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열왕(武烈王)
※ 생존기간 : (604~661)
※ 재위기간 : (654~661)
※ 본문설명
신라 29대 왕으로서 성은 김(金)이며 휘는 춘추(春秋)이다. 진지왕의 손자로서 이찬(伊滄; 2등급) 용춘(龍春:龍樹)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진평왕(眞平王)의 딸 천명부인(天明夫人) 김씨(金氏)이며 비는 문명부인(文明夫人)인데 각찬(角飡, 角干) 김서현(金舒玄)의 딸, 즉 김유신(金庾信)의 누이동생 문희(文姬)이다. 무열왕(武烈王)이라고도 한다. 즉위 할 때에 52세였다. 그의 즉위에는 오래전부터 상당히 복잡한 정치적 문제가 있었다. 김춘추는 김유신의 누이인 문희와 정략적인 측면에서 혼인함으로써 왕위에서 폐위된 진지왕계와 신라에 항복하여 새로이 진골귀족에 편입된 금관가야계의 정치적·군사적 결합이 이루어졌다.
642년(선덕여왕 11) 백제의 침입으로 대야성(大耶城)이 함락되고 사위인 성주(城主) 품석(品釋)이 죽음을 당하자, 고구려와 힘을 합하여 백제를 치고자 연개소문(淵蓋蘇文)을 만났으나, 국경의 영토문제로 감금당했다가 돌아왔다. 웅변에 능하고 외교적 수완이 뛰어나서 사신으로 일본과 당(唐)나라에 다녀왔으며, 특히 당나라에는 여러 차례 왕래하면서 외교적 성과를 거두고 군사원조까지 약속받아 삼국통일의 토대를 닦았다.
654년 진덕여왕이 죽자 여러 신하들이 이찬(;2등급) 알천(閼川)에게 섭정을 청하였으나, 알천이 굳이 사양하며 말하였다. “저는 늙고 이렇다 할 덕행이 없습니다. 지금 덕망이 높기는 춘추공 만한 이가 없으니, 실로 세상을 다스릴 뛰어난 인물이라 할만 합니다.” 결국 김춘추가 진골(眞骨)의 신분으로 군신들의 추대를 받아 즉위함으로써 신라 최초의 진골출신 왕이 되었다.
즉위 후 4월에 왕의 죽은 아버지를 문흥대왕(文興大王)으로 추봉(追封)하고 어머니를 문정태후(文貞太后)로 삼았다.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5월에 이방부령(理方府令) 양수(良守)에게 명하여 율령(律令)을 상정(詳定)하게 하고 이방부격(理方府格) 60여 조를 제정하여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당나라와 계속 친교를 맺어 깊은 신뢰를 얻고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신라왕(新羅王)에 책봉되었다.
655년 정월에 고구려가 백제·말갈(靺鞨)과 연합하여 신라 북경지방의 33성을 공취하자 신라는 당나라에 구원병을 청하였다. 3월 당나라가 영주도독(營州都督) 정명진(程名振)과 좌우위중랑장(左右衛中郞將)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쳤다. 맏아들 법민(; 뒤에 문무왕)을 태자로 삼고, 나머지 여러 아들 중에 문왕(文王)을 이찬(;2등급)으로, 노차(老且)를 해찬(海滄)으로, 인태(仁泰)를 각찬으로, 지경(智鏡)과 개원(愷元)을 각각 이찬(;2등급)으로 삼았다. 10월에 우수주(牛首州)에서 흰 사슴[白鹿]을 바쳤다. 굴불군(屈弗郡)에서 흰 돼지를 바쳤는데,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이고 다리가 여덟이었다. 왕의 딸 지조(智照)를 대각찬(大角滄) 김유신(金庾信)에게 시집보냈다. 월성 안에 고루(鼓樓)를 세웠다.
656년 김인문(金仁問)이 당에서 돌아와 마침내 군주(軍主)에 임명되어 장산성(獐山城) 쌓는 일을 감독하였다. 7월에 아들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 문왕을 당에 보내 조공하게 하였다.
