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고왕과 구수왕의 일본진출
[1]. 초고왕(재위166~214)
초고왕(肖古王)<또는 소고(素古)라고도 하였다.>은 개루왕(蓋婁王)의 아들이다.
개루가 재위 39년에 죽자 왕위를 이었다.
초고왕은 즉위 전에 일본에 진출하여 일본에서는 스사노오신으로 불리워진다.
백제 개루대왕 때에 백제는 함흥 아래 정평군에 쇠를 다스리는 수시리성을 두어 초고왕자가 지켰다.
초고왕은 소고왕이라고도 하여고 일본에서는 속고대왕이라고 부른다.
일본에서 근초고왕을 속고왕(速古王), 또는 속고대왕(速古大王)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일본에는 백제 속고대왕(速古大王)의 후손으로서 여러 씨족 가문인 금부련(錦部連), 삼선숙녜(三善宿니)등
직계 후예를 남겼는데 이는 일본의 고대 기록인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 남아있다.
위 책에서 속고대왕 손자에 비류왕이 기록되어 있다.
함흥 지방은 고대에 소시모리라고 하였고 온조왕 때에 우곡성이라 하였다.
뒤에는 우수주(牛首州); (삼국사기)라고도 하였다.
우수주(牛首州)는 다른말로 오근내(烏根乃)라고도 했는데, 함흥 성천강(城川江)의
서쪽 가지 이름에 흑말천이 있다.
우수주 벌력천현(伐力川縣)이 우리말 "뿌리"의 음차로 고려된다.
오근내의 근(根)이 뿌리이고 일본의 속고왕이 일본에 새운 곳이 시마네현(島根縣)이고
한반도로 돌아간 곳이 역시 근국(根國)이었다.
오근내(烏根乃)와 관련하여 함주군 북쪽 상조양면 위에 오악봉(烏岳峰)이 있다.
그 남쪽에는 한당 고성이 있고 그 남쪽에는 우봉석성(牛峰石城)이 있다.
따라서 오악봉과 우봉 사이에 백제 우수주가 있었다.
우수주에는 횡천현(橫川縣)이 있었는데 함흥 동쪽 호련천(瑚漣川)부근이고
우수주에 또한 자현(磁縣)이 있었는데 이는 함흥 서북쪽 자고성(慈古城)에 해당한다.
자모성은 백제 주성의 북쪽 호위성이다.
정평군은 수시리고성, 수곡성, 장곡성이 있던 곳이다.
수곡성과 장곡성은 금이강을 사이로 마주보며 수시리고성은 동쪽이었다.
수시리고성은 백제 사성(蛇城)이다.
수시리고성은 속고대왕의 딸 수세리히메가 구수대왕을 만나 결혼한 곳이다.
정평군 아래 문천군은 본래 이름이 낭자곡성으로서 서기 63년부터 백제 영역이었다.
문주왕이 백제왕이 되기 전에 있던 곳이 문천의 문주다.
[삼국사기지리지]에서 고구려, 백제의 우수주(牛首州) 지리 이름을 보면
우수주가 초고왕이 처음 개척한 함경남도 함흥이다.
[삼국사기/백제기]에서는 우곡성이다.
[삼국사기/지리4]의 고구려 백제 지명중 “우수주牛首州”를 함경남도 함흥에 비정하여서
잃어버린 고구려, 백제 지명을 밝힌다.
우수주牛(首州)는 다른말로 오근내(烏根乃)라고도 했다는데 함흥 성천강(城川江)의 이름에 흑말천이 있다.
우수주 벌력천현(伐力川縣)은 함흥의 흑말강 유역이다.
횡천현(橫川縣)은 함흥 동쪽 호련천(瑚漣川)부근으로 고려되고
자현(磁縣)은 함흥 서북쪽 자고성(慈古城)에 해당한다.
호원군(乎原郡)은 (北原)이라고도 했는데, 함흥 북쪽 홍원군(洪原郡)이다.
나토군(奈土郡)은 대제(大提)라고도 했는데 함흥 남쪽 정평군(定平郡)이다.
서호(西湖 ) 광호(廣湖), 동호(東湖) 등 큰 호수가 많다.
사열이현(沙熱伊縣)은 사수산(泗水山)을 지나 흐르는 금진강(金津江)으로 추정되니
함흥 남쪽 정평군(定平郡) 위치다.
광산이 많고 고대로부터 쇠를 다스리던 곳이다.
초고대왕의 딸이 살던 수시리 고성이 있다.
적산현(赤山縣)은 주이천(朱伊川)이 흐르는 지금의 함주군청(咸州郡廳) 자리다.
근평군(斤平郡)은 병평(幷平)이라고도 했고 심천현(深川縣)만 있었는데 평주진 고성으로 고려된다.
심천현은 영흥으로 고려된다.
양구군(陽口郡)은 신포시 양화만(陽化灣)이다.
대양산(大陽山) 아래에 있다.
저족현(猪足縣)은 신포시 동쪽 신창읍(新昌邑)의 저석봉(砥石峰)과 관련된다.
신창읍에 숙신고도 성터가 있다.
저족현은 오사회(烏斯廻)라고 했는데, 오사회는 신포시 압해산(壓海山)을 가리킨다.
압(押)을 일본에서는 오사라고 읽는다.
