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묘지

17. 동작동 국립묘지

오늘의 쉼터 2008. 6. 4. 21:57

 

동작동 국립묘지

 

 

이곳은 1955년 한국전쟁이 끝나고 국군묘지로 창립된 곳으로 현재는 16만 4천여 분이 잠들어 계신 곳이다
이곳의 형세를 풍수인들 사이에서는 공작이 날개를 펼치고 있는 孔雀張翼, 봉황포란, 장군대좌, 혹은 묘역의

백호에 해당되는 산이 호랑이가 숲에서 뛰쳐나오는 형상이라 하여 맹호출림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는 곳인데,

風水人들이 쉽게 공부할 수 있는 墓 3곳이 있다
 
 1, 박정희 대통령의 묘소
 2, 중종의 후궁이자 선조임금의 할머니인 창빈 안씨의 동작릉
 3, 이승만 대통령의 묘소
 
특히 1549년 쓰여 진 창빈 안씨의 묘소로 인하여 18년 후 그의 손자인 하성군이(16세) 방계혈통으로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올랐다 하여 이곳 터가 명당이라고 불리 우는 것이다.(창빈의 묘를 쓰고 2년 후에 태어난다)
 
하나하나 살피기 전에 먼저 묘역의 정문에서 국립묘지의 전경을 둘러볼 것 같으면, 주봉에서부터 이어진 능선이 박정희 대통령 묘소---제1장군묘역---창빈의 묘소로 흐르면서 여러 차례 과협과 기복을 거치며 매우 역동적인 모습인 것을 볼 수가 있다
단순히 용의 상태만 놓고 본다면 대단히 좋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문에 들어서서 우측에 있는 안내판을 보게 되면 국립묘지의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는데, 청룡·백호가 마치 두 팔을 앞으로 나란히 뻗은 것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즉 서로가 깊숙이 交鎖되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고 案山이 있는 것도 아니다 


 



<국립묘지의 실제 지형이 이러함에도 이곳을 소개하는 글들을 볼 것 같으면 마치 청룡·

백호가 잘 감아준 듯 묘사하고 있다. 오직 자신의 상상만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음이다>
 

그렇다보니 이곳의 모든 물은 창빈의 묘 앞에서 합수가 되어 直去水로 곧고 길게 한강으로 빠지고 있다

(현충천) 혈이 생기기에는 무언가 석연치가 않은 지세이다
 
 古云 : 龍虎而開口 子孫之財敗
          (청룡·백호가 입을 벌리고 있으면 자손의 재물이 패한다)
 
 
 
<첫째>, 박정희 대통령, 육영수 영부인 묘소 (申坐)
 
이곳에 대한 평가는 다소 객관성은 떨어지지만, 당시 관계가 있었던 손석우선생의 책에서 발췌해 보았다
 
“저분께서는 이곳에 영부인의 묘를 쓰면 박대통령께서는 남북통일을 이루고, 그 아드님은 만주까지 지배하는 위대한 지도자가 된다는데 당신은 어째서 반대인지 그 이유를 말해 보시오”
 
“여기 이 자리는 음양이 교구가 안 되는 자리이고 냉혈입니다.
 냉혈이니 시신이 썩지 않고 음양교구가 안되어 자손이 끊어집니다.”
 
“이곳이 그렇게 나쁘다면 당신은 어디가 좋다는 말이요?”
 
“국립묘지에 영부인을 모시려면 이승만 대통령의 묘가 있는 바로 위쪽에 쓰는 것이 좋지만, 그것이 전임대통령에 대한 결례라고 생각한다면 그 밑에 쓰는 것도 좋습 니다.

그 자리도 좋은 곳입니다”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여사의 묘역사진>
 

용이 혈을 맺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조건은 무엇보다 일단 기맥이 멈춘 곳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곳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장군묘역을 거쳐 창빈의 묘소로 길게 흘러가는 과룡처에 위치하고 있다
 
 古云 : 龍行未止不可尋穴, 謂之行龍又謂過龍
          (용이 멈추지 않으면 혈을 찾는 것이 불가하니, 일컬어 행룡 또는 과룡이라 한다)
 
본인은 땅속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능력이 없으므로 손톱과 머리카락이 자라는 냉혈인지의 여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렇듯 용세가 앞으로 쭉 빠지는 곳에 혈이 생긴다는 말 또한 그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다. 이와 같은 곳을 풍수의 다른 용어로는 騎龍이라고도 한다
 
