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참고집

◎ 만리장성(萬里長城). 바로알기

오늘의 쉼터 2008. 10. 6. 20:49

 

◎ 만리장성(萬里長城)에 관하여 

진시황이 전국(戰國) 6국을 정벌한 후, 북방 오랑캐?의 침략을 막기위하여 백성들을 동원하여

세운 건축물로 달에서도 보인다고 가르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달에서는 안보인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 민족의 열등감을 강조(?)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그러한 소리를 합니다만 사실은 반대로입니다.

저는 자신있게 만리장성의 우리민족의 위대한 역사를 증명하는 역사적증거중의 하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회시간이나 세계사 시간에서 이러한 위대한 건축물을 세운 중화족은 대단한 민족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문화재도 없는데라고 하면서.. 하지만,

이 얼마나 우스운 이야기입니까?

맞는 이야기라고요?

그럼 정말로 만리장성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우선 지금의 북경근방에 위치한 장성은 진나라때의 장성이 아니라,

명나라와 청나라에 걸쳐 완성한 장성입니다.

 이전에 역사에 등장하는 장성이 지금의 장성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선, 만리장성이란 무엇인가요?

일종의 방어수단입니다.

대륙의 세력이 강대하였을 때는 어떠했는가?

주변국을 정벌하여 속국으로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합니다.

하지만, 만리장성은 무엇인가요?

왜 그들은 이러한 구조물을 국운을 걸면서 목숨을 걸고서 쌓아야만 했을까요?

그것은 주변민족을 그들 스스로 정복할 능력이 없어 위협을 느낀 나머지 건립한 구조물입니다.

그렇다면 장성밖의 민족의 과연 누구인가요?

장성은 어디를 막기위해서 세워진 것인가?

정말로 의심이 되면 지도를 펴 놓고 어디를 막기 위해서 쌓은 것인가를 보십시요..

물론, 앞서 말했듯이 진시왕 당시의 장성은 지금의 장성은 아닙니다.

지금의 장성은 명나라이후로 건립, 축조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장성 밖에는 누가 살았던가?

지금의 장성밖에도 바로 우리 민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장성안에서도 살았고, 장성을 넘나들면서 중원을 도모하였습니다.

알다시피 만리장성과 같은 수평적인 방어물은 한 곳이 무너지게 되면 모든 곳이 일시에 무너지게 되어

방어적 목적으로는 부적합 합니다.

유사한 예로 세계1차대전이 끝나고 프랑스는 마지노장군의 제안을 받아들여 독일과의 국경선에

참호와 진지등을 대규모로 구축하여 독일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이것이 바로 "마지노 선"이다.

하지만, 독일의 침략에 끄덕없다고 생각되면 이 "마지노 선"도 독일과 기계화부대에 의해서

벨기에 부근이 뚫리자,

모든 방어선이 일시에 무너지는 상황이 발생하여 프랑스는 2차대전 당시 별 힘조차 써보지 못하고

항복하고 만다.

또한, 대륙의 역사를 봐도 만리장성을 쌓은 후 그 덕을 본 적은 없습니다만,

그들은 단지 그들의 땅을 그곳까지로 해서 지키고 싶었던 것일 뿐이다.

일종의 희망사항이 반영된 구조물인 것이다.

만리장성은 그들이 우리를 두려워하여 만든 것이며 영원히 그곳(중원)을....

그들의 영역으로 만들기 위해서 였습니다.

따라서, 만리장성은 그들의 위대한 유산이 아니라,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증명하는 유산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런 것을 알려고 하지 않고 단순히 우리조상은 왜 만리장성과 같은 구조물을 짓지

않았냐하는 한탄만을 합니다.

물론, 문화재면으로 보면 손해가 될 것이나, 역사적인 면으로 보면 만리장성은 우리가 가서 열심히

그 의미를 되새겨야 하는 곳입니다.

예전에 경복궁에 조선총독부건물이 있었을 때, 일본인 관광객들이 열심히.....

그 곳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강조할 점은 만리장성이 장성밖의 "오랑캐"를 막기위해 세웠다고 가르쳐서는 안됩니다.

그 오랑캐는 바로 우리 민족이요,

당신의 조상인 것입니다.

누가 자신의 역사를 가르치면서 자신을 스스로 "오랑캐"라고 비하 하는 나라가 어디있다는 말입니까?

무서운 역사 비하의 현실입니다.

당신의 조상이 오랑캐이면 당신 또한 바로 그 오랑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역사에서는 패배주의, 자기 비하를 가르치는 역사입니다.

