 피곤함을 핑계하고는 이전에 거처하던 별당으로 물러가 보니 나나니가 집을 지었고 발이 긴 거미와 흙벌레들이 방안에 있어 매우 거칠어 사람은 볼수 없고, 오직 뜰안에 꽃이 바야흐로 피어서 웃음으로 사람을 맞이하고, 섬돌의 풀은 이슬을 머금고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을 더하게 하는 것만 보일 뿐이었다. 주인은 다시 왔건만 미인은 어디에 갔는지 오직 초당만이 우뚝이 홀로 남아 있다. 먼지를 쓸고 누우니 만사에 부심하고 오장이 끊어져서 온갖 병이 얽히어졌다. 오래지 않아 반드시 죽으리라는 것을 스스로 알았다.
 마침 달밝은 저녁을 당하여 깊이 신음하고 깊이 탄식하며 전전반측하고 있는데, 갑자기 담밖에서 곡성이 들려오는 것이었다. 가만히 듣자니 끊어질 듯 이어지는 소리가 마디마디 슬프고 아프며 몹시 원망하는 듯도 하고 애절히 호소하는 듯도 하였다.
이생은 괴이히 여겨 아픈 몸을 부축하고 급히 일어나 옷을 잡으며 창을 열고 머리를 들어 살펴보았다. 달빛이 훤하고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어른하는데, 마음에 품고 있는 바로 그 여인이 연한 화장을 하고 흰옷을 입고서 짧은 담에 기대어 슬픈 울음과 원망의 말로 지나간 일을 홀로 되뇌는데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에 반은 믿을 수 있고 반은 의심이 나고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놀라와서 엎어지고 자빠지며 나아가서 손목을 잡고 말했다.
 "이게 꿈이오 생시오? 낭자는 누구요? 나는 기억이 나지 않거니와 어찌 원망과 사모의 정이 간절하기로 나를 이같이 느끼게 하시나요? 정말로 낭자일진댄 어찌 정례가 식어서 이같이 나를 멀리 하십니까?"
 "저는 오유란입니다. 낭군님은 어제 성문 밖의 무덤을 보지 아니하였습니까? 한 글월의 고결이 낭군님에게 있어서는 간절한 정의에서 나왔겠지마는 저에게 있어서는 어찌 영총이 아니겠어요? 썩은 뼈에 장차 살이 붙고 외로운 혼이 다시 사랑을 찾게 되면 사례를 하옵고 또
낭군님이 생각해 주시는 데 대하여 보답하고자 하옵니다만 이미 저승에 있는 몸이오니 실로 슬픈 일입니다. 다만 낭군님이 들으시고 저의 마음을 알아 주시기만 바랄 뿐이옵니다."
 이생은 자못 그 뜻을 알아차리고는 지성으로 타이르며,
 "이승과 저승의 길이 달라 사람들이 비록 꺼리는 바이나 정사가 간절하기로 나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고는 소매를 끌고 별당으로 들어갔다.
 소식을 들음이 급함과 가약을 어기게 된 이유를 자세히 이야기하고는 병이 들어 괴로와한 것과 몸이 마친 절개에 대한 사례를 하니 오유란은 눈물을 거두고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저는 본래 비천한 사람으로서 일찍 짝을 잃었으나, 삼정을 잘 배워 한 마음을 굳게 먹고 있다가 군자를 뜻밖에 만나 사랑을 받고서 탁문군의 흥취를 돋우고 오직 예양의 정열을 사모하면서 비록 조강의 처는 아니오나 길이 낭군니을 모시고자 하였더니 어찌 된 일인지 좋은 일에 마가 많아 가기가 막히고 낭군님께서는 홀연 만리 길에 오르시고 말았던 것입니다. 제가 스스로 일신을 돌아보니 같이 살고 같이 죽으려고 하였던 그 말을 실천할 수 없고 일월을 두고 맹세했으나, 그 맹세를 좇을 수 없었어요, 작별한다는 말도 없었고 가시는 것도 몰랐던 까닭으로 이로 인하여 병에 걸리고 위중하여 실성하니 존재 없는 목숨이나마 불쌍하였습니다. 삶의 평안을 꾀하기를 알지 못함이 아니었읍니다만, 평생에 부끄러운 일이 많아 도리어 세상을 저버리는 것이 빠름을 알지 못하였어요. 구슬이 깨어지는 것을 달게 여기고, 구슬을 묻어 버리기로 뜻을 결정하고 보니 마치 나는 모기가 등을 치는 것과 같고 어린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는 것과 같았습니다. 비록 목숨을 받음이 짦음을 알았으나 어찌 낭군님으로 말미암은 깊이 원한이 없었으리이까? 목이 메일 뿐입니다."