 
 
<둘째>, 이승만 대통령의 묘소

 




장군봉에서는 두개의 능선으로 갈라지고 있는데, 하나는 창빈의 묘로 이어지고 다른 하나는
이승만 대통령의 묘소로 흐르고 있다
두 곳을 유심히 비교해 보면 창빈의 묘소로 연결되는 능선이 다소 높고 중후함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그곳이 중출맥이며 이곳은 곁가지인 것이다 
 
이곳 묘소의 50m 뒤쪽에는 가느다란 용의 한가운데 암석이 박혀 있는데,

지표면의 암석은 땅속의 상태를 어느 정도 대변하는 것이라 하였다
하지만 이곳의 바위는 형상이 추하고 강하며 지저분한 형태를 띠고 있다
따라서 암석의 상태로 보아 이곳은 차고 억세며 탁한 기맥이 흐르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당연히 용의 모습 또한 후덕한 맛이 없고 수척하여 메마른 것이다
 
 




더욱이 龍의 상태가 한쪽은 경사가 급하고 반대쪽은 완만하다. 이 같은 상태를 偏龍이라 부른다.
 
한편 이곳에서는 재미있는 현상이 보이고 있다
산이 起峰을 하게 되면 기맥의 품성이 좋고 나쁨을 떠나서 양쪽으로 가지를 뻗게 되어 있는데,

이곳은 묘소의 중심부분에서 좌우로 두개의 가지 A · B가 뻗은 것이 완연하게 보이고 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애초에는 C 지점에 작은 봉우리가 솟았던 것이다
따라서 묘소 뒤의 치고 오르는 모습은 활개를 높게 만들다보니

대부분 인위적으로 조성한 것이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때 파생되는 가지의 상태를 보고 龍의 품성을 짐작한다고 하였다
 
 古云 : 龍之凶者 枝脚亦必惡陋
          (용이 흉한 것은 지각 또한 반드시 악하고 추한 것이다)
 
A는 앞쪽을 향하여 차분하게 형성되어 있다
반면 B는 묘를 등지며 뒤를 바라보고 있다
좋은 땅은 A·B가 절대로 어긋나지 않는 법이다.
이미 장군봉에서 시작될 때부터 졸렬하다보니,

암석도 흉하고 능선 또한 빈약하며 가지까지 질서를 잃은 것이다
그럼에도 그분은 어떤 근거로 이곳이 좋다고 하였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셋째>, 창빈 안씨의 동작릉 (申坐)
 
이곳은 용혈사수로 분류하여 자세하게 살펴보겠다.
 
(1),龍
주봉에서 흘러온 용은 박정희 대통령의 묘 앞에서 깊은 과협을 만들고 장군묘역에서 힘 있게 솟고 있는데,

비록 아무리 훼손되었다 할지라도 상하좌우 흐름이 힘이 있으며 중출맥으로 뻗은 것이 기품이 있음을 볼

수가 있다
그리고는 묘역의 정 중심으로 진행하다가 차분하게 멈추고 있는데, 그 끝 지점에 묘가 위치하고 있다.

단순히 용의 측면에서만 본다면 이곳은 대단히 잘 쓰여 진 곳이다
 
(2),穴
그러나 곡장 뒤에서 혈의 최종단계인 기맥을 농축시키고자 짧게 밀착되는 형상이 없다.

(形止勢縮, 形止氣蓄).즉 입수가 없는 것이다.


용세가 훌륭한 것은 사실이지만, 무언가 아쉬움 때문에 마지막 순간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다란 용세 중 기맥이 가장 안정적인 곳만큼은 틀림이 없다
 
(3),砂
정문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청룡·백호가 앞으로 곧게 도망가는 형상을 하고 있다
특히 백호는 맹호출림이라는 표현에 어울리듯 힘 있게 날뛰는 모습이다
그러나 창빈 묘의 입장에서는 다소곳이 차분한 형상이 더욱 좋았을 것이다
설상가상 안산까지 없다보니 앞이 휑하게 뚫리고 말았다
 
 古云 : 尤嫌無案山 衣食必艱難
          (더욱 두려운 것은 안산이 없는 것이니. 반드시 의식이 어려울 것이다)
 
