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해 역사
1. 태조고황제 대조영 천통(698~719)
고구려 말에 송화강에 살던 말갈인들이 요서의 전쟁지로 많이 이주해 들어왔다.
영양왕이 말갈 군대로 당나라 요서군을 쳤고, 안시성 전투에 말갈병이 동원되고 연남생의 국내성에도
말갈병들이 있었다.
668년, 고구려가 망국한 후에 또 말갈인들이 요서로 들어왔다.
이때 숙신 말갈지역의 발해 구국에서 태어난 걸걸중상이 서압록하를 지키다가 고구려 망국을 당하여
동모산에 후고구려을 세웠다.
698년 거란의 이진충이 조양시(영주)에서 난을 일으켜 북경을 점령하니 이 때 대조영은 영주에 들어가서
거란을 도왔다.
그러나 거란이 패퇴하고 대조영과 걸사비우는 영주에 있던 고구려, 말갈인들과 함께 요수를 건너 피한다.
그러나 걸사비우는 전사하고
격파하였다.
여기서 천문령(天門嶺)은 발해 신주(神州) 검문현(儉門縣)으로 고려된다.
창도현에서 천두진(泉頭鎭) 졸본성(발해 신주성)으로 올라가는 고갯길이다.
[구당서] 渤海靺鞨大祚榮者,本高麗別種也。高麗既滅,祚榮率家屬徙居營州。
萬歲通天年,契丹李盡忠反叛,祚榮與靺鞨乞四比羽各領亡命東奔,保阻以自固。盡忠既死,
則天命右玉鈐衛大將軍李楷固率兵討其余黨,先破斬乞四比羽,又度天門嶺以迫祚榮。
祚榮合高麗、靺鞨之眾以拒楷固;王師大敗,楷固脫身而還。屬契丹及奚盡降突厥,道路阻絕,
則天不能討,祚榮遂率其眾東保桂婁之故地,據東牟山,築城以居之。 祚榮驍勇善用兵
靺鞨之眾及高麗余燼,稍稍歸之。聖歷中,自立為振國王,遣使通於突厥。其地在營州之東二千里
南與新羅相接。越熹 靺鞨 東北至黑水靺鞨,地方二千里,編戶十余萬勝兵數萬人。
[신당서] 渤海,本粟末靺鞨附高麗者,姓大氏。高麗滅,率眾保挹婁之東牟山,地直營州東二千里,
南比新羅,以泥河為境,東窮海,西契丹。築城郭以居,高麗逋殘稍歸之。 萬歲通天中,
契丹盡忠殺營州都督趙翽反,有捨利乞乞仲象者,與靺鞨酋乞四比羽及高麗餘種東走,度遼水,
保太白山之東北,阻奧婁河,樹壁自固。武後封乞四比羽為許國公,乞乞仲象為震國公,赦其罪。
比羽不受命,後詔玉鈐衛大將軍李楷固、中郎將索仇擊斬之。是時仲像已死,其子祚榮引殘痍遁去,
楷固窮躡,度天門嶺。祚榮因高麗、靺鞨兵拒楷固,楷固敗還。於是契丹附突厥,王師道絕,不克討。
祚榮即並比羽之眾,恃荒遠,乃建國,自號震國王,遣使交突厥,地方五千里,戶十餘萬,勝兵數萬。
頗知書契,盡得扶餘、沃沮、弁韓、朝鮮海北諸國。中宗時,使侍御史張行岌招慰,祚榮遣子入侍。
睿宗先天中,遣使拜祚榮為左驍衛大將軍、渤海郡王,以所統為忽汗州,領忽汗州都督。
自是始去靺鞨號,專稱渤海。
당나라는 거란 돌궐 등이 유주 영주를 노력하니 더 이상 발해를 어쩌지 못하였고 천문령 전투후에
대조영은 태백산 동북 계루고지 동모산에서 대진국(발해)를 건국하였다.
대조영은 천통(天統)이라고 개원하였다.
태백산 동북은 요원시 북쪽이 되고, 이통현의 대고산자 등의 화산지대가 태백산으로 고려된다.
또한 동모산이 계루고지이므로 이는 고구려 중부에 해당하니 졸본성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이통현의 동첨산향에 있는 동첨산 산성이 바로 동모산 위치에 해당한다.
우리말 "모"가 한자로 첨으로 바뀐 것으로 고려된다.
태백산동북이면서 또 오루하 변이라고 했는데 장춘시를 지나는 송화강을 청나라 때에도 오라하라고 불렀다.
즉 송화강이 오루하이자 훗날의 홀한강이었다.
이통현 동모산성의 위용
북쪽에서 본 동모산성
동모산성으로부터 장춘시로 내려가는 곳에 있는 전가둔 고성.
대조영은 동모산에서 건국했지만 천보 때 발해왕도는 현주로서 홀한주라고도 했다.