 이생은 오유란을 위로하며 말했다.
 "낭자는 실로 하늘이 나에게 주신 인연이었으므로 비록 유명이 달라졌어도 하늘이 다시 상봉을 허락한 줄로 아오. 상봉이 허락된 이상 우리들의 즐거움도 허락될 것이 아니겠소?"
하고는 같이 잠자리에 드니 이불 속의 즐거움은 의심없이 그 옛날과 꼭 같았다. 이생은 팔을 베어주고 뺨을 맞대고 기쁨에 넘치는 정다운 말을 속삭였다.
 "낭자는 이르기를 죽었다 하고 나는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유명간의 회합에 있어서 살찐 살결의 포동포동함과 애틋한 정의 은근함은 옛날에 비하여도 지금과 같고 조금도 차이가 없으니 나로서는 유명이 달라졌음을 인정하기가 싫소이다."
 이윽고 북두칠성이 서쪽으로 기울어지고 새벽 종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오유란은 베개를 밀치고 일어나 옷을 입고 눈물을 뿌려 작별을 하면 말했다.
 "우리들의 사랑은 이로부터 좀 멀어질 것입니다."
 "오심이 어찌하여 더디었으며 또 정이 떨어진다는 말은 어찌 차마 그렇게도 빨리하오."
 "신도는 상도에서 어긋남이 많아 행적이 뜻과 같이 되지 아니합니다."
 "그 무슨 말씀이며 그 무슨 정입니까?"
하며 이생은 다시 오유란의 옷자락을 잡고 후에 다시 만날 수 있는가를 묻고 또 물으면서 맹세코 놓지를 않았다.
 오유란은 쳐다보며 소리를 나직이 하고,
 "낭군님의 유정함이 이에 이르렀는데 제가 어찌 무정하겠습니까? 삼가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
고 했다.
 이러한 후로부터 오유란은 매양 해가 어두워지면 왔다가 새벽닭이 울면 돌아가곤 하니 서로 떨어지기 어려워하는 정을 다시 새로워지고 흡족해졌다.
 하루는 저녁에 이생이 한숨을 후유 쉬고 탄식하면서 말했다.
 "낭자가 빨리 왔다 빨리 감은 실로 재미있고 즐거운 일이 아니며 같이 살고 같이 묻히자는 맹세는 도대체 어디에 있소? 한 번 태어났다가 한번 죽는 것을 나만이 홀로 부끄러워 여기하겠소. 바라건대 나도 죽어서 모름지기 낭자와 더불어 같이 갔다가 같이 오는 것이 어찌 좋은 뜻이 아니오?"
 오유란은 놀라고 두려워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낭군님이여. 낭군님이여! 그 무슨 말씀이오니까? 제가 가장 천한 몸으로서 죽은 것도 족히 슬퍼할 것이 못 되오며 또 이미 지나간 일이온데 낭군님은 존귀하신 몸으로 부모님이 살아 계시므로 마땅히 자중하고 자애하셔야 할 것이어늘 어찌하여 경솔히도 그와 같은 생각을 하시니 정말 황공하옵니다."
 "내 부모에 대하여 이미 불초한 자식이 되어 근심을 끼친 일이 많으며 한번 죽는 것은 또한 이치에 당연하므로 피할 수 없습니다. 공자같은 덕으로도 백어의 참사라 있었으며 인자같은 어짊으로도 이모의 요절이 있었으니 하물며 나는 아무것도 비교할 만한 것이 없는데 무엇을 족히 애석하게 여길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꺼리는 것이 부친의 병환이 나으신 이때에 내가 죽었다고 부모님들이 통곡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근심하지 마옵소서, 저에게 한 묘리가 있사오니 그러한 말씀은 다시 입밖에 내지 마십시오."
