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백제

2.온조왕 한산 시대

오늘의 쉼터 2008. 9. 16. 18:10

 

 

온조왕 한산 시대 (재위bc18~ad28)

 

 


 

 

 

<한단고기>의 백제 건국기록은 아래와 같다.


bc19년 태자 비류가 (어하라로) 즉위하였는데 모두가 그를 따르지 않았다.


이에 마여등은 온조에게 말하기를

'신등이 듣기는 마한의 쇠퇴는 이미 들어난 일이요 가서 도읍을 세워야 할 때입니다'라고 했다.


온조가 '좋다'고 승락하니 곧 배를 만들어 바다를 건너 처음 마한의 미추골에 이르렀다.

 

 

 


 평안남도 평원군에 남아있는 미두산성이 미추성이다.

 미추의 변음(變音)이 미두인 것이다.

 미추는 용(龍)의 우리말이다.

 강룡산(降龍山), 견룡지(見龍池) 등이 미추홀에 남아있다.

 

 한참 만에 한산에 이르러서 부아악에 올라 살만한 땅을 살펴보고는

 앞으로 나아가 사방을 살펴보았지만 텅 비어서 사람 사는 곳이 없었다.

 


 


부아악은 자모산성이다.

성 둘레는 5000m이고, 위례성을 호위하는 5방성 중의 북방성이 된다.

온조봉에서 그 이름이 유래된 은좌봉(殷坐峰)이 그 서남에 있다.

평성시 동남쪽 백족산(百足山)도 온(溫=百)조산에서 유래한 것이다.

 

마려, 오간등 열명의 신하들이 말했다.

'생각컨대 이 하남의 땅은 북쪽이 한수를 끼고 동쪽은 크고 높은 산이요

남쪽은 기름진 평야가 열려 있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으니

이곳은 천험의 지리를 갖추고 있어 얻기 어려운 지세이옵니다.

마땅히 도읍을 정할 만한 곳입니다.

여기보다 나은 곳을 찾지 마시옵소서.'
온조는 열 신하들의 의견을 따라 하남의 위지성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라고 칭하니

백제라는 이름은 백사람이 건너 왔다는 뜻의 이름이다.
뒤에 비류가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이 그의 땅을 가지고 귀순해 왔다.


 


 

평안남도 성천군의 위례성. 성천은 위례성천이 어원으로 추정되며, 현재는 비류강(沸流江)이라고도 부른다.

동쪽의 소조산(小祖山)도 온조산에서 유래된 것이 된다.

 

 

백제의 초기 수도가 대동강 지역인 것은 문헌이나 고고학적으로 여러 가지 증거가 있다.

 

1) 일본 나라현(奈良縣)의 아스카(明日香) 기토라고분에서 나타난 벽화의 별자리가 평양 하늘을

   관측한 것으로 증거된다.

   백제인의 하늘은 평양 하늘이었다. 

2) 신라의 수만 개에 달하는 고분과 고구려의 수만 개 고분에 견줄 수 있는 백제 고분은 서울에 거의 없다.

    일제강점기에 약 80개 정도 남아 있었다고 전하지만 대부분 고구려식이다.

   대신 평안남도와 황해도에 수만 개 고분이 있는데 이 모두가 백제 귀족 고분이며 이를 이제까지 유령국가

   낙랑군의 고분으로 잘못 알고 있다.

3) 6세기 공주 무령왕릉 같은 형식의 벽돌(塼室) 고분의 선구가 만주로부터 대동강에 산재해 있다.

   현재 서울 한강에는 벽돌 고분이 없다.

   고구려 장수대왕이 백제 개로대왕을 죽인 뒤에, 백제는 황해도 웅진(토산 북포)으로 천도하였고,

   다시 성왕 때에 충청남도 부여 사비성으로 천도하여, 평안도와 황해도 전실고분이 한강 유역을

   거치지 않고 충청남도 공주 송산리 무령왕릉 고분으로 이어진 것이다.


4) 일본의 벽화 고분은 백제가 전수한 것이다. 그 벽화 고분의 선구가 역시 평양 지방이다.

   서울에는 벽화 고분이 하나도 없다.

   벽화 고분은 만주의 요양시를 거쳐 평양시에 전해졌고, 그 뒤에 고구려 집안과 신라로 전해졌다.

 

5) 또한 고구려고분으로 선전된 황해도 안악3호 고분의 복식과 관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왕의 복식과 관이다.

   고구려왕의 복식과 관은 색이 전혀 다르다.


6) 황해도 사리원의 대방태수 장무이(張撫夷) 묘는 낙랑의 대방태수묘가 아니라

    백제의 대방태수묘이다.

 

  471년 송나라에 개로대왕의 사자로 간 백제 대방태수의 이름도 장무(張茂)였다.

  즉 장무의 부형이 장무이인 것이다.

  장무이는 고향이 어양(漁陽)이라고 했는데 그 어양이 예성강의 지명이다.