657년 7월에 일선군(一善郡)에 홍수가 나서, 빠져죽은 사람이 300여 명이었다. 동쪽 토함산의 땅이 불타더니 3년만에 꺼졌다. 흥륜사의 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의 북쪽 바위가 무너지면서 부서져 쌀이 되었는데, 그것을 먹어보니 곳간의 묵은 쌀과 같았다.
658년 정월에 중시 문충(文忠)의 [벼슬을] 바꾸어 이찬(;2등급)으로 삼고, 문왕을 중시로 삼았다. 3월에 왕은 하슬라(何瑟羅)의 땅이 말갈과 맞닿아 있으므로 사람들이 편안치 못하다고 여겨 경(京)을 폐지하여 주(州)로 삼고 도독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또 실직(悉直)을 북진(北鎭)으로 삼았다.
659년 4월에 백제가 자주 변경을 침범하므로 왕이 장차 이를 치려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요청하였다. 8월에 아찬 진주(眞珠)를 병부령으로 삼았다. 9월에 하슬라주에서 흰 새를 바쳤다. 공주(公州) 기군(基郡)의 강에서 큰 물고기가 나와서 죽었는데, 길이가 100자나 되었고 [그것을] 먹은 사람은 죽었다. 10월에 왕이 조정에 앉아 있는데, 당나라에 군사를 요청하였으나 회보가 없었으므로 근심하는 빛이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그런데 홀연히 어떤 사람이 왕 앞에 나타났는데, 마치 앞서 죽은 신하 장춘(長春)과 파랑(罷郞) 같았다. 그들이 [왕에게] 말하였다.
신은 비록 백골[枯骨]이 되었으나 아직도 나라에 보답할 마음이 있어 어제 당나라에 갔었는데, 황제가 대장군 소정방(蘇定方)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내년 5월에 백제를 치러 오게 한 것을 알았습니다. 대왕께서 이처럼 너무 애태우며 기다리시기는 까닭에 이렇게 알려드립니다.
[그리고는] 말을 끝내자 사라졌다. 왕이 매우 놀랍고 이상하게 여겨 두 집안의 자손에게 후하게 상을 주고, 해당 관청에 명하여 한산주(漢山州)에 장의사(莊義寺)를 세워 명복을 빌게 하였다.
660년 정월에 상대등 금강(金剛)이 죽었으므로 이찬(;2등급) 김유신(金庾信)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3월에 당 고종(高宗)이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김인문(金仁問)을 부대총관(副大摠管)으로 삼아,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劉伯英) 등 수군과 육군 1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하였다. 또 칙명으로 왕을 우이도행군총관(夷道行軍摠管)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그들을 응원하게 하였다. 5월 26일에 왕이 유신(庾信), 진주(眞珠), 천존(天存)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여 6월 18일에 남천정(南川停)에 다다랐다. 정방(定方)은 내주(萊州)에서 출발하여 많은 배가 천리에 이어져 흐름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왔다. 21일에 왕이 태자 법민(法敏; 뒤에 문무왕)을 보내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덕물도(德物島)에서 정방을 맞이하였다. 정방이 법민에게 말하였다. “나는 7월 10일에 백제 남쪽에 이르러 대왕의 군대와 만나 의자(義慈)의 도성을 깨뜨리고자 한다.” 법민이 말하였다. “대왕은 지금 대군(大軍)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대장군께서 왔다는 것을 들으면 필시 이부자리에서 새벽 진지를 잡숫고 오실 것입니다.” 정방이 기뻐하며 법민을 돌려 보내 신라의 병마를 징발케 하였다. 법민이 돌아와 정방의 군대 형세가 매우 성대하다고 말하니, 왕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다. 또 태자와 대장군 유신, 장군 품일(品日)과 흠춘(欽春)<춘(春)을 혹은 순(純)으로도 썼다.> 등에게 명하여 정예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그것에 부응하도록 하고, 왕은 금돌성(今突城)에 가서 머물렀다. 7월 9일에 유신 등이 황산(黃山) 벌판으로 진군하니, 백제 장군 계백(伯)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먼저 험한 곳을 차지하여 세 군데에 진영을 설치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유신 등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네 번을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고 사졸들은 힘이 다빠지게 되었다. 장군 흠순이 아들 반굴(盤屈)에게 말하였다. “신하된 자로서는 충성만한 것이 없고 자식으로서는 효도만한 것이 없다. [이런] 위급함을 보고 목숨을 바치면 충(忠)과 효(孝) 두 가지 모두를 갖추게 된다.” 반굴이 “삼가 분부를 알아듣겠습니다.” 하고는 곧 적진에 뛰어들어 힘써 싸우다가 죽었다.