없는 것을 지어내서 가르치지 말고, 있는 것을 제대로 가르쳐야 합니다.

일부에서는 장성밖에 우리조상과 중국의 조상과는 다른 제3의 민족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해지지 않습니까?

우리조상과 중국사이에 좁은 공간에 끼여서 살 작은 민족이 과연 대륙의 많은 왕조들이 흥망을 걸고서

장성을 쌓아야할 만큼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 사이에 끼여 있던 사람들이 장성을 쌓았어야 할 것입니다.

잠시만 생각해보면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의 역사를 왜곡시켜려는 사람들의 무분별한 의도가 드러날 뿐입니다.
역사바로잡기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러한 중요한 부분을 모두 다시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됩니다..

만일 만리장성을 구경가신다면 자랑스럽게 관광을 하시고 오십시요..

이쯤 되면 만리장성과 함께 맨 처음 축조한 인물로 늘 이름이 따라다니는 진시황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이름 앞에는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물이라는 만리장성도 강력한 전제군주제 유지를 위해

수 많은 백성들의 고혈과 희생을 담보했던 폭정의 수단이자 상징으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물론 진시황제와 만리장성은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오해가 있다.

진시황과 만리장성에 대한 3가지 오해

첫 번째 오해는 이 모든 어마어마한 건축물을 모두 진시황이 축조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진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축조하긴 했지만 엄밀히 따진다면 만리장성을

처음 만든 사람은 진시황제가 아니다.

굳이 만리장성의 기원을 따진다면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 진나라가 아닌

그 전의 춘추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만리장성이라는 말이 문헌에 나타난 것은 전국시대이다.

결국 엄밀히 말하면 진시황은 전국시대 연(燕)·조(趙)·진(秦) 등의 여러 나라가 외적(흉노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이미 구축했던 장성들을 통일 이후 연결하고 더 연장한 것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다.

두 번째 오해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만리장성의 존재가 진시황 때 축조한 장성의 모습 그대로 일 것이라는

점이다.

유감스럽게도 진나라 때 축조된 고대 장성은 세월이 흐르고 여러 왕조의 명멸을 거치는 동안

이루어진 수많은 개 ·보수 및 방치 등을 거쳐 거의 본모습을 볼 수 없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만리장성은 거의 명대에 축조된 것이다.

명의 영락제 시대 이후부터 진행된 만리장성의 개축은 무려 18차례의 개수를 거쳐 16세기 말 동쪽의 하북성

산해관(압록강 인접)으로부터 서쪽의 감숙성 가욕관까지 연결된 실제거리 1만2000여리나 되는 오늘날의

만리장성이 완성되었다.

특히 만리장성은 강력한 국가의 상징일 것이라는 일반인의,

세 번째 오해와는 달리 실제 역사상 비교적 세력이 약한 한족 왕조 때 더 활발하게 축조되었다.

만리장성의 축조 목적이 북방의 이민족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서이므로 실제 한족국가이면서도 문물이

융성했던 당대나 몽고족이 통치한 원대, 만주족이 통치한 청대에는 만리장성에 대한 개보수나 증축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아이러니한 사실을 보며 문득 악순환이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정정이 불안하고 늘 북방 이민족이라는 위협요소를 가지고 있는 국가가 이 위협요소를 막기 위해

인력과 자금을 투자하여 만리장성이라는 대역사를 하다보니 그로 인한 부작용으로 오히려 정정이

불안해지는 결과가 초래된 것이다.

이처럼 만리장성의 보수는 역대 왕조의 커다란 두통거리였다.

안하자니 북방 이민족 침입이 걱정되고 하자니 비바람에 허물어진 장성을 보수하기 위해 매번 수십만이

동원되어야 했으니 말이다.

더구나 만리장성을 쌓던 수많은 사람이 일을 하다 사고로 죽게 되면 그 자리에 묻혔기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는 악명이 높았던 천덕꾸러기 만리장성도 오늘에 와서는 유네스코의 문화유산이라는

감투도 쓰고 비싼 입장료를 받고 짭짤하게 관광수입을 올리고 있는 효자 상품으로 화려하게 부활하게

되었으니 인생역전이라는 말이 절로 실감날 정도이다.