  평산군과 토산군 사이에 있다.

 

7)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396년 백제를 정벌할 때 뺏은 첫번째 성이 만주의 단동시(丹東市)

    봉황산성(鳳凰山城)으로 [만주지리풍속지]에 기록되어 있다.

    즉 396년 이전에 백제 땅은 만주에도 퍼져 있었다.

8) 광개토대왕에게 백제가 패퇴한 5세기, 백제가 후퇴한 수도 웅진성은 임진강(臨津江)에 있었다.
    황해도 신계군(新溪郡) 부여면(夫餘面) 위라천(位羅川)이 제2의 위례성(慰禮城)이고 위라천에서 

    흘러내려오는 예성강은 본래 위례성강(慰禮城江)이라고도 불렸던 것이다.

    또한 문주왕의 웅진강은 임진강이었고 임진강 중류에 고마성이 있었다. 

    임진강의 상류는 고미탄이라고 한다. 

   고미탄이 웅진강이다.
   당시 웅진성의 호위성이었던 평산군 태백산성은 백제 말기 수도인 충청남도 부여의 부소산성과

   똑같은 형식이다.

 

9) 대동강 평양에서는 병술년 506년 경에 고구려인에 의해서 현재의 평양성이 세워질  당시에

   만들어진 [평양성벽 각서刻書]가 발견되었는데, 그 성벽에 평양이라는 말은 전혀 없고,

   대신에 오로지 "한성漢城"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漢城 下 後部小兄...


  고구려 한성은 백제 북한성에 해당한다.

  백제 북한성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빼앗았었다. 
  [
평양성벽각서]에서 [한성 하, (漢城 下)]는 고구려 한성이 고구려인에 의해 건설 도중에

  다시 백제에게 함락되었던 사실을 의미한다.
  506년 무령왕 때이다.


 

10) 고구려 문자왕이 (507) 겨울 10월에 장수 고노(高老)를 보내,

   말갈과 함께 백제의 한성(漢城)을 칠 것을 꾀하여,

   횡악(橫岳) 밑으로 나아가 주둔하였는데, 백제가 군사를 내어 맞아 싸우므로 물러났다.

   이 횡악이 바로 평양 서쪽 용강군의 오석산 황룡산성이다.

   백제 다루왕 때에 횡악에 다섯 개의 돌이 떨어졌다.

   그래서 오석산성인 것이다.

   또한 백제 속국회의를 하러 들어온 점재현장의 신사비에서 보듯이 풍년이 들게하고

   해상 출입이 안전하게 해달라는 비가 오석산에 있다. 

   전통적으로 백제가 기우제를 올리던 곳이 횡악이기 때문이다.

 

11)고구려가 당나라에 항복했던 대동강 평양은 본래 고구려 한성이었다.

    연개소문의 둘째아들 천남산묘지(泉男山墓誌)에도 고구려가 당나라에 항복한 곳은

   고구려 한성漢城으로 나와있다.

   즉 지금 평양은 본래 고구려의 한성이었다.

 

   [泉男山墓誌] 漢城不守 貊弓入獻 楛矢來王


12) [삼국사기]에서 한성(평양 니현)의 백제 개로왕을 참살한 고구려 안장왕이 다시 백제로

    쳐내려와서 전투한 곳은 황해도 한복판 오곡군(五谷郡), 지금의 서흥이었다.

    북한의 역사책은 이를 백제군의 북침을 유인해서 섬멸한 것이라고 억지로 해석한다.

    그러나 백제 무령왕이 이미 평양 이북을 수복했었던 것이다.

 

13) [일본서기] 550년조에서 백제 성왕과 왕자 여창이 평양(平壤)을 쳐서

    한성 등 6군을 수복했는데, 본래 백제 고지라고 했다.

    결국 포기하고 돌아왔다.


14) [삼국사기/거칠부전(居柒夫傳)]에서 나제동맹군의 백제가 앞서나가서 평양성을 쳤다고 했는데

    대동강의 평양, 즉 남평양이며 본래는 고구려 한성이다.


15) 번한왕 기준(箕準)이 요서에서 위만(衛滿)에게 밀려나서 피난나온 마한이 대동강 평양이다.

   [마한세계(馬韓世系)]에서 기준의 9세 후예인 기정(箕貞)이 기원전 17년에 백제 온조대왕에게 망했는데,

   이때 기씨마한의 세력이었던 선우(鮮于)씨는 평양 서쪽의 오석산 황룡산성(黃龍山城)=(앞 지도 참조)의

   주인이 되었고, 기(奇)씨는 경기도 행주산성의 주인이 되었고, 한(韓)씨는 충청북도 청주의 주인이 되었다.
   전라도 익산 구석에서 기씨마한이 망했다는 주장은 그 후손들의 분산 배치 결과로서 말이 되지 않는다.