이는 당나라 현종의 사자 최흔이 713년에 요동반도 대련을 거쳐 발해 수도를 찾아가서 대조영을 만난
기록으로 알 수 있다.
玄宗遣郎將崔訢冊王為渤海郡王授左驍衞員外大將軍以所統州為忽汗州領忽汗州都督
당나라 정원 때인 고탐의 <도리기>에서 현주(顯州)는 당나라 천보 때의 발해 왕도이며 중경현덕부라고도 했다.
[신당서-도리기]에 의하면
발해 상경으로부터 서남방으로 600리고 발해 서경 압록부로부터는 육로로 400리였다.
神州 又 陸行 四百里 至顯州 天寶中 王所都, 顯州 天寶中 王 所都 又 正北如東 六百里 至 渤海王城
현주는 첫 번째 홀한성이다.
그 위치는 청나라 강희제의 기록에 나오는데 장춘시 농안에서 가까운 곳이다.
강희제 때의 [호종동순일록(扈從東巡日錄)]에 의하면
금나라 태조 아골타가 영강주(寧江州)에서 파자간산(婆刺赶山)을 지나 달로고성(達魯古城)을 지나
요나라 황룡부(黃龍府): 장춘시(長春市) 농안현성(農安縣城)에 이른다.
그리하여 “마침내 현주를 차지했다 遂克顯州”고 말했다.
즉 현주가 농안과 가까운 곳이다.
명나라 때 전여성田汝成이 지은 [요기遼紀]에서는 개원시 동북방의 평정산平頂山에 있다고 하였다.
정통正統 13년조에 개원開原市 기반산棋盤山에서 평정산平頂山으로 가는 도중에 현주폐성顯州廢城,
요나라 때 중경中京이 있다고 하였다.
開原.... 東北 平頂山中 有 顯州廢城者 遼時中京也..肥饒之地 不下萬頃...
뒤에 이어지는 비요지지,불하만경은 요하투 평야를 가리킨다.
청나라 양빈楊賓이 지은 [유변기략柳邊紀略 卷1]에서도
개원의 서북에 요하투가 있고 요하투는 구현주의 남쪽이라고 하였다.
“遼河套 在開原西北 舊顯州城下“ 라고 하였다.
동요하와 서요하가 만나기 전의 동요하로 둘러싸인 평원이다.
東遼河,自吉林伊通州赫爾蘇邊門入,北流,屈西南入遼河.環縣境東、北、西三面,
稱遼河套.其右岸為懷德境.舊設舖司二:東北小城子入懷德;東南四平街入府.
요하투套는 요하遼河의 만곡부彎曲部를 의미한다.
투套가 본래 강이나 산이 만곡하는 지방을 가리키며 하투河套는 황하黃河 만곡부, 즉 음산산맥 아래를 가리킨다.
따라서 요하투套는 지금 동요하가 이수현梨水縣을 통과하는 만곡부다.
이 부위를 개원의 서북이라 한 것이 맞는데, 동시에 구현주舊顯州의 남쪽이라 한 것이다.
역시 청나라 때의 [전요비고全遼備考]에도 요하투에 관한 같은 글이 있다.
요하투는 개원 서북에 있고 구 현주성 아래에 있으며 물은 달고 흙은 후덕하고 평야가 바다보다 작지 않다.
套 在開原西北 舊顯州城下 水甘土厚 平地 不下萬頃...
따라서 대조영의 첫 번째 홀한성 현주는 동요하의 유역이고 동요하를 장악하는 평정산에 있고 장춘시 농안현
황룡부성과 가깝다.
농안현과 공주령시 사이에 쌍성보진이 있는데 그 동쪽은 송화강 수계이고 서쪽은 대청산이면서 그 산너머
서남쪽은 요하투 평원이다.
쌍성보진 서북에 대조양보(大朝陽堡)가 있는데 본래 대조영보(大祚榮堡)가 이닌지 의심된다.
아니더라도 수도를 의미하는 것이 조양(朝陽)이다.
서남쪽 대청산유지에서는 청동시대 청동검이 발굴되었다.
대조양보에서 요하투로 넘어오는 도중에 나권구가 있는데 외라성에 해당한다.
발해 현주성의 위치
발해 현주성의 구획도
북쪽에서 본 발해 현주성
2. 광종무황제 대무예 인안(720~738)
대무예황제는 개마, 구다, 흑수를 복속시켰다. 당나라가 그를 일찍이 계루군왕이라고 호칭한 것은
그가 발해 황태자로서 서경에서 주로 있었기 때문으로 고려된다.
즉위 첫해에 태자인 대도리행이 당나라로부터 계루군왕으로 책봉되었다.
八月唐冊王嫡男大都利行為桂婁郡王
이무렵 대창발가는 양평현 개국남이라고 작위를 받았는데 지금 대릉하가 확실하게 발해 소유였다.