황토를 틀에 넣어 햇빛에 건조시켜 만들었다는 수많은 흙벽돌 하나하나를 손끝으로 만지며 걸으니

손끝을 따라 벽돌 하나에 숨어있는 이름모를 사람들의 땀과 한숨이 전해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제는 중국의 상징이 되어버린 만리장성과 진시황의 악연, 진시황의 입장으로 볼 때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으로 기존의 장성들을 연결하여 만리장성을 축조했을 뿐이다...... /김정은 기자

 

 

 

어느 젊은 남녀가 결혼하여 신혼생활 한달여 만에 남편이 만리장성을 쌓는

부역장에 징용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일단 징용이 되면 그 성 쌓는 일이 언제 끝날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야말로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었죠.



 

안부 정도는 인편을 통해서 알 수야 있었겠지만, 부역장에 한 번 들어가면

공사가 끝나기 전에는 나올 수 없기 때문에 그 신혼부부는 생이별을 하게 되었으며,

아름다운 부인은 아직 아이도 없는 터이라 혼자서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남편을 부역장에 보낸 여인이 외롭게 살고있는 외딴 집에 어느날 지나가던

나그네가 찾아 들었었죠.


 

남편의 나이 쯤 되어 보이는 사내 한사람이 싸릿문을 들어서며 "갈 길은 먼데 날은

이미 저물었고 이 근처에 인가라고는 이 집밖에 없습니다.

헛간이라도 좋으니 하룻밤만 묵어가게 해 주십시오"하고 정중하게 간청을 했죠.
여인네가 혼자 살기 때문에 과객을 받을 수가 없다고 거절할 수가 없었던

이유는 주변에는 산세가 험하고 인가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바느질을 하고 있는 여인에게 사내가 말을 걸었죠.
"보아하니 이 외딴집에 혼자 살고 있는듯 한데 사연이 있나요?" 라고 물었습니다.
여인은 숨길 것도 없고 해서 남편이 부역가게 된 그 동안의 사정을 말해 주었죠.

밤이 깊어가자 사내는 노골적인 수작을 걸었고,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 여인과

실랑이가 거듭되자 더욱 안달이 났었죠.


 

"이렇게 살다가 죽는다면 너무 허무하지 않습니까?
그대가 돌아올 수도 없는 남편을 생각해서 정조를 지킨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직 우리는 너무 젊지 않습니까?
내가 당신의 평생을 책임질 테니 나와 함께 멀리 도망가서 행복하게 같이 삽시다."

사내는 별별 수단으로 여인을 꼬드기 시작 했었죠.
하지만 여인은 냉랭 했습니다.



 

사내는 그럴수록 열이나서 저돌적으로 달려 들었고, 여인의 판단은 깊은 야밤에 인적이 없는

이 외딴 집에서 자기 혼자서 절개를 지키겠다고 저항한다고 해도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여인은 일단 사내의 뜻을 받아들여 몸을 허락하겠다고 말한 뒤,

한 가지 부탁을 들어달라고 조건을 걸었었죠.


 

귀가 번쩍 뜨인 사내는 어떤 부탁이라도 다 들어줄 테니 말해 보라고 했고.

여인은 "남편에게는 결혼식을 올리고 잠시라도 함께 산 부부간의 의리가 있으니

그냥 당신을 따라나설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그러니 제가 새로 지은 남편의 옷을 한 벌 싸 드릴 테니 날이 밝는대로 제 남편을

찾아가서 갈아 입을 수 있도록 전해 주시고
그 증표로 글 한 장만 받아 달라는 부탁입니다


 

어차피 살아서 만나기 힘든 남편에게 수의를 마련해주는 기분으로 옷이라도 한 벌 지어 입히고

나면 당신을 따라 나선다고 해도마음이 좀 홀가분 할것 같습니다.
당신이 제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 오시면 저는 평생을 당신을 의지하고 살 것입니다.
그 약속을 먼저 해 주신다면 제 몸을 허락하겠습니다."

여인의 말을 듣고 보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고. 마음씨 또한 가상 한지라

좋은 여인을 얻게 되었노라 쾌재 부리며 그렇게 하겠다고 하고 '이게 웬 떡이냐''''

 하는 심정으로 덤벼들어 자신의 모든 것을 동원해서 욕정을 채운 후 골아 떨어졌죠.

사내는 아침이 되어 흔드는 기척에 단잠을 깨었죠.


 

 

밝은 아침에 보니 젊고 절세의 미모에다 고운 얼굴에 아침 햇살을 받아 빛나니

양귀비와 같이 천하 미색이었죠 .

사내는 저런 미인과 평생을 같이 살 수 있다는 황홀감에 빠져서 간밤의 피로도 잊고

벌떡 일어나서 어제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하여 길 떠날 차비를 했고.
여인은 사내가 보는 앞에서 장롱 속의 새 옷 한 벌을 꺼내 보자기에 싸더니 괴나리 봇짐에

챙겨 주는 것이 었습니다.