16) 평양의 백제대왕을 낙랑태수라고한 것은 동진에서 보낸 근초고대왕의 책명에서 나타나고,

   그후 [양나라 직공도(梁職貢圖)]에도 백제 사신을 낙랑 사신이라고 기록해놓았다.

   아울러 이 백제가, 이 낙랑이 양자강 동쪽을 동진(東晋) 말부터 백년간 거느렸다.

 

17) 백제 초고대왕(肖古大王)의 이름이 함흥에 남아있다.

   이는 뒤에 자세하다.

18) [정의괄지지(正義括地志)]에서는 도이(島夷)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백제국 서남의 발해 중에 큰 섬 15개소가 있는데 백제에 속했다.

    백제가 발해 동북에 위치해 있었으니 백제의 만주 소유가 기록된 것이다.

 

   [正義括地志]:「百濟國西南渤海中有大島十五所,皆邑落有人居,屬百濟.」


19) [신당서/백제전]에 백제가 멸망하고 그 땅을 발해와 신라가 나누어가졌다고 하였다.

 

   武後又以其孫敬襲王,而其地已為新羅、渤海靺鞨所分,百濟遂絕。

 

   발해는 한강 이남에 내려온 적이 없으므로 백제는 망국 때까지도 황해도를 소유하고 있었다.


20) 현재 한강은 북한강 수계로 살펴볼 때에 금강산의 회양(淮陽)도호부에서 흘러내려서 광주의 

   옛이름인 회안(淮安)을 지나서 경기도 통진군에 있던 평회압성(平淮押城)을 지나 바다로 나갔다.

   이는 북한강으로부터 시작된 한강의 이름이 백제 시대에 회수(淮水)였다는 증거다.

   평안북도 영변에서 임회태수장이라는 도장이 발견되었기도 하다. 

   즉 백제 임회군(臨淮郡) 태수 도장이다.   
   이렇게 많은 대동강 백제 평양의 증거가 무시되는 국사는 결코 진실된 역사가 아니다.

   제 조상 무덤을 호로새끼 무덤이라 하면서, 스스로 근본을 부인하고 노예처럼 살기로 작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삼국사기>의 편년으로 온조대왕 시대를 살펴본다.

 

원년 여름 5월에 동명왕묘(東明王廟)를 세웠다.

 

실제 동명왕은 서기전 19년에 유리왕에게 타도당하여 졸본성으로 옮겨갔으나 죽은 것으로 알려졌을 수가 있다.
한반도에서 동명왕 전설이 있는 곳은 평양 남쪽 정릉사와 평양 동북쪽 성천 홀골산성이다.
성천성은 온조 원년에 세운 위례성이며 동명왕 사당도 처음에는 홀골산 강선루 부근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에 정릉사의 동명왕묘는 불교가 전해진 후에 세워진 것으로 고려되며, 근초고왕 때에 세워졌을 것으로 고려된다.

 

2년(서기전 17) 봄 정월에 왕이 여러 신하에게 말하였다.
“말갈(靺鞨)은 우리 북쪽 경계에 연접하여 있고, 그 사람들은 용감하고 속임수가 많으니

 마땅히 병장기를 수선하고양곡을 저축하여 막아 지킬 계획을 세워야 할 것이다.”

 3월에 왕은 재종숙부族父 을음(乙音)이 지식과 담력이 있으므로 우보(右輔)로 삼고 군사 업무를 맡겼다.

을음(乙音)은 이름이 아니라 을지문덕의 을지와 같은 두 글자의 족성(族姓)으로 고려된다.
태조대왕 때에 환인현에 있던 파저강의 비류소국을 치고나서 주나(朱那)를 쳐서

그곳의 왕인 을음을 사로잡아 고추가로 임명하였다. 


태조 22년(서기 74) 겨울 10월에 왕은 환나부(桓那部) 패자 설유(薛儒)를 보내 주나(朱那)를 정벌하고,

그 왕자 을음(乙音)을 사로잡아 고추가로 삼았다.
환인현 파저강은 초기부터 백제 영역이었다.

 

3년(서기전 16) 가을 9월에 말갈이 북쪽 경계를 쳐들어 왔다.

왕은 굳센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급히 쳐서 크게 이겼다.

적으로서 살아 돌아간 자가 열에 한 둘이었다.

겨울 10월에 우뢰가 쳤고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피었다.

 

4년(서기전 15) 봄과 여름에 가물어 기근이 들고 전염병이 돌았다.
가을 8월에 사신을 낙랑(樂浪)에 보내 우호를 닦았다.

한사군의 낙랑(樂浪)은 고두막한과 고주몽의 등극으로 인해서 이미 요동(금주시 부근)으로 밀려났다. 
요동군 대양하(大梁河)라고 부르던 지금의 요양하(繞陽河)는 바로 밀려난 낙랑의 낙양하(樂陽河)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낙(樂)의 또다른 발음이 요()다.