大昌勃價襄平縣開國男
청나라 흥경(지금의 무순시 신빈현)에 출현했던 무황제 고분 벽돌 하나에 그가 서경(西京)에 묻혔다고
기록되었다.
요양시 석성에 발해 태자가 거처했다는 기록도 내려오는데 이는 후고구려를 멸망시킨 819년 이후로 고려된다.
복속했던 흑수말갈과 당나라가 교통하자 흑수부를 쳤다. 훗날에 후고구려도 당나라와 교통하자 없애버렸다.
이때 동생 대문예가 당나라로 망명하였다. 대무예황제는 산동반도에 장문휴를 보내어 등주자사 위준을
죽이고 돌아오는 길에 요서의 대산 남쪽에서 당나라군을 격파하였다.
지금의 산해관 앞 구려하까지 영토를 확장했던 것이다.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하여 발해를 공격했으나 실패하였고 이후 다시 당과 발해는 화친하였다.
735년 송막 12성을 쌓고 요서 6성을 쌓았다.
구다에 송막 12성을 쌓은 것이다.
구다는 영고탑이 있던 적봉시 지역이다.
5경 60주 1군 38현을 두었으니 해동성국이라고 불렀다.
玄宗開元七年,祚榮死,其國私謚為高王。子武藝立,斥大土宇,東北諸夷畏臣之,私改年曰仁安。
帝賜典冊襲王並所領。未幾,墨水靺鞨使者入朝,帝以其地建黑水州,置長史臨總。
武藝召其下謀曰:「黑水始假道於我與唐通,異時請吐屯於突厥,皆先告我,今請唐官不吾告,
是必與唐腹背攻我也。」乃遣弟門藝及舅任雅相發兵擊黑水。門藝嘗質京師,知利害,
謂武藝曰:「黑水請吏而我擊之,是背唐也。唐,大國,兵萬倍我,與之產怨,我且亡。昔高麗盛時,
士三十萬,抗唐為敵,可謂雄強,唐兵一臨,掃地盡矣。今我眾比高麗三之一,王將違之,不可。」
武藝不從。兵至境,又以書固諫。武藝怒,遣從兄壹夏代將,召門藝,將殺之。門藝懼,儳路自歸,
詔拜左驍衛將軍。武藝使使暴門藝罪惡,請誅之。有詔處之安西,好報曰:「門藝窮來歸我,誼不可殺,
已投之惡地。」並留使者不遣,別詔鴻臚少卿李道邃、源復諭旨。武藝知之,
上書斥言:「陛下不當以妄示天下」,意必殺門藝。帝怒道邃、復漏言國事,皆左除,而陽斥門藝以報。
後十年,武藝遣大將張文休率海賊攻登州,帝馳遣門藝發幽州兵擊之。使太僕卿金思蘭使新羅
督兵攻其南。會大寒,雪袤丈,士凍死過半,無功而還。武藝望其弟不已,募客入東都狙刺於道。
門藝格之,得不死。河南捕刺客,悉殺之。 武藝死,其國私謚武王。
3. 세종문황제 대흠무 대흥,보력(738~794)
대흠무황제 연호는 대흥이었다.
대흠무황제의 두 공주 묘비에서 그가 다시 보력으로 개원한 것이 밝혀졌다.
두 공주 묘비로 인해 발해 수도가 그 부근으로 알려졌으나 그렇지 않다.
대흠무황제는 천보말에 상경으로 천도하였다. 숙신고지 구국舊國으로부터 300리라고 하였다.
고탐의 <도리기>에 의하면 현주로부터 600리 정북동이다.
한편 [대원일통지大元一統志]의 글을 보면 발해 상경성은 혼동강 유역에 있었다.
혼동강이란 홀한강의 의역(意譯)이다.
혼동강은 장백산에서 발원하는데, 북으로 흘러 “발해 건주” 서쪽 오십리에서 여러 물을 만나 “동북”으로
흐르고 발해의 상경을 지난다.
아래로 흘러 오국두성의 북쪽을 지나 동북으로 흘러 바다로 간다.
混同江 拔源 長白山 北流經 渤海 建州 西五十里 會諸水
東北流 經 上京 下達 五國頭城北 又 東北注 于海
상경고성은 본래 숙신고성이고 발해 대씨가 상경이라 하였다.
금나라가 요나라를 멸하고 발해 상경에 도읍하고 훗날 회녕부라고 하였다.
上京 古城은 본래 肅愼氏地이고 渤海大氏가 改爲 上京하였다
金旣滅遼 卽 上京 建邦設都 後改 會寧府
이제까지 원나라 기록에 의하면 금나라 상경은 발해 상경이고,
발해 상경은 장백산에서 발원하는 송화강 주변에 있었으며
결코 장백산에서 발원하지도 않는 지금의 모란강 주변에 발해 상경을 둔 것이 아니었다.
