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서노(召西努) 백제의 기원 어하라와 비류왕 수도 부여성
1. 백제의 기원 어하라 (bc42~bc19)
연타발의 딸 소서노(召西努)는 기묘년 3월(bc42년)에 패대(浿帶)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고 살기 좋다는 말을 사람들에게서 듣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번(辰番)에 이르렀다.
바다에 가까운 외진 곳으로 여기에 살기 10년 만에 밭을 사고 장원을 두고 부를 쌓아 몇 만금이러니
원근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와 협력하는 자가 많았다.
북쪽은 대수(帶水)에 이르고 서쪽은 큰 바다에 임했다.
반천리(즉, 오백리)의 땅이 모두 그의 것이었다.
사람을 보내 편지를 주몽제에게 올리며 섬기기를 원한다고 하니
주몽제는 몹시 기뻐하시며 이를 장려하여 소서노를 어하라라고 책봉했다.
어하라 책봉후 13년 임인(-19)에 소서노가 죽었다.
소서노의 어하라 책봉은 bc31년경으로서 유리왕의 즉위해인 bc19년보다 13년 전이었던 것이다.
소서노가 건너온 패수는 뒤에 구하(句河)가 된 지금의 요하 상류다.
낙랑군의 패수이며 고국원왕이 백제의 공격으로 죽은 평양성 패수다.
어하라의 북쪽 경계가 된 대수(帶水)는 뒤에 살수가 된 심양시 혼하다.
소서노 어하라의 중심은 어니하가 지나는 대석교시 진미산이었다.
공손탁 요동국이 설치한 대방군은 의무려산 동쪽으로서 지금의 요하 서쪽이라 서로 다르다.
훗날 백제가 망한 후에 당나라가 나당전쟁에 패배하여 한반도에서 철수하고나서
다시 대방도독부가 대석교시 남쪽 개주시 웅악현에 설치되기도 했다.
발해 때 개모성에 진주(辰州)를 두었는데 이 개모성 사람들이 거란에 밀려나
요하를 건너 이주해 들어온 곳이 개주시다.
그래서 뒤에 진번(辰番) 땅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본래 진주 개모성은 단군시대 소밀랑 수도 부근이므로 발해가 진주(辰州)라고 불렀던 것이다.
<북사>에서 백제왕을 어라하(於羅瑕 )라고 불렀다.
고대에는 어니하(於泥河)가 있었는데 지금의 영구시와 대석교시
사이를 지나는 물이며 해성시(海城)시에서 나온다.
대석교시 진미산에서는 낭랑묘가 있어 전통적으로 여성을 숭배한다.
즉 초기에 소서노의 행적과 관련되는 것이다.
또한 대석교시 서북 교외에는 악주(岳州)고성이 있다.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성이다.
이는 요나라 요주성(耀州城)이라는 주장이 있어왔지만,
성의 모습이 요나라 평지성의 일반적인 형태인 사각형(方形)이 아니다.
이는 소서노 어하라의 어주성(於州城)이 어원인 것이다.
중국식 한자 발음도 어( 於) yu와 악(岳) yue은 서로 비슷하나 요(耀) yao는 비슷하지 않다.
북쪽에 있는 해성시 팔리진의 영성자산성도 여자가 지었다고 한다.
어하라의 북쪽 방어성이다.
진미산 동남쪽에는 백채향(百寨鄕)과 백자구(百子溝) 등이 있는데 모두 백제의 이름이 남은 것이다.
2. 비류백제의 수도 부여성
소서노가 어하라로 즉위하여서 수도로 삼은 곳은 지금의 요동반도 서남단의 복주(復州)인데
부여성이라고 불렀다.
<자치통감>에 의하면 346년 모용황이 정벌하여 부여왕 여현 등 5만명을 끌어간 곳이 부여성이다.
<수서> 등에 백제 수도는 오방제도(五方制度)인데 중방을 고사성이라고 하고 동방을 득안성,
남방을 구지하성, 서방을 도선성, 북방을 웅진성이라고 하였다.
其外更有五方: 中方曰<古沙城>, 東方曰<得安城>, 南方曰<久知下城>, 西方曰<刀先城>, 北方曰<熊津城>.
중방은 고사타자성이고, 동방은 득리진의 용담산성이고 북방은 웅악진의 웅악성이다.
남방은 구지하라고 했는데 이는 우리말로 구슬산 밑이라는 뜻이다.