백제 초기의 낙랑은 한사군이 아니라 [비류 백제]로 고려된다. 

비류와 온조는 형제지만 이제 서로 다른 나라의 왕이다.

   

5년(서기전 14) 겨울 10월에 북쪽 변방을 순행하고 위무하며 사냥하였는데 신록(神鹿)을 잡았다.

 

6년(서기전 13) 가을 7월 그믐 신미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중국도 같은 기록이 있다. (
永始四年七月辛未晦,日有食之。)

나사의 추산으로 양력 8월31일에 일어났다. 

 Aug 31 00:25 A 83 0.747 0.931 55.4N 165.2W 41 386 06m25s

 

8년(서기전 11) 봄 2월에 말갈적병 3천 명이 와서 위례성(慰禮城)을 포위하자 왕은 성문을 닫고

나가 싸우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 적이 양식이 다 떨어져 돌아가자,

왕은 날랜 군사를 뽑아 대부현(大斧峴)까지 쫓아가 한번 싸워 이겼으며, 5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가을 7월에 마수성(馬首城)을 쌓고 병산책(甁山柵)을 세웠다.


부현은 평양 서쪽 부산(斧山)으로 고려된다.

 평양 북쪽 30리, 월봉산 남쪽에 있다.

한 용감한 장수(온조왕)가 이곳에서 도끼로 적을 무찔렀다고 해서 그렇게 이름지었다고 한다.

부산사(斧山祠)라고 하는 사당을 지어 제사지내며 제사 이름은 압병제(押兵祭)이다.


마수성은 뒤에 <광개토왕 비문>에서 모수성이라고 했던 의주의 백마산성으로 고려된다.



 

 

병산책은 병천동이라고 하던 대령강의 박천읍 동쪽 마을과 관련하여 박천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낙랑태수(樂浪太守)의 사자가 고하여 말하였다.

 “근래에 서로 예방하고 우호를 맺어 뜻이 한 집안과 같았는데, 지금 우리 영토에 접근하여 성과 목책을

만들고 세우는 것은 혹시 야금야금 먹어 들어올 계책이 있어서인가?

만일 옛 우호를 저버리지 않고 성을 허물고 목책을 깨뜨려 버린다면 시기하고 의심할 바가 없겠지만,

혹시 그렇지 않다면 청하건대 한번 싸워서 승부를 결정하자.”


낙랑태수(樂浪太守)의 사자는 당시에 요동성 부근으로 물러난 낙랑태수가 아니라 

역시 낙랑왕을 자처하던 비류왕으로 고려된다.

왕이 회답하였다.

“요새를 설치하여 나라를 지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떳떳한 길인데 어찌 감히 이로써 화친과 우호를

저버림이 있을 것인가.

의당히 집사(執事)가 의심할 바가 아닌 것 같다.

만일 집사가 강함을 믿고 군사를 낸다면 우리 나라小國도 또한 이에 대응할 뿐이다.”
이로 말미암아 낙랑과 우호를 잃게 되었다.

 

10년(서기전 9) 가을 9월에 왕이 사냥을 나가서 신비로운 사슴(神鹿)을 잡아 마한(馬韓)에 보냈다.

겨울 10월에 말갈(靺鞨)이 북쪽 경계를 노략질하였다.

왕은 군사 200명을 보내서 곤미천(昆彌川) 가에서 막아 싸우게 하였다.

우리 군사가 패배하여 청목산(靑木山)을 의지하고 스스로 지켰다.

왕이 친히 정예 기병 100명을 거느리고 봉현(烽峴)으로 나아가 구원하니 적이 보고는 곧 물러갔다.
청목산은 청색(靑塞)이라고 했던 청천강의 희천시로 고려된다.

뒤에 진사왕 대에 관방을 �았는데 그 동쪽 경계였다.

곤미천은 지금의 고면천으로 고려되며 이는 압록강의 지류인 충만강의 지류다.

 

 


 

 

 

11년(서기전 8) 여름 4월에 낙랑이 말갈을 시켜 병산책(甁山柵)을 습격하여 깨뜨리고는

1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가을 7월에 독산책(禿山柵)과 구천책(狗川柵)의 두 목책을 세워 낙랑과의 통로를 막았다.

구천책은 평안남도 개천시에 세운 것이다.

독산책은 독로강(禿魯江)변으로 추정되며 지금 압록강의 강계읍이 독산책이 있던 곳이 된다.
주나를 정복한 고구려 환나우태 설유(薛儒)의 이름으로부터 비롯된 설렬한령(薛列罕嶺)이 남아 있다.

 

13년(서기전 6) 봄 2월에 서울(王都)에서 늙은 할멈이 남자로 변하였고, 다섯 마리의 범이 성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죽었는데 나이가 61세였다.


여름 5월에 왕이 신하에게 말하였다.

 “우리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영토를 침략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하물며 이즈음 요망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국모(國母)가 돌아가시니 형세가 스스로 편안할 수 없도다.