사내 마음은 이제 잠시라도 떨어지기 싫었지만 하루라도 빨리 심부름을 마치고 와서

평생을 해로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부지런히 걸었었죠.



 

드디어 부역장에 도착하여 감독관에게 면회를 신청하면서.

옷을 갈아 입히고 글 한 장을 받아 가야 한다는 사정이야기를 했더니 감독관이

"옷을 갈아 입히려면 공사장 밖으로 나와야 하는데 한 사람이 작업장을 나오면

그를 대신해서 다른 사람이 들어가 있어야 하는 규정 때문에  옷을 갈아 입을 동안

당신이 잠시 교대를 해 줘야 가능하다" 고 말하자. 사내는 그렇게 하겠노라 하고

여인의 남편을 만난 사내는 관리가 시킨대로 대신 들어가고 그에게 옷 보따리를  건네주었죠.

남편이 옷을 갈아 입으려고 보자기를 펼치자 옷 속에서 편지가 떨어졌습니다.

"당신의 아내 해옥 입니다.


 

당신을 공사장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이 옷을 전한 남자와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이런 연유로 외간 남자와 하룻밤 같이 자게 된 것을 두고 평생 허물하지 않겠다
각오가 서시면 이 옷을 갈아 입는 즉시 제가 있는 집으로 돌아오시고 혹시라도 그럴 마음이

 없거나 허물을 탓하려거든 그 남자와 교대해서 공사장 안으로 다시 들어가십시오."

자신을 부역장에서 빼내 주기 위해서 다른 남자와 하룻밤을 지냈다고 고백을 듣지만

그것을 용서하고 아내와 오손도손 사는 것이 낫지, 어느 바보가 평생 못나올지도 모르는

만리장성 공사장에 다시 들어가서 교대를 해주겠는가?



 

남편은 옷을 갈아 입고 그 길로 아내에게 달려와서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랍니다.

이거야말로 하룻밤을 자고 만리장성을 다 쌓은 것이 아닙니까?
하고 많은 인간사에서 이처럼 다른 사람이 나 대신 만리장성을 쌓아준다면 다행한 일이겠지만,

어리석은 그 사내 처럼 잠시의 영욕에 눈이 어두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남의 만리장성을 영원히 쌓아주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요!


 

'인류 최대의 토목공사'라고 불리는 이 거대한 유적은 중국 역대 왕조들이 북방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세운 방어용 성벽이다. 지도상 연장 길이 2,700km이며, 중간에 갈라져 나온 지선들까지 합치면 총 길이가 약 5,000~6000km에이른다. 동쪽 산하이관에서 서쪽 자위관

까지 동서로 길게 뻗어있다. 보통만리장성의 기원을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 때로 잡지만

그보다 훨씬 전인 춘추시대(BC770~ BC443)부터 북쪽 변방에 부분적으로 성벽이 건축되었다. 통일왕국인 진이 들어서면서 북쪽의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이들 성벽을 연결하고 증축한 것이다. 당시의 만리장성은동쪽 랴오양(遼陽)에서 서쪽 간쑤성(甘肅省) 민현(岷縣)까지로

지금보다 훨씬 북쪽에 있었다.

 

 

2천여 년 역사, 시대에 따른 변화
만리장성이 현재 위치에 처음 축성된 것은 6세기 북제(北齊) 시대다. 처음 건축될 무렵에는

산시성(山西省) 리스 현부터보하이 만까지 약 1,500km 길이였다.

이후 명(明) 나라 때 총 길이2,700km에 이르는 현재의 규모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명 나라는 15세기~16세기에 만리장성에 대한 대대적인 개보수 작업을 진행했는데,

당시 북방에 있던 몽고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북방민족인만주족이 세운 청 왕조에서는 군사적 가치가 없어 방치되어 있다가,

중화인민공화국 때 관광 목적으로 보수되어지금에 이르고 있다



 

만리장성 2,700km가똑 같은 구조와 재료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이중으로 축성된 곳도 있고, 성벽의 높이나 폭도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다.

 대체로 서쪽보다는동쪽이 견고하게 축성되어 있다. 성을 쌓은 재료는

햇볕에 말린 벽돌과 이것을 불에 구운 전(塼), 그리고 돌 등인데 동쪽으로 갈수록

더 단단한 재료를 사용했다. 성벽은 높이 6∼9m, 평균폭은 위쪽 4.5m, 아래쪽 9m이다.

100여 m 간격으로 망루를 설치하고, 군대를 주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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