즉 금주시 옥산 아래 용왕묘에 해당한다.
서방은 고대에 설립 근거가 없는 백사주(百沙洲)가 기록으로 전해오는 곳으로서 백제 서주일 수도 있고
백제주일 수도 있다.
지금은 고려성이라고 이름이 바뀌었다.
또한 비류백제 수도 위치인 복주 시 동쪽에 동명산이 있는데 그 아래에 대백라가 있다.
동명산은 명나라 때에도 동명왕의 전설이 내려왔다.
즉 비류 백제가 동명왕묘를 세운 곳이다.
지금은 명산이라고 옛 기록 상의 동명산으로 둘러싸인 대백라는 사진과 같다.
동방의 득안성은 득리사가 들어서 득리영성이라고 이름이 바뀌어 전해왔다.
북방의 웅진성은 지금 웅악현의 구룡지다.
당나라 군대가 한반도에서 철수하고서 698년에 대방주도독부를 두었던 곳이다.
남방의 구시하성은 옥산 남쪽 용왕묘다.
중요한 곳으로 보란점시 북쪽에 화얼산이 있다.
이곳에서는 임예승인(臨穢丞印)이 발견된 곳이다.
임예현은 중국 기록에 없다.
백제의 임예현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다.
현재 화얼산은 산을 다 파내어 깍아 버렸다.
예(穢)의 중국 발음이 후이인데 화얼산으로 변한 것이다.
어하라가 진번지간이라고 했는데 이곳 보란점이 본래는 불한, 즉 새로운 번한(番韓)이 있던 곳이다.
보란점시의 뒷산 이름이 발발산이다. 아마도 탁발산, 탁의 발산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위만에게 번한을 빼앗긴 기준왕의 장수였던 대장군 탁이 무리를 이끌고 육로로 이주해 들어온 탁의 고향
월지국 마한은 바로 이곳으로 고려되며 중마한(中馬韓)이라고도 하였다.
그들은 마한에 들어와서도 불한이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했었던 것이 된다.
기준은 목지국 마한으로 이주하여 대동강에 있었다.
그런데 후한시대에는 목지국마한이 마한 56국의 중심으로서 가장 번성했고 위나라 시대에는 월지국 마한이
번성했다.
그 이유는 목지국마한이 백제에 망해 버렸기 때문으로도 볼 수 있으나 그보다는 마한을 정복한 백제왕이
위나라 시대에 월지국, 즉 대방고지 백제에 옮겨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구려 태조대왕 때에 중국 공략을 도왔던 마한은 바로 이 보란점의 월지국마한이다.
물론 예맥도 함께 하였었는데 121년 예맥거수가 중국인 요동태수 채풍에게 죽임을 당한 후에 많은 예인들이
백제 땅으로 건너온 것으로 보인다.
보란점시 서쪽에는 중국에서 근거를 알 수 없는 횡산현(橫山縣)이 있었다.
사실은 당나라 설인귀가 쳐들어왔던 그 횡산이다.
보란점시 남쪽에는 석하가 있는데 백제 고이왕의 석천이며 그곳에 석현성(石峴城)이 있었다.
역시 설인귀가 쳐들어온 석성이며 온사문이 있던 곳이라서 지금은 온가구(溫家溝)라고 부르는 성이다.
한반도에서 찾기 어려운 온조왕의 온씨가 이 요동반도 남단에 집중되어 있다.
요동반도 남단의 주요 강인 벽류강은 본래가 비류강이었을 것이다.
비류나 벽류나 한자만 다를 뿐 발음은 같다.
비류백제 강역도는 아래와 같다.
온조가 떠나고 비류가 죽은 뒤에 비류의 부여 후손은 부여성을 떠나서
1) 백제 미추홀로 가거나
2) 파저강(압록강)의 비류소국으로 옮겨가서 부이르강을 남기고,
3) 또 일부는 함흥 서남쪽에 살면서 비류강을 남겼다.
비류의 부여성은 본래 살던 월지국마한에 복속되었고, 그들은 본래 불한, 또는 낙랑이라고도 하였다.
[신찬성씨록]에 백제에 부여 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出自百?? 扶餘地 卓斤?主 施比王也
위 가록에서 백제에 부여지가 있었고 거기에 본래 탁근국이 속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탁근국이 월지국 마한을 처음 세운 대장군 탁에 의해 비롯된 것도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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