장차 꼭 도읍을 옮겨야 하겠다.
내가 어제 순행을 나가 한수(漢水) 남쪽을 보니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을 정하여 길이

편안할 수 있는 계책을 도모하여야 하겠다.


<삼국사기> 원문에서 동쪽 말갈과 북쪽 낙랑이 동쪽 낙랑과 북쪽 말갈로 서로 바뀌었다.

가을 7월에 한산(漢山) 아래로 나아가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들을 옮겼다.

 

 



 

 

온조왕의 새 수도는 니현의 한성이다.

제령산 아래에 있다.

제령산 서남줄기가 용산이고 동명왕사가 있다.


<삼국유사>에서 근초고왕이 천도한 곳은 북포산(北浦山)이며, 지금의 안학궁인데 태화궁이라고도 불렀다.
근초고왕의 연호가 태화였던 것이 칠지도에 기록되어 있다.
평양시 낙랑토성이 북포에 대응하는 남포(南浦)였을 것이다.
개로왕 때에 장수왕의 고구려군에 의하여 북성과 남성 공격이 7일 간격으로 이루어졌는데

그중 남성은 지금의 니현(泥峴) 한성 위치다.
내성은 대원리(大園里)라고도 한다.
성왕 때인 550년에 평양과 한성 등 6군을 수복했다가 버렸다. 


이 온조 한성은 훗날 668년에 유인원이 웅진도독부에서 고구려로 올라갈 때에 대곡(황해도 평산)과 대동강

평양 사이에 위치해서 북진해 올라가는 당나라 유인원에게 항복했던 한성이다.
또한 670년 후고구려를 일으키려던 안승의 한성이다. 

이에 대해 문무왕기 14년조에는 신라왕이 고구려 부흥군을 받아들여서 백제 옛땅 한성에서 반란하게 도우니

고종이 화를 냈다고 하였다. 

 

王納高句麗叛衆 又據百濟故地 使人守之 唐高宗大怒

 

 550년에 신라가 한성에 들어갔는데 신라의 우두방, 또는 니미방(今 新羅之牛頭方、尼彌方也)이라고 하였다.

니미(尼彌)는 진흙산을 의미한다.

 이것이 대동강의 니현이며 백제 한성이다. 우두(牛頭)는 소머리이니 사비성과 같은 말이고.

크다는 의미의 우리말로 한성이다.

 

니현의 한성 동쪽에는 가수리 관음산 남쪽에 가수굴이 있다. 

일본에서 개로왕을 가수리왕이라고 하였다.

 

 

 

 

동명왕릉이 있던 용산사(지금의 정릉사)는 백제 한성이 바로 가까이 있지 않으면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저기 멀리 떨어진 평양성에서 동명왕릉을 이곳까지 멀리 세울 이유가 없다.

오로지 백제 한성에 온조왕이 동명왕릉을 세운 것으로만 그 위치가 설명이 가능하다.
한성의 궁터는 두 군데 보이는데 남쪽 것이 온조시대 한성으로 고려된다.

북쪽은 개로왕이 벽돌(蒸土)로 만들었을 것으로 고려된다.

 

 

 

한성의 서북쪽을 보면 북벽은 이중으로 성벽이 보인다.

서벽에서 흙산(泥山)인 것을 알 수 있다.

 


 

한성의 북벽은 산으로 이루어졌는데 도증산(道證山)이라고도 하였다.

도증이 토증(土蒸)에서 비롯된 말이면 개로왕의 증토축성(烝土築城)에서 유래한 말이 된다
 

 

서북 궁성 입구에 성루 다락이나 종고루 등을 세웠던 궁성 토대의 흔적들이 보인다.

이곳의 현재 지명이 니현(泥峴)이다.

한편 남한산 위치에는 남한산성이 있었다.

근초고왕 시대에는 남경이라고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남한산성에는 상리, 하리, 내리 등이 있었다.

이는 안악3호고분 책계왕묘에 나타나는 상리일 수 있다. .

 

 

 

8월에 사신을 마한에 보내 도읍을 옮긴 것을 알리고 마침내 강역을 구획하여 정하였는데
북쪽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렀고, 남쪽으로는 웅천(熊川)을 경계로 하였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고,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다.
9월에 궁성과 대궐을 세웠다. 

패하는 요양시 태자하를 말한다.

주양은 우수주에 있었고 질암이라고 하였는데 지금의 오대산 진고개 아래로 고려된다. 

남쪽 경계 웅천은 임진강이다.

 

14년(서기전 5) 봄 정월에 도읍을 옮겼다.
한산 아래에 새로 만들어진 니현의 한성이다.

2월에 왕은 부락을 순행하며 위무하고 농사를 힘써 장려하였다.
가을 7월에 한강 서북쪽에 성을 쌓고 한성(漢城)의 백성을 나누어 살게 하였다.