압해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사회(烏斯廻)가 압해산이 된 것이다.
진사왕이 고구려를 친 도압산(都押城)일 수도 있다.
왕기현(王岐縣)은 개차정(皆次丁)이라고도 했는데 차호읍(遮湖邑)의 궁산(宮山)을 가리킨다.
궁터가 있었던 곳으로 보인다.
삼현현(三峴縣)은 밀파혜(密波兮)라고도 했는데 북청군의 북쪽 덕성군 삼산(三山)으로 고려된다.
즉 덕성읍이 삼현현이다.
덕성군의 북쪽의 성대리(星垈里) 고성은 고대의 철산지다.
성천군(犬生-川郡) 또는 야시매(也尸買)는 이원군(利原郡)으로 고려된다.
시리군이라고도 하였다.
대양관군(大楊管郡)은 마근압(馬斤押)이라고도 했다.
부령군 동쪽에 있는 부거폐현(富居廢縣) 성터로 추정된다.
부거폐현은 백제 무령왕이 살던 곳으로 고려된다.
매곡현(買谷縣)과 고사마현(古斯麻縣)이 있었다.
고 사마현은 바로 백제 무령왕의 이름이고,
청진 북쪽 부령군(富寧郡), 부거현(富居縣)이 모두 무령왕에서 비롯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경성도호부의 18역(驛) 이름중에도 무녕역(撫寧驛)이 있었다.
부령군 석막면(石幕面)이 무령왕의 사마현이 변한 이름으로서 고사마현의 위치다.
석막면에 옥련성터가 있다.
지금 수성천(輸城川)이 무릉산에서 흘러내리는데 무령산이었을 수도 있다.
무령대왕이 479년 고구려를 공략하러 들어와 있던 곳이다.
명천군 성명봉(聖明峰)은 무령왕의 아들 백제 성명왕(聖明王)을 의미한다.
(백제 성왕은 성명왕이라고도 한다.)
성명봉에서 내려오는 명간천(明澗川)은 본래 명왕천(明王川)이었을 것이다.
성명대왕이 태어나서 자란 곳으로 고려된다.
길주(吉州)의 고선화진(古宣化津)은 무령대왕 동생인 선화천황(宣化天皇)이 있던 곳으로 고려된다.
길주 서쪽 안반덕산(安班德山)=(1830m)이 역시 무령대왕 동생인 안한천황(安閑天皇)의 이름일 수도 있다.
길주에는 다신산성, 소파온고성, 산성, 태신고성 등 오래된 고성이 많이 있다.
매곡현(買谷縣)은 청진시(淸津市) 수성천 동쪽이 고말산(高抹山)으로 추정된다.
급벌산군(及伐山郡)은 이벌지현(伊伐支縣)과 수성천현[藪(犬生)川縣]이 있었다.
수성천현은 청진시 수성천(輸城川) 서남쪽으로 고려된다.
수성천의 최상류는 부령군에 있다.
그런데 이 수성천의 원류를 회령군 여이현(餘伊峴) 남쪽에서 발원하여 나온다고도 하였다.
지금 부령군이 된 여이현의 여이(餘伊)는 백제 왕족 이름일 것이다.
무령왕의 즉위전 아명일 수도 있다.
급벌산군은 경성시(鏡城市)로 추정된다.
이벌지현은 경성시 주을읍으로 추정되는데 보로천(甫老川)이 지난다.
보로(甫老)가 벌(伐)의 연음일 것이다.
문현현(文峴縣) 다른말로 근시파혜(斤尸波兮)는 어랑읍으로 고려된다.
본래 회문(會文)이라고 했고 주북천(朱北川)이 흐른다.
모성군(母城郡), 또는 야차홀(也次忽)은 경성 남쪽 어랑천(漁郞川)이 흐르는
어랑군(漁郞郡)의 어대진(漁大津)이다.
동사홀(冬斯忽)은 동생을 의미하는 어랑면 아우동(阿隅洞)으로 고려된다.
수입현(水入縣)은 어랑천과 명간천의 사이인 수암동(壽巖洞)으로 고려된다.
객련군(客連郡), 또는 가혜아(加兮牙)는 명천읍(明川邑)으로 추정된다.
상아동(象牙洞)이 있다. 백록산도 있는데 이 모두가 중국인 기자의 후예와 관련된다.
기자조선이 처음 생겨났던 요녕성 조양시 객좌현의 지명들이 옮겨온 것이다.
적목현(赤木縣), 또는 사비근을(沙非斤乙)은 길주군 서북 목성리(木城里)로 고려된다.
관술현(管述縣)은 학성군(鶴城郡)으로 추정된다.
저란현현(猪蘭峴縣), 또는 조생파의(鳥生波衣), 또는 저수(猪守)는 단천(端川)으로 추정된다.
저란은 절節의 연음인데 단천에 직절리가 있다.
천성군(淺城郡) 비열홀(比烈忽)은 안변읍(安邊邑)이다.
경곡현(~谷縣) 또는 수을탄현(首乙呑縣)은 안변군 서곡면(瑞谷面)이다.
청달현(菁達縣) 또는 석달현(昔達縣)은 석왕사면(釋王寺面)으로 추정된다.
살한현(薩寒縣)은 통천군 흡곡면이다.