[신당서-발해전]에 상경 천도 대목이 있다.
대흠무가 구국으로부터 300리 되는 홀한하 동편의 상경으로 천도하였다.
欽茂 徒 上京 直舊國 三百里, 忽汗河之東.
다음은 [구당서]다.
오환국의 설명을 보면 후륜바얼 호에서부터 나오는 흑룡강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홀한강이 등장한다.
오환국의 북쪽은 대산을 넘어서 대실위부락이 있다. 그 부락은 망건하(흑룡강 최상류) 주위에 있다.
今亦自稱烏丸國。武德、貞觀中,亦遣使來朝貢。其北大山之北有大室韋部落,其部落傍望建河居。
그 흑룡강은 후륜바얼호에서 나온다.
꺽여서 동쪽으로 흐르고 실위의 서쪽 경계를 지나, 동쪽으로 대실위(러시아 영토) 경계를 지나 동쪽으로
몽올실위 북쪽을 지나 낙조실위 남쪽을 지나 또 동으로 흘러 나하를 만나고(지금 흑하시에서 러시아로부터
내려온 나하가 합류한다.) 그리고 홀한하와 합쳐서 동쪽으로 남흑수말갈의 북쪽과 북흑수말갈의 남쪽을
지나 동쪽 바다로 들어간다.
其河源出突厥東北界俱輪泊,屈曲東流,經西室韋界,又東經大室韋界,又東經蒙兀室韋之北,
落俎室韋之南,又東流與那河、忽汗河合,又東經南黑水靺鞨之北, 北黑水靺鞨之南,東流注於海
물론 목단강도 합류하지만 작은 가지일 뿐인다.
즉 송화강을 홀한강이라고 불러왔던 것이다.
즉 결론적으로 발해 상경은 금나라 상경과 같다.
이제까지 금나라 상경으로 알려졌던 아성시 고성은 본래 발해 상경이었다.
하얼빈 아래 아성시 금나라 상경터 발굴 평면도를 보면 [ㄴ] 자인데 이것은 두 개의 성터가 겹친 것이다.
금나라 상경의 남성이 발해 상경 궁성이었다.
금나라 상경 기록에 의하면 아골타가 산채를 짓고 살다가, 서남방에 아골타 묘지도중 금태조묘를 만들고
후에 남북 쌍성을 세워 아골타묘를 멀리 이장했다가 도로 원위치했다. 즉 북성이 처음부터 황성이었다.
북성과 남성을 나누는 중앙 성벽을 보면 옹성문이 남쪽으로 향했다.
옹성문의 방향을 보면 남북 쌍성이 되고도 북성이 여전히 금나라 황성이다.
그런데 남쪽성에 분명한 황궁터가 또 있으니, 이는 금나라 황궁이 아니라 먼저 지어진 발해 황궁일 수밖에 없다.
즉 가로로 직방형인 발해 상경성이 허물어지고서 그 북방에 금나라 아골타가 와서 성채를 짓고 살다가,
발해 상경성을 포함하는 남성을 다시 만들어서 남북 쌍성으로 다시 만들었다.
이를 발해 상경인 남성만 분리해 보면 위 오른쪽 그림과 같다.
발해 상경성의 규모는 동변이 1500m이고 남변이 2200m이니 성둘레 7400m의 대성이다.
금나라 상경의 규모는 합쳐서 11000m가 된다.
게다가 이 발해 상경, 즉 남성 내에서 황궁터만 다시 유심히 살펴보면 이는 발해 동경성의 내성 황궁터와 매우
흡사하다.
이런 내성의 모습은 요나라나 금나라가 아닌 발해 식이다.
이는 화룡化龍의 서고성西古城, 혼춘琿春의 팔련성八連城을 보아도 금나라 상경의 남성은 역시 발해성이라는
느낌이 온다. 또한 상경성 서남쪽에는 숙신 고성이 남아있다.
발해 때에도 수도의 남산성으로 이용되었을 것이다.
한편 300리 남쪽의 발해 구국(舊國)은 금나라 태조 아골타가 가르쳐준다.
[금사-태조기金史-太祖紀]의 건국기를 보면,
금나라 태조 아골타가 처음 거병을 하였을 때, 요나라 영강주(寧江州)는 대대로 발해 대씨(大氏) 소유였는데,
영강주 사람 발해대가노(渤海大家奴)가 달로고부로부터 아골타를 찾아와서 보고 말하기를
“요나라를 치려고 아골타가 거병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왔는데, 우리(=발해인)는 누구를 따라야 할까?”물으니,
태조가 대답하기를
“나의 군사가 비록 적지만 발해 구국 땅의 너희 발해족과 여진족은 이웃이었다. 마땅히 나를 따르라.
