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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단고기란?

오늘의 쉼터 2009. 4. 12. 18:44
   한단고기란?


          숙명여대에 보관중인 한단고기 원본

 

계연수가 기존의 '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의 네 종류의 책을 하나로 묶은 다음 이기(李沂)의 감수를 받아 1911년에 30부 한정 편찬하였다. 계연수는 만주에서 독립 운동을 하다가 1920년에 한 일본인에 의해 피살되었는데 이 때, 제자인 이유립에게 다음 경신년(1980)이 되면 이 책을 세상에 공개하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1980년 필사본을 한정판 100부 편찬 하였다. '삼성기'는 단군시대 이전, 즉 한민족의 기원부터 단군조선의 건국과 흥망을, '단군세기'는 단군조선의 정확한 역사적 기록의 편년체 기술, '북부여기'는 고구려의 전신으로 여겨지는 북부여의 흥망성쇠를, '태백일사'는 단군조선 멸망 이후, 고구려, 고려, 대진국(발해)등의 역사와 문화, 풍속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삼성기
이 책은 신라의 승려인 안함로와 행적이 확실치 않은 원동중이 쓴 것이다. 각각 상권과 하권으로 구분하였다.

책의 내용은 한[桓]국과 배달국시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는 기원전 7197년에 세워진 한[桓]국의 초대 지도자인 한인으로부터 7세 지위리 단인까지 3301년의 역사와 배달국,
신시시대의 한웅으로부터 18세 단웅까지 1565년의 역사를 압축한 것이다. 하권엔 신시역대기가 덧붙여 있다.

단군세기

이 책은 고려말 좌의정을 지낸 행촌선생 이암 문정공이 쓴 책이다.
그는 1313년(충선왕5)문과에 급제하고 충선왕이 그를 아껴 비성교감에 임명했다.
그후 좌정승을 마지막으로 관직에 물러났다.

책의 내용은 아사달에 도읍하여 조선이라는 나라 이름을 사용한 단군 조선의 역사를 싣고 있다.
 1세 단군 왕검으로부터 47세 단군 고열가까지 2096년 동안의 각 단군의 재위기간에 있었던 주요 사건들을
편년체로 기록한 것이다.

북부여기

이 책은 고려 말의 학자인 범장이 전한 책이다.

책의 내용은 상권, 하권, 가섭원부여기로 구성되며 시조해모수로부터 6세 고무서까지의 204년과 가섭원부여 108년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특기할 사항은 지금까지 국사책에서 고구려의 건국 연대를 B.C. 37년으로 기록하였으나, 이 책에 의하면,
실상 고구려의 건국 연대는 이보다 120년에서 180년이 앞선 것으로 사료된다.
또한 몇가지 기록상의 공통점 등으로 보아 이 북부여기가 바로 고구려의 전신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태백일사

이 책은 이조시대 연산군과 중종 때의 학자인 이맥이 전한 책이다.
이맥선생은 행촌선생의 고손으로 1474년(연산군4)때 문과에 급제했으나 성품이 강직하여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유배되었다 중종 반정때 다시 관계에 진출하여 성균관 사예와 사헌부 장령을 겸하고 동지돈영부사에 이른 인물이다.
행촌선생과 이맥선생은 모두 고성이 본관이다.

이 책의 내용은 한(桓)국시대로 부터 고려에 이르는 역사적 내용을 담고 있다.
즉, 삼신오제본기, 한국본기, 신시본기, 삼한 관경본기, 소도경전본훈, 고구려국본기, 대진국본기, 고려본기가
포함되어있다.
그리고 삼한관경본기는 마한세가 상·하와 번한세가 상·하로 구성되어있다.

소도경전본훈은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기록하고 있으며 한국 선조의 전통적 종교와 철학 및 문자를 소개하고 있다.

이상의 네 권의 역사책은 한단고기라는 이름으로 1911년에 계연수라는 분에 의하여 편찬되었다.
한단고기는 한국 선조의 역사 뿐만이 아니라 한국선조의 사상을 담고 있는 천부경, 삼일신고의 원문과 참전계경에
대한 자료가 실려있다.


한단고기의 전래에 관하여

한단고기 서문에는 계연수 선생이 "신시개천 5808년(서기 1911년) 곧 광무 15년 신해 5월 광개절날에
태백 유도 선천 인경 계연수가 묘향산 단굴암에서 쓰다"라고 한단고기가 필사된 날자를 밝히고 있다.
그런데, 계연수가 펴냈다는 한단고기의 원본은 지금 남아있지 않다.
여기서 한단고기가 한국인에게 알려진 경위를 살펴 보자.

평북 선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계연수 선생이 한단고기를 필사하여 합본한 것은 1911년이고
사망한 해는 1920년이라고 대종교에서는 말하고 있다.

계연수 선생은 한단고기 서문에서 '한단고기는 모두 해학 이기 선생의 감수를 거치고
또 내가 정성을 다하여 옮겨 적었다.
또 홍범도, 오동진 두 벗이 자금을 마련하여 인쇄에 부쳤다'고 했다.

한단고기를 감수한 이기 선생은 한말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애국계몽운동가였다.
책을 인쇄하는데 자금을 댔다는 홍범도 장군은 대종교인 이였으며,
간도를 중심으로 항일 무장투쟁을 했던 독립운동가였다.
홍범도장군과 함께 자금을 댔다는 오동진 선생은 천마산대 최시흥(단학회 3대 회장)과 함께 활동하면서
조선총독부 기관을 폭파하고, 조선총독부의 경찰과 조선총독부의 앞잡이를 많이 처단하였던 독립 운동가였다.