 "묘리란 어떠한 것인가요?"
 오유란은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고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손으로 이생의 팔을 잡고 여러 번 말을 하려고 하다가는, 마침내 마지 못하여 대답을 했다.
 "사람의 병자와 사자는 분명히 구별할 수 있지마는, 아픈 상태는 글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제가 낭군님을 대접하는 방법이 다른 사람과는 같지 아니합니다. 비록 병이 들었더라도 아프지 아니하고, 비록 죽었더라도 살아 있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어서 정신도 그대로 있고 지각도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방법으로써 잘 주선하여 끝없는 즐거움을 꾀하는 것이 내가 실로 원하는 바이온데, 낭자는 어찌하여 꺼리지요?"
"가르쳐 주시는 뜻이 이와 같으니 그러면 오늘 저녁을 당하여 시험해 보겠습니다만 한번 저를 따라 하룻밤만 지내고 나면 나타날 것입니다."
이튿날 새벽에 오유란은 먼저 일어나 베갯머리에 앉아 머리를 풀어 헤치고 눈물을 짜고 깊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이고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인데, 어제는 옳고 오늘은 글렀던가? 정신도 초롱초롱하고 심신도 그대로 있어서 조금도 차이가 없으나 다만 조용히 한잠 잤을 뿐인데 낭자는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슬퍼하고 있소?"
"낭군님은 믿지 아니하십니까? 제가 말한 묘리는 바로 이것입니다. 아직은 떠들거나 시끄럽게 하지 않는 것이 좋겠어요."
하고는, 자리를 남쪽 벽 밑으로 옮겨 앉아서 동정을 살피니, 동방은 이미 밝았고 붉은 해가 피를 쏟고 있었다. 붉은 벽 밖에 수상한 사람들의 그림자가 있어 가까이 서서 말했다.
"불쌍하도다 청춘이여! 슬프도다 부모들이여! 아깝도다 문벌이여! 원통하도다 객사함이여!"
하더니, 수명의 노복들이 문을 열고 들여다보고 나서, 어떤 놈은 베를, 어떤 놈은 나무를 다스리곤 하다가 우루루 쫓아 나서, 번쩍 하는 사이에 시체를 관에다 넣는 시늉을 하고 땅땅거리면서 뚜껑을 덮고 나갔다.
이생은 눈을 살며시 감고 하는 것을 다 보고는 비로소 몸이 죽었는가 의심하고서, 슬픈 표정으로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중얼거렸다.
"사람의 목숨은 어찌 그리 쉽게 죽는고. 내 삶은 천지로부터 받아 가지고 부모가 있어도 자식된 도리를 다 못하고, 친척이 있어도 화목을 돈독히 하는 줄을 알지 못하였으니 살았을 때에도 이미 사람 사는 곳에서 불량한 사람이 되었고, 죽어도 또한 지하에 가서 처벌이 있을 것이로다."
하면서 스스로 슬픔을 금치 못하니, 흐르는 눈물은 비가 쏟아지는 것과 같았다. 옛말에 하였으되,
'새는 죽으려고 할 때에 그 울음이 슬프고, 사람은 죽으려고 할 때에 그 말이 착하다,'
고 한 말은, 실로 헛된 말이 아니었던가 보다.
이 생을 감쪽같이 속이는 것이 속으로 미안하긴 하였으나 오유란은 이날부터 수시로 출입하였다. 혹은 낮에도 자며 즐거워하고 혹은 밤에 술 마시며 이야기하기에 밤 가는 줄도 모르고 도취하니 즐거움은 미진하였고 사랑은 무궁하였다.
이생은 자득한 듯이 희언을 오유란에게 보내며 말했다.
"낭자의 묘술로 능히 나로 하여금 목숨을 좋이 마치게 하여 주오. 목숨을 마치는 것은 오복의 하나라 감사하여 마지 않겠소."