당시 백제의 한강 서북쪽에 새로 쌓은 성이 지금의 평양성이 된다. 
북한성이라고 한다.    
특히 온조왕의 천도 당시에는 황해도의 구월산 금마 마한을 병합하기 전이다.


17년(서기전 2) 봄에 낙랑이 쳐들어 와서 위례성을 불질렀다.
아직은 비류왕의 낙랑 세력이 온조왕을 능가했던 것으로 고려된다.

여름 4월에 사당廟을 세우고 국모(國母)에게 제사지냈다.


한편 일본의 <신찬성씨록>에는 도모왕都慕王이 백제 시조로 되어있다.

같은 책에서 주몽왕은 추모(鄒牟)왕이라고 하였다.
도모왕은 우리말 대모산, 대모성(大母城)과 관련이 있고 평안북도의 자모산성,

황해도의 자모산성과 관련된다. 
즉 대모, 자모 소서노를 백제 건국왕으로 추증한 것이다. 
평양 서쪽 강서군 초성리에 있던 대구향(大垢鄕)으로 추정된다. 

강서대묘(삼묘리)가 있는 곳이데, 대후묘가 있었을 것으로 고려된다.

대구향 가까운 곳에 각묘향(角墓鄕)이 있았는데 지금 수산리벽화고분에 해당한다.

온조왕릉일 수도 있다.  

 

18년(서기전 1) 겨울 10월에 말갈이 갑작스레 습격하여 왔다.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칠중하(七重河)에서 맞아 싸워 추장 소모(素牟)를 사로잡아 마한에 보내고

그 나머지 적들은 모두 산채로 구덩이에 묻어 버렸다.
칠중하는 경기도 적성으로 알려졌다.

11월에 왕이 낙랑의 우두산성(牛頭山城)을 습격하려고 구곡(臼谷)에 이르렀으나 큰 눈을 만나 곧 돌아왔다.

구곡은 <광개토왕 비문>에서 구모로성이라고 부르던 곳으로서 단동시 구련성이다.

낙랑 우두산성은 단동시 서쪽 수암현의 낭랑성으로 고려된다.

 

20년(서기 2) 봄 2월에 왕이 큰 단大壇을 설치하고 친히 천지(天地)에 제사지냈는데 이상한 새 다섯 마리가

와서 날았다.

22년(서기 4) 가을 8월에 석두성(石頭城)과 고목성(高木城)의 두 성을 쌓았다.
고목성은 평안남도 성천군 동쪽이며 원산의 서북쪽인 고원군(高原郡) 서쪽 지방으로 추정된다.

태백산맥에 있다.
석두성은 황해도 토산군 북쪽 학봉산 석두사와 관련되는 것으로 고려한다.

9월에 왕이 기병 1천 명을 거느리고 부현(斧峴) 동쪽에서 사냥하다가 말갈 적(賊)을 만났다.

한번 싸워 격파하고, 생구(生口)를 사로잡아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24년(서기 6) 가을 7월에 왕이 웅천책(熊川柵)을 세우자 마한 왕이 사신을 보내 나무라며 말하였다.

 “왕이 처음 강을 건너 왔을 때 발디딜 만한 곳도 없었으므로 내가 동북쪽의 100리의 땅을 떼어 주어

편히 살게 하였으니 왕을 대우함이 후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마땅히 이에 보답할 생각을 하여야 할 터인데, 이제 나라가 완성되고 백성들이 모여들자

나와 대적할 자가 없다고 하면서 성과 못을 크게 설치하여 우리의 영역을 침범하니

그것이 의리에 합당한가?”

 

이 당시 웅천책은 예성강(禮成江)으로 고려된다.

마한이 고립되어 말라가는 상황이 된 것이다.

 

왕은 부끄러워서 드디어 목책을 헐어버렸다.

 

25년(서기 7) 봄 2월에 왕궁의 우물물이 갑자기 넘쳤고, 한성(漢城)의 민가(人家)에서 말이 소를 낳았는데

머리 하나에 몸은 둘이었다.

 

일관(日官)이 말하였다.

“우물물이 갑자기 넘친 것은 대왕이 우뚝 일어날 징조요,

소가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인 것은 대왕이 이웃 나라를 병합할 징조입니다.”


왕이 듣고 기뻐하여 드디어
진마(辰馬)를 병탄할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진마(辰馬)는 마한에 들어온 진한(辰韓)을 의미하며 기준왕 준의 후예이다.

 금마(金馬) 마한, 진마(辰馬)라고도 한다.
황해도 구월산 북록에 있는 천험의 요새에 있었다.

 현재 은율, 장연, 안악에 걸쳐 있는 구월산 북쪽의 천연의 요새가 있다. 

구월산은 본래 궐산(闕山)이다. 


 

 

26년(서기 8) 가을 7월에 왕이 말하였다.