가지달현(加支達縣)은 안변부 남 30리라고 하였다.
현재 안변군 신아면 문곡리다.
어지탄현(於支呑縣) 또는 익곡현(翼谷縣)은 안변 남 65리라고 하였다.
통천군 학면으로 고려된다.
매시달현(買尸達縣)은 원산시(元山市) 무달사(武達寺)로 추정한다.
천정군(泉井郡)은 원산시에 있던 덕원군(德源郡)이다.
부사달현(夫斯達縣)은 덕원면(德源面)으로 추정한다.
동허현(東墟縣)은 원산시로 추정한다.
내생군(奈生郡)은 고원군(高原郡)으로 고려된다.
을아차현(乙阿次縣)은 천내군으로 고려된다.
우오현(于烏縣) 또는 욱오현(郁烏縣)은 문천시 구읍내 옥평리로 고려된다.
주연현(酒淵縣)은 통천 구읍으로 고려된다.
위 기록에서 천성군 비열홀이던 안변군이 가장 남쪽인데 현 이름들은 대개 현재 국사학계 통설과 일치한다.
천정군도 역시 일치한다.
그러나 천북군 이북의 우수주 9개군을 국사학계는 춘천 방향으로 비정하고 있는데
이는 함흥 방향으로 맞추어야 옳다.
발해의 신라 공격 때에 함흥의 신라 우수주가 춘천으로 피난나왔을 수도 있다.
서기 160년 초고왕자는 함흥 정평에서 일본 시마네현(島根縣)의 이즈모(出雲)에 건너가서 일본 전역을
굴복시키고 일본 아마테라쓰(천조대신) 히미코(卑彌呼)=(즉 연오랑 세오녀 중의 세오녀)를 포함한
8명의 신녀를 후비로 삼아서 야에가끼(팔중성)에 가두고 8명의 자손을 낳았다.
그후 히미코가 탈출하여 규슈(구주)에 야마대국을 세우고 그 아들이 가야로 건너가서 가야왕의 사위가
되어 얻은 후손이 니니기(알알이)이며, 알알이가 구주로 돌아와 아들을 낳으니 신무천황이 되었다.
백제 6대 초고대왕(
신무천황(神武天皇)=(194~256)의 증조부다.
백제의 동해안 진출은 마한을 병합한 온조대왕 때 서기 16년 함흥 우곡성 진출에서 시작되었다.
서기 56년에 다루왕이 우곡성을 쌓았다.
우곡성이 함흥의 우수주성이다.
그후 63년에 다루왕이 문천시의 낭자곡성까지 차지하였다.
[삼국사기]에서 108년에 강원도 삼척(
125년에 신라가 동해안의 말갈로부터 침략을 받으니, 백제 기루대왕(己婁大王)=(재위 77~128년)은
백제의 다섯 장군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였다.
초고대왕이 백제 지방왕으로서 함흥에 거처할 때에
원산시(元山市) 북쪽 문천시(文川市)에 속고봉(速高峰), 속고산(速高山)=(722m),
=[신증동국여지승람] 소의달산(所依達山), 즉 쇠달산 같은 백제 초고대왕의 별명인
속고왕(速古王)의 이름을 딴 지명이 생겨난 것이다.
함흥시 동쪽에는 초고대령(草高臺嶺)도 생겨났다.
즉 개루대왕 생전에 초고대왕인 속고왕은 원산-함흥 지역에 봉토를 받아서 있었던 것이다.
그후 214년 신라가 사현성(沙峴城)을 수복했는데, 이는 함경남도 원산(元山) 남쪽 고산군(高山郡)
사현봉수(沙峴烽燧)가 있던 사현(沙峴)이다.
개로대왕의 참살 때에 문주대왕은 문천시의 문주로부터 신라로 내려가서 구원병 1만을 얻어올 수 있었다.
함흥 동쪽 퇴조만의 퇴조고성(退朝古城)=(석축 4917척)은 발해 고성으로 고려된다.
그러나 서쪽에 초고대령(草高臺嶺) 동북에 초막산(草幕山), 제봉산(?峰山)이 있다.
초고대령은 초고대왕령이었을 것이다.
초막산 북쪽에 가장 높은 우두산(牛頭山)=(814m, 현재 봉화산)이 있었고 그 북쪽에 함관령이 있다.
그 서북쪽에 덕산동 초원고성(草原古城)이 토성인데, 1147척이며 함흥의 동쪽 호위성이다.
함흥 서쪽 6511척의 한당고성(閑堂古城)이 토성인데, 동해안까지 확장된
백제 동부의 부도성인 우수주성으로 유력하다.
그 위치는 함흥시와 백운산석성의 중간인 상조양면의 탑동리이다.
북쪽에는 자고성(慈姑城)이 있는데 이는 평양의 자모산성처럼 북쪽 호위성이다.
한당고성은 고구려, 백제의 우수주(牛首州)의 내성이었다..
동남쪽에 우봉석성(牛峰石城)이 있다.
백제 개루대왕(蓋婁大王) 시대에 개루대왕의 왕자 초고왕자는 함경남도 함흥에서 바다를 건너서
일본 시마네현(嶋根縣)의 이즈모(出雲)에 진출하였고, 160년에 일본의 여왕 히미코(~247)를 정복하였다.
