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발해

◐ 정혜공주 [貞惠公主, 737~777]

오늘의 쉼터 2008. 10. 31. 18:13

 

◐ 정혜공주 [貞惠公主, 737~777]

 

 

 

너무 잡초와 잡목이 우거져서 아마 저 조그만 비석이 없었다면

이 무덤이 그 유명한 정혜공주의 묘소인 모르고 지나쳤을 지도 모른다.

정혜공주는 발해시조 대조영의 증손녀이자 제3대 문왕 대흠무의 둘째 딸로

777년 40세의 나이로 사망. 그녀의 무덤은 굴식돌방무덤무덤으로 1949년 우연히 발굴되었다.

내부는 이미 도굴된 상태였으나 내부의 벽화와 비석, 무덤양식은

현재 위치인 길림성 돈화시가 발해의 초기 도읍인 동모산 지역이란 사실을 보여주어

발해사를 연구하는 중요한 실마리가 되고 있다.

 

정혜공주 [貞惠公主, 737~777]

 

발해의 문왕(文王:大欽茂)의 둘째 딸.

서적에서는 그 인적사항을 알 수 없다가 1949년 중국 학자들에 의하여

지린성[吉林省] 둔화현[敦化縣] 육정산(六頂山)고분군에서

그의 묘와 함께 묘비가 발견되면서 알려졌다.

그 비문에 의하면, 문왕의 둘째딸로 출가하였으나 그 남편은 그녀보다 먼저 죽었으며,

보력(寶曆) 4년(777) 4월 14일 40세로 죽었다고 한다.

정혜공주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보력 7년 11월에 진릉(珍陵) 서원(西原)에 배장(陪葬)되었다고 한다.

 

발해 정혜공주묘비

 

정혜공주묘

 

정혜공주묘 내부

 

정혜공주묘

 

정혜공주묘비

 

발해 정혜공주는 무왕의 둘째딸이다.

이 묘에서는 묘비와 돌사자상 등이 출토되었다.

묘비에는 모두 725자가 기록되어 있다.

이는 발해의 신비를 푸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였다.

이 묘비는 세련된 4,6 변려체로 되어 있어 발해의 한문학 수준이 상당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발해인이 지은 한시들은 뛰어난 예술성으로 당과 일본에서도 크게 호평받았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발해의 중앙 귀족 문화가 당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발해는 많은 유학생과 유학승을 당에 파견하여 선진적인 한문학과 유교문화,

그리고 불교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정혜공주묘지(貞惠公主墓誌) 

 

판독문 : 송기호 
  
         
  貞惠公主墓誌並序」
夫緬覽唐書嬀汭降帝女之濱博詳丘傳魯舘開王姬之筵豈非婦德昭昭譽名其於有後母儀穆穆餘」
慶集於無疆襲祉之稱其斯之謂也  公主者我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之第二女也惟祖惟」
父王化所興盛烈戎功可得而論焉若乃乘時御辨明齊日月之照臨立極握機仁均乾坤之覆載配重」
華而旁夏禹陶殷湯而周文自天祐之威如之吉公主稟靈氣於巫岳感神仙於洛川生於深宮幼聞婉嫕」
瓌姿稀遇曄似瓊樹之叢花瑞質絕倫溫如崑峯之片玉早受女師之敎克比思齊每慕曹家之風敦詩」
悅禮辨慧獨步雅性自然▨▨好仇嫁于君子標同車之義叶家人之永貞柔恭且都履愼謙謙簫樓」
之上韻調雙鳳之聲鏡臺之中舞狀兩鸞之影動響環珮留情組紃藻至言琢磨潔節繼敬武於勝里」
擬魯元於豪門琴瑟之和蓀蕙之馥誰謂夫聟先化無終助政之謨稚子又夭未經請郎之日公主出織」
室而灑涙望空閨而結愁六行孔備三從是亮學恭姜之信矢銜杞婦之哀悽惠于 聖人聿懷閫德而」
長途未半隙駒疾馳逝水成川藏舟易動粵以寶曆四年夏四月十四日乙未終於外第春秋四十諡曰」
貞惠公主寶曆七年冬十一月廿四日甲申陪葬於珍陵之西原礼也 皇上罷朝興慟避寢㢮懸喪事」
之儀命官備矣挽郎鳴咽遵阡陌而盤桓轅馬悲鳴顧郊野而低昂喻 以鄂長榮越崇陵方之平陽恩加」
立厝荒山之曲松檟森以成行古河之隈泉堂邃而永翳惜千金於一別留尺石於萬齡乃勒銘曰」
丕顯烈祖功等一匡明賞愼罰奄有四方爰及君父壽考無疆對越三五囊括成康」
惟主之生幼而洵美聰慧非常博聞高視北禁羽儀東宮之姉如玉之顏蕣華可比」
漢上之靈高唐之精婉之熊閫訓玆成嬪于君子柔順顯名鴛鴦成對鳳凰和鳴」
所天早化幽明殊途雙鸞忽背兩劍永孤篤於潔信載史應圖惟德之行居貞且都」
愧桑中詠愛柏舟詩玄仁匪悅白駒疾辭奠殯已畢卽還靈轜魂歸人逝角咽笳悲」
河水之畔斷山之邊夜臺何曉荒隴幾年森森古樹蒼蒼野煙泉扃俄閟空積悽然」
寶 曆 七 年 十 一 月 廿 四 日」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III(1992)] 
 
