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신라

28. 진덕여왕(眞德女王)

오늘의 쉼터 2008. 10. 27. 22:03

 28. 진덕여왕(眞德女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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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덕여왕(眞德女王)


※ 생존기간 : (?~654)
※ 재위기간 : (647~654)


※ 본문설명

신라 28대 왕으로서 휘(諱)는 승만(勝曼)이며 진평왕(眞平王)의 모제(母弟; 진평왕의 친동생)인

갈문왕 국반(國飯)의 딸이다. 어머니는 월명부인(月明夫人) 박씨(朴氏)로서 선덕여왕(;재위632-647년)의 뒤를 이어 647년 즉위, 연호를 태화(太和)라 하였다.

647년 정월 17일에 상대등 비담(毗曇)을 잡아 죽이고 그 무리 30명을 죽여 반란을 평정하였다.

2월 알천(閼川)을 상대등에 임명하였고 대아찬(;5등급) 수승(守勝)을 우두주(牛頭州) 군주로 삼았다.

 당 태종이 사신을 보내 부절(符節)을 가지고 앞 임금[선덕여왕(;재위632-647년)]을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추증하고, 아울러 왕을 주국(柱國) 낙랑군왕(樂浪郡王)으로 책봉하였다.

 7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은혜에 감사하였다. 연호를 태화(太和)로 바꾸었다.

 8월에 살별[彗星;혜성의 옛이름]이 남쪽에서 나타났고 뭇 별들이 북쪽으로 흘러갔다.

 10월에 백제 군사가 무산성(茂山城), 감물성(甘勿城), 동잠성(桐岑城)의 세 성을 에워쌌으므로,

왕이 유신을 보내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막게 하였다.

 고전(苦戰)하여 기운이 다 빠졌는데, 유신의 부하 비령자(丕寧子)와 그의 아들 거진(擧眞)이

적진에 들어가 급히 공격하다가 죽으니, 무리들이 모두 분발하여 쳐서 3천여 명을 목베었다.

 11월에 왕이 몸소 신궁(神宮)에 제사지냈다.

 648년 정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3월에 백제 장군 의직(義直)이 서쪽 변경을 침공하여 요거성(腰車城) 등 10여 성을 함락하였다.

 왕이 이를 근심하여 압독주도독 유신에게 명하여 이를 도모하게 하였다.

 유신은 이에 사졸(士卒)을 타이르고 격려하여 거느리고 나아갔다.

 의직이 이에 대항하자 유신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협격(夾擊)하였다.

 백제 군사가 패하여 달아나므로, 유신은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여 거의 다 죽였다.

 왕이 기뻐하여 사졸들에게 상을 주되 차등이 있었다.

 겨울에 한질허(邯帙許)로 하여금 당에 조공케 하였다.

 [당] 태종이 어사(御史)를 시켜 물었다. “신라는 신하로서 대국(大國) 조정을 섬기면서

어찌하여 따로 연호를 칭하는가?” [한]질허가 대답하였다.

 일찍이 천자의 조정에서 정삭(正朔)을 반포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조 법흥왕 이래로 사사로이

기년(紀年)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대국 조정에서 명이 있었다면 작은 나라가 어찌 감히 그렇게 하겠습니까?

 태종이 그렇겠다고 여겼다.

 이찬(;2등급) 김춘추(金春秋; 뒤에 태종무열왕)와 그의 아들 문왕(文王)을 보내 당나라에

조공하였다.

 태종이 광록경(光祿卿) 유형(柳亨)을 보내 교외에서 그를 맞이하여 위로하였다.

 이윽고 [궁성에] 다다르자 춘추의 용모가 영특하고 늠름함을 보고 후하게 대우하였다.

 춘추가 국학(國學)에 가서 석전(釋奠)과 강론을 참관하기를 청하니, 태종이 이를 허락하였다.

 아울러 자기가 직접 지은 온탕비(溫湯碑)와 진사비(晉祠碑) 그리고 새로 편찬한 진서(晉書)를

내려 주었다.

 어느날 [춘추를] 불러 사사로이 만나 금과 비단을 매우 후하게 주며 물었다.

 “경(卿)은 무슨 생각을 마음에 가지고 있는가?” 춘추가 꿇어앉아 아뢰었다.

 신(臣)의 나라는 바다 모퉁이에 치우쳐 있으면서도 천자(天子)의 조정을 섬긴지 이미 여러 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백제는 강하고 교활하여 여러 차례 침략을 마음대로 하였습니다.

 더욱이 지난 해에는 군사를 크게 일으켜 깊숙이 쳐들어와 수십개 성을 쳐서 함락시켜

조회할 길을 막았읍니다.

 만약 폐하께서 당나라 군사를 빌려주어 흉악한 것을 잘라 없애지 않는다면, 저희 나라 인민은

모두 사로잡히는 바가 될 것이고 산 넘고 바다 건너 행하는 조공마저 다시는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

 태종이 매우 옳다고 여겨 군사의 출동을 허락하였다.

 춘추는 또 장복(章服)을 고쳐 중국의 제도에 따를 것을 청하니,

이에 내전에서 진귀한 옷을 꺼내 춘추와 그를 따라 온 사람에게 주었다.

 조칙으로 김춘추(金春秋; 뒤에 태종무열왕)에게 관작을 주어 특진(特進)으로 삼고,

문왕을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으로 삼았다.

 본국으로 돌아올 때 3품 이상에게 명하여 송별 잔치를 열게 하여 우대하는 예를 극진히 하였다.

 춘추가 아뢰었다.

 “신에게 일곱 아들이 있습니다.