이는 히미코 여왕의 여사제(女師弟)인 와카히(稚日女命)=(113~160년)가 초고대왕에게 죽임을 당한 해가
그녀의 고분에서 160년으로 확인되기 때문이다.
이는 효고현(兵庫縣) 서궁시(西宮市) 증암정(甑岩町)에 있는 월목암신사(越木岩神社)에 남아있는 기록이다.
일본의 최초 천황이 된 신무천황(神武天皇)의 증조부였던 스사노오(須佐之男)는
일본에서 [建速須佐男, 速佐男, 素佐能雄, 素盞嗚, 素佐能雄] 등으로 표기되어 왔다.
건속(建速)은 속(速)을 건국했다는 뜻이니, 일본에 속고국(速古國)을 처음으로 세운 분이라는 뜻이다.
시마네현(嶋根縣)에 처음 팔중궁을 세웠던 수가(須賀)라는 곳이 바로 일본의 속고국 땅이고 초고대왕의 땅이다.
여기서 스사노오(須佐之男)의 뜻은 쇠코왕이라는 뜻이다.
당시 발음은 지남(之男), 능웅(能雄)=(n-ung)이니 우리말 “놈”의 발음에 해당한다.
고대의 “男”에 대한 발음에서 유래되는데, 고대에는 “남”이 작위에 해당하는 높인 말이었고,
대개 아들을 의미하는데 지금은 거의 비칭(卑稱)으로 전락하였다.
[삼국사기]<백제기>의 소고(素古)왕이나 초고왕(肖古王)이나 [신찬성씨록]의 속고대왕(速古大王)이나
다 쇠코왕이라는 뜻이다. "코"의 우리말 고어가 "고"이다. 따라서 쇠코왕이다.
[일본서기]에서 소산오(素盞嗚)라고도 표기하는데 스사노, 소산오의 뒤부분 산오, 또는 사노 sano가
바로 코를 의미한다.
이는 아프로아시아 언어Afroasiatic etymology 에서 코를 의미하여 남아 있다.
소말리아를 비롯한 아프리카 대륙 여러 언어에 남아있다.
현생 인류가 6만년전에 아프리카 아담Y에서 출발하였으므로 그 흔적이 일본에 남아있는 것이다.
또한 [고사기]나 [일본서기]에서 스사노오의 출생은 이자나기의 코에서 탄생한다.
사노가 코를 의미하는 것은 더이상 의심할 필요가 없다.
그 앞의 소가 지금 우리말 소이다.
이는 어찌해서 알 수 있는가?
656년에 세워진 야사카 신사(八坂神社)의 기원에 그 의미가 있다.
야사카 신사에 전하는 바에 따르면 제명천황 2년에 고구려사자가 일본에 올 때에 부사인 이리노사주가
신라땅 우두산에서 제사지내는 스사노오신을 야사카에 모셔와 제사지냈다고 하였다.
社伝によれば、斉明天皇2年(656年)、高句麗より来日した調進副使・伊利之使主(いりしおみ)が、
新羅の牛頭山に祀られる素戔嗚尊を山城国愛宕郡八坂郷に祀り、「八坂造」の姓を賜ったのに始まるという。
他にも各種の記録がある。
함흥은 신라 진흥왕 이후 신라 영토이고 고구려 사자가 통과한 곳이 된다.
그런데 백제 온조왕 초기에 우수주가 바로 함흥이다.
또한 소시모리의 전설이 있는 곳이다.
야사카신사는 본래 우두천왕을 제사지냈는데 명치유신 이후에 소사노오로 이름을 바꾸어 제사지낸다.
이후 일본은 우두천왕과 스사노오를 동일시 하기도 한다.
그러나 고구려 사자가 백제 초고왕을 모셔왔을 가능성은 적고 본래의 소시모리,
즉 우두천왕을 모셔왔을 가능성도 높다.
백제 초고왕이 그 땅 우수주를 다스릴 때에 쇠코왕이라고 하였던 것이고,
초고왕의 신사가 신라 우수주 우두산에 남아 있었을 때에 고구려사자가 일본에 오면서 가져온 것이다.
결론은 소사노오는 쇠코왕의 당시 일본말이고 백제에서는 쇠코왕, 즉 소고왕, 초고왕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현재 함경남도 문천시 속고산(速高山)이 쇠코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대 쇠달산(所依達山)이므로 속(速)을 소의(所依)로 풀어쓴 것이다.
또한 쇠달산에 신사(神祠)가 있었다고 전한다.
출운대사에 있는 스사노오 벽화
스사노오의 딸을 수세리공주(須勢理毗賣)라고 했는데,
함흥 남쪽 정평군(定平郡)에 수시리고성(隨時里古城)=(400m토성)이 남아있다.
수세(須勢)도 중국어 발음기호표기식인 반절(半切)로 보면 “쉐(shu-e)”발음인데 “쇠”의 우리말 고어다.
정평의 수시리고성은 금이강(金伊江)이 감싸는데, 금이(金伊)도 “쇠+l”의 이두(吏讀) 기록이고
금이강이 쇠물이다.
이 지역에 광산이 많이 있으니 수시리고성은 쇠를 다스리던 곳이다.
금이강 서북쪽 사수산(泗水山)=(1747m)도 사수(泗水)가 곧 쇠물이다.