 
 
 
 
 
정혜공주묘지(貞惠公主墓誌) 

 

해석자 : 송기호 
   
          
정혜공주 묘지 및 서문


무릇 오래 전에 읽었던『상서(尙書)』를 돌이켜 보건대 요(堯) 임금은 두 딸을 규수(嬀水)의 물굽이에 내려보내 순(舜) 임금에게 시집보냈고,『좌전(左傳)』을 널리 상세히 보건대 주(周) 천자(天子)가 딸을 제(齊)나라에 시집보낼 때에 노(魯) 장공(莊公)이 노관(魯館)을 지어 그 혼례를 주관하였다. 그러니 부녀자로서 갖추어진 덕이 밝고 밝으면 명예로운 이름이 어찌 후세에 전해지지 않을 것이며, 어머니로서 갖추어진 규범이 아름답고 아름다우면 선인(先人)들이 쌓은 은혜가 어찌 무궁하게 전해지지 않으리오? 조상들의 복을 물려받는 것이란 바로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공주는 우리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의 둘째 딸이다. 생각컨대 고왕(高王), 무왕(武王)의 조상들과 아버지 문왕은 왕도(王道)를 일으키고 무공(武功)에서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고 능히 말할 수 있으니, 만일 이들이 때를 맞추어 정사(政事)를 처리하면 그 밝기가 일월(日月)이 내려 비치는 것과 같고, 기강을 세워 정권을 장악하면 그 어진 것이 천지(天地)가 만물을 포용하는 것과 같았다. 이들이야말로 우순(虞舜)과 짝할 만하고 하우(夏禹)와 닮았으며, 상(商) 탕왕(湯王)과 같은 지혜를 배양하고 주(周) 문왕(文王)과 같은 도략(韜略)을 갖추었다. 하늘에서 이들을 도와주니, 위엄을 베풀어 길하게 되었도다.
공주는 무산(武山)에서 영기(靈氣)를 이어받고, 낙수(洛水)에서 신선(神仙)에 감응받았다. 그녀는 궁중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유순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용모는 보기 드물게 뛰어나 옥과 같은 나무에 핀 꽃들처럼 아름다왔고, 품성은 비할 데 없이 정결하여 곤륜산(崑崙山)에서 난 한 조각의 옥처럼 온화하였다. 일찍이 여사(女師)에게서 가르침을 받아 능히 그와 같아지려고 하였고, 매번 한(漢) 반소(班昭)를 사모하여 시서(詩書)를 좋아하고 예악(禮樂)을 즐겼다. 총명한 지혜는 비할 바 없고, 우아한 품성은 저절로 타고난 것이었다. 공주는 훌륭한 배필로서 군자에게 시집갔다. 그리하여 한 수레에 탄 부부로서 친밀한 모습을 보였고, 한 집안의 사람으로서 영원한 지조를 지켰다. 그녀는 부드럽고 공손하고 또한 우아하였으며, 신중하게 행동하고 겸손하였다. 소루(簫樓) 위에서 한 쌍의 봉황새가 노래부르는 것 같았고, 경대(鏡臺) 가운데에서 한 쌍의 난조(鸞鳥)가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움직일 때면 몸에 단 패옥이 소리를 냈고, 머물 때면 의복의 띠를 조심하였다. 문장력이 뛰어나고 말은 이치에 맞았으며, 갈고 닦아서 순결한 지조를 갖추고자 하였다. 한(漢) 원제(元帝)의 딸 경무(敬武)공주처럼 아름다운 봉지(封地)에서 살았고, 한(漢) 고조(高祖)의 딸 노원(魯元)공주처럼 훌륭한 가문에서 생활하였다. 부부 사이는 거문고와 큰 거문고처럼 잘 어울렸고, 창포와 난초처럼 향기로왔다. 그러나 남편이 먼저 돌아갈 것을 누가 알았으랴, 지모(智謀)를 다하여 정사를 보필하지 못하게 되었구나. 