한단고기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계연수 선생이 사필한 때로부터 70년 후이며, 단단학회 회장 이였던 이유립 선생이
공개한 것이다.
원본이 전하지 않고, 70년 후에야 책이 나타난 점 때문에 한단고기의 편자는 계연수가 아닌 이유립이라는
의심이 제기되고 있다.

지금은 이유립 선생의 부인이 단단학회를 지키고 있다.
우리의 뿌리, 역사 찾기를 평생 소원했던 이유립 선생은 생전에 많은 책을 썼으며,
 한단고기와 비슷하거나 같은 내용이 많이 발견된다.
한단고기 평주(이유립의 한단고기 번역본)는 실제로 이유립 선생이 한단고기를 번역 출간하기 위하여 쓴 것이다.
이 한단고기 평주는 이유립 선생이 한단고기를 풀이해 놓은 것으로, 이것을 책으로 펴내기 직전에 이유립 선생은
사망하였다.
1979년에 펴낸 한단고기에는 정오표가 달린 책이 있는데 정오표는 책에서 틀린 글자나 잘못된 내용을 고쳐서
추가한 것으로 이 정오표의 글씨는 이유립 선생의 글씨가 분명하다.
이것은 이유립 선생이 한단고기의 내용을 어느 정도 수정했을 가능성을 예측케 한다.

그러나 1979년, 이유립이 세상에 공개한 한단고기는 당시엔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한단고기가 주목받게 된 계기는 1982년에 일본에서 일본어 번역본이 나오면서부터였다.
일본어 번역본은 신국민사라는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는 가지마 노보루가 펴낸 것이다.
이것이 국내에 역수입되며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원래 직업이 변호사인 가지마 노보루는 평소 한국과 중국에서 고서적을 수집해 왔다.
그는 1979년, 한국에서 한단고기 영인본을 발견했다고 한다.
가지마 노보루는 한단고기를 바탕으로 일본 천황가의 뿌리에 대하여 일본의 신도가 본류이고
단군은 지류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후 한국의 송호수 박사를 비롯한 재야 사학자들에 의하여 번역되어 한단고기는
일반 대중에게 알려졌으며 지금도 많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단단학회와 대종교의 관계

한단고기를 전한 단단학회와 대종교는 긴밀한 관계가 있었다.
서기1909년 1월 15일 홍암 나철 대종사와 오기호, 강 우, 최동식, 유 근, 정훈모, 이 기, 김인식, 김춘식, 김윤식 등
수십 명이 그 날 자시를 기하여 서울 제동(지금의 삼청공원 옆)에서 제천보본의 대례를 봉행하고 700년 만에
천신교(=대종교)를 다시 열었다.

당시 삼신설과 개천연호 등 핵심문제에 이견을 보인 이 기 선생은 대한자강회의 계연수, 김효운 이정보 등과 함께
서기 1909년 3월 16일 단학회를 조직하였고, 홍암대종사는 서기 1910년 8월 5일 단군교에서 대종교로 개명 하였다.
이에 반발한 정훈모 선생은 단군교의 명칭고수를 명분으로 내세워 1910년 8월 15일 갈라져 나왔고 1930년에
단군교는 내분으로 와해되었다.

한편 이 기 선생은 단학회 발기총회를 앞두고 한일합방의 국치를 예견한 나머지 비분을 참지 못하여 서울의 모 여관에서
단식을 하다가 7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이후 계연수 등 5,6명이 1910년 10월 3일 강화 마니산 참성단에서 단학회 발족을 위한 제천식을 가졌고,
2대 회장에 취임한 계연수 선생은 단학회 강령을 실천하기 위하여 서기 1914년 남만주 관전현 홍석납자로 이전하였다.
계연수 선생은 대종교 계열의 서로군정서, 대한독립단 등의 무장독립운동에 대하여 정신적, 사상적 계몽협조를 하였다.
서기 1920년 일본 밀정(스파이)에 의하여 계연수 선생이 피살되자, 천마산대 대장 최시흥이 3대 회장으로 취임하여
대종교적 민족주의자 석주 이상룡 선생과 함께 활발한 활동을 펴고자 하였으나 취임한지 얼마 안되어 역시 일본
밀정에게 붙잡혀 살해되었다.

단학회 4대 회장은 대종교 계열의 서로군정서 관남총관으로 있던 이덕수 선생이 추대되었으나,
일본군과 전투중에 전사하였다.
이후 단학회는 침체상태가 되고, 회원들이 일본경찰에게 쫓기거나 붙잡혀 단학회가 해산되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해방 뒤 일제에 수감되어있던 이용담이 출옥하여 평양에서 단학회를 재건하고 5대 회장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공산치하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할 수 없었고 다행히 이유립 선생이 6 25사변때 월남에 성공하여 1954년부터
동지규합을 하였고, 대종교에서 활동을 하였다(대종교 상교).

그러나 이유립 선생은 삼신설과 삼대설에 대하여 의견충돌을 보여 1964년 11월 22일 발기인대회를 열어 단단학회를
조직하였다.
단학회를 계승하여 단단학회라고 부른 것은 대종교 2세 교주 김교헌 종사의 저서 신단실기에 기록된 "단단"에
근거한 것이다.
이유립 선생은 1966년 5월 18일 단단학회 초대회장으로 취임하여 이기 선생의 이론과 홍암 나철 대종사,
 서일 종사의 이론을 종합, 계승하여 우리 배달민족이 조국근대화와 국토통일성업을 완수하고 국제적인
후진을 면하기 위해서 홍익인간 이념에 입각하여 민족적, 민주적인 혁명을 이룩하자는 것을 취지로 삼았다.



※참고서적
1. 한단고기(桓檀古記): 임승국, 정신세계사, 1986
2. 김진명 연구 자료, 2000
자료출처 :
http://www.daejonggyo.or.kr/history/handangogi.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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