좌장군 품일이 아들 관장(官狀)<또는 관창(官昌)이라고도 하였다.>을 불러 말 앞에 세우고 여러 장수들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내 아들은 나이 겨우 열 여섯이나 의지와 기백이 자못 용감하니, 오늘의 싸움에서 능히 삼군(三軍)의 모범이 되리라!” 관장이 “예!” 하고는 갑옷 입힌 말을 타고 창 한 자루를 가지고 쏜살같이 적진에 달려들어갔다가 적에게 사로잡힌 바가 되어 산 채로 계백에게 끌려갔다. 계백이 투구를 벗기게 하고는 그의 나이가 어리고 용감함을 아껴서 차마 해치지 못하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신라에게 대적할 수 없겠구나. 소년도 오히려 이와 같거늘 하물며 장정들이랴!” [그리고는] 살려 보내도록 하였다. 관장이 [돌아와]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제가 적진 속에 들어가 장수를 베지도 못하고 깃발을 뽑아오지도 못한 것은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말을 마치자 손으로 우물물을 떠서 마신 다음 다시 적진으로 가서 날쌔게 싸웠는데, 계백이 사로잡아 머리를 베어 말안장에 매달아 보냈다. 품일이 그 머리를 붙잡고 흐르는 피에 옷소매를 적시며 말하였다. “내 아이의 얼굴이 살아있는 것 같구나! 왕을 위하여 죽을 수 있었으니 다행이다.” 삼군(三軍)이 이를 보고 분에 복받쳐 모두 죽을 마음을 먹고 북치고 고함지르며 진격하니, 백제의 무리가 크게 패하였다.
계백은 죽고, 좌평 충상(忠常)과 상영(常永) 등 20여 명은 사로잡혔다. 이 날 소정방(蘇定方)은 부총관 김인문(金仁問) 등과 함께 기벌포(伎伐浦)에 도착하여 백제 군사를 만나 맞아 싸워 크게 깨뜨렸다. 김유신(金庾信)등이 당나라 군대의 진영에 이르자, 정방은 유신 등이 약속 기일보다 늦었다고 하여 신라의 독군(督軍) 김문영(金文穎)<또는 영(永)으로도 썼다.>을 군문(軍門)에서 목베려 하였다. 유신이 무리들에게 말하였다.
대장군이 황산(黃山)에서의 싸움을 보지도 않고 약속 날짜에 늦은 것만을 가지고 죄로 삼으려 하니, 나는 죄없이 모욕을 받을 수 없다. 반드시 먼저 당나라 군사와 결전을 한 후에 백제를 깨뜨리겠다.