한편 [일본서기]에서 스사노오, 즉 초고대왕은 신라국(新羅國) 소시모리(曾尸茂梨)에서
아들 구수대왕과 배를 타고 일본 이즈모(出雲)으로 왔다고 하였다.
신라국 소시모리(曾尸茂梨)=(蘇尸茂梨)라는 곳도 역시 우리말 고어 발음으로
소시가 쇠를 의미하고 무리가 물을 의미하니 역시 쇠-물(鐵)을 뜻하며,
함흥 남쪽 정평군(定平郡) 수시리고성(隨時理古城)=(400m토성)이 신라의 소시모리 성이다.
본래 신라 땅이던 것이 백제 초고대왕의 개척 영지가 되었던 것이다.
한편, 금이강 남쪽에 이웃한 금야강(金野江)은 고대에 비류수(沸流水)라고도 이름했다.
따라서 스사 [
스사노오建速須佐之男(shue-nam)는 우리말 “쇠왕, 쉐왕”이 된다.
쇠왕을 당시에는 “쇳남”, “쇠사남”이라 기록한 것이다.
백제 초고대왕(肖古大王)은 백제의 속국(速國), 내지 별국(別國)을 일본 본토 시마네현(嶋根縣)에
세운 일본신 스사노오(建速須佐男), 즉 �남, 쇠대왕이다.
초고대왕이 건너가 세운 일본 지명인 시마네현(嶋根縣)은 그 이름에서 일본 팔도(八島)의 뿌리가 되었고
일본의 뿌리인 것이다.
[고사기]에서 왜여왕 히미코(
불렀는데, 일본은 이를 동생이라고 풀이했으나 일본말 “아나”는 한자로 귀(貴)가 되므로, 귀세(貴勢)가
올바른 기록이며, 이는 존귀한 분을 가리키는 중국 고어다.
초고대왕은 이즈모(出雲) 히가와(斐伊川)의 수가(須賀)에 야에가기(八重垣) 궁을 세웠다.
히가와(斐伊川)는 함경남도 문천시(文川市) 서쪽 배지이천(配?伊川)에서 유래한 것이다.
문천시에 매성(妹城)이라는 고성이 있었는데 왕비를 기린 것이라고 고려되고, 히가와의 히(斐)도
여신을 의미한다.
문천시에 절문루(節文樓)가 전해오는데 스시노오의 부인 이름도 쿠시나다(櫛名田姬)다.
즉 쿠시나다가 문천시 배지천에서 초고대왕, 스사노오를 따라서 도일한 백제 본토 여인으로 고려된다.
한편 비이신사(斐伊神社)는 효소천황(孝昭天皇) 5년에 세웠다고 한다.
[일본서기]에서 스사노오는 신라에서 왔고 근국(根國)으로 돌아갔다.
근국이 오근내현이라고 하던 함흥 우수주이다.
실상은 백제가 점령한 함흥에서 일본으로 갔고 다시 백제로 돌아가 초고대왕으로 즉위한 것이다.
[고사기]나 [일본서기]에서 스사노오가 이즈모에서 팔지대사(八枝大蛇)를 잡아 죽인 것은 초고대왕이
일본 천조대신의 12신녀 중에서 8신녀를 잡아 팔중원(八重垣)에 가두고 후비로 삼은 것을 의미한다.
2년(167) 가을 7월에 몰래 군사를 보내 신라의 서쪽 변경의 두 성을 습격하여 깨뜨리고 남녀 1천 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8월에 신라 왕이 일길찬 흥선(興宣)을 보내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나라 동쪽의 여러 성들을 쳐들어 왔다.
신라 왕도 또 친히 정예 기병 8천 명을 거느리고 뒤이어 한수(漢水)까지 엄습하여 왔다.
신라군은 동해안으로 올라와 덕지강에서 금야강을 타고 요덕을 지나 대동강으로 온 것이다.
왕은 신라 군사의 수가 많아 대적할 수 없음을 헤아려서 곧 앞서 빼앗았던 것을 돌려주었다.
5년(170) 봄 3월 그믐 병인에 일식이 있었다.
겨울 10월에 군사를 내어 신라의 변경을 침공하였다.
21년(186) 겨울 10월에 구름은 없이 우뢰만 쳤고, 살별이 서북쪽에 나타났다가 20일만에 없어졌다.
22년(187) 여름 5월에 서울王都의 우물과 한수(漢水)가 모두 말랐다.
23년(188) 봄 2월에 궁실을 고치고 수리하였다.
군사를 내서 신라의 모산성(母山城)을 공격하였다.
전라북도 남원 동쪽 운봉으로 고려된다.
24년(189) 여름 4월 초하루 병오에 일식이 있었다.
나사 추산으로는 양력 5월 3일이다.
0189 May 03 05:26 A 70 0.419 0.948 39.7N 90.5E 65 211 05m42s
가을 7월에 우리 군사가 신라와 구양(狗壤)에서 싸워 패배하였는데 죽은 자가 500여 명이었다.
25년(190) 가을 8월에 군사를 내서 신라의 서쪽 국경의 원산향(圓山鄕)을 습격하고 나아가
부곡성(缶谷城)을 포위하였다.
구양은 충청북도 괴산, 원산향은 경상북도 예천군, 부곡성은 군위군으로 알려졌다.