 

“마한은 점점 쇠약해지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마음이 갈리어 그 형세가 오래 갈 수 없을 것 같다.

만일 남에게 병합된다면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는 격(脣亡齒寒)이 될 것이니 후회하더라도 이미 늦을 것이다.

차라리 남보다 먼저 마한을 손에 넣어 훗날의 어려움을 면함만 같지 못할 것이다.”


겨울 10월에 왕이 군사를 내어 겉으로는 사냥한다고 하면서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드디어 그 국읍(國邑)을 병합하였다.

다만 원산성(圓山城)과 금현성(錦峴城)의 두 성만은 굳게 지켜 항복하지 않았다. 

 

청주 한씨의 [마한세가]에 의하면 당시 금마마한왕은 계왕(稽王)으로서 기원전 32년에 즉위하여 기원전 16년 온조왕에게 땅을 뺏기고 서기 9년에 원산, 금현이 항복하여 완전히 망했다고 하였다.

 

 

 

 

 

 

원산성은 구월산 동남쪽 신천군의 원산역과 모한정 등의 지명으로 고려하여 당시 원산성으로 고려된다.

 

 


 

 

본래 금현성은 황해도 옹진군에 있던 웅현일 수도 있다.
온조왕에 의해 옮긴 금현성은 평양 금수산(錦繡山) 아래 평양 북성(北城)으로 고려된다.

 

27년(서기 9) 여름 4월에 두 성이 항복하자 그 백성들을 한산(漢山) 북쪽으로 옮기니,

 마한은 드디어 멸망하였다.
가을 7월에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쌓았다.

용강군 황룡산 아래에 백사포 건너서 대두산이 있다. 

 현재 남포시 배경이 되는 산성이다.

 




28년(서기 10) 봄 2월에 맏아들 다루(多婁)를 태자로 삼고 중앙과 지방內外의 군사 업무를 맡겼다.

 여름 4월에 서리가 내려 보리를 해쳤다.

31년(서기 13) 봄 정월에 나라 안의 민가들을 나누어서 남부(南部)와 북부(北部)로 삼았다.
여름 4월에 우박이 내렸다. 5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6월에 또 지진이 일어났다.

 

33년(서기 15)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었다. 백성이 굶주려 서로 잡아먹고 도적이 크게 일어났다.

왕이 이를 위무하고 안정시켰다.

가을 8월에 동부(東部)와 서부(西部)의 두 부(部)를 더 설치하였다.

 

34년(서기 16) 겨울 10월에 마한의 옛 장수 주근(周勤)이 우곡성(牛谷城)에 근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왕은 친히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이를 토벌하였다.

주근이 스스로 목매어 죽자 그 시체의 허리를 베고 그의 처자도 아울러 죽였다.

 
다루왕 29년(서기 56) 봄 2월에 왕이 동부에 명하여 우곡성(牛谷城)을 쌓아 말갈을 방비하게 하였다.

33년에 동부를 설치하고 일어난 반란이다.

우곡성은 함흥 서쪽 우봉석성 부근으로 추정된다. 우수주를 두었다.

 


 

 

36년(서기 18) 가을 7월에 탕정성(湯井城)을 쌓고 대두성(大豆城)의 민가들을 나누어 살게 하였다. 
대두성은 용강군 남쪽 대두산성이고, 탕정성은 용강군 서쪽 지금의 온천군 온정읍이다.

 

8월에 원산성(圓山城)과 금현성(錦峴城)의 두 성을 수리하고,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을 쌓았다.
본래의 원산성과 금현성을 의미한다. 황해도 구월산 신천과 옹진반도로 고려한다.
고사부리성은 중화군으로 고려한다.

 

37년(서기 19) 봄 3월에 우박이 내렸다.

크기가 달걀만 하여 참새 같이 작은 새들鳥雀이 맞으면 죽었다.

여름 4월에 가물었는데 6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왔다.

한수(漢水)의 동북쪽 부락에 기근이 들어 고구려로 도망해 간 자가 1천여 집戶이나 되니,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사이가 텅비어 사는 사람이 없었다.

 

38년(서기 20) 봄 2월에 왕이 지방을 순행하고 위무하여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고,

북쪽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렀다가 50일만에 돌아왔다.

3월에 사신을 보내 농사짓기와 누에치기를 권장하고 급하지 않은 일로 백성을 괴롭히는 일은

모두 없애도록 하였다.

겨울 10월에 왕이 큰 단(大壇)을 쌓고 천지에 제사지냈다.


주양(走壤)은 신라 수약주(춘천)에 있었다. 

질암(迭巖)이라고도 했는데 오대산 진고개 동쪽으로 고려된다.

진고개를 니현(尼峴)이라고 하였다.

 

40년(서기 22) 가을 9월에 말갈이 술천성(述川城)을 침공해 왔다.
 겨울 11월에 또 부현성(斧峴城)을 습격하여 100여 명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왕이 날쌘 기병 200명에게 명하여 이를 막아 치게 하였다.
술천은 고구려 한산주에 있던 지명인데 성지매라고도 하였다.