오유란은 대꾸를 하지 않았다. 오유란은 본시 민첩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자주 배 고프고 목마른가를 물으며, 때때로 좋은 음식을 갖다 대접했다. 이생은 그러한 좋은 음식을 가지고 오는데 대하여 감탄하면서 말했다.
"거기에도 또한 묘방이 있는 것 같은데, 그 묘방은 어떠한 것이요?"
"토식이라는 것이지요"
"토식이라 이르는 것은 어떠한 것이요?"
"능히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좋아하지 아니하니 나로 하여금 한번 보게 해주는 것이 어떠하오?"
" 보고 싶고 알고 싶으시면, 택일할 필요없이 오늘 아침에 낭군님과 더불어 같이 가 봅시다."
이생은 좋아하고 관을 챙겨 쓰고 옷을 털어 입고는 곧 나서려고 했다.
때는 오월이라 날씨가 매우 더웠다. 오유란은 옆에 섰다가 침을 뱉고 웃으면서 말했다.
"이같이 더운 날씨에 의관은 무엇 때문에 하십니까?"
"큰 길에 나서면 여러 사람이 보고 손가락질 할 것이며, 내 무뢰배가 아닌 이상 더벅머리에다 관을 쓰지 않는 것이 어찌 옳다고 말할 수 있소?"
"낭군님의 불통함은 어찌하여 그렇게 고지식하십니까? 살았을 때와 죽었을 때의 몸도 구별하지 못하고 공연한 조심만을 일삼으시는군요. 사람은 우리를 볼 수 없지만 우리는 볼 수 있고, 사람들은 우리의 말을 들을 수 없지만 우리는 들을 수 있습니다. 소리가 없고 냄새가 없는 것은 하늘이며, 귀신의 도는 공허하고 형체도 없고 자취도 없는 것은 음양이온데, 낭군님과 저의 처신에 있어서는 돌아보고 꺼리어 할 바가 무엇이 있으며, 꾸미거나 차릴 필요가 무엇이 있어요?"
"사람들은 비록 보지 못한다 할지라도 나로서는 어찌 마음에 부끄럽지 아니하겠소? 그러나 자취가 없다는 마을 들으니 저으기 마음이 놓이는군?"
하며 가벼운 홑옷을 입고, 오유란의 손을 붙들고 문을 나가면서 자기몸을 돌보고 혹 사람이 알아볼까 두려워하니 걸음걸이는 인어가 해막을 엿보는 것과 같고 마음은 꾀꼬리의 집이 바람 부는 가지에 걸려 있는 것과 같았다.
어느덧 저자 있는 곳을 지나 이방의 집으로 갔다. 삼사리를 지나는 동안 이미 수천 명의 어깨를 스치고 팔을 치는 자가 많았으나, 한결같이 보거나 아는 시늉을 하는 자는 없었다.
때에 이방이 집에 돌아와 아침을 먹고 있었다. 오유란은 먼저 방문 밖에 가서 이생을 돌아보며 말했다.
"낭군님은 여기에 머물러 있다가 가만히 보세요."
하고는 바로 들어가서 밥상을 대하나, 사람들은 깨닫거나 알지 못하는 체 했다. 왼손으로 뺨을 한번 치고 오른손으로 가슴을 세 번 치니, 이방은 갑자기 젓가락을 떨어뜨리고 양손으로 가슴을 안으며 침을 흘리고 눈을 두리번거리면서 아프다고 대구대굴 거리는 것이었다. 그러자 온집안이 발칵 뒤집혀 버렸다. 큰아들, 둘째딸 아내와 첩들이 손을 모아 주물러 구하고는, 부랴부랴 장가란 무당을 찾아가 물어보고, 다시 오가란 장님을 찾아가 물어 보았으나 다 그대로 두면 죽는다고 하며, 원통하게 죽은 남자귀신과 여자 귀신이 서로 짜고는 앞서면서 따르면서 와 가지고 일시에 달려 들었으니 술과 밥을 성대히 차려놓고 귀신을 불러 배부르게 먹이면 괜찮을 것이라고 했다. 이에 점장이의 말을 시험해 보기 위하여 먹을 사고 술을 받고 양고기를 삶고 굽고 해서, 뜰가운데 자리를 펴고 음식을 낭자하게 차려 놓았다. 오유란은 이것을 보고 이생에게,
"묘방은 바로 이것이랍니다"
하고는, 이생의 손목을 끌어다가 술을 마시게 했다. 이생은 굳게 사양하였으나, 할 수없이 조금 마시고는 젓가락을 놓았다. 오유란은 마른 고기를 싸면서
"후일의 양식으로 삼읍시다"
하고는 보자기에 싸고 자루에 넣어 가지고 사나이는 지고 계집은 이고 하여 별당으로 돌아왔다.