신라 장군 구도(仇道)가 말탄 군사(馬兵) 500명을 거느리고 막았다.
우리 군사가 거짓 퇴각하자 구도가 와산(蛙山)까지 추격하여 오므로 우리 군사가 되돌아 쳐서 크게 이겼다.
26년(191) 가을 9월에 치우기(蚩尤旗)가 각(角)과 항(亢) 별자리에 나타났다.
34년(199) 가을 7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군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쳤다.
39년(204) 가을 7월에 군사를 내어 신라의 요거성(腰車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성주 설부(薛夫)를 죽였다.
요거성은 경상북도 문경이나 상주로 추정된다.
신라 왕 나해(奈解)가 노하여 이벌찬 이음(利音)을 장수로 삼아 6부의 정예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우리의 사현성(沙峴城)을 공격하였다.
겨울 10월에 살별이 동정(東井) 별자리에 나타났다.
사현이 여러 성이다.
이때는 원산(元山) 남쪽 고산군(高山郡) 사현봉수(沙峴烽燧)가 있던 사현(沙峴)이다.
40년(205) 가을 7월에 금성太白이 달을 범하였다.
43년(208) 가을에 누리蝗가 생기고 가물어 곡식이 잘 자라지 못하였다.
도적이 많이 일어나자 왕은 그들을 위무하고 안정시켰다.
44년(209) 겨울 10월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45년(210) 봄 2월에 적현성(赤峴城)과 사도성(沙道城)의 두 성을 쌓고 동부(東部)의 민호(民戶)들을 옮겼다.
겨울 10월에 말갈이 사도성(沙道城)을 공격해 왔으나 이기지 못하자 성문을 불질러 태우고 달아났다.
두 성은 가까운 곳으로 고려되며 목책도 세웠는데 함흥시 동쪽 40리 덕산동에 있던 덕산고성과
덕산초원고성이 적현성으로 고려되고 퇴조고성이 사도성으로 고려된다.
적현성은 덕산면으로 추정된다.
고대에는 덕과 적이 잘 바뀌었다.
초고대왕령 아래 사도성은 퇴조만으로 추정된다.
46년(211) 가을 8월에 나라 남쪽에서 누리가 곡식을 해쳐 백성들이 굶주렸다.
겨울 11월에 얼음이 얼지 않았다.
47년(212) 여름 6월 그믐 경인에 일식이 있었다.
0212 Aug 14 06:48 T 87 0.431 1.025 39.8N 85.8E 64 96 02m12s
48년(213) 가을 7월에 서부인(西部人) 회회(茴會)가 흰 사슴을 포획하여 바쳤다.
왕이 상서롭다 하여 곡식 100섬을 주었다.
49년(214) 가을 9월에 북부(北部)의 진과(眞果)에게 명하여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고
말갈의 석문성(石門城)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같아서 말갈의 석문성으로 추정된다.
겨울 10월에 말갈이 날쌘 기병으로 쳐들어 와서 술천(述川)까지 이르렀다.
술천은 고구려 한산주에 있던 지명인데 이는 지금 평양을 흐르는 대동강의 지류라고 보아야 한다.
성천 부근으로 고려된다.
왕이 죽었다.
[고사기]에서 초고대왕은 보검인 쯔무가이대도(都牟刈大刀)를 규수의 왜여왕 히미코에게 보내주었다.
쯔모검은 주몽검의 다른 표기로 보인다.
앞서 소서노로 고려한 도모왕(都慕王)이라고 기록하여 한자가 틀리다.
주몽검 / 쿠사나기쯔루기
대구(大邱) 평리동(坪里洞)과 비산동(飛山洞)에서 출토된 청동검과 비교된다.
대구 평리동 청동검과 대구 비산동 청동검
*초고대왕의 일본 후손표
[2]. 구수왕(재위214~234)
구수왕(仇首王)<혹은 귀수(貴須)라고도 하였다.>은 초고왕(肖古王)의 맏아들이다.
키가 일곱 자요 위엄과 거동이 빼어났다.
초고대왕이 재위 49년에 죽자 왕위에 올랐다.
《고사기》에서 초고대왕은 처음에 이즈모(出雲)에 정도하고 그 곳에 수가(須賀)=(속고速古)에
야에가기(八重垣궁)을 짓고 살면서 백제의 여인 쿠시나다히메(櫛名田比賣)와 결혼하여
일본 팔도왕인 야시마지누미노가미(八嶋士奴美神)를 낳았다.
이를 《일본서기》에서는 오호아나무지=[(대기귀신(大己貴神) 또는 대국주신(大國主神)]이라 하였는데
바로 초고대왕의 장자 구수대왕(仇首大王)인 것이다.
그러나 실제는 쿠시나다히메가 함경남도 문천 출신인 백제에서 구수대왕을 낳고 일본으로 데려간 것이다.
구수대왕은 일본에서 귀수왕(貴首王)이라고 표기하는데, 일본의 대국주신(大國主神)이다.
대국주신의 일본 발음인 오호아나모지(大穴牟遲)=(大己貴神)는 아나(穴), (己)가 그 발음에서
본래 귀(貴)를 뜻하고 모지(牟遲)가 우리말 머리(首)를 의미하므로 귀수왕(貴首王)을
일본말 아나모지(大穴牟遲)로 풀어쓴 것이다.