만일 요나라를 따르면 내가 가서 영강주를 치겠다.”고 말했다.
寧江州渤海大家奴 於是達魯古部實裡館來告曰 聞舉兵伐遼,我部誰從?
太祖曰 吾兵雖少 舊國也. 與汝鄰境 固當從我. 若畏遼人 自往就之.
이 직후에 발해 대가노는 아골타의 신하가 되었다.
그러나 영강주를 지키던 성주 발해인 대약사노大藥師奴는 항복하지 않았다.
아골타는 한달만에 영강주를 쳐서 성주인 방어사防禦使 발해 대약사노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금태조 아골타는 대약사노를 용서하고 풀어주면서 “발해와 여진은 본동일가本同一家”라며
회유하고 여타의 발해인들도 회유하고 우대하였다.
금나라 4대 황제인 해릉왕의 모후가 발해인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아골타가 영강주寧江州를 놓고서 발해 구국舊國을 말한 것이다.
대파고성은 성둘레 3150m이며 호성하(참호)로 둘러 싸여 있다.
영강주는 [호종동순일록扈從東巡日錄]에서
길림시吉林市 오라고성烏拉古城에서 80리 물길인데 바로 장춘시 유수현楡樹縣 대파고성大坡古城이다.
숙신고지肅愼故地가 본래 장춘이다.
발해 구국이었던 장춘시 유수현 대파고성은 동변이 1050m, 서변이 840m 남북이 각각 630m로서
총 3150m의 둘레를 가졌다.
동서남북으로 각각 4문이 있었고 발굴 결과 포문布文기와와 녹유綠釉기와, 연주수면連珠獸面 기와,
꽃무늬 와당 등이 나왔다. 왕성의 화려함이다.
성내에서는 대형 조각 벽돌, 청색 벽돌, 동경, 철솥, 옥기, 석기, 돌공石球 등이 나왔다.
성 외곽에서도 6개의 건축지와 1개의 야철지冶鐵地가 나왔다.
석각 호랑이와 용운문龍雲紋 옥패식玉佩飾이 아름답고, 칼, 창, 검, 화살, 불상 등 청동류와 각종 동패식이
출현하며 쌍룡문, 쌍어문 동경 등 여러 동경도 나왔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대파고성 남쪽의 노하침향老河沈鄕에서는 발해 최초의 고분군古墳群이 발굴되었다.
발해 묘장이 139좌이며 석관묘와 목관묘도 있고 철갑편, 철검 등 철기와 구리장식, 은장식 등이 있었다.
게다가 발해 고분으로 유명한 돈화현敦化縣 육정산六頂山 고분군보다 훨씬 이른 발해 조기 고분 양식으로
발표되었다.
따라서 그동안 돈화현 육정산이 발해 구국이라고 주장한 것은 수정되어야 한다.
현재까지 발굴된 발해 고분과 노하심의 숙신족肅愼族 고분 때문에 발해 구국으로서 대파고성은 확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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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자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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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우리의 역사적 관심이 집중되야 할 곳은 노하침에서 발굴된 동한시대東漢時代 묘장 129좌다.
발해 초기 묘장보다 훨씬 화려하고 정교한 구리장식, 금은 장식이 발굴되었는데,
이는 동한시대의 숙신족 고분이다.
대파고성 앞 노하침 고분의 숙신 유물, 허리띠 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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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상경은 바로 이 숙신고지에 세워졌다.
그리하여 중국 장춘시(長春市)는 홈페이지를 통해서 공식적으로 숙신(肅愼)의 후예를 자처하여왔다.
단, 얼마전부터는 부여라고 주장하고 있다...
단재 신채호가 단군 도읍지 완달산으로 고려했던 곳이 바로 이 발해 상경인 아성이다.
그러나 이곳은 단군 시대 청동기 문물의 변방으로서 단군 도읍지가 될 수 없다.
요나라는 대파고성에 영강주 혼동군(寧江州 混同軍)을 두었다.
혼동(混同)은 홀한(忽汗)과 같은 말로서 홀한강이 혼동강으로 바뀌는 계기가 된다.
고대 백제 한강이 지금의 대동강으로 이름이 바뀌는 것과 같다.
금나라 태조 아골타보다 발해 역사지리를 더 잘 아는 현세 역사학자는 있을 수 없다.
게다가 돈화현 육정산 발해 고분보다 훨씬 더 빠른 초기 발해 고분까지도 충분히 많이
대파고성 인근에서 발굴되었다.
금나라가 아성시에 상경을 세운 이유는 아성시 북쪽 철산지(鐵産地) 때문이다.
여진족은 금만 있고 철이 없어서 무기 제조에 어려움을 겪었다.
발해문황제 대흠무 역시 같은 이유로서 이곳에 도읍을 정했을 것이다.
대흠무황제는 정원 때에 다시 한번 천도하였는데 동경이다.