어린 아들도 역시 일찍 죽어, 미처 소년으로서의 나이를 지나지 못하였다. 공주는 직실(織室)을 나와 눈물을 뿌렸고, 빈 방을 바라보며 수심을 머금었다. 육행(六行)을 크게 갖추고 삼종(三從)을 지켰다. 위(衛) 공백(共伯)의 처 공강(共姜)의 맹세를 배웠고, 제기량(齊杞梁)의 처와 같은 애처러움을 품었다. 부왕(父王)에게서 은혜받아 스스로 부덕(婦德)을 품고 살았다. 인생길이 절반도 되지 않았는데 세월은 달음질치고, 흐르는 물은 내를 이루어 계곡에 견고하게 감추어진 배를 쉽게 움직이는구나. 아아, 공주는 보력(寶曆) 4년(777) 여름 4월 14일 을미일(乙未日)에 외제(外第)에서 사망하니, 나이는 40세였다. 이에 시호를 정혜공주(貞惠公主)라 하였다. 보력 7년 겨울 11월 24일 갑신일(甲申日)에 진릉(珍陵)의 서쪽 언덕에 배장하였으니, 이것은 예의에 맞는 것이다.
황상(皇上)은 조회를 파하고 크게 슬퍼하여, 정침(正寢)에 들어가 자지 않고 음악도 중지시켰다. 장례를 치르는 의식은 관청에 명하여 완비하도록 하였다. 상여꾼의 목메어 우는 소리 발길따라 머뭇거리고, 수레 끄는 말의 슬피 우는 소리 들판따라 오르내리는구나. 한(漢) 악읍공주(鄂邑公主)처럼 영예는 숭산(崇山)을 뛰어넘고, 당(唐) 평양공주(平陽公主)처럼 은총을 장례에 더하였다. 황산(荒山)의 골짜기에 소나무와 개오동나무가 빽빽히 줄을 이루고 있는데, 고하(古河)가 굽이치는 곳에 있는 무덤은 깊숙히 감추어져 있구나. 천금같은 공주와 이별하기가 아쉬워, 비석을 세워 영원히 남기고자 한다. 이에 명문(銘文)을 새겼으니 다음과 같도다.
위대하고 빛나는 업적을 세운 조상들은 천하를 통일하였고, 상주는 것을 분명히 하고 벌내리는 것은 신중히 하여 그 인정(仁政)이 사방에 미쳤다. 부왕(父王)에 이르러서는 만수무강하여 3황(皇)5제(帝)와 짝하였고 주(周)나라 성왕(成王), 강왕(康王)을 포괄하였다. 생각컨대 공주가 태어나매 어려서부터 진실로 아름다왔고, 비상하게 총명하고 슬기로와 널리 듣고 높이 보았다. 궁궐의 모범이 되었고 동궁(東宮)의 누나가 되었으니, 옥같은 얼굴은 무궁화만이 비길 수 있었다. 한강(漢江) 신녀(神女)의 영기(靈氣)를 품고 고당(高唐) 신녀(神女)의 정기를 이었으며, 고운 자태를 지니고 부덕(婦德)의 가르침 속에 자랐다. 군자에게 시집가서 유순하기로 이름났으며, 원앙새가 짝을 이루듯 하였고 봉황새가 울음에 화답하듯 하였다. 남편이 일찍 죽어 유명(幽明)을 달리 하니, 한 쌍의 난조(鸞鳥)가 홀연히 등을 돌린 듯하였고 쌍검이 영원히 떨어져 있는 듯하였다. 순결과 정절에 돈독하여 역사책에 기록하고 그림으로 남길 만하며, 부덕(婦德)을 행함에 정조가 있고 아름다왔다. 사랑의 노래를 부끄러워 하고 수절의 시를 즐겨하였으며, 크게 어질고 근심으로 즐거워하지 않는 중에 세월이 어느듯 빨리 지나 공주도 세상을 하직하였다. 장례가 이미 끝나 상여가 돌아갈 때, 공주의 혼은 하늘로 돌아가고 사람들은 집으로 되돌아오니 뿔피리 소리 구슬프고 호드기 소리 처량하다. 강가의 깎아지른 산 옆에 자리잡으니, 묘광(墓壙)은 언제 광명을 볼 것이며 봉분(封墳)은 언제까지 갈 것인가. 고목이 무성하고 들판에 연기가 자욱한데, 무덤 문을 갑자기 닫으니 처량한 감정이 홀연히 쌓이는구나.
보력(寶曆) 7년 11월 24일.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III(1992)] 
 

