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묘지

16. 光山金門 최고의 명당/外孫發福地

오늘의 쉼터 2008. 6. 4. 21:44

 

◐ 外孫 發福地

 

金成雨 장군의 묘소(1327~1392)
   



 묘를 소개하기에 앞서 잠시 장군의 이력을 살펴본다.
장군은 고려 27대 충숙왕 14년에 개성에서 출생하여 일찍이 절충장군에 제수되었고,

 그 후 都萬戶 兼 全羅忠淸招討使에 발탁되었다
당시 왜구의 침입이 남해와 서해안 지역에서 극에 달하였기에,

왕명을 받고 지금의 대천 보령 지역에서 수차례에 걸쳐 크게 섬멸하였다
   
 1392년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건국하면서 새 국가에 참여할 것을 수차에 걸쳐

회유하였으나 거절하였고, 오히려 자신의 군대로 이성계를 치고자 계획하였으나 勢 不利함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장군은 크게 탄식하며 
 “하늘은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고, 이성계는 또 어찌하여 탄생케 했는가!” 하며
  자결을 결심하고 곁에 있던 白玉馬를 풀어 주었으나, 눈물을 흘리며 장군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백옥마야 너도 나를 따르겠다는 말이냐?” 하고 묻자 머리를 끄덕이었다


  이에 장군은 결연히 차고 있던 칼을 빼어 백옥마를 베고, 자신도 그 자리에서 자결하였다
 그리하여 지금의 묘가 있는 鉢山에 모셔졌다
   
  현재의 대천해수욕장은 장군께서 군사들을 조련시키던 곳이라 한다.
 장군은 동시대를 활약한 최영 장군보다는 12년 후배이고, 이성계 보다는 7년 앞선 장군이었다
 지금도 이 지역에는 장군과 관련된 지명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海望山, 蟻坪里, 月戰里, 伏兵里·····(자료 : 광산김씨 대종회, 보령시 홈페이지)


 성주산(680m)에서 시작된 용은 대단히 역동적인 모습으로 진행하다가 빼어난 몇 개의 봉우리를 거친 다음

비로소 다소곳한 주산을 형성한다. 
주산으로부터 급하게 떨어지던 맥은 A에서 한번 멈추면서 가쁜 숨을 고르고 있는데, 이곳에서 기맥은 자신이

머물 곳을 확인하고는 보폭을 조절하고 있음이다
그리고는 B와 C에서 좌·우측으로 가지를 뻗어 주면서 좌우로 통통하게 살이 찐 당판을 형성하고 있다. 
마치 호박넝쿨이 가늘게 이어지다가 열매를 맺듯이, 고밀도로 농축된 結晶體를 이룬 것이다 
따라서 B·C가 선익인 것이며, 아래의 金克愼 묘 부분은 전순에 해당된다.
   
그런데 김극신 묘의 우측에 또 하나의 가지가 뻗어있다(D)
이것은 당판이 右旋龍으로 혈을 맺고 남은 기운이 유연하게 휘어짐에 따라 당판이 기우는 것을 지탱시켜 주는

받침대의 역할인 것이니, 橈棹라 부른다.
만약 D와 대칭되는 지점에 또 하나의 가지가 생겼다면 기맥은 계속 진행한 것이 되므로, 위에서 혈이 생기지

못하는 것이다.

이곳을 혈이라 부를 수 있는 근거는 청룡·백호도 아니고 물의 모습도 아니며, 패철로 판단함은 더더욱 아니다
오직 묘소 뒤편 약 30m의 용세가 밀착되는 현상에 달린 것이니,

주산에서부터 전순까지의 흐름이 매우 합리적이고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마치 용인에 있는 이석형 선생 墓所와 흡사하게 생겼다
   