지금 영안현의 동경성이다.
만주에서 가장 큰 성이다. (동서로 4580m, 남북 3300m다.)
발해 동경성은 그 이름이 지금도 동경성이다.
발해 호주가 된 영안현 동경성 내 동경성 평면도와 동경성의 황궁도
子欽茂立,改年大興,有詔嗣王及所領,欽茂因是赦境內。天寶末,欽茂徙上京,直舊國三百里忽汗河之東。
訖帝世,朝獻者二十九。寶應元年,詔以渤海為國,欽茂王之,進檢校太尉。大歷中,二十五來,
以日本舞女十一獻諸朝。貞元時,東南徙東京。欽茂死,私謚文王。
대원의(794~794)가 즉위했으나 살해당하고, 대흠무 문황제의 손자인 인종성황제 대화여가 즉위하여
중흥(794~795)이라고 개원했으며 이때 상경으로 재천도하였다. 즉 하얼빈 아성으로 옮겨간 것이다.
그러나 대화여황제도 1년만에 서거하고, 대흠무황제의 막내인 목종강황제 대숭린이 즉위하여
정력(795~809)이라 개원하였다.
그후 의종정황제 대원유의 영덕(810~812), 강종희황제 대언의의 주작(813~817),
철종간황제 대명충의 태시(818)을 지나 성종선황제 대인수의 건흥(819~830)에 이르렀다.
子宏臨早死,族弟元義立一歲,猜虐,國人殺之。推宏臨子華璵為王,復還上京,改年中興。死,謚曰成王。
欽茂少子嵩鄰立,改年正歷,有詔授右驍衛大將軍,嗣王。建中、貞元間凡四來。死,謚康王。子元瑜立,改年永德。死,謚定王。弟言義立,改年硃雀,並襲王如故事。死,謚僖王。弟明忠立,改年太始,立一歲死,謚簡王。
4. 성종선황제 대흠무 건흥(819~830)
대인수황제는 대조영의 동생인 대야발의 후손으로서 후고구려를 병합하고 국경을 서와 남으로 더욱 넓혔다.
여기서 대인수황제가 새로 홀한성을 지어서 남천한 것으로 고려된다.
장춘시에서 관성자라는 대성이 발현되었기 때문이다.
동서로 3500m 남북으로 2000m인 이 관성자는 그 규모가 아성의 상경성(2200m x 1500M)보다 훨씬 크다.
따라서 장춘시 관성자는 상경성보다 더 큰 중경성이 아니라, 발해선황제 대인수 때에 새로 만들어진
발해 용천부 홀한성으로 자리매김되어야 하고, 발해국이 요나라 태조에게 멸망당한 홀한성이 된다.
<대원일통지> 개원로(開元路)에서
상경고성上京故城 항목을 보면 상경고성이 본래 숙신씨지이고 발해 대씨가 상경이라 고쳤으며
上京故城 古肅愼氏地 渤海大氏 改爲 上京,
금나라가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즉시 상경에 나라와 도읍을 세웠는데 후에 회녕부라 하였고
(금나라 수도가 북경으로 옮겨갔다.) 상경성의 남쪽에는 건주가 있으며, 상경성 서쪽에는 빈주가 있고,
또 그 서쪽은 황룡부인데 황룡부(장춘시 농안현)는 본래 발해 홀한군인데 뒤에 용천부, 즉 상경이
되었다는 문장을 이해할 수 있다.
黃龍府 卽 渤海之 忽汗郡 後爲 龍泉府
발해의 상경이 본래 금나라 상경터(아성시)에 있었지만,
또 요나라 황룡부 부근에 발해 후기 상경용천부가 생겨났던 것이다.
그래서 금나라가 도읍한 상경을 <금사/지리지>에서는
발해 상경이라는 말 대신에 해고지지(上京路,即 海古之地)라고도 하였다.
해고지지는 결국 발해의 옛도읍이라는 뜻이다.
[신당서]에서 정원 때에 발해 수도 상경은 숙신고지라고 하였는데, 대이진 황제 때에 발해를
직접 방문한 북경인 <장건장 묘비문> 에서는 발해 도읍 홀한성이 읍루고지라고 하였다.
癸丑秋(833년) 方舟而東 海濤萬里 明年秋初 達 忽汗州, 州卽 邑婁故地
발해 상경이 바뀐 것이다.
대인수 황제 때에 불열말갈국도 요동성으로 이주하였고, 정리부는 심양으로 이주하였고,
남해부는 요양으로 이주하였으며, 중경 현덕부는 고구려 안시성터인 북진시로 이주하였고
장령부도 현재의 장령현 위치에서 만리장성 동쪽으로 이주하였다.
대이동이 일어났다. 남해부는 본래 두만강 남쪽이었으므로 777년 남해부 토호포에서
일본으로 가는 배가 떠났는데, 이 대인수 황제 때에 무순시의 옥저고지 사비성으로
옮겨들어온 것이다.