이생은 배를 어루만지고 쉰 냄새를 토하면서 말했다.
"오늘 일은 참 묘하군. 내가 전세에 있어서 굳게 귀신의 설을 믿지 아니하였다가, 오늘에서야 유명의 다름을 겪어 보았소. 알고 보니 무당 농락하기는 손바닥 뒤집기 보다 쉽군 그래."
수일 후에 오유란은 또 물었다.
"낭군님은 한번 포식해 보고 싶은 뜻이 없습니까?"
"뜻이 있지"
"여염집 사이에 동서로 다니며 함부로 빼앗아 먹는 것은 매우 잔인할 뿐더러 고상하지 못합니다. 이번에는 사또한테 가서 빼앗아 먹고 싶으나, 낭군님의 뜻은 어떠하신지요."
"그게 무슨 말이요. 그와 나의 사이는 일찍부터 형제와 같은 정의가 있었는데 내 비록 십순에 구식을 하는 일이 있더라도 어찌 차마 빼앗아 먹겠소? 다시 다른 곳을 찾아 보시오."
"의리를 가지고 의리를 가지고 말씀하십니까? 정의를 가지고 말씀하십니까? 가령 낭군님이 살아 있었을 때에 사또한테 얻어 먹은 것이 정의가 깊어져서 그러하십니까? 인정이 많아서 그러하십니까? 저는 매우 친밀하였습니다. 그래서 살았을 때나 죽었을 때나 조금도 멀리함이 없으니, 이제 한번쯤 음식을 빼앗아 먹는데 대하여 무슨 꺼릴 것이 있겠어요?
"낭자의 말이 옳소!"
이에 오유란은 홑치마만 걸치고 일어나면서 말했다.
 "날이 더워 염려할 여지가 없습니다. 낭군님은 이미 시험해 보았거니와 사람이 누가 봅디까요?"
 이생은 고개를 끄덕이고 알몸으로 문을 나서니 행동이 어수룩하고 모습이 초라했다. 축 늘어진 금경은 두 방울 사이에서 끄덕끄덕하고 주먹의 반만한 동주는 양다리 사이에서 달랑달랑하니 대낮에 보는 사람 쳐놓고 누구나 웃지 않을 수 없었지만, 엄중한 명령하에 감히 지껄이지 못했다.
 그러한 모습을 하고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사문을 걸어서 지나갔다. 즉시 선화당 대청 위로 올라가서, 오유란이 물러서며 이생에게 속삭이기를,
 "사또가 저기 있으니, 낭군님은 이전 이방의 집에서 한 것과 같이 들어가서 사또를 치고 그 거동을 보십시오."
 "나는 익숙하지 못한데 어찌 마음놓고 할 수 있을까?"
 "일은 그리 어렵지 아니합니다. 저는 상하의 분수가 있어서 감히 할 수 없거니와, 낭군님은 무슨 꺼릴 것이 있겠습니까?"
 이생은 마지 못하여 허리를 꾸부리고 슬금슬금 앞으로 가서 머뭇거리고 서성대면서 모는 것과 같고, 아는 것과 같아서 바로 곧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이상한 눈초리로 살피고 있는데, 감사가 가만히 담뱃대로 이생의 배를 쿡 찌르면서 말했다.
 "형장은 이 무슨 꼴인가?"