이에 큰 도끼를 잡고 군문(軍門)에 서니, 그의 성난 머리털이 곧추 서고 허리에 찬 보검이 저절로 칼집에서 튀어나왔다. 정방의 우장(右將) 동보량(董寶亮)이 그의 발을 밟으며 말하기를 “신라 군사가 장차 변란을 일으킬 듯합니다.” 하니, 정방이 곧 문영의 죄를 풀어주었다. 백제 왕자가 좌평 각가(覺伽)를 시켜 당나라 장군에게 글을 보내 군대를 철수시킬 것을 애걸하였다. 12일에 당나라와 신라군이 의자왕(義慈王)의 도성을 에워싸고자 하여 소부리(所夫里) 벌판으로 나아가는데, 정방이 꺼리는 바가 있어 전진하지 않았으므로 유신이 그를 달래어 두 나라 군사가 용감하게 네 길로 나란히 진격하였다. 백제 왕자가 또 상좌평(上佐平)을 시켜 제사에 쓸 가축과 많은 음식을 보냈으나 정방이 거절하였고, 왕의 여러 아들이 몸소 좌평 여섯 사람과 함께 앞에 나와 죄를 빌었으나 그것도 물리쳤다. 13일에 의자왕이 좌우 측근을 데리고 밤을 타서 도망하여 웅진성(熊津城)에 몸을 보전하고, 의자왕(義慈王)의 아들 융(隆)은 대좌평 천복(千福) 등과 함께 나와 항복하였다. 법민(法敏; 뒤에 문무왕)이 융(隆)을 말 앞에 꿇어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었다. “예전에 너의 아비가 나의 누이를 억울하게 죽여 옥중에 묻은 적이 있다. [그 일은] 나로 하여금 20년 동안 마음이 아프고 골치를 앓게 하였는데, 오늘 너의 목숨은 내 손 안에 있구나!” 융은 땅에 엎드려 말이 없었다. 18일에 의자왕이 태자와 웅진방령(熊津方領)의 군사 등을 거느리고 웅진성으로부터 와서 항복하였다. 왕이 의자왕의 항복 소식을 듣고 29일에 금돌성(今突城)으로부터 소부리성에 이르러 제감(弟監) 천복(天福)을 당나라에 보내 싸움에서 이겼음을 알렸다. 8월 2일에 주연을 크게 베풀고 장병들을 위로하였다. 왕과 소정방(蘇定方) 및 여러 장수들은 대청마루 위에 앉고, 의자왕과 그 아들 융(隆)은 마루 아래 앉혀서 때로 의자왕으로 하여금 술을 따르게 하니 백제의 좌평 등 여러 신하들이 목메어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 날 모척(毛尺)을 붙잡아 목베었다. 모척은 본래 신라 사람으로서 백제에 도망한 자인데, 대야성의 검일(黔日)과 함께 도모하여 성이 함락되도록 했기 때문에 목벤 것이다. 또 검일을 잡아 [죄목을] 세어 말하였다.
네가 대야성에서 모척과 모의하여 백제 군사를 끌어들이고 창고를 불질러 없앰으로써 온 성 안에 식량을 모자라게 하여 싸움에 지도록 하였으니 그 죄가 하나요, 품석(品釋) 부부를 윽박질러 죽였으니 그 죄가 둘이요, 백제와 더불어 본국을 공격하였으니 그것이 세번째 죄이다.