그래서 발해 망국 직후에 만주 복판에 자리잡은 정리부와 남해부가 손잡고 반란을 일으킨다.
從父仁秀立,改年建興,其四世祖野勃,祚榮弟也。仁秀頗能討伐海北諸部,開大境宇,有功
詔檢校司空、襲王。元和中,凡十六朝獻,長慶四,寶歷凡再。大和四年,仁秀死,謚宣王。
5. 애제 대연선 청태(819~830)
장종 대이진황제의 함화(831~857),순종 대호광황제의 대정(858~871),명종 대현석황제의 천복(872~893),
대위해황제(894~906)의 태평성대를 지나 발해는 애제 대연선황제의 청태(907~926)에 이르렀는데
거란이 발호하였다.
결국 요서로부터 요양을 뺏기고, 심양을 뺏기고, 장춘 홀한성을 뺏겨서 멸망하였다.
子新德蚤死,孫彝震立,改年咸和。明年,詔襲爵。終文宗世來朝十二,會昌凡四。彝震死,弟虔晃立。
死,玄錫立。咸通時,三朝獻。 初,其王數遣諸生詣京師太學,習識古今制度,至是遂為海東盛國,
발해 망국 당시 <요사/태조기>를 보면
아보기는 872년생인데, 31세인 902년 거란군 40만을 동원하여 산서성 북부를 정벌하고 9만5천명을
끌어다가 용화주를 세워 건국 기초로 삼았다.
용화주는 옹우특기현과 나만기 경계로서 서요하와 적봉시 노로아호하가 합쳐지는 곳이다.
다음해 여진을 치고 그 다음해에는 실위를 쳤는데 이는 요서로 진출했던 부족들이다.
그후 태조는 당나라를 아우로 삼고 36세인 907년 황제에 즉위하였다.
그해 7월 산해관 동쪽의 평로성에 투항한 당나라 장수를 안치한다.
본래 발해의 서쪽 경계였다.
909년 아보기는 요동으로 나간다. 대릉하 동쪽이다.
三年春正春月,幸遼東
911년 해족과 습족(조양시)을 쳐서 동해 바다를 경계로 삼는다.
이 동해 바다는 지금의 대릉하구 정도를 의미한다.
당시 요의 국경이 서쪽으로는 송막(적봉시) 남쪽으로는 백단(난하 중류), 북쪽으로는 서요하,
동쪽으로는 바다였다.
911년 3월 난하 하류로 내려가서 계주(옛 유주)를 차지한다.
912년 3월 유주(북경)를 공격한다. 뒤이어서 7월에 평주를 공략하여 10월에 평주(난하 하류 노룡)를 차지한다.
913년 1월에는 마침내 유주를 함락시킨다.
그런데 이때 아보기 동생 나갈이 도읍에서 반란하여 큰 타격을 받고 평정한다.
915년 10월 압록강에서 낚시를 하는데 신라, 고려 등에서 사자를 보냈다.
冬十月戊申,鉤魚於鴨淥江。新羅遣使貢方物,高麗遣使進寶劍,吳越王錢鏐遣滕彥休來貢。
이 압록강은 고구려 국내성 아래 유하의 하류인 신민시다.
현재 심양시로부터 현재의 요하를 건너 있는 곳으로서 현재의 요서다.
916년 연호를 신책으로 처음 세우고 7월에 친정하여 서쪽의 돌궐 등을 평정한다.
秋七月壬申,親征突闕、吐渾、黨項、小蕃、沙陀諸部,皆平之
10월에는 승승장구하여 중국 진나라(石晉)의 삭주, 울주, 신주, 무주, 위주 등을 차지한다.
즉 산서성의 대북(代北)에서 음산까지 차지한다.
917년 신주에서 유주연합군을 무찌르지만 유주성을 공략하는데 실패한다.
918년 3월 임황부에 황성을 짓는데 발해 등이 사자를 보낸다.
二月,達旦國來聘。癸亥,城皇都,以禮部尚書康默記充版築使。梁遣使來聘。
晉、吳越、渤海、高麗、回鶻、阻卜、黨項及幽、鎮、定、魏、潞等州各遣使來貢。
이때 비로소 태자하의 요양시 고구려 장안성이 요나라 차지가 된 것으로 보인다.
919년 4월 요양고성에 한인들과 발해인들로서 요양성을 고치고修遼陽故城 그곳에 동평군東平郡을 세운다.
즉, 4개월간 공격하고 차지한 것이다.
921년 중국을 공략하다가 12월에 난하의 단주檀州 백성과 북경 부근 순주順州의 백성을
각각 요양시 동평군과 심양시 심주로 이주시킨다.
