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참고집

단군세기의 저자

오늘의 쉼터 2009. 4. 12. 18:21

 

단군세기의 저자

행촌 이암(杏村 李灸,1297~1364)

본관: 고성(固城).
초명: 군해(君해).
자   :고운(古雲).
호   :행촌(杏村).
시호: 문정(文貞).

 
판밀직사사 감찰대부 세자원빈(判密直司事監察大夫世子元賓)인 존비(尊庇)의 손자이며, 철원군 우(鐵原君瑀)의 아들이다.1313년(충선왕 5) 문과에 급제하고, 충선왕이 그 재주를 아끼어 부인(符印)을 맡겨서 비성교감(秘省校勘)에 임명한 뒤 여러 번 옮겨 도관정랑(都官正郎)이 되었다.충혜왕 초 밀직대언 겸 감찰집의(密直代言兼監察執義)에 올랐으나, 1332년 충숙왕이 복위하여 충혜왕의 총애를 받았다고 하여 섬으로 유배되었다가 1340년 충혜왕의 복위로 돌아와 지신사(知申事)·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정당문학(政堂文學)·첨의평리(僉議評理) 등을 역임하였다.충혜왕이 전교부령(典校副令)에 무인(武人) 한용규(韓用規)를 임명하므로 옳지 못하다고 주장하였으나 왕이 듣지 아니하였다.충목왕이 즉위하면서 찬성사로 제수되어 제학(提學) 정사도(鄭思度)와 정방(政房)의 제조(提調)가 되었지만, 환관 고용보(高龍普)가 인사행정을 공평하지 못하게 처리한다고 왕에게 진언한 일로 인해서 밀성(密城)에 유배되었다.

충목왕이 죽자 서자 저(뒤의 충정왕)를 왕으로 세우기 위하여 원나라에 다녀와서 다시 정방의 제조에 임명되는 한편, 추성수의동덕찬화공신(推誠守義同德贊化功臣)이라는 호를 하사받았으며, 그뒤 찬성사를 거쳐 좌정승에 올랐다.공민왕초 철원군(鐵原君)에 봉하여졌으나 사직하고 청평산(淸平山)에 들어갔다가, 다시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제수되었다.

1359년(공민왕 8) 홍건적이 침입하므로 문하시중으로서 서북면도원수가 되었으나 얼마 뒤 겁이 많아 도원수로서 군사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고 하여 평장사(平章事) 이승경(李承慶)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1361년 홍건적이 개경을 핍박하므로 왕을 따라 남행(南行)하였고, 이듬해 3월 좌정승에서 사퇴하였다.
1363년 왕이 안동으로 피난할 때 호종한 공로로 1등공신으로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에 봉하여지고 추성수의동덕찬화익조공신(推誠守義同德贊化翊祚功臣)이라는 호를 하사받았다.글씨에 뛰어나 동국(東國)의 조자앙(趙子昻)으로 불렸으며, 특히 예서와 초서에 능하였고, 필법은 조맹부(趙孟부)와 대적할만하며, 지금도 문수원장경비(文殊院藏經碑)에 글씨가 남아 있다. 그림으로는 묵죽에 뛰어났다. 우왕 때 충정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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