이에 사지를 찢어 그 시체를 강물에 던졌다. 백제의 나머지 적병은 남잠성(南岑城)과 정현성(貞峴城) 등의 성을 차지하고 버텼다. 또 좌평 정무(正武)가 무리를 모아 두시원악(豆尸原嶽)에 진을 치고서 당과 신라인을 노략질하였다. 26일에 임존(任存)의 큰 목책을 공격했으나, 군사가 많고 지세가 험하여 이기지 못하고 다만 작은 목책만을 쳐서 깨뜨렸다. 9월 3일에 낭장(郎將) 유인원(劉仁願)이 군사 1만 명으로써 사비성(泗城)에 남아 지켰는데, 왕자 인태가 사찬 일원(日原), 급찬 길나(吉那)와 함께 군사 7천 명으로써 그를 보좌하였다. 소정방(蘇定方)은 백제 왕 및 왕족·신료 93명과 백성 1만 2천 명을 데리고 사비에서 배에 타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김인문(金仁問)과 사찬(;8등급) 유돈(儒敦), 대나마(;10등급) 중지(中知) 등이 그와 함께 갔다. 23일에 백제의 남은 적군이 사비성에 들어와, 항복하여 살아남은 사람들을 붙잡아 가려고 하였으므로 유수(留守) 유인원이 당과 신라인을 내어 이를 쳐 쫓았다. 적이 물러가 사비성의 남쪽 산마루에 올라 네댓 군데 목책을 세우고 진을 치고서 모여 틈을 엿보아가며 성읍을 노략질하니, 백제인 중에 배반하여 이에 부응한 것이 20여 성이나 되었다. 당나라 황제가 좌위중랑장(左衛中郞將) 왕문도(王文度)를 보내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삼았다. 28일에 [왕문도가] 삼년산성(三年山城)에 이르러 조서를 전달하였는데, 문도는 동쪽을 향하여 서고 대왕은 서쪽을 향하여 섰다. 칙명을 전한 후 문도가 당 황제의 예물을 왕에게 주려고 하다가 갑자기 병이 나서 곧바로 죽었으므로, 그를 따라 온 사람이 대신하여 일을 마쳤다. 10월 9일에 왕이 태자와 여러 군사들을 이끌고 이례성(禮城)을 쳤다. 18일에 그 성을 빼앗아 관리를 두어 지키게 하니, 백제의 20여 성이 두려움에 떨고 모두 항복하였다. 30일에 사비의 남쪽 산마루에 있던 군대의 목책을 공격하여 1천5백 명을 목베었다. 11월 1일에 고구려가 칠중성을 침공하여 군주 필부(匹夫)가 전사하였다. 5일에 왕이 계탄(灘)을 건너 왕흥사잠성(王興寺岑城)을 공격하여 7일에 이겨 700명을 목베었다. 22일에 왕이 백제에서 돌아와 싸움에서의 공을 논하였는데, 계금졸(衿卒) 선복(宣服)을 급찬으로 삼고 군사(軍師) 두질(豆迭)을 고간으로 삼았으며, 전사한 유사지(儒史知), 미지활(未知活), 보홍이(寶弘伊), 설유(屑儒) 등 네 사람에게 관작을 차등있게 주었다. 백제 사람들도 모두 그 재능을 헤아려 임용하였는데, 좌평 충상과 상영, 달솔 자간(自簡)에게는 일길찬(;7등급)의 관등을 주어 총관의 직을 맡겼고, 은솔 무수(武守)에게는 대나마(;10등급)의 관등을 주어 대감의 직을 맡게 하였으며, 은솔 인수(仁守)에게는 대나마의 관등을 주어 제감의 직을 맡게 하였다.
661년 백제 부흥군을 격파하고, 이어 고구려 정벌의 군사를 일으켰다. 6월에 대관사(大官寺)의 우물 물이 피가 되었고, 금마군(金馬郡) 땅에 피가 흘러 그 넓이가 다섯 보(步)가 되었다. 왕이 죽었다. 시호를 무열(武烈)이라 하고, 영경사(永敬寺)의 북쪽에 장사지냈으며 묘호(廟號)를 올려 태종(太宗)이라 하였다. 고종이 [무열왕의] 죽음 소식을 듣고 낙성문(洛城門)에서 애도식을 거행하였다. 그 뒤를 이어 맏아들이 문무왕이 되었다.
그의 재위기간에 신라 왕권의 전제화(專制化)가 확립되었고, 또한 크게 성장한 귀족세력을 중심으로 당나라의 율령제도(律令制度)를 모방한 관료체계가 정비되었으며, 구서당(九誓幢)이라는 9개 군단(軍團)의 설치로 군사조직이 강화되는 등 본격적인 국가체제가 확립되었다. 또, 김유신의 매부(妹夫)가 됨으로써 경주김씨 왕실과 김해김씨와의 결합이 이루어졌고, 그의 직계자손으로 8대가 계속됨으로써 120년 동안 정치의 황금기를 맞게 되었다.
※ 본문참고 : 두산대백과사전
※ 본문출처 : 차석찬의 역사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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