 


정혜공주묘지(貞惠公主墓誌) 


<개관>
 
  
 
  
시대   발해
 
 
연대   780년(문왕44년)
 
 
유형/재질   비문 / 화강암(花崗巖) 
 
 
문화재지정   기타문화재 - 국외 
 
 
크기   높이 90cm, 너비 49cm, 두께 29cm
 
 
출토지   중국 길림성(吉林省) 돈화시(敦化市) 강동향(江東鄕) 승리촌(勝利村) 육정산(六頂山) 고분군 IM2호 
 
 
소재지   (중국)길림성박물관 
 
 
서체   해서체(楷書體)
 
 
찬자/서자/각자   --->    미상 / 미상 / 미상 
 
  
 
 
 
 정혜공주(貞惠公主)는 발해 제3대 문왕(文王)의 둘째 딸로서 737년(문왕 1)에 태어나 777년(문왕 41)에 4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정혜공주의 무덤은 중국 길림성(吉林省) 돈화시(敦化市) 강동향(江東鄕) 승리촌(勝利村) 육정산(六頂山) 고분군에 있다. 1949년 연변대학교에서 1차로 발굴하고, 1959년에 재차 발굴 조사하였다. 무덤은 고구려의 전형적인 돌방흙무덤[석실봉토분]으로 묘지석은 널길 안에서 7조각으로 깨진 채로 발견되었다. 위가 뾰족하고 아래는 네모진 규(圭:옥으로 만든 홀) 모양이며 크기는 높이 90cm, 너비 49cm, 두께 29cm이다. 앞면에 해서체(楷書體)로 음각하였다. 묘지에 글자를 21행으로 새겼는데, 전문 725자 가운데 491자만 명확하게 판독할 수 있다. 그러나 내용이 정효공주묘지와 거의 동일하기 때문에 비문의 내용은 정효공주묘지를 통하여 완전히 복원할 수 있다. 묘지석은 현재 중국 길림성 장춘시(長春市) 길림성박물관(吉林省博物館)에서 보관하고 있다. 그 내용은 정혜공주의 출신, 공주의 지혜로움과 아름다움을 칭송한 것, 출가, 남편과 아들을 잃고 수절한 사실, 장례, 애도문의 순으로 구성되었다. 정혜공주묘지는 정효공주묘지와 더불어 발해인이 남긴 아주 귀한 자료이다. 특히 발해 초기의 역사를 규명하는 데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예를 들어 육정산(六頂山) 고분군이 발해 왕실의 공동묘지였고, 동모산(東牟山) 지역이 돈화시(敦化市) 일대라는 사실을 증명해주었다. 그리고 문왕대의 여러 가지 정치제도나 불교사상에 관한 정보를 전해주고 있기도 하다.  
 
 
  
 

<참고문헌>  
 
 
 
(단행본)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분과, 2004, 『고대로부터의 통신』, 푸른역사
(단행본)權悳永, 2002, 『韓國古代金石文綜合索引』, 학연문화사
(단행본)國史編纂委員會, 1995, 『韓國古代金石文資料集』Ⅲ, 國史編纂委員會
(논문)이종훈, 1992, 「해방 후 중국에서 발굴된 발해유적들과 그 성격」『역사와 사회』8, 彩文硏究所
(단행본)韓國古代社會硏究所 編, 1992,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논문)방학봉, 1991, 「정혜공주묘지와 정효공주묘지에 대한 비교연구」『발해문화연구』, 이론과 실천
(논문)채희국, 1988, 「발해의 정혜공주묘와 정효공주묘에 대하여」『조선고고연구』, 1988-2
(논문)孫秀仁, 1988 「新中國時期渤海考古學的進展」『白山學報』35, 白山學會
(논문)閻萬章, 1987, 「關于渤海貞惠公主墓志考釋中的一些問題」『遼金史論集』(陳述 主編) 3, 書目文獻出版社
(단행본)許興植, 1984, 『韓國金石全文』古代篇, 亞細亞文化社  
 
 

 

               <정혜공주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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