스사노오의 후손으로 기록된 장남 야시마지노미신(八嶋土奴美)은 일본 팔도왕(八嶋牟遲)을 의미하는
관직명이다.
《위서왜인전》에서 일본 지방왕을 히노모리(卑奴母離)라고도 했는데 이는 백수(白首)라는 우리말이다.
우리나라 남자 무당을 의미하는 박수무당의 박수와 어원이 같다.
고구려 《동천왕묘지문》에도 백수(百殊)라는 왕칭(王稱)이 등장한다.
백제의 첫번째 팔도왕 야시마지노미(八嶋土奴美)는 구수왕자였다.
대국주신의 또다른 별명인 야찌호꼬(八千矛神)와 같은 발음의 이름이다.
구수대왕의 무기가 광창(廣槍)이었으므로 야찌보코(八千矛神)라고 했다.
이즈모의 박물관에 남아있는 수많은 비파형 동검 중에서 가장 넓은 것이 그의 무기였다.
비파형동검의 아래 부분에 나무를 끼워서 장창으로 사용한 것이다.
초고대왕은 칸오호찌히메(神大市比賣)와 결혼해서 오호토시노가미(大年神),
우카노미타마노가미(宇迦之御魂神)=(海神)을 낳았다.
함흥 지방에는 만년산(萬年山)이 있다.
만년과 대년이 서로 통한다.
《일본서기》에서 초고대왕은 일본에서 다시 신라 땅 소시모리, 즉 함흥으로 돌아갔다.
구수대왕, 즉 대국주신은 일본에서 고려(高麗)로 돌아간 것이 일본의
야찌보코오호쿠니누시신사(八千矛山大國主神社)의 연기(縁記)에서 확인된다.
함흥이 당시는 백제 땅이었고, 후에는 고구려 땅, 또 신라 땅이었으므로 기록의 시점에 따라 신라,
고구려로 다르게 적혔지만 같은 곳이다.
구수대왕은 초고대왕이 먼저 함흥으로 돌아간 뒤에도 일본에 남아있다가
함흥 남쪽 정평군(
定平郡 ) 수시리성에 다시 와서 초고대왕을 만나고, 초고대왕의 딸이자,구수대왕의 배다른 동생인 수세리히메須勢理毗賣와 결혼하여 정비로 삼고 일본에
다시 건너가서 일본을 다스리는 대국주신大國主神이 되었다.
《고사기》에서 스사노오의 딸이자 대국주신의 부인이 된 수세리히메는 정평군 수시리성의 공주였던 것이다.
초고대왕은 장자인 구수왕자를 《고사기》에서
초고대왕은 아시하라(葦原)의 시골놈(是奴, 葦原色許男, 葦原醜男)이라고 불렀다.
구수왕자는 초고대왕의 딸 수세리히메를 정비로 해서, 일본으로 건너가서
아나모지(穴牟遲)=(穴=貴, 즉 귀수貴首)라는 이름으로 일본을 다스리는 오호쿠니누시(大國主神)가 되었다.
대국주신의 대국성(大國城)은 오사카 화전(和田)에 있었다.
大国城跡(和田) 山吹城の出城。/ 일본 대국성 위치
八千矛山大國主神社(中市): 祭神、大國主命。大國町の旧氏神、神社縁記よれば大國主命が高麗よりの帰途、
この里に寄り、八千矛山に宮殿を定め、この地を大國という地名としたとある。神社の裏山を八千矛山という。;
이 신사 기록에 대국주신은 고려로 돌아갔다고 하였는데 함흥으로 돌아간 것이다.
구수왕자 대국주신은 일본에서 도또리현의 야카미(八上) 공주,
니이가타의 누나가와(沼河) 공주, 후쿠오카의 타기리(多紀理)공주 등과 결혼하였다.
타기리공주는 초고대왕이 히미코 왜여왕의 여사제에게서 낳은 공주였고,
누나가와 공주는 야시마무지신(八嶋牟遲)=(관직명=白首의 고어로 추정)의 딸이었다.
구수대왕이 이즈모(出雲)에서 대화(大和)로 진출할 때 구수왕으로부터 이즈모의 수장으로
임명받았던 지방왕 관직 이름이 야시마무지가 된다.
누나가와 공주의 신사는 니이가타(新瀉)현 경성(頸城)군에 있다.
구수대왕은 또 백제본국의 칸야타데(神屋楯) 공주를 통해서 백제 사반대왕(沙伴大王)
즉, 일본의 사대주신(事代主神)인 효소천황(孝昭天皇)을 낳았다.
일본에 남겨진 구수왕의 후손은 백제 사반왕과 일본의 의덕천황, 그리고 관야조신, 안고숙녜, 미장련,
하무조신 등의 조상이다.
의덕천왕은 압신사에 모셔졌고 관야조신 등은 대국주신사에 모셔졌다.
214년에 구수왕자는 본국에 돌아와 백제대왕에 즉위하였고, 이즈모(出雲)의 야에가기(八重宮)에는
백제 사반왕인 사대주신(事代主神)을 보냈다.