이번에는 주변의 사격을 살펴보자
수없이 답사를 다녀도 청룡·백호의 교쇄됨을 좀처럼 보기가 쉽지 않은데,

이곳은 주산에서부터 펼쳐진 龍虎가 겹겹이 혈을 감싸주고 있다
특히 물이 좌에서 우로 흐르는 까닭에 백호의 거듭됨은 下水砂, 水口砂가 되어 더욱 절묘하게 배치되었다
한편 외백호는 크게 환포하여 물가까지 달려와 멈추어 섰는데, 산 끝이 모두 암석으로 형성되어서 수구막이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곳은 마을이 있는 안산에서 이어진 작은 능선과 마주하며 한문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 捍門 : 수구 양쪽에서 물의 출입을 단속하는 산으로, 혈을 수호하는 수문장과 같다
   
널찍한 명당에는 나지막한 안산이 있고 이것을 의지하여 작은 마을이 옹기종기 형성되었다 
그 너머로는 조산이 웅장하게 펼쳐져 있는데, 특히 文筆峯 하나가 隱隱하게 솟아있다
특이한 것은 장군 묘의 좌향이 억지로 꾸미지 않아도 문필봉을 정면으로 향하고 있음이다
마치 님을 만나기 위한 일념으로 고단한 천리를 달려와서는 비로소 편히 앉아 사랑스런 눈길로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이 문필봉이 다른 곳에서 독립된 개체로 보았을 때는 매우 당당하고 빼어나게 보이지만,

이곳 묘에서 보게 되면 앞의 큰 산에 가려져 다소 빛을 잃은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여기서 잠깐 광산金門의 족보를 살펴보면····· 
매우 이례적으로 한산이씨인 토정선생에 관한 부분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산해-☞ 사위 이덕형(영의정)-☞ 사위 정엽(참판)-☞정엽의 사위 라만갑(참판)-☞라성두(문과급제)-☞

사위 김수항(영의정)-☞김창립(영의정)


   
광산金門의 족보에서 계속되는 외손들을 소개하며 안동김씨 김수항, 김창립 父子 영의정까지 기록하고 있다
만약 이지함 선생이 이곳 묘의 感應을 받았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볼 것 같으면, 이지번·이지함 선생의 생애가

생전에는 변방의 한직을 전전했으나, 사후에는 위대한 사상가로 조명을 받는 모습을 문필봉의 모습에서

유추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古云 : 東邊秀異之朝砂 西邊必有眞龍之結作
         (동쪽에 수려하고 특이한 조산이 있으면, 서쪽에 반드시 眞龍의 결작이 있을 것이다)
   
 古云 : 龍穴旣眞 前後左右之山 自然相應
         (용혈이 이미 참되다면, 전후좌우의 산이 자연적으로 응하게 된다)
   
이곳에서 外孫發福의 근거를 찾고자 하였으나, 우측선익과 전순 그리고 백호가 상대적으로 발달했다는 것

외에는 특별한 단서를 발견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그것만을 갖고서 차자와 외손이 발복할 것이라고 짐작하는 것도 무리일 것이니,

역시 화복의 추리는 난해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거듭 말하지만 공연히 근엄한 표정으로 도사인 양 하기보다는 땅의 좋고 나쁨을 선별하는 능력을 배양함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古云 : 地理學應驗與否 聽其自然
            (지리학의 응험여부는 오직 자연에 맡길 것이다)
   
김성우 장군은 66세에 돌아가신다. 
대체로 묘를 쓰고 난 후에 태어난 인물이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고 보았을 때, 이곳의 실질적인 묘 바람은

손자 이후라고 볼 수 있다 
   
 曾孫 김맹권(晩翠堂) : 이지번, 지무, 지함의 外祖父 
 “세종때 과거에 합격하여 집현전학사 20인에 선발되었다.

  세종임금으로부터 후일 단종이 되는 원손의 보필을 부탁받은 고명대신이었으나,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당일로 고향인 보령으로 내려와 두문불출하며 후학을 기르는데 만 힘썼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참고로 이곳은 사계 김장생 선생과는 派가 다르다
 金成雨 將軍은 광산김씨 문숙공파 17世이고, 순창의 말 명당 김극뉴는 양간공파 23世, 사계선생은 27世이다
   
   
   
   
   <찾아가는 길>