 이생은 깜짝 놀라며 털썩 주저앉고는 비로소 자기가 살아 있음을 깨달으니, 취몽이 삼월달 봄날에 깬 것과 같고, 훈풍이 한가닥 불어온 것과 같이 정신이 들었다. 모두가 한 통속이 되어 자기를 속였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감사는 즉시 관비에게 명하여 옷 한 벌을 가지고 와서 입히게 했다. 이생은 더욱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였다.
 이생은 이튿날 새벽에 노비를 마련해 가지고 감사도 만나보지 않고, 오유란도 괘씸하여 한 마디 인사도 없이 그곳을 떠나 밤낮으로 달려 겨우 서울에 도착했다.
 부모들은 그의 얼굴이 해쓱함을 보고 근심걱정을 하였고, 종들은 그 차림이 초라함을 살피고 의심했다. 이생은 대답하기를 오는데 애를 먹고 병이 들어 고생을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생은 정사로 물러가 거처하며, 설분에만 뜻을 두고 마음속으로 굳게 맹세하고는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 해 가을에 마침 임금님이 문묘에 참배하심을 만나 글을 품고 가서 올렸던 바, 다행이 임금의 눈에 들게 되었다. 급제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한림학사로 뽑혔으니, 부모님들이 다같이 즐거워 할 영광이요, 친척들도 다같이 기뻐할 경하였다. 원근이 모두 기뻐 날뛰며 칭찬하느라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때 서쪽 지방에 심한 흉년이 들어 민심이 흉흉하였다. 임금은 근심하고 신하들을 보고 암행어사가 될 인재를 뽑아 오리라 했더니, 곧 이한림이 뽑혔다.
 이한림은 새 명령을 분부 받고, 설분할 기회가 닥쳐왔음을 못내 기뻐하며 매우 다행으로 여겼다. 행장을 다스려 가지고 곧 떠나 전전하면서 서주로 가니 행로가 흥겨웠고, 의기가 양양하였다.
 지나는 곳마다의 산천의 풍경은 옛날과 다름이 없고 그 옛날의 이생도 변함이 없었다. 두 물줄기가 잘리는 능라도는 우뚝이 보여 기억에 떠올랐으며, 삼산이 반락한 모란봉은 세월을 겪기를 몇 번이나 하였건만 강산은 뚜렷하였다. 이생은 즐거운 흥취를 이길 수 없어 곧 시 한수를 지었다.
대동문 바깥 물은 남쪽으로 흐르는데
노랑 돛단배가 고주에 걸려 있네
천지에 몸을 붙여 이제사 벗어났고
강산이 반가와서 다시 다락 오르고야
영명사 깊은 탑은 중들의 구름 같은 꿈
부벽루 높은 대는 나그네의 야화로세
수의 입은 암행어사, 사람들은 모르는데
임금님 은혜 받아 봄노래에 등반하리
  읊기를 마치고 나서, 채찍을 휘두르며 연광정에 올라가서 사방을 돌아보며 눈을 부비고 다시 보니, 그 옛날의 초당은 아득히 눈에 들어왔다. 술을 마시고는 또 노래를 지어 불렀다.
 도원 찾아 떠난 유랑 이제 다시 돌아오니
 풍물도 달라졌고
 사람들도 알아 보지를 못하네
 짧은 지팡이를 자축거리고
 헤어진 의복이 남루하지만
 까마득한 세상에 눈이 열리니
 때가 오면 남아의 뜻을 펴리라
  노래를 마치고 역졸들과 더불어 비밀한 약속을 해 두었다.
 그날 밤중에 역졸 여남은 명이 마패를 높이 들고 각각 몽둥이를 가지고 삼문을 두드리며 일시에 소리내어 외치기를,
 "암행어사 출두하옵시오."
하니, 우레와 번개가 백 리 밖에서 놀라고 천지가 한 성안에서 뒤집혀지는 것과 같았다.
 관노와 이방은 일을 단속하느라고 이리 닫고 저리 닫으며, 좌수와 별감은 눈을 휘둥그래 하고 가정에서 당황하고 있으니 마치 솥물이 끓는 것과 같았다.