詔徙檀、順民於東平、瀋州. 요양 공략 때에 심양이 같이 함락된 것인지,
동평군 설치후 2년 동안 차차 함락된 것인지 애매하다.
923년, 난하의 노룡현에 있던 평주를 차지하여 요나라의 평주를 설치한다.
924년 발해가 대릉하의 요주遼州를 약탈하였다.
요양, 심양을 빼앗겼던 발해가 대규모 반격을 해온 것이다.
발해가 요나라 요주자사 장수실을 죽이고 백성들을 끌어갔으므로 주민을 옮겨서 요주를 채우도록 하였다.
是月,徙薊州民實遼州地。渤海殺其刺史張秀實而掠其民。
그후 924년 9월 요나라 태조는 회홀성(신강성)에 가서 각석기공하고 돌아온다.
그리고 겨울에 발해를 치러 나선다.
두가지 사안 중에 하나는 완성되었는데 하나가 남았다...면서 발해를 친정하기로 한다.
十二月乙亥,詔曰 :「所謂兩事,一事已畢,惟渤海世急未雪,豈宜安駐.」
乃舉兵親征渤海大諲譔。皇后、皇太子、大元帥堯骨皆從。
윤12월 임진에 목엽산(아로과이심기 천산)에 제사하고 10일후인 임인에 오산烏山에서 제사하고 7일 후인
기유에 살갈산撒葛山에 이르고 8일후인 정사에 상령商嶺(지금 장령현)에 이르고 그날밤 부여부를 포위한다.
이틀후 춘정월 기미(1월1일 추정)일에 백기가 태양을 통과하더니 다음날 경신일에 부여성을 함락하여
그 장수를 죽인다.
1월 8일 병인일에 선봉대가 떠나서 대연선의 노상병을 만나 격파하고 그날밤에 홀한성으로 포위한다.
閏月壬辰,祠木葉山. 壬寅以青牛白馬祭天地於烏山. 己酉,次撒葛山,射鬼箭. 丁巳,次商嶺,
夜圍扶余府. 天顯元年春正月己未,白氣貫日. 庚申,拔扶余城,誅其守將. 丙寅,命惕隱安端
前北府宰相蕭阿古只等將萬騎為先鋒,遇諲譔老相兵,破之. 皇太子、大元帥堯骨、南府宰相蘇、
北院夷離堇斜涅赤,南院夷離堇迭裡是夜圍忽汗城. 己巳,諲譔請降.
한편 <요사/지리지> 동경도 황룡부를 보면 현재 장춘시 농안(農安)현성이었던 요나라 용주(龍州)는
원래 발해 부여부였고 태조가 발해를 평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곳에서 죽었다.
황룡을 보아서 황룡부라고 했는데, 보령 7년(975년)에 발해인 연파가 반란하여 폐지했다가
개태 9년(1020)에 성을 동북방(현재의 농안)으로 옮기고 종주와 단주 백성으로 채웠다고 하였다.
龍州,黃龍府。本渤海扶余府。太祖平渤海還,至此崩,有黃龍見,更名。保寧七年,
軍將燕頗叛,府廢。開泰九年,遷城於東北,以宗州、檀州漢戶一千復置
따라서 발해 부여부는 농안시 서남에 있었음을 알 수 있고 홀한성은 장춘시인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통주의 설명을 보면 본래 통주는 부여국왕성이었고 발해 부여성이었으나 태조가 용주로 고쳤다가
성종때 통주로 고쳤는데 보령7년(975년)에 반란으로 인하여 연파를 따르던 천여인을 옮겨서 만든 것이다.
通州,安遠軍,節度。本扶余國王城,渤海號扶余城。太祖改龍州
聖宗更今名。保寧七年,以黃龍府叛人燕頗餘黨千余戶置,升節度。
즉 통주는 부여성 사람들, 즉 용주 사람들이지만 장소는 반란으로 인하여 옮겨진 것이고
본래 부여국 왕성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위치를 보면 <대무신왕기>에서 안개가 자욱한 곳으로 묘사된 대소가 망한 부여 왕성으로 고려된다.
파라호를 중심으로 그 동편에 본래 부여왕성이 있고, 발해 부여성이었고 파라호 서남 복룡진(伏龍鎭)이
바로 상령이자 요나라 태조가 머물다가 황룡을 보았다고 하다가 죽은 곳으로서 요나라가 세운
1차 황룡부성으로 고려된다.
방위적으로 부여왕성은 동북으로 옮겨간 농안 2차 황룡부성의 서북이고, 복룡진은 서남이다.
따라서 발해 부여성은 동북에, 요나라 황룡부성은 서남에 있어야 한다.
또 그 서남 상령이 바로 거란을 막기 위해 발해군이 항시 둔을 만들어 강군常屯勁兵扞契丹을 안치해
두었던 곳이 된다.
발해는 거란의 침략으로 926년 1월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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