바라건대 고명하신 폐하 옆을 떠나지 않고 숙위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러자] 그의 아들 문왕과 대감(大監) △△에게 [머물러 숙위할 것을] 명하였다.

 춘추가 돌아오는 길에 바다 위에서 고구려의 순라병(巡邏兵)을 만났다.

 춘추를 따라간 온군해(溫君解)가 높은 사람이 쓰는 모자와 존귀한 사람이 입는 옷을 입고

배 위에 앉아 있었더니 순라병이 보고 그를 춘추로 여기어 잡아 죽였다.

 춘추는 작은 배를 타고 본국에 이르렀다.

 왕이 이를 듣고 슬퍼하여 군해(君解)를 대아찬(;5등급)으로 추증하고,

그 자손에게 상을 후하게 주었다.

 649년 정월에 비로소 중국의 의관(衣冠)을 착용하였다.

 8월에 백제 장군 은상(殷相)이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석토성(石吐城) 등 일곱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왕이 대장군 김유신(金庾信)과 장군 진춘(陳春), 죽지(竹旨), 천존(天存) 등에게 명하여 나아가

막게 하였다.

 이곳 저곳으로 이동하며 10여일 동안 싸웠으나 해결나지 않았으므로 도살성(道薩城) 아래

나아가 주둔하였다.

 유신이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오늘 틀림없이 백제인이 와서 염탐할 것이다.

 너희들은 짐짓 모르는 척하고 함부로 검문[誰何]하지 말라.”

그리고는 사람을 시켜 군영 안을 돌아다니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게 했다.

 “방어벽을 견고히 하고 움직이지 말라.

 내일 응원군이 오는 것을 기다려 그 후에 싸움을 결판내겠다.”

 첩자(諜者)가 이를 듣고 돌아가 은상에게 보고하니,

 은상 등은 군사가 증원될 것이라 하면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유신 등이 진격하여 크게 이겨 장사(將士) 100명을 죽이거나 사로잡고 군졸 8,980명을

목베었으며, 전마(戰馬) 1만 필을 획득하였고 병기와 같은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650년 4월에 왕이 명을 내려 진골(眞骨)로서 관직에 있는 사람은 아홀(牙笏)을 갖게 하였다.

 6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백제의 무리를 깨뜨린 사실을 알렸다.

 왕이 비단을 짜서 오언태평송(五言太平頌)을 지어, 김춘추(金春秋; 뒤에 태종무열왕)의 아들

법민(法敏;후에 문무왕)을 보내 당 황제에게 바쳤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대당(大唐) 큰 왕업(王業)을 개창하니
높디 높은 황제의 포부 빛나도다.
전쟁을 그치니 천하가 안정되고
전 임금 이어받아 문치를 닦았도다.
하늘을 본받음에 기후[雨施]가 순조롭고
만물을 다스림에 저마다 빛나도다[含章].
지극한 어짊은 해 달과 짝하고
시운(時運)을 어루만져 태평[時康]으로 나아가네.
깃발들은 저다지도 번쩍거리며
군악 소리 어찌 그리 우렁찬가!
명을 어기는 자 외방(外方) 오랑캐여
칼날에 엎어져 천벌을 받으리라.
순후한 풍속 곳곳에 퍼지니
원근에서 다투어 상서(祥瑞)를 바치도다
사철이 옥촉(玉燭)처럼 고르고
해와 달[七曜]은 만방을 두루 도네.
산악의 정기 어진 재상 내리시고
황제는 신하를 등용하도다.
삼황오제(三皇五帝) 한 덕을 이루니
길이길이 빛나리 우리 당나라.

 고종(高宗)이 가상하게 여겨 법민을 태부경(太府卿)으로 삼아 돌려 보냈다.

 이 해에 비로소 중국의 영휘(永徽) 연호를 사용하였다.

 651년 정월 1일에 왕은 조원전(朝元殿)에 나와서 백관들의 신년 하례를 받았다.

 신년 하례 의식은 이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2월에 품주(稟主)를 집사부(執事部)로 고치고 파진찬(;4등급)

죽지(竹旨)를 집사 중시(執事中侍)로 삼아 기밀업무를 관장케 하였다.

 △△△ 파진찬 김인문(金仁問)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고 머물러 숙위하였다.

 652년 정월에 파진찬(;4등급) 천효(天曉)를 좌리방부령(左理方府令)으로 삼았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3월에 서울에 큰 눈이 왔고 왕궁 남쪽 문이 아무 까닭없이 저절로 무너졌다.

 653년 11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금총포(金總布)를 바쳤다.

 654년 3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진덕(眞德)이라 하고 사량부(沙梁部)에 장사지냈다.

 당 고종(高宗)이 이를 듣고 영광문(永光門)에서 애도를 표하고 태상승(太常丞)

장문수(張文收)를 사신으로 보내 부절을 가지고 조문케 하였으며,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추증하고 비단 300단(段)을 내려 주었다.

 나라 사람들은 시조 혁거세로부터 진덕왕까지의 28왕을 일컬어 성골(聖骨)이라 하고,

무열왕부터 마지막 왕까지를 일컬어 진골(眞骨)이라 하였다.

 당나라 영호징(令狐澄)의 신라기(新羅記)에 말하기를

『그 나라의 왕족은 제1골(第一骨)이라 하고 나머지 귀족은 제2골(第二骨)이라 한다.』고 하였다.

 왕이 후사 없이 죽었기 때문에 진지왕의 아들 이찬(;2등급) 용수(龍樹)의 아들인 김춘추가

태종무열왕이 되었다.



※ 본문참고 : 두산대백과사전
※ 본문출처 : 차석찬의 역사창고
※ 이미지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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