 이 때 감사는 마침 수청기생 계월과 같이 자다가 갑자기 뜰문 밖에서 암행어사 출두하옵신다는 소리를 듣고, 뜻하지 않았는데서 나온지라, 황급히 일어나 촛불을 켜지 않고 어두운 데서 옷을 찾다가, 겨우 뒤집혀진 옷 하나를 자으니 곧 계월의 넓은 비단 속곳이었다. 계월도 또한 알몸으로 황급히 뒤따라 들어갔다.
 감사는 본시 해학을 좋아하고 또 잘하는 사람이었다. 우환이 있는 중에서도, 계월의 가는 허리 아래 사타구니 사이를 손가락질하며 희롱의 말을 했다.
 "추위를 당하여 감기가 들었느냐? 어찌 그리 콧물을 많이 흘리느냐?"
 계월이 슬쩍 돌아보며 대꾸했다.
 "사또께서는 승자하시와 벼슬이 더 올랐습니까? 어찌 그리 화신이 툭 튀어 나왔으며 큼직하십니까? 그러하오나 이와 같은 재앙이 닥쳐온 이 때에 희담이 무엇입니까? 요컨대 좀 정신을 차려 무사하기를 도모하옵소서."
 이와 같이 황급한 때에 어사는 벌써 선화당으로 들어와서, 높이 걸터앉아 특명으로 분부하였다.
 "봉고를 하고 형구를 갖추어, 수하를 막론하고 명첩을 올리지 못하게 하라!"
 명이 떨어지자 이노들이 다투어 쫓아가서 감사에게 아뢰었다.
감사는 두 세 명의 관노로 하여금 그 동정을 살펴 보고 또한 용모를 알아보게 했더니, 돌아와 아뢰기를,
 "어사의 나이는 삼십 세 가량 되었고, 얼굴이나 거동이 흡사 전날의 이랑주와 같으니 일이 매우 의아하고도 괴이합니다."
고 했다.
 "너는 이랑과 다정하고도 친숙한 사이라 오늘의 어사또는 이랑과 흡사하다 하거니와, 아직 그 진위를 알지 못하고 있느니, 너는 모름지기 잘 살펴보고, 자세히 보고하라."
 오유란이 선화당으로 나와 몸을 숨기고 가만히 살펴보니 오늘의 어사는 전날의 이랑이며, 전날의 이랑은 오늘의 어사가 아닌가? 때는 비록 다르나 사람인즉 같아서, 추호도 다름이 없고 조금도 의심할 바가 없었다. 곧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다시는 근심을 하지 마옵소서, 어사되는 사람은 곧 전날의 이랑주입니다."
 감사는 기뻐서 얼굴빛을 고치며 말했다.
 "내 이미 친구의 등과를 덜었으나, 오늘의 어사임을 알지 못하였구나!"
 이에 빼앗겼던 혼을 거두고 의관을 가다듬고, 한 통인으로 하여금 어사에게 명첩을 올리게 하였다. 어사는 날카로운 소리로 거절하면서
 "내 본래 너를 알지 못하노라. 사또가 명첩을 올림은 무슨 까닭인고?"
 하고는, 즉시 통인을 묶어 내려놓고 종아리 삼십 대를 치라 했다.
 감사는 거절당했다는 말을 듣고 친히 나아가 보고자 했으나. 다시는 명첩이 없기로 뛰어 들어가 뻣뻣이 서서 어사를 향하여 말했다.
 "고인은 평안하셨는가?"
어사가 보고도 못 본 척하고 못 들은 척하니 감사는 앞으로 나아가서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형은 정말로 남아로서 뜻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으니, 자네 일은 드디어 이루어졌네. 오늘 동생이 경악하고 황급하고 곤경하였음은, 오히려 형의 옛날에 속임을 당한 것보다 못하지 않을 것일세. 한 번 깊이 생각해 보게. 형이 별안간 영화의 길이 올랐음은 어찌 나의 한 정성의 소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닌가? 일로써 말할진댄 형이 안 졌다고 말할 수 있으나, 진 사람은 어사 자네일세."
 이 말을 들은 어사는 풀이해서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해 보니, 마음은 스스로 조용히 열리고 입에서는 스스로 웃음이 나와서,
 "때도 이미 지났고 일도 오래 되어 할 수 없군."