사대주신은 일본에서 효소천황(孝昭天皇)이 되었고, 미시마(三嶋)의 세야다타라(勢夜陀多良)와 통하여
이스케요리(伊須氣余理毗賣)=(219~273)를 낳았는데, 이스케요리는 신무천황(194~256)의 황후가 되었다.
이스케요리히메의 비문이 효소천황릉에서 발견되었는데 바로 백제 사반왕인 효소천황의 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이스케요리히메의 부친이라는 코토시로누시(事代主神)가 효소천황이었던 것을 확정할 수 있다.
초고대왕(재위166~214년)이 귀국한 뒤에, 166년부터 구수대왕이 오사카(大阪) 대국성(大國城)에서
일본을 다스리다가, 백제대왕으로 즉위한 214년 뒤에는 구수대왕(재위 214~234년)의 아들인 의덕천황
(懿德天皇)=(180~244) 오호야마토히코스키토모(大倭日子鉏友命)가 대화를 다스리다가 신무천황
(神武天皇)=(194~256)에게 전사하였다.
그 뒤에 초고대왕의 막내아들인 대년신(大年神)의 아들 안녕천황(安寧天皇)=(222~270)이
신무천황에게 항복하였다.
이후 신무천황은 왜여왕 히미코를 통일 왜국왕으로 내세워 2인자로서 보좌하다가,
247년에 히미코 여왕이 죽으니,
백제 고이대왕古爾大王(재위 239~286)의 허가 없이 스스로 독립된 일본 최초 천황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신무천왕이 257년에 백제 구수대왕계의 반격으로 죽고, 백제에서 돌아온 사반대왕인
효소천황(孝昭天皇)=(202~268)과 신무천황의 아들인 수정천황(綏靖天皇)=(243~292)이 타협하여
효소천황의 손녀 공주인 13살의 여사제 일여(壹與), 즉 개화천황開化天皇(244~283)을 여왕으로
세워서 휴전한다.
사반대왕의 아들이자 개화천황의 부왕인 효원천황孝元天皇(228~273)은 개화천황의 부왕으로서
역시 천황의 반열에 올려졌을 것으로 고려된다.
3년(216) 가을 8월에 말갈이 와서 적현성(赤峴城: 함흥 덕산)을 포위하였다.
성주가 굳게 막으니 적이 퇴각하여 돌아갔다.
왕이 굳센 기병 800명을 거느리고 추격하였는데, 사도성(沙道城 함흥 낙원) 아래에서 싸워
이를 격파하여 죽이거나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다.
4년(217) 봄 2월에 사도성 옆에 두 개의 목책을 설치하였는데 동서로 서로 떨어진 거리가 10리였다.
적현성의 군졸을 나누어 보내 지키게 하였다.
5년(218) 왕이 군사를 보내 신라의 장산성(獐山城; 경상북도 경산)을 포위하였다.
신라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하니 아군이 패배하였다.
7년(220) 겨울 10월에 왕성(王城) 서문에 불이 났다.
말갈이 북쪽 변경을 노략질하므로 군사를 보내 막았다.
8년(221) 여름 5월에 나라의 동쪽 지방에 홍수가 나서 산 40여 곳이 무너졌다.
6월 그믐 무진에 일식이 있었다.
나사(NASA) 추산으로는 양력 8월 5일이다.
0221 Aug 05 05:58 T 68 0.911 1.034 68.8N 159.9E 24 278 01m58s
가을 8월에 한수(漢水) 서쪽에서 크게 사열(査閱)하였다.
대방고지 백제왕으로 알려진 구이왕의 북방진출과 관련된 병력 사열이었을 것이다.
9년(222) 봄 2월에 담당 관청有司에 명령하여 제방을 수축하게 하였다.
3월에 영을 내려 농사를 권장하였다.
여름 6월에 서울王都에 물고기가 비와 함께 떨어졌다.
겨울 10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우두진(牛頭鎭; 춘천)에 들어가 민호(民戶)를 약탈하였다.
신라 장수 충훤(忠萱)이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웅곡(熊谷)에서 맞아 싸웠으나 크게 패배하여
한 필의 말을 타고 혼자 도망하였다.
11월 그믐 경신에 일식이 있었다.
나사(NASA) 추산으로는 양력 1월 19일이다.
0223 Jan 19 06:10 A 83 0.520 0.923 9.5N 82.0E 59 339 10m21s
11년(224) 가을 7월에 신라의 일길찬 연진(連珍)이 쳐들어 왔다.
우리 군사가 봉산(烽山) 아래에서 맞아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겨울 10월에 금성(太白)이 낮에 나타났다.
14년(227) 봄 3월에 우박이 내렸다.
여름 4월에 크게 가물자 왕이 동명묘(東明廟)=( 평양 정릉사.)에 빌었더니 곧 비가 내렸다.
16년(229) 겨울 10월에 왕이 한천(寒川)=(상원군 한천)에서 사냥하였다.
11월에 전염병이 크게 번졌다.
말갈이 우곡(牛谷) 함흥이다.
우수주의 경계에 들어와 사람과 재물을 약탈하였다.
왕이 정예 군사 300명을 보내 막게 하였는데 적의 복병(伏兵)이 양쪽에서 쳐서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18년(231) 여름 4월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밤(栗)만 하여 참새같이 작은 새들(鳥雀)이 맞으면 죽었다.
21년(234)에 왕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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