처음 위례성을 세웠던 성천 부근으로 고려된다. 

 

41년(서기 23) 봄 정월에 우보(右輔) 을음(乙音)이 죽자 북부의 해루(解婁)를 우보로 삼았다.
 해루는 본래 부여 사람으로 식견神識이 깊었고, 나이가 70세를 넘었으나 기력이 쇠하지 않았으므로

등용한 것이었다.
2월에 한수 동북쪽의 여러 부락 사람으로 나이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위례성(慰禮城)을 수리하고 조영하였다.

처음 위례성이 한수(대동강) 동북쪽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으니 평안남도 성천이다.
우보가 된 해루가 본래 부여인인데, 요동반도 복주 부여성의 부여인이다. 

 

43년(서기 25) 가을 8월에 왕이 아산(牙山) 벌판에서 5일 동안 사냥하였다.

9월에 기러기(鴻雁) 100여 마리가 왕궁에 모였다.

 

일관(日官)이 말하였다.
“기러기는 백성의 상징입니다. 장차 먼 데 있는 사람이 투항해 오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겨울 10월에 남옥저(南沃沮)의 구파해(仇頗解) 등 20여가(家)가 부양(斧壤)에 귀순하니(納款)

왕이 이들을 받아들여 한산(漢山) 서쪽에 안치하였다.
평양 서쪽의 해압산(海鴨山)으로 고려된다.

현재 강원도 평강군의 옛지명인 부양은 이들이 광개토왕 침공 이후에 옮겨간 것으로 고려된다.  

 

45년(서기 27)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어 풀과 나무가 타고 말랐다.

겨울 10월에 지진이 일어나 백성들의 집을 넘어뜨렸다.

46년(서기 28) 봄 2월에 왕이 죽었다薨.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 건국 설화는 아래와 같다.
백제(百濟)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은 그 아버지는 추모(鄒牟)인데 혹은 주몽(朱蒙)이라고도 하였다.
주몽은 북부여(北扶餘)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다.

부여 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주몽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비류(沸流)라 하였고, 둘째 아들은 온조(溫祚)라 하였다.
<혹은 『주몽이 졸본에 도착하여 월군(越郡)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하였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孺留이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 마침내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열 명의 신하와 더불어

남쪽으로 갔는데 백성들이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들은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가 살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열 명의 신하가 간하였다.

 
“이 강 남쪽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를 띠처럼 띠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으니 이렇게 하늘이 내려 준 험준함과

지세의 이점(天險地利)은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여기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鄒忽)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한수 남쪽 하남(河南)의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이 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서기전 18)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수 없어서 위례(慰禮)에 돌아와 보니 도읍은 안정되고

백성들도 평안하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가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에 귀부(歸附)하였다.


그 후 처음 올 때 백성(百姓)들이 즐겨 따랐다(百姓樂從)고 하여 국호를 백제(百濟)로 고쳤다.

그 계통(世系)은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扶餘)에서 같이 나왔기 때문에 부여(扶餘)를 씨(氏)로 삼았다.
<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조 비류왕(沸流王)은 그 아버지는 우태(優台)로 북부여 왕(北夫餘王) 해부루(解夫婁)의

서손(庶孫)이었고,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로 졸본(卒本) 사람 연타발(延陀勃)의 딸이었다.

 

소서노는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지는 비류라 하였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다.
우태가 죽자 소서노는 졸본에서 과부로 지냈다.

 

뒤에 주몽이 부여(扶餘)에서 용납되지 못하자 전한(前漢) 건소(建昭) 2년(서기전 37)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소서노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주몽은 그녀가 나라를 창업하는 데 잘 도와주었기 때문에 그녀를 총애하고 대접하는 것이 특히 후하였고,

비류 등을 자기 자식처럼 대하였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에게서 낳은 아들 유류(孺留)가 오자

그를 태자로 삼았고, 왕위를 잇기에 이르렀다.

이에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하였다.

 

“처음 대왕이 부여에서의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도망하여 오자 우리 어머니께서 재산을 기울여

나라를 세우는 것을 도와 애쓰고 노력함이 많았다.

 대왕이 세상을 떠나시고 나라가 유류(孺留)에게 속하게 되었으니,

우리들은 그저 군더더기 살처럼 답답하게 여기에 남아 있는 것은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택하여 따로 도읍을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


드디어 동생과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두 강을 건너 미추홀(彌鄒忽)에 이르러 살았다.』

 
북사(北史)와 수서(隋書)에서는 모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동명(東明)의 후손에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질고 신의가 돈독하였다.

그는 처음에 대방의 옛 땅(帶方故地)에 나라를 세웠다.

한(漢)나라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가 자기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마침내 동이(東夷)의 강국(强國)이 되었다.』

 

 <그러나 어느 것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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