하고는, 곧 술을 가져오게 해서 감사와 즐겁게 마셨다.
 감사가 너무 지나치게 속인 장난을 사과하고, 용서를 입은 영광을 사례하니, 어사는 얼굴을 붉히고 웃으면서 말했다.
 "오늘은 소유문(蘇孺文)이 되어 친구와 더불어 술을 마시고, 내일은 겸주자사(兼州刺史)가 되어 일을 살핌은 마치 나를 두고 이름일세."
 이튿날 날이 밝자 어사는 공청(公廳)에 나아가 앉고, 여러 형장(刑杖)을 갖추어 놓고 오유란이란 여인을 묶어 오게 해서, 거적자리에 앉혀 섬돌 아래에 엎드리게 하고는 문을 닫고, 날카로운 소리로 문초를 했다.
 "너의 죄를 네가 스스로 알고 있으니 매로써 죽이리라."
 오유란은, 나지막한 소리로 간곡히 아뢰었다.
 "관청에 매어 있는 여자로서 장부를 속여 희롱하기를, 산 사람을 죽었다고 하고 사람을 가리켜 귀신이라 하였으니, 어찌 죄 없다고 하느냐? 빨리 처치하고 늦추지 마라."
 오유란은 다시 빌면서 말했다.
 "바라옵건대 어사께서는 잠시 문을 열고 한 번만 보아 주신 즉, 소녀가 다만 한 말씀만 드린다면 회초리 아래 귀신이 된다 할지라도 다시는 원통함이 없겠습니다."
 어사는 일찍부터 인정이 없는 사람이 아닌지라, 그 말을 듣고야 낯익은 얼굴을 한 번 보니 오유란이 몸을 나타내고 살짝 쳐다보고 생긋이 웃으며 말했다.
 "산 것을 보고 죽었다고 한 것은, 산 사람이 스스로 죽지 아니한 것을 판단 못함이요, 사람을 가리켜 귀신이라고 한 것은, 사람으로서 스스로 귀신이 아님을 깨닫지 못한 것이니, 속인 사람이 나쁩니까, 속임을 당한 사람이 나쁩니까? 너무 지나치게 속인 사람은 혹 있다고 할지라도, 속임을 당한 사람으로서 차마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저는 사졸(士卒)이 되어 오직 장군의 명령을 들을 따름입니다. 일을 주장한 사람에게 책임이 돌아가야 할 것이어늘, 어찌 사졸을 버히려 하십니까?"
 어사 듣기를 마치고 보니, 사정이 또한 없을 수 없고 사실이 또한 그러하였으므로, 즉시 풀어 놓도록 명령하고, 당상으로 올라오게 하고 한 번 웃는 얼굴을 보여주며,
 "너는 묘기(妙妓)가 되고 나는 소년이 되어 일은 조금도 괴이함이 없으나, 가운데서 일을 꾸민 사람이 매우 나쁘고 또 괴이하였으나, 지금에 와서 생각한들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술을 가져오게 해서 잔치를 베풀고, 그 옛날의 정회를 다 털어 놓고 이야기했다.
 어사는 수일을 묵으며 여러 송사(訟事)를 다스림에 있어서 옳은 것은 옳은 대로 죄는 죄대로 처리하였고, 가는 고을마다, 수령을 표창할 만한 자는 표창하고 떨어뜨릴 만한 자는 떨어뜨리면서, 일을 밝게 살피니 한 사람도 억울한 일이 없었다.
 어언간 세월이 바뀌어 팔구월이 되었다. 어사는 다시 내직(內職)의 명령을 받으니 명성이 멀리까지 들렸다. 이 해에 감사도 또한 외직으로부터 벗어나 돌아오니, 두 사람의 정의는 평생토록 두터웠다. 서로 도우면서 진급하여 다같이 정승이 되었다. 서로 도와 주는 덕(德)과 서로 변통해 주는 공(功)은 한대(漢代)의 소조(蕭曹)와 같고 당대(唐代)의 방두(房杜)와 같기를 사십여 년이나 그러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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