(4),水
內明堂의 현충천 물은 直去水로 빠지면서 명당을 칼로 베듯 2등분 하였다
 
 古云 : 水穿堂直過 謂之水破天心 主財不聚 人丁稀少
           (물이 명당을 곧게 뚫고 지나게 되면 수파천심이라 하여,
             재물이 모이지 않고 사람도 드물게 된다)
 
또 外明堂의 한강 물은 곧게 묘를 치다가, 다시 反弓水가 되는 형상이다

* 凶水의 4가지 : 冲來, 直去, 返橫, 急斜,

이중에서 3곳이 해당되는 곳이니, 물의 형상이 대단히 불길한 곳이다
 
古云 : 水賤龍貴不爲全, 禍福兩相兼
          (물은 천하고 용이 귀한즉 온전한 것이 아니니, 화복이 서로 상반된다)
 
 



                                        동작동의 지형도
 
혈의 결응은 용의 상태가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모든 것을 충족시키는 것은 아니다
주산과 來龍·청룡·백호·안산·물의 흐름 등이 조화롭게 어우러졌을 때 비로소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특히 풍수를 선도해야할 책임 있는 사람들까지, 이 묘소의 손자가 임금이 되었기

때문에 교과서적인 명당이며 표본적인 혈이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
그러나 선조임금의 재위 중 우리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과 고통을 안겨준 7년간의 임진왜란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가?
임금은 신하의 전공을 질투해야 할 정도로 정신이 황폐해 진다
창빈의 증손자 광해군은 이복동생 영창대군과 친형 임해군을 죽이고, 자신은 조카에게 폐위를 당하며,

광해군의 자식은 世孫의 지위에서 강화도로 유폐되어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된다 
 
한편 庶삼촌을 왕위에서 끌어내린 인조임금은(창빈의 고손자) 이괄의 난으로 궁궐을 버리고 도망 다니는

지경에 이르고, 급기야 병자호란을 맞게 되어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하게 된다
그 후 인조는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다 돌아온 그의 長子 소현세자를 정치적입장이 다르다는 이유로

毒殺하고, 며느리 세자빈에게는 사약을 내린다.
심지어 소현세자의 자식들까지 할아버지 임금에 의해 제주도에 귀양 보내져서 죽임을 당하기에 이른다.
 
창빈의 묘를 쓰고 90년 동안 그의 직계 자손에게 일어난 사건들로서, 조선의 역사 중 가장 비참하고

혼란스러우며 굴욕적인 시기의 출발점에 창빈의 묘가 있는 것이다
 
특히 임진왜란부터 병자호란까지 약 50년 동안 힘없는 백성들은 수십만 명이 죽고 또 수십만 명이

왜국과청으로 끌려갔다.
두 임금은 도망 다니기 바쁘고, 분노한 백성들에 의해 궁궐은 불타며, 침략자들에게 수많은 문화재를

약탈 당하였다
조정은 동인, 서인, 남인, 북인으로 갈라져 당파싸움에 제 잇속 차리기 바쁘며, 군주에게 버림받은 백성들의

생활은 극도로 피폐해져 人肉까지 먹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
 


 


 

그럼에도 이 모든 상황을 福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
임금이 되었으므로 다른 것은 아무래도 괜찮은 것인가 ?
 ·····
혈의 發應이 그렇게 극단적인 것이라면, 그토록 무서운 피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면,

나는 두 번 다시 산을 오르지 않을 것이다
 
잠시 격정을 가라앉히고 쉽게 생각해 보자.


일반적으로 묘의 길흉화복을 추리할 때


 龍·····貴賤,


 水·····貧富,


 청룡·백호·····가솔, 신하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곳의 영향으로 하성군이 선조임금이 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용의 상태가 좋은 까닭일 것이다. 그러나 그 후 창빈 후손들 간의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과 임진왜란, 인조반정, 이괄의 난, 병자호란 등의

혼란은 청룡·백호와 물의 모습이 불길한 때문이라 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풍수의 同氣感應 논리상 창빈의 묘로 인한 왕실의 골육상쟁과 수난이야 당연한 것이라 할지라도,

잘못된 왕실의 묘 때문에 아무런 죄 없는 백성들은 너무나 처참한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임금을 잘못 만난 탓이런가? 

시대를 잘못 태어난 탓이런가!
 
창빈의 묘소는 결코 혈이 아니며 명당이 될 수가 없다 .

아니 묘를 써서는 안 되는 곳이다
당부하건데, 아무 곳에서나 혈과 명당이라는 단어를 무책임하게 남발하지 말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